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유진 벨(Eugene Bell)은 1868년 4월 1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태어났다. 켄터키 주 센트럴 대학교를 졸업하고(1888~1891), 켄터키(UTS) 신학교를 졸업했다(1892~1893). 이어서 루이스빌 신학교를 졸업했다(1893~1894). 유진 벨은 남장로교 제2진 선교사로 아내 로티(Lottie W. B.)와 함께 1895년 4월 9일 한국에 왔다.
그는 서울 정동에 있는 딕시 하우스(Dixie House)에서 한국의 풍습과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어 선생은 변창연이었다. 나주 지역 선교를 위임받은 그는 어학 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주 지역을 답사했으나 주민(유생)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거처도 얻지 못하고 그해에 개항한 목포로 갔다.
목포 선교부
1898년 3월부터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초가에서 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땅을 사서 우물을 파고 교회당을 지었다. 1898년 5월 15일 입당 예배를 드렸다.
낯선 나라에 와서 지역 주민들과 사귀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민들과 사귀기 위해서 매월 15일에는 살림집을 개방하고 구경시키는 날로 정해놓고 누구라도 들어와서 둘러보고 구경할 수 있게 했다. 곧이어 의료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이 부임해왔다. 오웬의 합류로 유진 벨의 선교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아내의 병사
로티 위더스푼 벨(Lottie Witherspoon Bell)은 1867년 미국에서 태어나 아우크스투스 여자신학교를 1889년에 졸업했다. 남편 유진 벨과 함께 1895년 4월 9일 입국했다. 1896년 5월 27일 서울에서 아들 헨리를 낳았고, 1899년 1월 6일 목포에서 딸 샬롯을 낳았다.
목포에서 선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1901년 4월 아내 로티가 딸 샬롯(Charlotte)을 낳은 지 2년 되던 해에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풍토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남편이 지방 선교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에, 로티 벨은 아들 헨리와 어린 딸 샬롯을 품에 안고 숨을 거두었다. 1901년 4월 12일의 일이다.
이때 유진 벨은 전주에서 아내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듣고 목포로 달려왔으나 아내가 숨을 거두고 4일이 지난 후에야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로티 위더스푼의 무덤은 서울 양화진에 있다.
로티 위더스푼은 1895년 4월~1898년 2월까지 서울에서 한국의 풍습과 한국어를 배웠고 1898년 3월~1901년 4월 12일까지 목포 선교부에서 땀과 눈물을 뿌린 뒤, 사랑하는 남편과 철모르는 아들과 딸을 남겨놓고 갔다.
장례를 마친 유진 벨은 엄마 잃은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선교사 자녀들 중 풍토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허다했거니와 엄마 잃은 두 아이를 데리고 선교지에서 살아갈 일이 캄캄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누이에게 맡기고, 1902년 10월 30일 다시 입국한 그는 자리를 비운 동안 다 흩어져 몇 명 남지 않은 신자들을 모아 150~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을 지었다. 1903년에는 세례를 받고자 준비하는 교인이 101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정명 학교와 영흥 학교도 설립했다.
광주 선교부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 불(Margaret Bull, 1873~1919)과 재혼했다. 마가렛은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윌리암 F. B.의 여동생으로 버지니아 놀포크 출신이었다. 1904년 봄, 광주에 선교부를 개설했다. 광주 남쪽 성벽 가까운 곳에 대지를 매입하고 교회당을 지었다.
광주에서의 첫 예배는 1904년 눈 내리는 성탄절에 유진 벨의 임시 주택에서 드려졌다.
유진 벨과 오웬 가족, 어학 선생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고 마을 사람들이 참석해 줄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막연히 기다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 놀라 반갑게 맞았다고 한다.
남자들은 한 방에 모여 앉고, 여자들은 또 다른 방에 모여 앉았다. 유진 벨은 양쪽 방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가운데에 서서 예배를 진행하며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 때 모인 주민들은 선교사의 살림살이(이삿짐)가 궁금한 40명의 구경꾼들이었다고 한다. 이삿짐의 큰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이런 것들에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진 벨 부부는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석해 준 것에 만족하고 고마워했다고 한다.
1905년 오웬 선교사와 함께 양림동에 근대식 병원 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 전신)을 개원했다. 1907년 유진 벨의 사랑방에서 2명의 남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문간방에서 3명의 여자 아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이후 1908년 광주 숭일 학교와 수피아 여자 학교로 발전하였다.
교회 창립 6년만에 교회 성도가 오백 명이 되었다. 교인들이 차고 넘쳐서 세 번이나 교회당을 증축했다고 한다. 유진 벨의 선교 지역은 25개 군(郡)으로 1910년에는 세례 교인이 일천오백 명이었다. 유진 벨은 성격이 느긋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력있는 유능한 목회자(선교사)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26일 마가렛은 서울에서 선교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병점 철도 건널목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은 광주에서 거행되었고 광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진 벨은 1922년부터 평양 장로교 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그는 57세에 별세했으며, 광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진 벨 기념 재단
1995년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이 되던 해에 그의 4대손들이 미국에서 유진 벨(선교 100주년) 기념 재단(Eugene Bell Foundation)을 설립했다. 2002년에는 같은 이름의 재단을 한국에서도 설립했다.
유진 벨 기념 재단은 북한 식량 지원 및 결핵 치료 의료 시스템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유진 벨 기념 재단은 지난 10년간 북한 지역 13개소의 결핵 예방원과 63개의 결핵 요양소에 의약품을 지원하며 20만 명의 북한 결핵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유진 벨 기념 재단 이사장 스티브 린튼은 휴 린튼의 둘째 아들로 자신의 어머니가 순천에서 1960년 이후 평생을 봉사해왔던 결핵 퇴치 사업을 토대로 하여 현재까지 10여 년 동안 북녘 동포들을 위해 결핵 퇴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kilwonpil@hanmail.net
출처 : 크리스찬저널(http://www.kcjlogos.org)
Tuesday, 24 August 2021
유진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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