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21:12-17 고난 주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들어가는 말

볼티모어의 한 호텔에 허름한 옷을 입은 고객이 찾아왔습니다. 호텔 측은 그 허름한 고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신문에서 그 호텔측은 놀라운 소식을 읽었습니다. 허름한 차림으로 그 호텔을 찾은 분이 바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귀한 부통령이 오셨으니 그분을 잘 맞아 좋은 교제도 나누고, 그분이 묵어간 간 방이라고 사진도 하나 걸어놓고 그랬더라면 그 호텔이 얼마나 더 빛이 났겠습니까?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성전 삼으신 성도 여러분,
그분이 오신 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고난 주간에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복된 한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1. 기도로 성전을 채웁시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제일 먼저 올라가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맨 먼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2세에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부모님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곁에 없는 것을 알고 당황하여 예루살렘까지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모님은 '근심하며 찾았노라' 말씀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부모님께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40)
아버지 곁에 머물기를 원하고, 아버지의 집에 관심을 갖는 아들 예수님의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을 삼킬 정도로 강렬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보았습니다.
성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신 곳입니다. 구름이 그 성막 위에 머물렀습니다.
자기 백성을 만나 주시는 곳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성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집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성전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 가든지 이 성전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였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갔을 때에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 드렸습니다.
성전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성전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사56:7)
그러므로 성전 안에는 이방인을 위한 뜰을 갖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의 본질은 종교지도자들의 세속화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장사꾼들과 결탁을 해서 이윤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소,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면 외국이나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양이나 비둘기를 준비하고 파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준비해온 양이나 비둘기의 흠을 잡아 거절하곤 했습니다. 장사하기 위한 탐심이 들어간 것입니다.
또한 돈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상에서 로마의 황제가 새겨진 화폐로 통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세속적인 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성전세만은 반드시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돈을 성전에서 바꾼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성전에 나아온 이방인들을 위해 마련한 이방인의 뜰에서 그들은 장사를 하고 탐욕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들에 대해 분노하시고, 성전의 청결을 위해 사역하신 것은 두 번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처음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거룩한 제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는 장사치들을 향해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들의 상과 의자들을 뒤엎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자들을 향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장사하는 집보다 더 강한 분노의 표현, '강도의 굴혈'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요2에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향한 채찍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장사를 허용함으로 이윤을 취하는 제사장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장사는 장소만 바꾸면 얼마든지 채찍을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강도는 장소를 바꾸어도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의 신앙 본질이 존중되길 원하십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리로 변질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탐심을 충족시키는 자리가 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에는 강도 대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성령의 전입니다. 기도하는 전이 되기 위해서는
장사하는 마음을 내어쫓아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2. 예수께 고침을 받읍시다(v14).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소경은 예수님의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자들은 그 환영의 인파에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연약한 모습 그대로 성전으로 나아왔습니다. 볼 수 없지만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절뚝거리는 발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셨습니다.
눈이 감겨서 예수님의 입성을 볼 수도 없었던 소경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발이 불편해서 메시아 환영 대열에 합류할 수 없었던 저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스위스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의사이기도 한데요, '창조적 고통'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곳에 많은 환자들을, 특별히 정신과 환자들 상담을 하면서 겪은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깨달은 일은 현대인들이 자기 상실감이란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겁니다.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명예를 잃어버린 게 아니고, 건강을 잃은 게 아닌데 자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상실!입니다.

누가 이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시켜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악한 영에 의하여 소경이 되고
죄의 독화살을 맞아 절뚝거리며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이해하시고 구원해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요즈음 또한 가정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소경된 가장이 많습니다. 한국 신문들을 보면 가장들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통곡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소경된 가장에 절름발이 된 가정을 만납니다. 누가 저들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십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이 소경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절뚝거리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요즈음 미국에서는 맹세(Under God)에 대한 여론이 분분합니다. 미국이 처음 시작할 때, 하나님의 통치 아래 머물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워싱턴 같은 지도자들은 연약했지만 영적으로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갈수록 나라는 풍요하여졌지만 지도자들은 소경이 되어갑니다. 백성들은 절뚝거립니다.
우리들이 태어난 고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경된 지도자들을 가장 안타까워합니다. 대통령을 염려하고 국회워원들을 염려합니다. 소경된 지도자들과 절뚝거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누가 우리 고국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줄 믿습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사53:6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께서 절름발이가 된 나와 가정과 국가를 찾아오셔서 온전케 하십니다.

교회는 병을 치료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까지 소경되어 살아왔을지라도, 예수님께 나오면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날에 성전으로 예수님이 찾아가셨고,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들에게 의원이 쓸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3. 찬양을 회복합시다(v15)

성전에서 호산나 찬송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양자들은 놀랍게도 아이들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합니다.
어린아이는 無識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아이는 기대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단순히 요구합니다.
자기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의존합니다.
어린아이는 흙과 같습니다. 비가 오면 부드러워집니다.
가뭄이 오면, 딱딱하게 굳고 겨울이 오면 얼어붙기도 하지만 작은 단비에도 적셔집니다.
문 앞에 나와서 부르시는 부드러운 소리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모압과 암몬 군사들이 쳐들어 왔을 때, 금식하면서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은 여호사밧 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전쟁에 나아갈 때,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을 격퇴시켰습니다.
대하20:20-22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성도는 찬송하는 자들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모진 고통 중 찬송하였을 때,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아이들이 찬양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모습이 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읽어보지 못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마26:30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나아가실 때 찬미하면서 나아가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찬송자이기를 원하십니다.
찬송으로 어두움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2004년의 고난 주간을 어떻게 보내기 원하십니까?
이 가시밭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제 4월 월삭 기도회를 인도하신 박항배 목사님을 전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시밭 같은 세상에서 백합화로 피어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넌 가시나무 숲에 핀 어린 백합화,
때로 바람이 불어와 흔들리더라도
너무 가시를 두려워 말아라.
내 안에 너무 많았던 가시들
하나씩 꽃으로 변화시킨 그분이 계시니
혹 가시에 상할지라도
굳이 찔린 아픔을랑 더 고운 향기로 품어내거라

기도로 성전을 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연약한 부분을 치료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찬송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새들백 교회의 목사님은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기 앉은 여러분 가운데 쓸모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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