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14:1-12 실패하지 않은 인생 - 한 선지자의 에필로그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주파수를 압니다.

기독교 역사상 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의 생애를 들쳐볼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곳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찬송하시는 곳에서 찬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으신 그 자리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범주에서 머물 수 있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외쳤을 때,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을 때,
그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심판 아래 놓인 세상을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셔?할 그 자리에 태어날 수 있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할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에필로그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성령의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도 그와 같이 마지막까지 경주를 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1. 세례 요한의 인생엔 감동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생애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죽음의 순간입니다. 왜 이렇게 귀한 의인이 의미 없게 죽어가는가 의문이 갑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실패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엔 죽어야할 때 죽는 감동이 있습니다.
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죽을 때 죽는 일은 위대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화려하게 데뷔하고 이름을 날리다가도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음으로 하여서 서글픈 인생으로 마감하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향해 배반의 땅을 걸어가실 때, 그는 오실 왕의 죽음의 길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인의 고난과 죽음을 보며,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바로 새기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삶 자체를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뛰어 넘는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언행이 감동적인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출생]이 감동적입니다.
소망이 없던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생애에 성령께서 전격적으로 개입하심으로 세례 요한은 태어나게 됩니다.
이삭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사무엘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출생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습니다.
[자기 인식]이 감동적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인 자신은 메시아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들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자신을 오시는 왕의 종으로서 명쾌하게 선포합니다. 자기 부인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사역]이 감동적입니다. 비록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독사의 새끼라 외치면서 과감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유난히 돋보이는 까닭은 구속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마침]이 감동적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선포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료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망하여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망할 수가!
이렇게 불명예스러울 수가!
정말 악하고 가증스러운 헤롯과 헤로디아의 연회 놀이감이 되어 목이 잘려 죽어 가는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실패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종은 왕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얼마나 의인이 철저하게 망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상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왕이 흥하시도록  자신이 망하는 사람
자신이 흥하도록 왕을 망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면
세례요한은 왕이 흥하시도록  자신이 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보면서 자문하게 됩니다.
내가 흥하자고
나를 드러내자고 왕의 길을 망치지 말자!

이상을 볼 때,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왕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선지자 중 선지자이십니다.
주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칭찬하신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2. 헤롯의 인생엔 감동이 없습니다.


헤롯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헤롯왕과 사마리아인인 그의 아내 말테이스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Buttrick).

그러나 헤롯이 불행했다는 말은 그 출신이 에돔(에서의 후예) 자손이어서란 말은 아닙니다.

헤롯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주전 40년 로마의 안토니오 황제에 의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은 분봉왕입니다.
그는 세상을 감동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46년 동안 성전 건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곳에서 행복이나 성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왕비를 열 명이나 두었습니다.
첫 부인 도리스가 헤롯의 손에 죽었고 그녀의 아들, 안티파텔이라는 왕자가 죽었습니다.
미리암네라는 둘째 아내와 그가 나은 두 아들도 헤롯의 손에 죽었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쾌락만을 추구하여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헤롯은 예수님께서 여자가 나은 사람 중에 이 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신 의인 세례요한을 죽이는 죄까지 범하였습니다.

가문도 불행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헤롯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많이 죽여야 했을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조카 (아그립바 1세)는 주님의 제자 야고보를 살해하였습니다.(사도행전 12장)
피비린내가 풍기는 집안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정작 실패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그를 죽인 헤롯과 헤로디아입니다.
그들의 생애에는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대신 탐욕과 피냄새만 있습니다.
헤롯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남을 불행하게 함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이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눈앞에서 빙빙 돌며 귀찮게 구는 것입니다. 여러 번 쫓았지만 뉴턴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뉴턴은 벌떡 일어나서 날아가는 파리를 손을 낚아챘는데 잡혔습니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날려 보내며 “야 이 녀석아! 세상이 얼마나 넓으냐! 그런데 너는 하필 내 얼굴 주위만 맴돌고 있느냐” 하였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를 모르고 인간의 부귀영화를 찾아 몸부림친 헤롯의 인생은 어리석음 바로 그것입니다. 행복은 남의 생명을 빼앗아 우리 자신의 기쁨을 채우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잘 살게 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나로 인하여 타인이 행복하게 되었을 때 행복합니다.

사람들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섬김을 받고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송명희씨는 나는 황제보다 하인이 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3.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배역을 끝까지 잘 감당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상을 받는 배우는 남자냐 여자냐 하는 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연을 맡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이 어느 배역을 맡았느냐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맡은 배역에서 얼마나 감동적인 연기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이 아무리 비천하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낼 때 그의 훌륭히 연기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씀하실 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자신의 배역을 잘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배역과 재능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가 맡은 배역을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배역을 맡겨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흡족하게 해 드렸는가 이점이 중요합니다.

요한 복음 3장 29절에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속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는 조연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맡은 배역을 놀랍게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신부를 취하는 신랑을 드러내기 위해 죽는 배역을 충성되게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귀중한 검입니다

불란서에 자케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케퐁의 사업이 기울어 파산지경에 이르러 이제 십만 프랑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자케퐁이 충격을 받아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상속자인 조카에게 삼촌이 남긴 십만 프랑의 돈을 찾아가라고 했더니 이 조카도 충격을 받아서 그 길로 죽었습니다. 갑자기 십만 프랑이나 생기니까 너무 충격이 컸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너무나 적합한 말씀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마무리하는 말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이제 요한의 사역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오심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충성스럽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흥하여야 하실 그 시간에 자신은 쇠하고 있습니다(요 3:30).
요한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죽음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
"시대를 밝힌 각성자일 수 있었습니다.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사21:11).

이것은 밤과 같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애타는 부르짖음입니다.  부르짖음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이 오나니” (사21:12).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어두움의 시대가 계속되지만 아침도 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어두운 시대를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도 아침이 올 것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 아침은 마른 뼈들이 살아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과 교회 탄생의 아침이었습니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다윗도 밤과 같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면서 아침이 올 것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그 아침은 구원의 아침이요 기쁨의 아침이었습니다.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그리고 아침을 깨우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시대가 어두워질 때마다 시대를 깨우고 밝히는 각성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어두운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1] 독일에서는 슈페너와 같은 경건주의자들이 하나님의 각성에 참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지 150여년이 지난 독일은 영적 및 사회적으로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1648년에 그친 “30년 전쟁”은 독일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시와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었으며 굶어서 죽은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야콥 슈페너는 하나님의 탄식과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독일 교회 안에 즉각적이고도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슈페너는 300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그의 각성 운동을 지지하는 편지들이었습니다.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