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매사추세츠주(州) 노스필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4살 때에 부친을 여의고, 가정 형편도 그리 넉넉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학력은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고, 제화점에서 일을 거들며 먹고 사는 일에 메달리게 됩니다. 그러던 중 교회 교사인 에드워드 킴볼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 듣고, 그것을 마음에 믿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때 그는 이 기쁨을 모친과 나누기를 원했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어머니, 1837년 2월 5일은 제가 어머니로 부터 처음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월 21일은 제가 성령으로 거듭난 생일 입니다."
그 때가 1855년,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의 일입니다.
다음 해, 무디는 시카고로 떠나게 되고, 그곳의 한 제화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탁월한 상업수완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당시에 유명했던 폴리머스 형제단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들과 친교하면서 나누게 된 성경적인 지식은 그의 평생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 때 그는 YMCA와 지역 교회에 헌신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교회 학교 방침에 대하여 교회와 무디 간의 의견에 불일치가 일어나자, 무디는 직접 주일학교를 꾸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가 빈 술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된 것은 1858년이었고, 몇 해 지나지 않아 그의 '학교' 정원은 1500명을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무디의 주일 학교를 돕던 다른 여교사가 심각한 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는데, 그 여교사는 자기의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음에도 자기가 가르치던 아이들의 집을 하나하나 돌면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거듭나게 하는 일에 남겨진 시간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녀의 열정을 통하여 무디는 복음 전파와 구령의 헌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 그가 한 사람의 혼에 가지는 관심이 각별하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후 링컨의 정책에 반발하며 미국 남부의 여러 주들이 남부동맹을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링컨의 미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정부군을 남부로 보내는데, 이것이 '남북전쟁'이었습니다. 시카코에 있었던 무디는 남북 전쟁 기간동안 북군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을 전도하고 구령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 무디는 평소 존경하던 스펄전 목사와 죠지 뮬러를 만나고자 하였고 그런 그에게 영국을 여행하게 되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이 때를 즈음하여 그는 영국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다음 해 영국에서 아직 어리지만 뛰어난 설교가였던 무어하우스와 함께 시카고에서 전도 집회를 70여회 열게 됩니다.
당시의 전도집회는 이러했는데, 먼저 믿음으로 엄청난 숫자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천막을 세우고 북을 쳐서 사람들에게 전도 집회가 있다고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부흥사들이 구역을 나누어 천막을 돌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거듭난 것을 촉구하였고, 그들이 외치는 죄에 대한 회개와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구에 반응하여 사람들은 울고 회개하며 주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거룩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술집들은 문을 닫고, 노름판은 사라졌으며, 손찌검을 하며 아내를 구타하던 남편들이 악행을 그치게 되어 주위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일들이 당시의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무디의 가장 강력했던 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주류 업계와 그들로부터 광고비를 지원 받는 일단의 언론계였습니다.
1870년 그의 나이 33세에 그는 그의 평생의 사역 동반자 생키를 만나게 되는데, 생키가 그의 찬송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으면 무디는 그의 입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증거하여 많은 이들이 회심케 하는 사역을 효과적으로 분담하게 됩니다.
생키는 평소 무디의 열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무디 목사를 지치게 하시든지, 아니면 제게 초인적인 힘을 주십시오." 무디의 숙부는 자기 조카 무디를 가리켜 '봄날 미친 토끼처럼' 힘이 솟구친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구령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납치해가는 '납치범'인 무디를 가만히 둘 리 없었고, 기어이 그를 도시와 함께 태워버리려고 작정을 하였는데,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나 무디의 사역지는 그야말로 불탄 수수밭처럼 황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그와 그의 가족의 생명은 안전하게 지켜졌고, 이러한 재난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무디는 이를 즈음하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혹자는 이 때를 무디가 성령침례를 받아 거듭난 시점으로 보기도 하나, 구원 받아 성령께서 내주하는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서 발생하는 오류라고 보면 됩니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런던,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뉴욕, 시카고, 보스턴, 대학들과 궁전들에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당시 교파를 떠나서 많은 교회에서 무디를 지원하였는데, 이는 모든 교회가 복음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파마다 믿음은 달랐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에 있어서 아무도 회의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76년, 무디는 엄청나게 값진 선물을 받게 되는데 바로 그의 모친이 그의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일이 일어납니다. 자기 고향 노스필드의 어느 한 회중교회에서 설교하게 된 무디는, 그의 설교가 끝난 뒤, 구원으로의 초청 시간(당시에는 설교가 끝난 뒤, 교회의 회중 안에서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구원을 받으라고 권고하던 차례가 있었음)이 시작되자 앞줄에서 한 여인이 초청에 응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여인은 바로 무디의 어머니였습니다. 무디의 모친은 상냥하고 인정이 많았고 자녀들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유니테리언(삼위일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단일인격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지칭)으로서 복음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아들의 설교를 통하여 마음이 움직인 것이죠.
그의 나이 52세가 되던 1889년, 무디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무디성경신학원을 설립하게 되었고, 1893년 시카고에서 EXPO(만국 박람회)가 열리자, 그 옆에 집회 장소를 마련하여 대대적인 구령 집회를 열게 됩니다. 수백명의 목사들과 복음 전파자들이 무디를 도와 거리에서 길 모퉁이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메스컴에서는 무디의 이런 전도 집회에 관하여 호의적으로 또는 악의적으로 그를 광고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가 60에 이르러 점점 육체가 쇠하게 되었고, 그의 사역은 R.A. 토레이가 이어받게 되었으며 1899년 12월 22일에 그는 본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1908년 8월 13일에 그의 파트너였던 생키도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무디의 일생에서 그는 전천년주의자였고, 세대주의자였으며, 플리머스 형제단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한가지 성경만을 사용하였는데, 1884년에 홀트와 웨스트코트가 편집한 사본에 맞추어 'RV 성서'가 나오게 됩니다. 당시에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RV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무디는 그 성경에 대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의 사역을 이어 받아 영적 대각성을 이끌었던 R.A. 토레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디는 시카고 대화재를 겪고나서 이렇게 장담한 적이 있습니다. "내게는 이 성경과 매킨토시의 모세오경 주석으로 충분하다." 플리머스 형제단의 매킨토시 형제가 저술한 오경 주석은 지금도 그 주석의 탁월성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요.
그의 장례식을 집전했던 그의 친구 스코필드는 1909년에 무디가 가졌던 그 믿음, 바로 플리머스 형제단의 신앙이기도 하였던 신앙을 바탕으로 일련의 주석을 성경에 달아 그의 이름을 딴 주석성경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스코필드 주석성경입니다.
무디의 사역과 그의 일생을 통하여 미국의 그리스도교는 지금도 그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고, 그의 사역의 열매들은 미국의 영적 타락에 맞추어 많이 빛바래졌으나(무디성경신학원이 근간에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등 배교해버렸음) 아직도 그의 구닥다리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복음 전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출처 : 최용의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간한 무디의 전기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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