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21:1-11 예수님, 복되신 나의 왕!

들어가는 말

은밀히 여쭤보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그분이 기다려지고,
그 앞에 서보고 싶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그 분만 나와 함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왕,
그분만 생각해도 행복한 그런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그분이 원하신다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은
그분이라면 무엇인가 헌신하고 싶은
새끼가 어미로부터 떨어지지 않자 어미 나귀까지 내놓고 싶은
그분이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고 싶은
이런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메주는 원래 콩으로 쑤는데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 싶은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어떤 말씀도 순종하고 싶은
그런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오늘 그런 왕을 당신에게 소개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왕을 만난 분이 만든 찬송 한 곡을 함께 불러 봅시다.

내 사랑하는 그 이름
예수님
복된 예수님
날 구원하신 그 이름
예수님
복된 예수님
아, 귀하다.
주의 이름
갈보리 산의 어린 양
귀한 생명 버리셨네
예수님
복된 예수님

오?말씀을 한 주간 묵상하시면서 왕으로 오시는 복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모셔들일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철저히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따라 모든 일을 진행시켜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순님께서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자가 임하시는 것을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사62:10-11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메시아는 시온에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드시는 일이란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베풀기 위해 오시는 이 메시아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슥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힘없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약속하신 겸손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약속하신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평화와 겸손과 온유하신 왕이심을 사실로 눈앞에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스가랴, 이사야)을 통해서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말씀을 주일마다 받으시면서 마태복음이 왜 신약의 맨 처음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충분히 이해하셨을 줄 압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Testament(약속)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에서 시작하신 복음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일 (2:6)
애굽에 잠깐 피신하신 일(2:15)
헤롯이 베들레헴 아기들을 죽임으로 일어난 슬픔(2:18)
세례 요한의 광야에서의 복음 전파(3:3)
예수님의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
가버나움에서 복음 전하신 일(4:15-16) 등
그분의 생애가 온통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꼭 그렇게 몇 백년 동안 약속을 하시다가 그 약속을 지키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악하여서 제 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당시 사람들만 해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로마 제국의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처럼 힘과 기백으로 군림하기 위해 백마를 타고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들이 기대하는 현실적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가 아닙니다.

링컨은  얼굴이 하도 못 생겼답니다. 너무너무 못 생겨서 이게 문제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초등학생이 "수염을 길러 보십시오" 그래서 그 다음부터 그 위장하느라고 못생긴 얼굴을 위장하기 위해서 턱수염을 길러가지고 그 만큼도 보기 좋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야당 국회의원이 아브라함 링컨을 정면에다 대고 비난을 합니다. 비방을 하는데 "저 사람은 이중인격자요 두 얼굴을 가진 남자입니다" 그리고 갖은 욕설을 했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두 얼굴이 있다면 하필이면 내가 왜 이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여기 나왔겠습니까?"

미국의 대통령은 얼굴도 링컨처럼 못생겨서는 안된다는 인간적인 사고가 링컨을 조롱하게 한 것입니다.

서울 도심의 탄핵찬성 집회에서 나왔던 사회자와 참가자 사이의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 비하 발언이 방송돼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이 집회의 사회자는 "우리 국모가 누굽니까? 고등학교도 안 나온 여사가 국모로서 자격 있습니까?"

인간들이 똑똑한 것 같지만 의외로 이런 허수에 속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오해도 바로 이런 허수에 속아 넘어간 경우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탄생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 이르기까지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따라 진행하신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21:5)
멍에는 자유의 반대입니다. 멍에는 주인이 짐승을 부리기 위하여 장치한 도구입니다. 누가 멍에를 지기를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멍에를 매지 않는 말은 농업이나 이동에 유용하게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비천한 동물인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겸손으로 교만을, 가난으로 부요를, 온유로 분노와 사악을 이기신 분입니다.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더욱 커 보이는 그분,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이웃,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더욱 자라 가는 나

란 시구가 너무 마음에 다가와서 이 글을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사용하면 좋겠다고 제게 글을 보내왔습니다.  (안효성목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 안에는 놀라운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뭐 때문에 어미 나귀를 대동했을까요?

메시아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셔야 그 언약을 이루기 때문에 어린 나귀를 타시지만, 어린 나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환호 속에 가면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린 나귀에게 어머니 나귀가 함께 있는 것이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어미 나구를 대동하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됩니다.세상 경험이 전혀 없는 새끼인데 갑자가 엄청난 인파가 자기를 둘러보고 뭐라고 떠드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러나 이 어린 나귀는 뒤를 돌아보며 어미 나귀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안심을 하고 계속 앞서 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멍에는 곧 '십자가(十字架)'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막 8:34)

본 훼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부자유나 어두운 숙명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매임으로 생기는 고난이다. 십자가는 우연한 고난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자신의 완고한 고집을 죽인 자만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죄와 허물을 지고 가야 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엄숙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안에서 변함없이 진행됨을 믿으시고 그 약속을 붙드심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기업에 쓰임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왕의 약속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1] 두 제자입니다.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두 제자의 이름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쓰임을 받은 제자들의 이름은 어느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동일하게 그들이 예수의 명하신 대로 가서 말씀대로 나귀를 데려 왔다는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시니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반문이나 의문을 달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나아가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나귀를 타시려 하니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그 위에 깔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에 이 두 제자의 순종과 봉사가 얼마나 아름답게 쓰임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날 때부터 꼽추인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꼽추라 창피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에 수녀님이 찾아와서 그 수녀님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천주교 사경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천주교 사경회는 개신교처럼 찬송을 세게 부르거나 말씀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조용조용하게 하는 세미나 비슷한 것인데 강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려오나 각각 감동을 받으시오. 과연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시는가 감동을 받고 다시 모입시다."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갔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좋은 잔디밭과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꼽추 소녀는 더딘 걸음으로 나갔기 때문에 좋은 자리가 없어서 아무도 없는 쓰레기통 옆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어디를 가나 쓰레기구나' 하고 한숨을 쉬는데 그 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곱추 소녀가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 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쓰레기통을 왜 뒤집니까?"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 걸 찾아서 무엇 하려구요."

"이걸 가지고 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 사드리려구 그래요."

그 순간 곱추 소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 인생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런 감동을 받고 그는 들어가서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나 같은 곱추 쓰레기도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시니 저 병들고 나약한 양로원으로 보내주세요. 나로 하여금 주께서 쓰시게 해 주세요."

드디어 '내가 너를 쓰겠다' 이 음성을 들은 꼽추 소녀는 양로원에 들어가서 굽은 허리로 수많은 노인들의 병수발을 들었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 키 큰 사람보다 곱추가 노인들을 섬기기에는 더 좋았습니다. 노인들을 섬긴 이후 곱추가 들어가면 병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곱추는 이미 곱추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보낸 천사였습니다. 땅이 진동했습니다


2] 나귀의 주인입니다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나귀 둘을 즉각 내어놓았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주님께서 쓰시도록 흔쾌히 내어놓은 나귀의 주인은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분입니다.
사람이 자기 소유를 주님을 위해 내어 놓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장로님, 부자시죠. 건축헌금 좀 하시죠?"
"뭐가 있어야지요."
"일산에 빌딩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들 것인데요."
"분당에도 빌라가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작은 아들거에요."
"파주에 산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손자거에요."
"강남에 집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내거에요."
그 때 목사님 이 나오면서 혼잣말로
"다 있는데 하나님 몫만 없네."

'주가 쓰시겠다'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쓸모 없는 인간으로 되어버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구속하시고 값을 지불하여 다시 우리를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348장에는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1절)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합소서
2절)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합소서
3절)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진리 말씀만 전파하게 합소서
4절)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하늘 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
5절)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우리는 주께서 나를 쓰시려고 찾고 있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쓰시겠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레이아'는 말인데 이 말은 이 나귀새끼가 주님께서 꼭 쓰셔야 하는 '필요 불가결한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한국 프로야구 감독 가운데 김성한이란 분이 있습니다. 어릴 때 그의 모습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가망성이 없는 문제아였습니다. 좋지 못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잡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중학교 감독으로 있었던 최관수씨가 김성한이에게 "너 그렇게 살면 안된다. 야구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한 번 해보지 않겠니?" 하면서 야구를 시켰습니다. 야구 배트를 쥐면서부터 그를 불러준 감독이 너무나 고마워서 열심을 다했습니다.

나귀 임자는 주님의 말씀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즉시 나귀를 내드렸습니다.
나귀의 청지기라 생각하였습니다.
내 것으로 생각했다면 주저하였겠지요. "왜 하필 내 소중한 나귀를"이라며 불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고 집행할 뿐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 생명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3] 수많은 무리들입니다.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는 감동 깊은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로마의 한 총독이 유월절 예루살렘에서 도살되는 양의 수를 조사했는데 25만 마리였다 합니다. 당시 유월절 규정에는 양 한 마리에 최소한 열명을 한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약 250만명 이상이 모였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환영하는 인파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사람들이 운집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의 행열을 상상해보십시오.
더구나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환영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바른 메시아관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몇 년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그 사건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 것은 뒤로하고서라도, 그 환영하는 모습만은 대단했습니다.
그런 뜨거운 환영을 우리는 본문에서 만납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입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소동하였습니다. 지진에 의해 땅이 흔들리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이 소동에 휩싸였습니다.(에스아이스떼)
그들은 겉옷을  나귀 위에 얹음으로 예수님의 입성을 왕의 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폄으로 승리의 왕을 진심으로 맞아들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오랫동안 外勢에 눌려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이 장면이 눈물이 찡할 정도의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외칩니다.

<호산나>란 말은 <우리가 구하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그들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호산나의 찬양을 부른 사람들은 모두 무거운 짊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 그 짐을 내려주지 않으면 곧 쓰러지고 말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은 수많은 인생고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질병의 짐, 슬픔의 짐, 고통의 짐, 불화의 짐, 전쟁의 짐, 배고픔의 짐, 절망의 짐들......  . 그들은 무엇보다 죄악의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무거운 죄악의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구원하소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여"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고국에서 촛불 집회라는 것이 매우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고 옮아 붙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무엇을 향한 대망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답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고국의 촛불을 든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이런 구원을 열망을 담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세상 정치가들을 향한 갈망이 참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구하는 기다림으로 변화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 그 분은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마무리하는 말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메시아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날 입성하십니다.
자기의 목숨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믿는 이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로서 메시야가 오시리라 말씀하신 선지자의 예언은 성취됩니다.

오늘 말씀을 한 주간 묵상하시면서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모셔들일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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