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스물여섯 살 젊은 나이에 미지의 나라 조선을 선교하겠다고 찾아온 펜윜! 그는 선교지 Korea에 관한 지식, 신학적 배경, 후원 선교단체 어느 한 가지도 내놓을 것 없던 독립선교사였다. 그 앞에는 세 장벽(언어, 문화, 사람)이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이 모든 불가능을 훌쩍 넘어, 오늘 한국 침례교의 아버지란 칭송의 자리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을까?
펜윜은 그 안에 예수 생명을 담은 거듭난 선교사였다. 그는 많은 번뇌와 몸부림 속에 자신의 거듭남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중요한 답을 얻었다. “너는 자격이 없지만 나는 있다.” 펜윜은 정규적인 공교육이나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세상 경력이란 것도 철물상을 운영해본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찌그러지고 녹슨 깡통” 같은 존재로 생각되었다. 이런 그에게 나이아가라 사경회 Robert P. Wilder의 메시지는 강력했다. "사막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겐 쭈그러지고 녹슨 깡통이라도 그 안에 담긴 물이 중요하다.“ 물통의 재질이나 가치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물이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지혜가 중요했다. 그래도 선교사로 헌신하기는 부족함을 느끼던 펜윜에게 이런 메시지도 더해졌다. "어떤 사람이 배에 올라 노를 저었다. 한참을 저었는데 배가 여전히 선착장에 머물러 있었다. 일어서서 돌아보니, 배 고물이 선착장에 묶여 있었다. 칼을 꺼내 밧줄을 잘랐다. 그리고 노를 저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펜윜은 자신의 부족함을 핑게할 수 없었다. ‘서투른 목수가 연장을 탓한다.’ 주님께서 복음 전할 연장으로 그를 찾았다. 예수의 연장으로 거듭난 그를 주님은 기뻐하셨다. 그분의 강한 어깨에 그를 올려놓으시고, 모든 길에 동행하시고 사용하셨다. “나는 너의 목자가 되어 한국의 산과 계곡으로 너를 인도하리라.” 그는 연약한 연장이었지만, 그를 붙드신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목수셨다.
펜윅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실천한 선교사였다. 50명이 넘는 소래교회 교인들이 모인 어느 날,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는 사람은 자기 포함 세 명! 고용인 두 사람과 한 교사 펜윜만이 밭을 일구었다. 사람들은 서양인 선생이 채소밭을 가꾸며 일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선생이나 양반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던 세상이었다. 이런 조선땅에서 그는 천하고 낮은 죄인들을 섬기러 오신 왕을 전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섬기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는 조선인들에게 이해 불가였다. 많은 조선인이 반발했다. “안됩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왕이 종의 형체를 취하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요!” 하인이 주인을 위해 몸 바쳐 살아가는 나라! 신하가 왕을 위해 생명을 내놓고 충성하는 조선에서는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메시지였다. 바쳐야(offer) 할 주체와 대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섬기러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몸으로 섬김을 실천하였다. 섬기러 오신 왕,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들은 말했다. “처음 보았소!”
펜윜은 자립선교의 선구자였다. 본국 선교회 후원이 중단되는 일이 있어도 선교가 중단되지 않도록,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선교거점을 농장에 마련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의 자신의 경제활동 경험을 살려 과수원 자영농장을 솔선수범했다. 시범농장을 경영하며 한국 땅에 맞는 품종을 개량 농업에 영향을 미쳤다. 자비량선교를 실천하였다.
맥켄지 선교사 순교후, “이와 같은 선교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시오” 요청하였던 소래교회 교인들은 펜윜 선교사의 말씀 사경회와 섬김 실천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펜윜은 피선교지 백성을 마음으로 존중했던 선교사였다 “조선인은 영리하며 주어진 교훈을 모두 습득하는 지력을 지니고 있다. 창의적이며 중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거의 초인적인 분량의 고생과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다.” 조선인 사역자를 또한 존중했다. 신목사는 불과 몇 주간만 나에게 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신목사가 훈련시킨 사람들과 내가 가르친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신목사의 학생들은 모두 사역을 잘 감당하는 데 반해 나의 학생들은 일을 잘못한다. 나와 긴밀한 접촉이 신목사를 망쳐놓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나로부터 떠나게 하셨다.” 영적인 면에서 조선인이 특별함을 그는 알아보았다. 1896년, 소래교회 두 주간 사경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였다. 주일 새벽, 3백명의 교인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다. 영적 대각성이 평양대부흥보다 10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그는 조선에 회개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로서 조선인의 영성을 존중하는 영적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펜윜은 조선인 중심 선교에 진심이었다. 선교 초기에 펜윜은 토착인 신앙인을 자기 대신 설교할 전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된 교리를 전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도 황인종에 대한 백인 우월성이 없지 않았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신 사실을 간과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의 사역 초기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졌고 시행착오와 쓴맛도 보았다. 그러나 토착인을 전도 대상자로만 생각하던 그가 신명균을 만나며 비약의 기회를 마련했다. 신목사는 예수님 믿고 온 가정이 풍지박살이 났었다. 그런 신목사에게 펜윜은 조그만 집을 짓도록 후원했다. 그런데 신목사는 받은 50달러를 이웃 마을에 전도자 파송비로 사용했다. 자기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데 차마 자기 가정 회복을 위해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집도 없는데, 묽은 죽을 먹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선교비를 더 급한 일에 사용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한 십자가 증인들을 파송하는 일에 돈을 쓰고 있었다. 온갖 멸시를 받으면서 12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동양 예의범절을 지키며 주의 도를 훈육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듣는 사람” 신목사는 동양풍습을 따라 주를 섬겼다. 그는 성경과 자기 몫을 떼어 그 지역 지도자에게 주고, 그들이 사역하도록 했다. 신목사의 이런 목회방법은 혼자 백인 선교사 5인 몫을 해냈다. 이런 신목사를 선교동역자로 인정하면서, 펜윜의 선교 사역의 지평은 토착인 중심 선교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신목사는 선교대상이 아니라, 선교동역자였다. 이뿐 아니었다. 현지인 손필한 장석천 같은 훌륭한 전도인들이 함께 함으로 토착인 중심선교는 언어와 문화아 사람의 장벽을 쉽게 넘어갔다. 경비 효율적인 면에서도 비교불가였다.
펜윜은 선교방법에서 하나님께 충실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 말씀만 전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는 하나님 한 분께만 은밀히 고백하고, 용서는 잘못한 그 형제에게만 빌도록 가르쳤다. 둘씩 짝을 지어 모든 집을 방문! 성경을 펼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전했다. 말씀을 듣는 이의 심령에 역사하게 하는 전도방법으로 주변을 변화시켜 갔다. 장석천은 이를 추진한 제자였다. “무슨 양반이 서양 예수 교회를 가지고 여기 왔는가! “옷을 찢기고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펜윜 선교사업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펜윜은 적극적 보살핌으로 후원했다. 넉 달에 36개 교회가 주님께 더했다.
펜윜은 모든 사역에서 사람보다 주님의 가르침을 앞세운 선교사였다. “인간의 가르침은 불충분하다. 성령님께서 직접 너를 가르치시도록 하라. 늘 함께 거하시며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은 말할 수 없이 훌륭하시다.” 펜윜은 하나님 말씀에 진심이었기에 조선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30년 각고의 노력 끝에 1919년 우리말로 원산번역 ‘신약젼셔’를 출판했다. 서경조 전치규와 같은 좋은 조력자들의 힘을 입어 성경을 번역할 때, 조선인의 순박한 토속언어를 특히 존중하였다. 그는 사도행전 2장 교회 이상 구현하고자 조직을 ‘대한기독교회’라 불렀다. 성도의 모임은 화목의 잔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성경적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자 ‘대화회’(크게 화목을 이룸)를 두었다. 그의 모든 선교활동은 성경적이기를 원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열고 일꾼들에게 말씀 위에 굳게 서도록 훈련했다. 그는 또한 기도하시는 주님의 본을 따랐다. 그를 ‘기도꾼’이라 부르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복음찬미’란 찬송 보급에도 성경말씀과 구원의 진리만 담았다.
펜윜은 오지선교와 북방선교에 진심이었다. 전도자의 발길이 미치기 힘든 산골이나 빈들을 선교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실천했다. 다른 선교사와의 마찰을 피하고, 그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 내륙 산간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증거하라! 중생 재림 사명에 투철한 자는 바로 전도현장에 투입했다. 몸에 피가 흐르듯 전도자들은 계속 움직이며 전국적으로 순회사역에 전념하였다. 한일합방 이듬해, 162교회가 국내에 세워졌다.
대한기독교회는 1906년 한태영을 북간도에, 1909년 최성업을 시베리아에 교단 첫 선교사로 파송했다. 한반도를 넘어 북간도 시베리아까지 선교영역을 넓혀갔다. 당시 압록강을 넘나들며 선교하던 분들은 일제와 공산당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1918년 시베리아 포시에트 모카우에서는 동아기독교 박노기 등 4인이 선교여행 중 풍랑으로 순교했다. 1921년 압록강변 오봉산교회에서 손상열 순교, 만주지역 선교 중 1925년 6명 순교! 북간도 종성동 교회 1928년 김영국 김영진이 순교했다. 순교의 자리에서는 강한 선교 열이 불타올랐다. 북방 선교가 진행되던 중, 다수의 순교자가 발생하자, 펜윜은 61세의 노구를 이끌고 북방 순회전도에 나섰다. 한반도는 물론 만주 시베리아의 고난받는 성도들이 주 안에 굳게 서도록 위로를 전했다. 그들의 신앙강화를 위한 사경회가 절실했다. 그의 여정은 북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미치고 있다. “게일은 중국으로 떠나는 친구 펜윅을 배웅하기 위해 어제 제물포에 왔다“(1890,10.14 로제타) ”우리는 다시 중국 땅에 들어갔다.” “중국 마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그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지역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아름다운 연해주 포시에트(Posset)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연안으로 가는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갔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그는 부당한 일제에도 맞선 애국 선교사였다. “당신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조선에서 선교하고 있소? 선교하지 말고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시오” 명하는 일제 순사에게 행1:8을 보여 주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가 지도하는 대한기독교회(후에 동아기독교회)가 포교계 제출을 거부하고, 신사참배와 천황숭배에 맞서며 갖은 핍박을 당하면서도 조선인 편에서 하나님께 충성했다. 동아기독교가 만주 시베리아 북방선교에 진심일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한반도 안에서 일제에 맞선 펜윜 당당한 가르침이 큰 몫을 했다.
일본 헌병을 창고에 가두고도 시침을 떼는 펜윅에게 화가 치민 헌병 대장은 “그럼 당신네 창고에 갇힌 사람은 누구요?” “내가 헌병을 감금한 일은 없으나 허락 없이 남의 과일을 따 먹은 도둑놈을 감금한 일은 있소.”
스스로를 “조선에 양자로 왔다.” 자부하며 한복과 큰 절로 조선인들에게 선교했다. 1935년, 45년간의 조선 사역이 끝났다.! 원산 명석동 144번지에 그의 뼈만 묻은 게 아니었다. 그가 남긴 애국가는 그의 조선 사랑을 웅변적으로 전한다.
“우리 대한 나라 대한국을 위해 노래합세/ 열성조 나신데 또 돌아가셨네/모든 산 곁에서 노래합세/우리 대한 이름 어찌 사랑할까 /우리 대한 그 산과 골이나 그 강과 수풀/다 사랑하는 우리 노래합세”
그는 한국 사랑과 하나님 나라 사랑을 함께 붙들었다. 나라 사랑과 충성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사랑과 하나님 섬김을 잘 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일제 통치 아래서도 기독 신도들은 세상을 두려워 말고,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평안함으로 천국에 이를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마지막 남은 모든 재산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영적 형제자매들과 영적 자녀들에게 분배했다. 그를 위한 의의 면류관이 한국 땅에서나 하나님 나라에서 잘 어울리는 선교사였다.https://hadukro.blogspot.com/2015/02/for-great-commission.html
펜윜선교사 노년에 선교하였던 선교유적지/강경첫침례교회 옛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