Sunday, 11 May 2025

하디선교사

회개와 함께 찾아온 놀라운 생명의 역사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어라! 일찍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이 남기신 소중한 유언이다.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하디가 교직을 뒤로하고 1886년에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 동기다. 무디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던 그는 토론토대학을 방문한 한국 선교사 게일의 선교도전을 받았다.

1890년,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하디는 9월 30일,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25세의 나이로 한국땅에 도착했다. 토론토 의대 청년연합회[YMCA]가 그들을 의료선교사로 파송다. 이질로 사망한 제중원 원장 헤론 후임으로 반년 사역, 부산에서 일년 반, 등 8년 의료 사역을 감당했다. 1898년, 그는 남감리회 선교부로 옮겨 목사 안수를 받고 3년 넘게 복음의 씨았 뿌렸다,

1903년 여름, 하디는 한 주간 동안 성경공부 강사로 청빙 받았다. 중국에서 사역하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화이트(M. C. White)와 캐나다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I. H. McCully) 등이 개최한 원산사경회였다. 당시 하디는 13년 조선 선교에 많이 지쳐 있었다. 영적 돌파구가 필요했다. 사경회를 인도하던 그들 중에 성령이 임했다. 하디는 선교 실패와 부진이 미개한 조선인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고귀한 동기가 있더라도 성령의 능력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고백했다. 성령 충만과 영적 각성으로 새롭게 깨어났다. 그 집회에 참석했던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똑같은 은혜가 임하였다. 이어진 다음 주일 집회 때, 하디는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다. 조선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였음을 인정했다. 그의 진솔한 회개 불씨는 조선인교회 지도자들에게, 그리고 온 교회에 옮겨붙었다. 밤새 이어진 눈물의 통회와 자복, 그들의 공개적 회개가 파도처럼 원산 부흥 운동을 넘어 평양 대부흥으로 연결되었다. 회개 중에 조선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조선 사회 건강을 회복하는 데 꼭 필요한 영적 각성이었다.

하디는 참된 회개의 본을 보임으로 조선 교회 부흥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감리교의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협성신학교 교장 혹은 구약학 교수로 신학 교육에도 귀한 영향을 미쳤다.

1935년, 70세에 은퇴하여 44년의 한국 사역을 마무리하고 귀국! 14년 후, 84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고, 미국 랜싱에 묻혔다.

하디 선교사와 북간도

1908년, 남감리회 이화춘(북간도 선교 주역)은 용정 와룡동과 모아산 교회설립하였다.

하디는 베시(F.G.Vesey)의 성진 회령 용정 전도여행에 동행했댜.

그는 한 달 동안 북간도에 체류하였다. 용정에 머물면서 4일반 동안 하루 세 번 집회를 가졌다.

그는 북간도가 카나다장로회 책임구역임을 인정하고- 북간도 선교를 캐나다장로회(푸트)에 넘겨 주었다.https://hadukro.blogspot.com/2015/02/for-great-commissio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