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6 February 2015
한국 초기 선교사 계화삼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 교회가 보이고
한국 목회가 보이고
한국 선교가 보이고
한국 디아스포라 교회가 보인다.
계화삼 목사 약력
출생
1912년 9월 1일 황해도 황주 흑표면 용수골
1932년 12월 20일 평양 산정연교회 사경회에서 은혜 받음
학력
1934년 3월16일 만주 용정 은진(대성으로 통합) 중학 졸업
1944년 12월 9일 봉천 만주신학교 본과 졸업
1946년 3월 10일 만주 동북대학 정치과 졸업
안수
1937년 5월 3일 만주 목단강 신안진 중앙교회 장로안수 8년간 시무
목회
1944년 12월 15일 북만노회 강도사 취임 신안진 중앙교회 시무
1946년 3월 1일 동만노회 목사안수 연길중앙교회 시무 중 강제 폐교(1년 반 시무)
월남
1947년 5월 9일 국경선 넘어 두만강 도강
1947년 5월 15일 평북 철산 중앙교회를 섬김
또 월남
1948년 5월 14일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 구사일생으로 인천도착
1948년 전남 광주 서부교회 담임(숭일고등학교 교목 겸임) 6년 시무
광주 고등 성경학교 교장 2년(광주 신학교 교수 겸임)
1954년 목포제일교회 2년 시무
선교
1956년 9월 2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40회 총회에서 대만선교사 임명
13년 6개월간 선교사역. 대만 한국 디아스포라 교회 셋, 중국 현지인 교회 셋 설립
1969년 6월 26일 남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일교회 설립.
1972년 12월 16일 북미 캐나다 토론토 중앙장로교회 설립
1978년 12월 18일 미주 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 제 2대 총회장
[집필 동기]
필자가 계 목사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88년 겨울이었다. 토론토의 혹독한 찬 바람이 뼈 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계 목사님은 노구를 이끌고 공항에 나오셨다. 토론토 반석교회에 새로 부임할 후임 목회자를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필자 역시 그분을 만나러 나왔던 터라 그날 저녁을 계 목사님 부부, 그리고 반석교회 교인들과 함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계 목사님은 마흔 살이나 어린 후임 목사를 맞아 상석을 한사코 양보하시는 것이었다. 계 목사님의 이임 설교 말씀도 다가왔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내려놓는 모습이 신선했다. 반석교회가 서는 과정에서부터 자리를 잡기까지 쏟은 열과 성을 쏟은 분의 겸비함이 잔잔한 감동 되어 몰려 왔다.
목사 준비 공부를 하던 나에게 멘토를 생각하게 했다.
2년이 지났다. 1990년 가을부터 필자는 계 목사님께서 개척하셨고 또 원로 목사로 계시는 토론토 중앙교회에서 부교역자로 3년 간 사역했다. 그 동안 틈틈이 계 목사님을 찾아 뵈었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를 정리했다. 목사님은 우리 민족이 총체적으로 고난 당하던 시기에 50여 년간 목회 현장에 지켰다. 만주에서 북한으로, 광주에서 목포까지. 그리고 대만 선교사로, 아르헨티나, 캐나다 이민 교회 개척자로 쓰임을 받았다. 그는 격동기 한국 교회를 지킨 목회자요, 선교의 장이 열릴 때 한국 초기 선교사였다. 한국인들이 세계 각처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던 때에, 디아프포라 교회를 세우는 목회자였다. 걸어 오신 걸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졌다.
이 책을 기록하게 된 동기는 목사님의 살아오신 생애 자체가 한국 교회사와 선교역사의 좋은 자료가 되겠다는 생각에서다. 목사님이 목회 현장과 선교 현장에서 쓰임받은 일들은 후대의 목회자, 선교사, 성도들에게 교훈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필자로서는 버거운 작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게 하신 것이 이 일 하라고 허락하셨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과욕을 부린 셈이다.
감사한 것은 계 목사님께서 자료를 많이 도와 주셨다. 은현교회(김기호 목사님)가 초판을 도와주셨고, 생명의 말씀사 김창영 목사님께서 재 출판을 책임져 주셨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을!
2012년 1월 16일
토론토 서머나 교회 노하덕 목사
감사의 글
바람에 흩어지는 뜬 구름 같은 생애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무익한 종이란 말밖에 할 수가 없는데 내 생애가 책으로 출판이 되어 나온다니 주님 앞에 황송할 따름이다.
“주여! 무익한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26세에 장로가 된 후 84세가 된 오늘날까지 복음을 전하며 온 것이 내 일생의 전부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만큼 더 배워왔어야 했다. 다만 믿음의 사람을 찾기 힘들던 당시 신심이 깊으신 어머님을 만난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은혜였다. 1990년, 45년 전에 떠났던 중국의 동족들에게 다시 가서 복음을 나눈 감격을 무엇으로 말하랴! 아직도 쓰실 일이 있어서 중국에 보내시고 나를 선교 사역에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니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다.
이 책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나는 고마운 분들을 기록해 놓아야겠다. 해방 후 한국의 초기 선교사로서 무명의 존재여야 할 나의 생애를 발굴하여 한국선교사(宣敎史)로 발간하기까지 수고하신 노하덕 목사에게 감사 드린다. 또한 미천한 종을 매우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여 이 책의 발간을 추진하여 주신 분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1995. 6. 20 계화삼 목사
추천사
김명혁 목사님
목차
나라 잃은 설움이 조선인 가슴 가슴마다 무겁게 맺혀 가던 1912년 조선땅 황해도 용주골에 고고한 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이름하여 계화삼! 중화의 땅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꽃피우라 지어주신 이름이기도 하다. 선친께서 믿음의 사람이요. 모친 또한 그러하셨으니, 그 이름 안에 넉넉한 신앙을 담으셨던 것이다. 아명을 ‘신명’ 이라 지어 부르며 부모님의 신앙을 이름에 담았다. 그리고 그는 부모님 기도하신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애를 이름에 걸맞게 살았다.
1905년 을사조약부터 1910년 한일 합병의 칠흑같이 어두웠던 민족적 밤중에 주권조차 빼앗긴 조선의 땅, 한 농부의 가정에 어린 아이가 태어났으니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손길을 두시고 소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어 가셨던 것이다.
그를 황주 벌판 오곡백과 무르익은 가을(9월)에 태어나게 하셨을 때, 그는 이미 이삭에 낯이 익어갔던 것일까? 그는 남은 생애를 이런 풍성한 수확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살게 된다. 물론 그 열매는 영적인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첫 장은 축복으로 뭉쳐진 것이라고만 말하기 힘들다. 태어나 아버지의 모습을 채 구분하기도 전, 부친께서 그의 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다. 모친의 말씀을 듣고, 훗날에 그 정황을 종합해 보건데 맹장염이었음직하나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한 살도 채 못된 그가!
때로 고난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파도처럼 겹겹이 몰려온다. 그때 그의 가정이 그랬다. 욥에게 밀려 들었던 그 집채만한 고난의 파도가 이번엔 그의 가정을 강타하고 있었다. 가정의 대들보 같던 부친께서 소천하셨다.
몇 개월이 못되어 여덟 살 위인 큰형이 아버지를 뒤따라 갔다.
그리고 여섯 살 위인 둘째 형까지 연거푸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어머님은 그 극한 고난의 늪을 허우적거리며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어떻게 지나가셨을까? 그보다 열 살 위인 큰 누님은 그 모진 비바람을 어떻게 고 받고 있었을까? 이제 갓 지구상에 두 발을 딛고 하늘을 향해 선 어린 아들 신명이는 정말 신명나게 하는 존재일 수 있었을까?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는 그런 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 23:10~14)”
하지만 ‘이런 일’이 그의 가정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단련은 버거웠다.
그리고 그 연단 중에서 어머님을 지탱해준 힘은 독립지사이셨던 할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일본군에게 쫓기는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고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진짜 강한 아버지가 계셨다. 의지할 수 있고 힘이 되시는 분이 계셨다.
그리고 그분을 믿은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121:1-3)
모친을 지탱하게 한 힘은 위로부터 온 것이었다.
겹겹이 몰려오는 시험들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때그때 극복해 나갔다. 어머니는 남편을 위한 헌신을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있었다. 삼형제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을 어머니의 사랑도 외아들로 남은 화삼 위에 홀몬산의 이슬처럼 촉촉히 쌓였다.
하지만 그만한 믿음이 없었던 어린 화삼에게는 눈에 보였으면 좋을 그 아버지가 늘 그리웠다. 누구보다 뵙고 싶은 아버지신데 사진 한 장이라도 있었더라면·····.
아버지 모습을 담지 못한 마음 응어리 되어 훗날 사진업을 하는 동기가 되었다니. 어머니의 남다른 사랑 속에 자라며 감사하기만 했던 그도, 다른 친구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께 달려갈 때는 늘 부러웠다. 나도 내 입으로 ‘아버지!’ 하고 한번 불러 볼 아버지가 계셨으면·····. 한 달음에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아버지가 계셨으면…….. .
“아버지!”
새벽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 가며 간구하는 중심이 남달리 뜨거운 까닭이 여기 있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소망으로 바꾸어진 탓일까?
아무튼 그는 아버지 모습 담지 못한 한을 어머니 안에서 보상하려는 듯이 어머니 모습을 무수히 사진에 담았다. 물론 그것들도 두만강을 건너 조선땅에 온 직후 소련군에게 모두 압수당하고 말았지만.
어머니의 자녀를 향한 교육열은 특심했다. 맏딸과 막내아들은 어머니의 열정적인 교육열 덕분에 당시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받을 수 있는 모든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맏딸은 소학교를 졸업하자 평양에 있는 숭의 학교로 유학을 시켰다. 당시 어머니의 생활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전답을 모두 정리해서 평양으로 옮겼다. 그의 나이 네 살이었다.
어머니는 딸이 다니는 숭의학교 후문 근처에 집을 마련하셨고, 그는 그곳에서 여섯 살이 되기까지 유치원 교육을 받았다. 숭실 유치원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니며 시작한 학업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없는 재산에 맏딸을 숭의학교에 보내랴, 막내 아들 유치원에 업어 나르랴 생계 책임지랴 몸이 몇이라도 부족했다.
교육도 어려운데 생활비까지 마련하셔야 했던 어머니, 그 고생이 참 컸다. 과자집 앞에서 사탕 사달라고 조르던 그날이 낯뜨겁다. 회초리 한 번을 아끼시던 어머니, 과자 하나 선뜻 사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입안에 넣어주지 못했던 어머니의 속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혼자 힘으로 두 자녀를 교육시키며 생활을 꾸려 가시던 어머니의 힘이 한계에 이른 때는 1917년이었다. 나라 잃고, 전토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이 백성들이 벌써 만주로 만주로 밀려가고 있던 때였다.
몇 개월 후면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게 될 딸 신복을 숭실학교 졸업반인 곽남선과 약혼시켰다. 결혼의 제반 문제들을 친지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위안은 그들이 졸업 후 결혼하여 만주로 따라 오리라는 것뿐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그 해 가을, 그는 제2의 고향인 평양을 미처 정도 들기 전에 떠나야 했다. 끝없이 이어지던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틈에서 생면부지의 이국을 향해가던 몇 장면은 어제 일처럼 생생히 남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만 해도 오백 리 길, 어머니 손을 잡고 걷다가 업혀 가다가 함께 기진하곤 했다. 그를 업고 가야 할 어머니로서 다른 짐을 챙겨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몇 벌이고 껴입은 옷이 전부였다. 걸어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힘드신 어머니 등에 업혀 갔던 그 날들이 두고두고 훗날 안쓰런 추억으로 되살아 났다. 그 허술한 삼등칸, 아니 화물 기차라도 있어서 타고 갔더라면 그 쓰라린 아픔은 평생 맺히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원산에서 청진까지는 화물선이나마 탈 수 있게 된 것이 다행 중 다행이었다. 처음 타본 통통배에서 뱃멀미도 많이 했지만, 그 고역은 그가 누린 경이로운 기쁨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일이었다. 바다 수평선을 가르고 올라오던 태양과 밀려오는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통통배의 모습은 어린 가슴 가득 설레게 했다. 무엇보다 배에서 먹는 밥의 맛은 더없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깐, 그가 걸어가야 할 예정은 다시 청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주와의 국경지대인 회녕까지 며칠을 걷기도 하며 업히기도 하며 어떻게 그 먼 길을 갈 수 있었는지 꿈만 같았다.
마침내 두만강 가에 섰다. 고국을 떠나 만주를 향하던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서성거리고 있었다. 국경 감시망이 없는 곳을 찾다 보니 건너는 배가 있을 리 없었다. 서로서로 손을 잡고 봇짐을 매고 강물이 얕은 곳으로 건너기로 했다. 어느 남정네의 목마를 타고 건넌 두만강, 그는 비로소 이국 땅 만주에 서게 되었다. 그제나 이제나 경비병의 눈 길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그렇게 강을 건너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의 가슴도 애절하기만 하다.
이렇게 고국을 떠나 강을 건너 북간도에 도착하니 몇 사람이 모여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눈물 젖은 찬송을 올리며 기도하는 사람들, 기독교인이다.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저들의 아픔이 오죽하였을까만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저들의 마음엔 하나님이 주신 새 소망으로 힘있게 약동하고 있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수1:9)
일행 중에는 자칭 예수라 하여 훗날 조선 교계를 어지럽게 하였던 황국주도 있었고. 그의 고향에서 목회하시던 최덕신 목사님의 따님 최진실, 그리고 함께 은진중학에서 공부한 이은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주 땅은 광활했다. 청국의 힘으로 오색기를 만주에 덮기란 역부족이었다. 수십만 이민이 조선으로부터 밀려 왔지만 별다른 흔적이 없어 보였다. 특별히 초청받아 온 이민들은 아니었지만 부지런한 조선인들에게는 피난처로 무난한 땅이었다. 흑룡강, 송화강을 따라 뿌리를 내리는 조선인들이 늘어갔고, 용정, 연길, 봉천 등지에는 흡사 조선 땅처럼 조선인들의 인파가 넘쳤다. 땅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옥토였고, 수백 만 명이 들어와도 될 만큼 광대한 땅이었다. 곳곳에 학교를 짓고 일터를 가꾸며 자녀들과 꿈을 키우려고 힘을 쓰는 모습들이 활기차 보였다. 나라 잃고 고국을 떠난 조선인들의 설움이야 무엇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위해 만주 땅에 피난처를 마련하시고 피할 길을 주신 듯했다.
고린도전서 10:13
이들 중에는 고국의 독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명월구에는 조선 독립지사들이 사관 학교까지 세웠다.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이 독립군에 가담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젊음과 모든 것을 조국 앞에 내어 놓고 모여들었다.
그들처럼 광복운동에 전폭적으로 헌신되어 있지는 못하더라도 대부분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 독립군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피땀을 쏟아 가며 모은 물질이었지만 조국을 독립 운동에 쓰도록 기쁘게 내놓았다. 독립군을 돕는 것이 그들에게도 보람이 되었다. 홍범도, 김좌진, 궁정서 장군들의 활약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빛이 났다.
독립군이 가는 곳에는 경사가 난 듯했다. 소, 돼지들이 기꺼이 내놓고 군복을 지어주었다.
“알강알강 달국 소리에 적의 군사 황급하였네.
도도도닷데 지데닷데 잘도 넘어 가누나.”
기독교인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을 섰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군들의 간교하고 잔인한 핍박 또한 더욱 거세어졌다. 경찰 행정을 청국으로부터 넘겨 받은 일본은 무자비하게 만주 땅을 파고 들었다.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에 온 그의 가족이 삶의 뿌리를 처음 내린 곳은 용정이었다. 일송정 푸른 솔, 천년 만년 흐른다는 해란강을 담아 회자되는 선구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역사에 길이 남은 용정이었다. 서쪽으로 마제산이 동편 언덕과 조화를 이루는 용정은 그에겐 제 삼의 고향이 된다.
캐나다 선교부는 이곳 용정에 용정선교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1927년 제창병원도 스텐리 H. 마틴 선교사의 주도로 기독교 정신 속에 이곳에 세워졌다. 기독교 교육 기관으로 은진중학, 명신 여학교, 동산교회, 그리고 선교사들의 주택들이 병풍처럼 연이어 세워졌다. 용정은 만주 제일의 교육도시로 변해갔고, 신앙적으로도 가히 만주의 예루살렘이라 할만 하였다.
그가 이곳에 첫발을 내릴 때만 해도 아담한 소읍지였으나, 조선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큰 도시를 이루어 갔다. 밀려 오는 조선인 이주자들로 만주가 만개하는 듯하였다. 이곳 저곳에 십자가를 세운 교회들이 들어섰다. 교회에 뒤질새라 학교들이 세워졌고, 명월구에는 독립군 사관 학교가 세워졌다.
그러자 조급해진 일본은 청국과 민족을 보호하겠다는 미명 아래 치외법권을 중국으로부터 넘겨 받았다. 중무장한 일본군들이 조선 독립군들을 무섭게 밀어붙였다. 청산리 싸움, 봉오골 싸움 등에서 속 시원한 낭보들이 왔지만 역부족이었다. 만주 땅은 점차 공포와 굴욕의 땅으로 변하여 갔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되던 해였다. 밀리고 또 밀리던 독립군들은 마지막 궁지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우방, 중국 그늘에 피하여 훗날을 준비할 것인가, 러시아 땅으로 본거지를 옮길 것인가? 그들은 각자의 의견을 따라 무거운 나그네 길을 떠났다.
김구 주석이 중국 상해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렸고, 홍범도, 궁정서, 김좌진 장군들이 러시아로 옮긴다는 소식도 들렸다. 김좌진 장군이 그가 살던 신안진에서 30리(12km) 떨어진 사시역에서 물방앗간을 돌보다 부하에게 암살당했다는 비보도 왔다. 암살한 부하는 김 장군이 공산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쏘았다는 얘기도 들렸다. 러시아로 넘어갔던 독립군들이 레닌 혁명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소식 등이 왔으며 그들 중 82명이 공산당에 몰살당하여 한 웅덩이에 묻혔다는 비보도 왔다. 소련말로 ‘치뜰이사깨’(네 가지 모자 즉, 상투 틀고 망건 쓰고 감투에 갓까지 쓴 사람들)라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더니 어찌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 앞에 다가오는 듯하던 조선 독립이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3.1운동의 여진이 휩쓴 것은 그가 용정에서 영신 소학교 일학년 때였다. 교장 선생이 모든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비장한 선포를 하였다. 오늘은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는 날이니 1,2학년에 속한 학생들은 빨리 집에 돌아갈 것, 3학년 이상은 독립을 위한 시가 행진에 참여하자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저 왜놈들의 총칼에 희생될지도 모른다면서 각오들을 새롭게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이 미달인 그도 어른들 틈에 끼여 신나게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말 탄 일본 헌병들이 들이 닥치고, 경찰, 청군들까지 만세를 부르는 대열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공포심으로 떨었던 그날이 훗날에도 생생하였다. 쓰라린 좌절의 한이 조선인 가슴 가슴마다 맺혔다. 다만 세월만이 억압하는 자들과 억압당하는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영신소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생계 꾸리시기에 여념이 없으시던 어머니를 따라 의란구소학교를 거쳐, 연길숭신소학교에 이르기까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6년 만에 소학교를 졸업했다. 부자(父子)가 한 교실에서 상투 꽂고 망건을 쓴 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6년제 소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4년제 소학교조차 들어 가기 어려운 때였지만, 그는 14살에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26년 그가 4학년이 되던 해에 학교가 폐쇄되지 않았더라면 그 해 은진중학을 졸업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학감이시던 이태준 선생님(훗날 서울 미암교회 담임)의 독재를 반대하여 전교생이 동맹 휴학에 들어 갔던 일이 화근이 되어 은진중학은 문을 닫았다. 당시 는 광주 학생사건의 여운이 학교마다 넘치고, 좌경화 물결 또한 일제 당국의 신경을 어지럽히던 때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대성중학교(6회)에서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그 지역에서 더 진학할 대학이 없었다. 만약 그의 시력에 이상이 없었다면 꼭 해보고 싶었던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 동경에 유학을 갔을 것이다. 붉은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력은 그의 장래를 미술가로부터 목사로 구분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학업을 마무리한 그는 상업에 뛰어 들었다. 의란구 구룡평이란 곳에 있는 시장에서 포목상을 경영하였다. 6년의 세월이 지났다. 허송세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에게 운신의 폭은 좁기만 하던 때였다.
청국의 오색기는 손문이 제창한 삼민주의에 짓밟히기 시작했다. 부패한 청국 정부로부터 봉급조차 받지 못하던 관리, 군인들의 불만은 민간인들에게 횡포를 자행하게 만들었다. 특히 의지할 나라가 없는 조선인들은 그들의 밥이었다. 끄떡하면 공연한 트집을 잡아서 가산을 털어 갔다. 이러한 무법천지에서 그도 또한 희생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예고도 없이 밀어 닥친 공안국 순경이 점포에 찾아온 것이다. 가산을 수색하고 그들이 이미 준비하여 온 공산 유인물을 내보이며 공안국에 가자는 것이었다. 돈이 필요하다는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너무 어이없는 짓들이라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가 유치장 신세를 하룻밤 져야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를 찾아온 모친에게 순경은 돈을 요구했다. 하룻밤 유치장에 재워준 문턱세라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법도 없고 공의도 없는 이 땅이 싫었다. 그러나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온 천하가 다 이지경이요, 돌아갈 고국은 일제의 마수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데 말이다.
1933년 7월, 어머니의 권면을 따라 고향 황주에 아직 살고 계시는 외삼촌을 찾기로 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말하면 소래골 다음가라면 서러워할 황주 용수골이었다. 작은 아버지 계택진씨도 이곳에 살고 계시니 만주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피난처로 삼기로 했다. 조, 콩, 보리 , 밀, 녹두, 메밀 농사들을 도우면서 과수원 일도 거들어 드렸다. 농사 일에 익숙지 못한 그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반갑게 맞아 주시고 갈 때는 여비까지 책임지시겠다는 삼촌이 고마웠다.
농기구에 몸을 다치고 손바닥에 물집이 터져 나오도록 일을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한 꿈이 움터 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을 가지고 저 광활한 만주 땅에 이상적인 농촌을 세우면 좋겠다는 꿈이었다.
삼촌 집에서 농사일을 배우고 도우면서도 그의 관심은 늘 교회에 있었다. 더구나 용주골교회의 김유목 목사는 그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틈틈이 신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는데 특히 썬다싱의 전기는 그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특히 썬다싱의 회심과 전도 이야기가 그의 심령을 뒤흔들었다.
그는 어려서 동네에 있는 장로교 소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경을 구입하여 읽는 중 힌두교 교리와 다른 것을 알고 성경을 찢어 불에 태워 버렸다. 어려서부터 구도심이 낳은 썬다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여러 종교 경전을 읽어보았으나 참 신이 누군지 알 수 없어 번민하다가 큰 결심을 세우고 참 신과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면 자살하기로 하고 1904년 12월 18일 날짜를 정하여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기도했다.
정한 날짜 새벽 4시 30분 마지막 시간, 집 앞으로 자나가는 5시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하러 나가려는 순간 기도하던 자기 방안에 큰 빛을 보았다. 그 속에 예수께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재도 살아 계시는구나’하고 깨닫는 그는 그 때부터 예수 믿고 주께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생명의 지혜를 주님의 발아래 있음을 알았다. 그가 주의 발 아래에서 묵묵히 묵상과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그때 주께서 그에게 말씀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 길 속에서 고귀하신 주님의 마음과 사랑도 배웠다. 그에게 있어 신학교는 바로 십자가 밑에서 그 발을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1908년부터 1909년 사이 2년 동안 북인도 지역과 한번의 티벳 여행에서 온갖 위험을 겪으면서 전도했다. 회교도의 방해와 박해, 말라리아와 열사병, 눈보라와 히말라야의 급류 등 어려움 속에서 그의 목적은 오직 예수 증거에 헌신을 하였다. 밤 시간에도 자주 숲 속에 들어가 오래 기도하였다. 한번은 표범이 나타났으나 그는 꼼짝없이 기도하니, 표범은 마치 양순한 개처럼 사두 앞에 와서 앉더니 머리를 내밀었고 사두는 그것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였다. 깊은 기도 중에 ‘우주적 감정’을 체험하였다.
그는 둘도 없는 한 권의 성경책과 담요만을 가지고 부락마다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지리도 모르고 언어도 서투른 그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주로 나무 아래에서, 또는 바위 사이에서 묵상하고 잠을 잤다.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영혼은 더 맑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지도하에서 읽은 힌두 경전의 <解脫 Moksha >에 나오는 “매일 죽는 자는 살고, 매일 사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말이나 로마서 14:8 말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는 말씀과 접목시켜 ‘매일 죽자. 매일 죽어야만 눈이 떠지는 것이라면 어찌 천 번의 박해인들 견뎌내지 못하랴. 내 정신만 불이 되어 탄다면 내 몸은 아무도 죽이지 못하리라’는 신념으로 전도여행을 강행했다.
1913년 봄에 그가 티벳에 갔을 때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는데 라마교 국가인 티벳에서는 썬다를 체포하여 사형수처럼 깊은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우물 속 송장들 썩는 냄새 속에 태연히 있다가 밤중에 우물 뚜껑이 열리면서 밧줄이 내려와 천사의 도움으로 구조되기도 하였다. 그의 전도를 말리지 못했다
여권이 없는데다가 기독교 전도자의 신분으로 전도를 하여 네팔 경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쳐 넣어졌다. 옷을 홀랑 벗기고 착고를 채워 운신을 못하게 했다. 거머리 떼와 오물을 두고 욕을 하며 나가자 거머리 떼는 전신으로 기어올라 그이 피를 빨았다. 처음 두서너 시간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그는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였다. 순간 고통은 멈추고 감옥은 천성같이 변했다. 계속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자 죄수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경찰이 그를 석방해 주어서 나가는데 거머리에게 피를 다 빨려서였는지 현기증이 나서 잘 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몰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루 종일 걸어서 티벳인 동역자 타르친(Thar Chin, 성경을 티벳어로 번역함)을 만나 건강을 회복하였다.
1919년 5월 9일(30세) 썬다는 마드라스를 거쳐 티벳으로 갔다. 이로써 열 아홉 살 때부터 넘나들기 시작한 히말라야를 열번 째 넘은 것이다. 라마들은 그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저지했으며, 박해를 하다가 나중에는 죽이려고 했다. 인도와 티벳 국경지역에 썬다를 통과시키지 말라는 티벳 정부의 지령도 하달된 상태여서 통상 이용하던 코트가르 방향은 어렵게 되었다. 험난한 길을 통해 티벳에 들어가 마을마다 다니며 전도를 하는데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번 전도여행에서 썬다는 48곳에서 전도를 했다. 하루 평균 40리를 걸으며 9월말까지 전도를 하였다. 그해 티벳은 7월 30일부터 8월 9일 사이에 큰 눈이 내렸고 9월말에는 산천이 눈 속에 파묻힐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 썬다는 더 추워지기 전에 심라힐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랑게트 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티벳인 한 사람과 동행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으나 동행인이 있으니 서로 힘이 되었다. 한참동안 사력을 다해 산길을 전진해 가니, 앞에 웅크리고 있는 동사체(凍死體) 하나가 나타났다. 얼어죽은 것 같았다. 시체는 길에서 약 10미터 떨어진 가파른 비탈 쪽에 있었다. 썬다는 동행인에게 구조하여 업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그 동행인은 ‘그러다가는 우리도 얼어죽소. 나는 살아야겠소’ 하면서 혼자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썬다는 조심해서 동사체에 접근하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이를 업고 가는데 너무 힘이 들어 땀이 날 정도였다. 몇 시간을 이렇게 가고 있는데 또 하나의 동사체가 앞에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얼어 죽어있는데 그는 바로 몇 시간 전에 혼자 살겠다고 가 버린 동행인이었다. 한편 썬다 등에 업힌 사람은 차츰 온기를 되찾아 살아났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
스위스에 가서 여러 교회 집회 인도를 강행하였다. 병든 서구의 문명을 나무라면서 예수를 닮자는 설교를 담대히 선포하였다. 3월 3일 스위스 로잔느에서 행한 설교에서 서구문명을 ‘동물주의’라고 혹평했다. 기도 없는 유럽 교회는 죽은 교회요,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생명의 호흡(기도)을 나누지 못하면 영적으로 죽는다고 경고했다. 독일, 프랑스를 방문하여 말씀을 증거하면서 오직 예수만 증거하였다. 과로에 위궤양, 폐결핵이 그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유럽 순방 전도여행을 마치고 1922년 12월 초 인도로 돌아와서 계속 전국 순회전도를 하였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토록 감동적 일 수가 있다. 썬다싱의 주님을 향한 헌신, 세상을 향한 담대함, 믿음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들! 시대 탓만 하고 한없이 위축되고 왜소해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일도 떳떳이 감당을 못하고, 북만주에서 도망쳐 오고, 이곳 삼촌 집에 은거하며 한숨으로 시간만 소일하는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주일학교 어린 학생들 몇 명조차 잘 감당할 수 없어 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이때 평양 산정연교회에서 이용도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같은 교회의 믿음 있는 청년 여섯 명과 함께 개나리 봇짐을 꾸려 한 주간 먹을 양식을 챙긴 후 난생 처음 부흥집회를 참석하러 길을 떠났다. 100리 가까운 길을 한 달음 쳐서 평양 산정연교회에 도착해보니 벌써 온 교회당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자리만 뜨면 다시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로 금식도 하며 때로 번갈아 음식을 사먹으면서 말씀듣기에 전념했다. 강사 목사님은 이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20일을 금식함으로 준비하였다고 했다. 신령한 회개의 역사가 온 참석자들을 뜨겁게 강타하고 있었다. 결국 예고한 3일간을 더 부흥집회를 연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열정은 무한이었다. 그가 강단에서 서서 설교를 시작하면 3~4시간, 예배를 마치고 나서는 강단 앞에 엎드려 밤새워 기도하고,, 오전에 낮공부, 그리고 다시 계속되는 집회, 일주일 내내 계속했다. 병약한 그가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일주일 동안 힘있게 집회를 인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눈물이 풍성한 감동, 예술적인 표현법, 시적인 어휘의 표현에서 무식하고 유식한 사람 나이가 많거나 젊거나 간에 그의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어갔다.
나의 앞에 죽음 밖에 없는가. 십자가, 나는 그 후에 오는 부활을 믿노라. 이 육에 추한 몸은 완전히 죽어버리고 영에 속한 몸으로 바꿀려 하노라. 이것도 하나님의 성의(聖意)를 기다릴 뿐이로다. 내 능력으로는 죽을 수도 없고 더구나 순도(殉道)라는 그런 영광을 얻기 감당치 못하노라. 오직 聖意에 있을 뿐이로다. 오 성령이시어 나를 이끌어 골고다까지 아멘. 나는 주께 몸 바친다고 하여도 그저 부족한 것 밖에 없습니다. 몸이 열개가 있으면 그것을 다 주께 드리어 주님을 기쁘게만 하고 싶습니다.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루라도 온전히 주의 뜻대로 살면 그것이 나에게는 큰 복이요 영광입니다. 오 주여 저희들을 이끌어 육에서 곤하고 영에서 길이 편하게 하여 주옵소서. 육에서 슬프고 영에서 기쁘게 하옵소서. 육에서 수치를 당하고 영에서 영광을 얻게 하옵소서. 나는 세상을 위하여 있지 않사옵고 다만 하늘만 위하여 있사옵나이다. 하늘의 것 영의 것을 위하여는 곤고나 빈핍이나 수치나 죽음이나 무엇이든지 달게 받게 하옵소서. 나의 육신은 죽을 것이옵고 세상은 망할 것이로소이다. 주여 이 죽을 것을 어서 죽여 주시고 망할 것을 어서 망하게 해 주옵소서. 영은 살아야 할 것이옵고 하늘은 흥하여야 할 것이로소이다. 주여 이 살자를 어서 영원히 살게 해 주시고 흥할 것을 어서 흥하게 하옵소서. 오, 형제여 육에 죽고 영에 살자. 땅에서 천하고 하늘에서 귀하자. 우리 주님이 밟으신 길이니라. 내 천하려 해도 스스로 천하게 할 수 없고 내 죽으려 해도 자살할 수 없으니 나의 주여 나를 천하게 하시고 나를 죽이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주를 영광스럽게만 하옵소서. 형아! 나는 나의 일에 대하여 아무 수단도 방법도 없는 것을 알아다오. 무슨 깊은 철학적 원리를 내게 묻지 말아다오. 죽음. 이것만이 나의 수단이요 방법이요 원리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날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냥 무식하게게 돌진하려는 것 뿐이다. 어느 날이든지 나의 빛 없는 죽음! 그것이 나의 완성일 것이다. 울어라! 성자야. 울어라! 성녀야, 겟세마네는 어디 있어 나의 피 눈물을 기다리나! 차고 침 뱉았던 가야바의 아문은 어디 있으며 가시관에 홍포를 입었던 빌라도의 법정은 어디 있어 나를 기다리는 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십자가를 등에 지고 멸시 천대 비웃음 중에 우리 주님 걸어가던 오, 너 예루살렘 거리야 너는 어디서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 때가 되거든 외쳐 부르라….(이용도의 서간집에서)
그러나 이상했다. 그 유명하고 신령하다는 이용도 목사님의 불 같은 역사가 그에게만은 도무지 옮겨 붙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들끓는 와중에 그만이 사흘이 가고 한 주일이 가도 덤덤하기만 한 것이다.
‘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이렇게 달려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이렇게 그냥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집회를 시작한 지 9일째가 되었다.
‘오늘도 다른 날처럼 의미 없이 지나가는가? 나에겐 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걸까? 나는 저들과는 구분된 별종 인생인가?’
뭔지 모를 허전함과 서운함이 그를 감쌌지만 여기서 물러 날 수는 없었다. 다시 힘을 내 기도를 시작했다. 그 때였다.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죄의 고통이 시작되면서 마음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시원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대상 위로 달려가 기도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붙들었다.
“목사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제 마음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답답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형제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낱낱이 자복하십시오. 그리고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장대 위에 높이 들린 광야의 구리 뱀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 했다. 온 몸이 마치 목욕한 사람처럼 땀으로 흠뻑 젖어 들면서 서서히 막힌 숨이 트이기 시작했다. 목사님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 중만한 기쁨, 전에는 도저히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쁨이 그의 전신을 채우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했다.
그의 일행이 고향 교회에 돌아온 후, 교회에서도 기도의 불이 불기 시작했다. 그가 섬기는 주일학교에서 불이 붙고 타오더니, 온 교회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목사님은 말할 것 없고 장로님, 집사님들까지 온통 불바다였다.
밤을 지새우면서 통곡하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주일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삼일 예배까지 가득 가득 인파가 넘쳤다.
그러자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이 나타났다. 병이 나았다고 간증하는 사람,
강단에서 나비들이 춤춘다고 간증하는 사람이 생겼다.
가진 자는 없는 자를 기억하고 나누어 주는 일도 일어났다. 성령의 뜨거운 역사에 놀란 몇몇 장로님들은 그의 일행과 기이한 교회 성도들의 모습에 우려를 표시할 정도였다.
사도행전 오순절 사건이 생각났다.
[행2:42-47]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하기를 힘쓰니라
43.○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와 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을 같이하여 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과 순전한 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하며 또 온 백성에게 을 받으니 주께서 받는 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이웃 교회에서는 그의 간증을 듣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그는 감사와 기쁨과 떨리는 마음으로 기꺼이 이웃 교회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함께 은혜를 받은 이기화씨(훗날 숭실대를 졸업하고 중화교회를 담임)와 더불어 간증 순례를 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그 일에 13명이나 되는 믿음의 형제들이 자원을 했다. 큰 교회에서는 합하여서, 작은 교회들은 몇 조로 나누어서 황해도 일대에 간증 전도를 나섰다. 흑교면에서 시작하여 심촌, 계동, 봉산, 사리원, 안악, 장연 등지를 걷고 또 걸어갔다. 어느 곳에서는 환대를 받고 넘치는 대접을 받았지만 어느 곳에서는 푸대접도 받고 많이 굶주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간증 전도는 많은 교회에 새로운 힘을 주었다. 새벽기도회가 살아나고, 복음을 사모하는 열심들이 눈에 띄게 일어났다. 특별한 전도 전략이나 계획도 없이 진행된 그들의 간증 전도는 농번기가 오기까지 계속되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여,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 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썬다싱의 전도 정신, 이용도 목사의 영적 열정이 그의 영적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2년 동안 고향 방문은 그에게 전도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확고한 결의와 믿음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모친이 계시는 만주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손문이 혁명에 성공을 해 중화민국이 청국을 이어받았다.
어머니로부터 만주로 오라는 편지를 몇 차례 받았다. 주님의 은혜로 충만한 그가 신앙의 형제들과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주에 가서 이 복된 신앙을 잘 유지할 수 있을지 염려도 없지 않았지만 기도 끝에 어머니 홀로 고생하시는 만주로 돌아 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신앙의 동역자들과 눈물로 작별하고, 평양을 거쳐 성진, 청진, 회녕 두만강을 건널 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몇 번이고 놀라웠다. 만주에서 조국에 입국하던 때와 180도로 달라진 자신이 정말. 감사를 드렸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만주의 모든 산천이 그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탄식하던 피조물들이 새롭게 돌아 온 그를 따뜻하게 맞이 하였다. 누구보다 그를 기쁘게 맞이한 분은 물론 어머니였다. 그가 새로운 변화를 주님으로부터 체험하기 오래 전부터 어머니의 기도는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온 아들을 껴안은 어머니의 품에는 두 아들이 안겨져 있었다. 육신의 아들과 기도 응답으로 거듭난 영적인 아들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들이 감사의 눈물 속에 녹아 들고 있었다.
복음의 일꾼으로 복음 전하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전사로서 동분서주하랴 힘쓰고 애쓰시는 어머니에게 그의 만주 방문은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 동역자가 되었고, 복음 전파의 동반자가 되었다. 생활의 무거운 짐도 덜게 되었다. 소학 중학의 많은 친구들도 그를 기쁨으로 영접하였으며, 그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자로 그들 옆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사40:9)
어머니는 성숙한 믿음의 아들을 얻고, 그 동안 기도해 오던 큰 결단을 했다. 동만노회의 허락을 받아 원산에 있는 마르다 성경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동만노회는 그녀가 개나리 봇짐 장사를 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기꺼이 허락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우동, 피나무골, 증평, 남양촌, 태양촌, 백화구, 왕청, 합마당, 의판구 등에 교회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기도와 수고는 일어나는 교회에 좋은 거름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연중 삼 개월을 원산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틈을 내어 교회들을 도왔는데, 동만노회는 그녀를 여 전도사로 임명함으로써 전도 사역을 격려했다. 원산에 세워졌던 마르다 성경학교는 삼 년간 공부하고 졸업할 무렵에 마르다 신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녀는 마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복음 전파 사역에 몰두했다.
어머니가 신학 공부와 전도 사역에 몰두하는 동안, 그도 또한 교회 봉사에 열성을 기울였다. 의판구 용평시가 교회는 그가 힘을 다하여 섬기던 교회였다. 그는 뜻이 합하는 친구들과 조기회를 우선 결성하고 구제사업을 위해 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적인 성취가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세상에 들어가서 빛과 소금이 되고 싶었던 의욕들이 좌절되는 일도 많았다. 친구들이 그를 따라 예배에 참석해 주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내면적 변화나 신앙의 진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이 큰 입을 벌리고 그의 신앙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패역하고 믿음 없는 세대 앞에서 그의 신앙은 내면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세상을 향해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춤추는 자가 없었지만,. 애곡을 하여도 우는 자가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흐르는 물에 옷을 행구며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하네.
나의 행위에 티 없다거나
마음에 죄 없다는 말 더욱 아닐세.
아무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순결해야지 싶어
마음을 빨고 서 있네.
당시 만주의 특수한 정세는 그의 형편을 더욱 곤고하게 몰아갔다. 이전부터 만주는 치안 공백 상태였다. 광활한 대지에 듬성듬성 흩어진 농민들은 지주들과의 상호 협력 속에서 자치의 생활들을 하고 있었다. 지주들은 무작정 밀려 들어온 이주 난민들을 맞아들여서 배부른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악덕 지주들의 횡포는 천재(天災)보다 더 농민들을 힘들게 했다.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은 지주들의 부당한 제도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탄식이 하늘까지 쌓여가고 있었다.
농민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지주들만이 아니었다. 이래도 저래도 살길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마적으로 돌변했고, 힘을 키운 마적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죄와 악을 쌓아갔다. 그들의 눈에는 동족조차 보이지 않았다. 농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마적들을 대항해야 했기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수비대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복음 활동에 전념하고 싶었던 그도 또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자는 대열에 앞장섰다. 무섭게 몰려드는 비적들을 퇴치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전투에 수 차례 가담하였다. 만주 대륙의 혹독한 추위가 그의 온몸을 얼어 붙게 하고, 동상이 무서운 고통을 가져왔다. 비적들이 쏜 총탄이 발목에 박힌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치안을 책임지는 위치에 서야 했다.
1934년 9월 10일 그에겐 잊을 수 없는 쓰라린 날이었다. 밤이 12시를 기점으로 마적 연합대가 그가 사는 마을을 기습했다. 수비대의 완강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온 시가지는 화염에 휩싸이고 많은 살상이 행하여 졌다. 그의 점포와 가택 또한 완전히 불타버렸다. 어머니와 그가 몸에 걸친 단벌만으로도 살아 남게 된 것이 기적이었다.
황당한 현실 앞에서 욥이 고백한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휘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욥1:21)
만주의 그 차가운 공포의 밤을 모자는 기도로 지새운 그는 한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주신 말씀일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럼요 주님, 사람들은 끝났다 마침표를 찍고 살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십자가 아래서 은혜를 받은 이들의 느낌표가 되시고
오늘,
어떠한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을 신뢰하는 우리 성도 안에
살아 계셔
크고 비밀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
사랑합니다..
이어서 에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지로다.”(애가 3:28,29)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연약한 믿음을 부추기며 새 아침에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는 자신만의 문제를 떨쳐 버리고, 그와 같이 집을 잃고 낙망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졸지에 남편과 처자를 잃고 부모를 잃고 울부짖고 있었다. 아픈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 곤고한 땅에 이번에는 전염병이 덮쳐왔다. 살 집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들은 전염병에 더욱 쉽게 쓰러져 갔다.
그러나 그는 이사야 60장을 묵상하면서, 지금 동족이 당하고 있는 위기를 그리스도의 사람인 자신더러 그리스도의 빛이 되라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그는 뜻있는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병들고 죽음에 무서워 떠는 마을을 재건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마적들이 불태우고 지나간 잿더미를 치우고 썩어가는 시체들을 거적에 말아 들 것 위에 담아 날랐다. 시골에 가서 빈 집들을 뜯어다가 다시 집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명이 결코 녹녹하지 않았다. 젊은 그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 일들은 고통스럽고 힘이 든 일이었다. 시작한 일들을 마무리 하기도 전에 그는 장티푸스로 쓰러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고열에 시달리는 그의 곁을 스쳐가고 있었다. 단순한 전염병 같지가 않았다. 한 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열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40일이 지나서야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흑암의 땅에 끝없이 이어져 넘쳐오는 마적들과 전염병이 모든 그의 삶을 한계상황까지 몰아갔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육신은 말할 것도 없이 영혼까지 파리해져 가는 저들을 위해 자기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는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이 어떨까 고민하기 시작 했다.
평양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의 젊은 가슴에는 불이 있었다. 만주 벌판에 뿌리내리려 몸부림치는 조선 민족의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리라는 강렬한 소망이 불타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만에서의 거듭 산처럼 몰려드는 현실적 고난이란 파도 속에서 나 홀로 지탱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끊임없이 조선족들 가운데 몰아 닥치는 생명의 위험과 환난은 그를 현실 속에 뛰어들게 하였다.
남보다 많이 배울 기회를 가졌고 젊었기 때문에 시민들을 보호하는 위치에 서야 했다. 혼란스런 시국 속에서 자위단장이란 직분을 맡게 된 것도, 이리저리 뛰며 동분서주한 것도 피치 못할 현실 참여라고 할 수 있었다.
삼 년 동안 생명을 내건 시민보호 직무는 나름대로 바빴다. 현실 문제에만 참여 하다 보니 신앙적 뜨거움이 식어감을 느꼈다. 연약한 그 앞에 산 덩어리처럼 큰 파도가 덮쳐 와 저 깊은 웅덩이 속에 나동그라지게 하였다.
그는 그의 가슴 속에 품어왔던 신앙의 불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이 환난을 어떻게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환난은 큰 파도처럼 거듭 밀려드는데 자신은 파선한 널판지 한 쪽을 붙들고 다른 사람 구원은커녕 자신조차 감당 못해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인생이란 거인 앞에서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과연 바로 살고 있는지를 반추해 보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앞으로도 계속 이 현실참여에 헌신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 영적 무기력과 끊임없는 공복감을 앉은 채 껍질뿐인 자위단장 직책 수행을 수행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더군다나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기선을 제압하고 만주 전체를 마음대로 지배하려 들었다. 상황이 안팎으로 더 나빠져만 갔다.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물 필요가 없다. 이곳을 떠나자.’
1935년 12월, 이곳을 떠나겠다는 그의 결심을 들으신 어머니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생명 위협을 받고 있는 아들의 안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던 것이다.
그는 동경성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옛 발해 도읍지인 동경성 영고탑에는 중학 동창들도 있었다. 다만 벌떼처럼 몰려 다니는 마적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는지 모르는 두려움이 몰려 들었다. 험한 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하였다. 끝없이 광활한 만주 벌판은 그를 너무도 왜소하게 만들었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북만주의 강추위가 쉼 없이 몰려왔다. 주리고 추운 그의 육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갈 길을 인도 하여주소서!”
주님 붙드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함께 동행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도착한 동경성, 그와 첫번째로 마주친 사람은 그 두려운 마적 대신 김광일, 이중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중학동창이었다.
우연이었을까? 그는 하나님께서 만날 만한 자를 만날 수 있도록 예비하셨음을 믿었다. 그리고 감사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배필을 준비하러 하란에 이르렀을 때, 드린 기도의 응답을 리브가를 만남으로 받은 줄 알고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
이에 그 이 머리를 숙여 께 하고
.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과 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창24)
‘어떻게 이 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까?’
우연이려니, 그렇게 적은 것이려니, 믿을 수 없는 일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보니 소름이 돋았다.
‘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살아계셔서 우리 길을 인도하시는구나. 종의 앞에 모든 일을 여호와 이레 하시는 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었다.
놀라움에 몸을 떠는 옛 친구를 반갑게 맞이한 친구들은 오늘 길에 마적에게 놀란 줄 알았는지 오히려 안심시키는 말로 위로 하고 있었다.
영고탑에는 김동철 목사님이 감리교회를 세워 목회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만 만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익히 알고 존경했던 분을 그곳 교회 목회자로 세워 놓으신 것이다.
크고 작은 일까지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내 인생이 우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깨달으면서 힘이 솟아 올랐다.
‘나 같은 연약한 죄인에게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하십니까…………… .’
‘그래 이토록 놀랍게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도 주님을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믿음 없이 살고 있는 그 친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불끈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복음 전함이 빚을 갚는 길이다 싶어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 모든 만남이 퍼즐을 잡으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신비하게 맞추어져 감을 느꼈다.
북만주는 광활했다. 그래서 그가 살아야 할 공간도 넓었다. 뚜렷이 눈에 보이는, 또 정하여진 곳은 없었지만 그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나니 앞으로도 준비하시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은 놀라운 예술가
나무마다 듬뿍 눈을 쌓으시고
온 세상을 은혜로 입히시네.
반듯한 일 하나 남기지 못하고
탄식하는 겨울 나무
하릴 없이 나이테만 감긴
부끄러운 가지에
휘어지도록 풍성한 위로를 얹으시네.
바람아,
덧입고자 하는
나의 몸을 흔들지 말아다오!
‘하나님은 이 광활한 만주 땅보다 훠-월-씬 넓으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믿음으로 나가자!’
‘바울은 천막 제조술로 생활을 꾸리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 나도 과자 굽는 기술은 있지 않은가? 이것으로 생계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전념하리라’
신안진에 산다는 김광우를 따라 나섰다. 그곳에 사는 조선 사람이 수천 가구나 산다고 하니 복음 받을 사람도 많을 것이었다. 60리가 넘는 길을 털썩거리는 마차를 타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비밀을 향해 나아갔다. 저녁 노을이 온 벌판을 붉게 물들인 신안진은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깜깜한 밤, 울 되시고
주린 날, 푸른 초장
목마른 날, 쉴 만한 시냇가
곤고한 날, 피난처 되시는
선하신 목자
어느 날부터
나도 그분을 닮아
배고프고 목마른 자 위해 젖을 내어 주고
헐벗은 자 위해 털을 깎이우네.
나는 참으로 연약한 짐승
그러나 그분으로 인하여 나눌 줄 아는
주님의 사랑,
받은 은혜가 넉넉하여
모두에게 유익한
그분의 양
주님이 나의 목자시니
나는 이렇게 행복하네.
그는 제과술을 과신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기본 생활을 꾸려 나가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의 중심은 뭇 영혼들을 행복하게 할 달고 오묘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소망으로 가득차 오르고 있었다.
신안진의 시가지는 이제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고, 일본 경찰들은 목에 힘을 주며 횡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에게는 너무 자랑하고 싶은 복음이 있었다.
그가 만든 과자들은 공교롭게도 일본 경찰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밤을 새우며 만든 과자들이 날개가 돋친 듯 팔려 나가고 먼 곳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사업이 잘 풀리자 김씨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바울의 동업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니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맨 것이 잘못이었나? .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생각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던 이들을 용서하시던 주님을 생각하고 마음을 바로 고쳐 먹었다.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하실 일이 있으시겠지.
‘저 사람이 없어야 우린 살아!’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아버지,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
예수님은 저들을 위해 자신을 꺾으셨다.
그리고
꺾으신 그 자리에 우리를 접목시키셨다.
접붙인 가지에
피어난 꽃이래야 엉겅퀴처럼 투박한데
사람들은 누군가를 닮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간다.
동만주에 아직 살고 계시는 어머니로부터 속히 오라는 전갈이 왔다. 좋은 혼처가 있다는 것이다. 스물다섯이란 나이는 그 당시 작은 나이가 아니었다. 주변에서도 이미 몇 군데 혼담이 오고 갔다. 그는 이삭처럼, 결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였다.
어머니께 순종함으로 일생 살아온 그였다. 하물며 결혼 문제에 있어서랴. 어머니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평생을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아닌가! 어머니의 결정은 옳을 것 같았다. 더구나 어머니께서 알려 주신 혼처는 전혀 생소한 곳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막역한 친구 사이인 양신실 아주머니의 둘째 딸 김영순 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일찍이 만주 명월구 독립군 사관학교 문관이셨던 김춘호 선생이셨다. 당시 최고의 학벌이라 할 수 있는 숭실대를 졸업하시고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기울이신 분이셨다. 동지 수백 명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셔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시다가 소련 하바로프스키에 있는 82인 의사 묘에 묻히셨다고 한다.
그녀는 부친의 망명 독립생활 덕분(?)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가야 했다. 소학 교육을 받은 것도 그녀 모친의 피땀 어린 노고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믿음 좋고, 가문 좋고, 생활력이 강한 효녀 딸, 며느리 감으로 최적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강권하심을 따라 그는 결혼을 위해 어머니가 계시는 동만주로 내려 갔다. 어머니는 이미 결혼 날짜까지 모두 결정해 놓고 계셨다. 박예헌 목사님께서 원로 목사로 계시는 백화구 장로교회에서 그분의 주례로 결혼 축복을 받게 되었다.
목사님은 귀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라는 주례사로 두 부부를 축복해주셨다.
루이스(C.S. Lewis, 기독교 문학가)의 풍자적 이야기로 주례사를 시작하셨다.
어느 날 푸시라는 고양이가 영국왕실을 구경하고 의기양양하게 자기 친구의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때 그 고양이 친구들이
“야, 네가 왕실에 다녀왔다며? 좋은 구경거리 많았지? 무얼 보았니?
그런데 왕실을 구경하고 온 고양이가 뜻밖의 답을 했습니다.
“여왕의 의자 밑으로 기어 다니는 생쥐를 보았어.”
왕실에는 세계적인 명화, 커텐, 여왕의 아름다운 옷, 황금으로 장식된 방, 보석과 역사자료실 등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고양이 눈에는 의자 밑에 숨어 다니는 생쥐만를 보고 왔다 답을 한 것입니다. 이 고양이를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신랑 신부 두 사람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무궁무진한 하나님 왕국에 소중한 가정으로 입성한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에서 두 분이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두 분은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신랑신부 두 사람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세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살게되면,. 그건 왕궁에 들어온 고양이가 생쥐밖에 보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두 분을 하나님 나라 가족으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무궁무진함을 찾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어서 주례 목사님은 믿음의 가문을 이루라고 권면해 주셨다.
리차드 덕대일(Richard Dugdale)이라고 하는 사람이 1877년에 18세기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의 5대에 걸친 가계를 조사하여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라고 하는 유명한 목회자요 신학자의 가계와 맥스 쥬크스(Max Jukes)라고 하는 무신론자의 가계를 비교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신실한 믿음의 가정의 여인과 결혼하여 많은 자손들을 두었는데, 5대에 걸친 그의 1,394명의 자손들 가운데 13명은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고, 65명은 교수, 3명은 상원의원, 30명은 판사, 100명은 변호사, 60명은 의사, 75명은 육군과 해군의 장성들, 100명은 목회자와 선교사, 60명은 유명한 저자, 1명은 미국의 부통령이 되는 등 대부분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의 자손들은 주정부에 단 한푼의 신세도 진 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맥스 쥬크스(Max Jukes)는 불신의 여인과 결혼하여 그도 5대에 걸쳐서 1,292명의 자손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 310명은 빈민으로 죽었고, 150명은 범죄자였으며, 7명은 살인자였으며, 100명은 술주정뱅이요, 여인들의 절반 가량은 매춘부였습니다. 그의 자손 중 540명이 주정부에 125만불 가량의 신세를 끼쳤습니다.
어떤 가문을 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믿음으로 자자손손이 복을 받을 그런 가문이 되셔야 합니다.
그는 굳게 결심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무궁무진한 보배를 뒤로 하지 않아야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어야지.’
두 주일 간의 신혼생활을 어머니 곁에서 가진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북만주로 떠났다. 꿈을 향한 길은 때로 멀고 길다.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면 힘들어도 가야 한다.
우리 두 사람의 새로운 인생길, 우리만 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찬양하며 가리라. 어려움을 기도로 극복하여 갔다. 그의 생애를 움직여온 하나님의 말씀이 꼼짝할 힘조차 없는 두 부부의 발등상을 또다시 비추고 있었다. 일 주일간을 강행군하는, 힘겨운 여행이었지만 믿음으로 가는 길은 소망이 넘쳤다. 두 부부는 기도했다. 앞으로 전개될 험한 세상에서도 두 사람이 합심하고 주를 앙망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가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1)
일주일간의 여행 끝에 영고에 도착하였지만 문제는 남은 신안진까지의 60리 길이었다. 마적들이 그 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해림시가로 돌아가면 되려니 했지만, 그 길도 마적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여관집마다 초만원을 이루어 숙소조차 얻을 길이 없어 결국 호위병들을 삯으로 고용하여 신안진에 들어가기로 했다. 기도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 갔다. 몇 차례 마적들과의 교전을 목격하기도 하였지만 두 부부는 마침내 신안진에 도착하였다. 감사의 눈물이 두 부부의 가슴을 적셨다.
“
“(사46:1)
주님만 더욱 신실히 의지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사는 동업자, 김광우의 마음은 달랐다. 결혼하여 돌아온 신혼부부를 맞이 하면서도 기쁨 대신 불안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믿음의 조상들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였을까 생각하였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결정권을 주었지.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물을 억지로 메우고 빼앗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삭이 한 일이 생각났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 즉 우리를 떠나가라(창 26:12절 이하)”
양보!
이삭은 함께 동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기업을 양보하고 떠났지.
그것도 네 번이나.
그러나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한다고 하니 버거웠다. 더구나 자신 곁에는 자신만 믿고 먼 길을 따라온 아내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사업을 양보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했다. 그곳을 떠나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평생 세상적인 소유권 때문에 다투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허락하시는 한도 안에서만 물질을 누리기로 했다. “양보”, 그것을 신앙의 중심에 소중히 간직하고 언제든지 그러한 상황이 오면 이 양보의 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젊음과 열정은 쏟아 부어 이룬 기업을 친구에게 양보하고 또 다른 곳에 기반을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금보다 소중한 믿음을 결혼 선물로 주셨다. 귀한 선물을 보석으로 주신 하나님을 붙들기로 했다.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업자와 이권이 겹치지 않을 만한 거리로 옮겨 제과점을 열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참 신실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이삭에게 주셨던 대로 축복하여 주셨다. 자정이 넘도록 숯불 냄새와 싸우며 과자를 만들고 새벽같이 수십 리에 걸쳐 펼쳐진 고객들을 향해 뛰는 젊은 부부를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 주셨다.
그러나 그의 과자 업이 흥왕하자 이전 동업자 김광우가 시비를 걸어왔다.
자신의 과자 업체가 피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이요, 고객도 겹치지 않게 세운 것이었는데, 자신의 과자 업이 기울자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그는 모은 자본을 밑천으로 늘 해보고 싶었던 사진 업으로 직업을 바꾸기로 했다. 다툴 필요는 없다. 낮아지면 된다.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도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는데, 내가 과자 집 내려놓는 거야 그에 비하면 쉽지.
떨어질수록 빨라지고, 내려올수록 강해지고, 낮아질수록 더 힘이 나는 폭포처럼,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일 뿐인데, 어떻게 떨어질 때 장엄해 보일 수 있는가! 겸손한 자의 막강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
남을 짓밟고라도 올라가는 것만이 성공이라 몸부림치는 사람들, 그 발 아래로 쏜 살처럼 내려오는 폭포처럼,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처럼, 하늘에서 십자가로 내려오신 그분을 참 많이 닮았다.
더구나 몸이 무거워 오는 아내에게 무리하여 일을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동만주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사진기를 인수하고, 사진을 찍는 기술과 현상하는 기술을 열심히 익혔다. 당시는 사진이 만주에 처음으로 보급되던 시기였기에 사진기는 비쌌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사진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진 찍는 걸 두려웨 했다. 번개처럼 번쩍 불이 터지면서 찍히는 사진인지라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가 찍은 사진들은 현상 기술의 미흡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눈은 밤 고양이 눈처럼 빛나고 얼굴과 몸의 윤곽은 있는데 형체가 불확실했다. 그가 빛을 피한답시고 달빛아래서 현상을 한 것이 사진을 아주 기괴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괴상한 모습을 보면서 질겁을 하였다. 혼을 박았다고 외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자기들의 몸 안에 있는 영혼을 빼내어 찍었다는 것이었다.
이 웃지 못할 사진 업도 자리가 잡혀갔다. 현상할 때의 수 차례 시행착오를 반복하였지만 조금씩 향상된 기술을 습득해갔다. 그의 끊임 없는 탐구 자세가 취미와 어우러진 즐거운 나날이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경영 상태가 점차 호전 되었다. 몇 년 전 고향 땅 황해도를 방문하였을 때, 좁은 땅덩어리가 한 되어 고향을 등진 아픔이 한이 되어 품게 된 농장의 꿈이 현실로 다가 왔다.
10만평의 농장을 구입했다. 광활한 만주 땅에서 10만 평은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곳을 발판으로 이상을 펼치고 싶었다. 본국으로부터 여전히 이주민들이 넘어오고 있던 때이므로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그는 사진 업에서 얻은 이익금을 농장 구입에 투자하고 본국에서 이주해 오신 이모의 사촌이게 그 토지의 경영권을 맡겼다. 본격적인 농장의 꿈이 바야흐로 익어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가 훗날 벌여 놓은 사업들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된 것이 이 농장 구입 때문이었다.
꿈도 컸고, 이주민들을 받아 농장을 넓힐 수도 있었지만, 다만 한 가지를 빠뜨렸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는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가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 같자 세상 명예직들이 밀려 들어왔다.
소방대장을 맡아주세요.
자위대장을 맡아 우리를 보호해 주시오.
세상 중책들이었다.
세상에 누군가 맡아야 할 일이었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맡아 파도처럼 밀려 오는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하나님 앞에 서원하였던 영적 복음 사역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사회에 보석 같은 사명을 감당하고 있나?
성도란 반지 중에 박힌 보석이다.
반지의 진가는 반지 중앙에 박힌 보석으로 인하여 나타난다.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면 다이아몬드 반지다.
값진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면 값진 다이아몬드 반지다.
흠이 있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면 흠이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피로 값 주고 산 성도
그가 제대로 박혀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어야지.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보석이 끼어있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다.
그 성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 향기가 난다.
주님, 저는 그렇지 못한데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던 그에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그렇구나. 나에게는 이 모든 세상 일들보다 소중한 일이 있구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까 마리아처럼 좋은 편을 택하여라”
그는 분요한 마르다의 일들을 내려놓고, 마리아의 좋은 것을 붙들기로 했다.
그가 신안진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감리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목회를 전담하는 교역자가 없어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가 개척된 지는 10년이 지났어도 일꾼을 찾지 못해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만주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은 교회를 찾아왔다. 그는 이 교회에 속하여 충성과 지혜를 다 기울였다.
그런데 행복한 고민이 생겼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부분의 교인들이 장로교인들이라는 점이었다. 교인 수가 늘어갈수록 감리교로서의 존재 의미는 약해져 갔다. 여러 교인들이 장로교로 개칭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도 또한 장로교적인 배경을 가졌으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 문제를 놓고 그들은 기도하기로 했고 시간을 정하여 회의를 진행하였다. 여러 차례의 숙의를 거듭한 끝에 장로교로 개칭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장로교로 개칭하여 더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의 결정은 일년 후 20여 명의 교인이 150명의 열매로 나타났다.
정계로, 김시형 두 장로님께서 신안진 중앙교회에 이주해 오심으로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갔다.
당시 그는 아직 집사였다. 유년주일학교 부장직을 맡아 충성하였고,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큰 보람과 감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세상 직업과 사회 봉사 직에 분주한 중에도 교회주일학교 교육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다.
그는 맡은 직분에 충성하면서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꼈다. 주님이 교회 머리 되셔서 각 기관과 지체들을 섬세하게 지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걸 체험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교회 각 지체들을 모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으셨던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교회를 지휘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교회에 채우시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지휘하시던 주님은
옷을 벗기우시고,
허리엔 창
손과 발은 못
깊이 박히셨지.
쏟아지는 물과 피
뼈 끝까지 전율하는 고통
그보다 더 부끄러울 수 없는 수치가 서녘 하늘보다 붉었네.
그러나 그분은 오케스트라 지휘봉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지.
그날로 오늘까지
구원의 연주는 계속되고
우리들의 삶에서 생명의 물결되어 출렁이고 있네.
교회는 그의 지혜롭고 충성된 봉사를 귀하게 받아들여 장로 추천을 하였다. 이 때가 1936년, 그의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장로 자격 연령에 미달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필요를 따라 교회는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는 용정 중앙교회에 가서 동만노회가 실시한 장로 시취에 응하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합격하였다.
1937년 4월4일, 동만노회는 신안진 중앙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연령에 조금 미달한 것을 문제삼지 않고 장로 안수를 실시했다.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노아력 선교사 부부, 최문환 목사, 박경희 장로, 임뵈뵈 할머니, 정계로, 김시형 장로 등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 와서 그의 장로 취임을 축복해 주셨다.
노아력 선교사는 섬기는 지도자 되라 권면하셨다.
워싱턴의 예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워싱턴 사령관은 군인들의 사역 현장을 시찰하고 있었습니다.
막사 근처의 군인들은 한 상병의 지휘를 따라 커다란 통나무를 높이 쌓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흡족지 못한 사역에 화가 난 지휘 상병은 부하 병사들에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있었습니다.
힘이 부친 군인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반복하여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꼭대기에 거의 다다랐다가 또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워싱턴은 얼른 앞으로 뛰어가 있는 힘을 다해 그 통나무를 끌어 올리는 병사들과 함께 밀어 올렸습니다. 마침내 통나무는 맨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병사들이 감사하는 말을 했습니다.
워싱턴은 지휘하는 상병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도움을 필요로 하던 이 사람들을 돕지 않았습니까?"
"뭐라고? 내가 상병인 줄 모르나?"
"그래? 나는 최고 사령관인데. 다음 번 또 병사들이 들어 올리기에 힘든 통나무가 있거든 나를 불러주게나."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섬기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봉사하는 지도자 되라는 권면이셨다.
그의 장로 임직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였는데, 유독 어머니만은 성에 차지 않은 듯했다. 그 아들이 장로 임직보다는 목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어머니의 평생 기도제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속마음과는 달리 그는 장로로서 맡은 직분에 만족하였다.
목사로서 사는 길이 얼마나 힘든가! “죽도록 충성하라”시며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신 주님, 목사로서 따른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장로직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어머니 저는 장로로서 주님께 충성하는 일이 마음에 더 편합니다.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기회만 주어지면 지교회를 돕고 세워 나갔다. 사반, 오반, 칠반 등에 교회가 들어섰다. 그는 그때마다 어떤 형태로든 쓰임을 받으려고 마음을 열었다.
그가 섬기던 신안진 중앙장로교회는 500명을 수용할만한 예배당 신축에 들어갔다. 그는 건축 공사장에 매달려 살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 중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짓이겨지고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헌신한 그의 열정은 막지 못했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주야로 열심을 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라는 말씀을 생각했다.
드디어 헌당식을 하는 날이 왔다. 서금찬, 이권찬 목사님을 모셔와 부흥회를 열었다. 헌신한 여러 사람들의 눈에 감사의 눈물이 맺혔다. 삭막하고 광활한 이국 땅 만주에 예배당을 새롭게 세워 놓은 감회가 넘쳐 흘렀다.
죤 로스 목사님이 이 만주 땅에서 가슴 졸이며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하신 지 50년을 넘기기도 전에 그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인들이 받은 복음을 만주로 가지고 와서 만주 한복판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아름다운 일에 자신도 쓰임 받았다는 사실이 감회가 새로웠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니 행복했다.
그는 교회당 건립에 쓰임을 받은 소감을 말해달라는 성도들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우리를 향한 완전한 계획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계획이 남은 우리 생애에서도 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우리 생애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완전하고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는 만주 땅에 심겨진 디아스포라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소중한 전기를 삶 속에 접목시킨 분들을 접했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부터, 하나님의 꿈에 감동되어 자신들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척박한 땅 이곳에 나아왔던 선교사님들! 그들은 꼭 미국과 캐나다 같은 북미에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님들이란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념비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심겨진 하나님의 꿈이 꽃으로 피어난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만주라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고국 조선과 만주에 떨어져 한 알 한 알의 밀알들로 썩어갔지만, 그 밀알들은 우리들에게서 찬란한 하나님의 밀밭을 이루고 넘실거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만주에 사는 우리 조선 성도들이 이 귀한 분들을 통해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으니, 그 은혜를 받아 복을 누리는 우리 조선 성도들이 이 기념비적인 선교사님들과 그 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다 싶습니다. 이 소중한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하나님의 꽃밭이 그리운 사람들, 넘실거리는 하나님의 밀밭을 거닐고 싶은 분들에의 가슴에 안겨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기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즐거운 일만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다시 몰려 왔다. 동만보다는 다소 안정되어 있는 신안진이지만 마적의 위험은 상존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시국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동만에서의 경력은 그 사회에 더욱 필요한 존재로 부각시켰다.
어느 날 치안 당국에서 그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에 대해 이모 저모를 알아 본 당국이 그를 ‘ 만주국 협회 청년단 국방회장’ 직분과 소방대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인들에게나 맡기는 요직인데, 그리고 신변 위험도 적은 자리이지 감사할 법도 한데, 주의 일에 전념하기 시작한 그에게는 상당히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그 일이 그의 천국 시민으로서의 얼마나 합당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적으로부터 조선족을 보호하는 일은 분명 중요했다. 소방 사업 또한 중요했다. 다만 일본에 협력하여 일본인 고관들과 끊임없이 협력하여야 하는 일이었다. 친일적 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직분들이었다. 감당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결단은 쉽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더구나 동만에서 세상 사업에 빠져서 신앙 생활을 소홀히 했던 경험이 결단을 망서리게 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거절할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당시는 일본의 세력이 만주를 점령하고 있어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게 마련이고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는데, 신흥 만주국을 건설한 일본정권이 그를 만주 개국 공로자로 지명했다. 25년 이상 만주에 살면서 사업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지역 유지로서 써먹을 만 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만주인을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는 공로자 열 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조선 8도와 전 일본의 명소를 석 달에 걸쳐 관광하는 부상도 받게 되었다.
이 일 이후, 본의 아니게 다시 세상에 코를 꿰었다, 4년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분주한 삶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마침내는 신안진 협동조합장까지 겸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는 장로요, 사회에서는 유명인사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팔방으로 뛰어다니는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전에 받았던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와 같이 좋은 편을 택하여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의 말씀이 울려왔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1941년 9월, 그는 신안진 중앙장로교회 총대로 북만노회에 참석했다. 전쟁의 기운이 전 세계를 덮고 있던 1941년, 일본의 콧대는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조선 내에서는 일제가 내선 일체를 표어로 걸고 성씨 개명,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있었다. 정도를 걸어가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었다., 성도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놓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하나님만 섬기려는 그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혔고 무서운 고문을 받았다.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신앙은 모든 신앙인들 가운데 회자되며 심금을 울렸다.
일본 순사들은 주목사의 의기를 꺾으려고 주 목사와 성도들을 감옥 마당에 데리고 나왔다.
“오늘 여러분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 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소.”
교도소 마당, 그들 앞에는 널빤지에 못을 무수히 박아 놓고 못 위를 걷는 고문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 반대를 고집한다면 주목사는 이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 목사는 이런 답을 남겼다;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마치고 주 목사님은 자진해서 못이 무수히 박힌 널빤지 위로 올라갔다.
주목사의 발은 솟구치는 붉은 피로 얼룩졌다.
순간 성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시는 모습을 생각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참담한 광경이었다.
1.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언덕 위에 바치누나
연약하신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 쓴 가시관과 몸에 걸친 붉은 옷에
피 흘리며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2.한발자국 두발자국 걸어가는 자국마다
땀과 눈물 붉은 피가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인들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국마다 갖은 곤욕 지셨구나
3.눈물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의 복 얻으려면 이 길만을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4.아픈 다리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 길을 보여주니
십전팔기 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5.십자가의 고개턱이 제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 가오리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달라,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해 달라”
주목사님은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일사각오의 의지를 피력했다.
일사각오는 일제의 살인적 탄압에 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한 진실한 신앙인의 신앙고백이었다. 일사각오의 신앙을 선포한 후 다시 검거되어 황실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년 형을 언도 받고 복역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왔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 최봉석(崔鳳奭)·최상림(崔尙林)·박관준(朴寬俊) 등 존경받는 교회 어른들의 핍박 받고 순교하였다는 소식이 연이어 전해왔다. 십자가의 고난을 지고 가는 신앙 선배들의 비장한 순교 소식을 들을 대마다 기독교인들의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갔다.
평양 신학교가 조선 땅에서 더 이상 신학 교육을 시킬 수 없게 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윤선, 김선두 교수님들은 만주 봉천에 신학교를 세우고, 폐쇄된 평양신학교의 맥을 지키기로 결의했다. 교장은 정상인 목사였다.
신학교가 문을 연 1941년 북만노회에 이 신학교 개교에 대한 소식을 알려왔다.
노회에서 신학생 모집 광고를 들었을 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주 신학교 제 1호로 등록하였다. 평양 신학교가 만주 봉천에 이사온 것은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노회서기가 전한 신학생 모집 광고는 그의 귀에 우레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소명의 소리였다. 세상의 여러 분요한 일들에 젊음을 소진하던 그를 주님께서 복음 사역 가운데 부르셨던 것이다.
하지만, 주의 부르심에 그가 “예!”로 답하게 된 일이 쉽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모친은 그가 목회의 길을 가게 해 주십사 평생 기도해 오신 때문이다. 그를 신학 여러 차례 강권하였었지만, 그는 늘 조심스럽게 “저는 아닙니다!”로 대답하여 왔던 터였다. 목회자가 되느니보다 장로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 드렸던 것이다.
당시는 그의 생각은 그랬다. 세상 지위와 명예에 푹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삶의 기반과 교회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정도면 감사하자. 이런 위로를 삼아오던 터였다.
그러던 중 일제의 강압을 견디지 못한 평양의 총회신학교가 만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신학교가 새로 자리잡은 봉천은 그가 사는 곳에서 스무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되는 거리였다.
그가 신학교에 입학을 결단하자 현실적 어려움을 훨씬 넘는 기쁨이 있었다. 특히 평생 기도응답을 받으셨노라 감사하시는 어머님의 기쁨은 유별났다.
신학교 입학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분주한 일들을 과감히 정리하게 되였다. 사회 직분에서 과감히 사퇴하고 사업도 정리했다. 그가 여지껏 전심으로 쌓아온 일들을 하나하나씩 차례로 허물어가야 했다. 힘들여 세운 만큼 무너뜨리기도 어려웠다. 때로는 인간 관계가 얽히고 때로는 물질 관계도 얽혀서 난감한 적도 많았다.
“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살 깊이 다가왔다.
입학시험 문제는 간단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복음 1장1절을 해석하라는 것이었다. 박윤선 목사님의 깔끔한 성품이 문제를 무겁게 했다. 성경을 펼 때마다 맨 처음 등장하는 이 말씀을 제쳐 놓고 곧잘 읽어 갔던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좀더 깊이 묵상할 시간이 요청되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세계’를 바로 알아야 했다. 마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신 세계를 적어 놓았다는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 족보를 적었는지도 쉽지 않았다. 새로 이사한 학교에서 실시하는 첫 번째 입학 시험인데 설마 떨어뜨리랴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쓴 답은 썩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다.
그는 36명의 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었고, 그 중 앞으로 23명은 졸업자 명단에서 빠지게 될 것이었다. 그가 그 가운데 끝까지 남아서 삶을 주님께 바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머지 졸업자 13명 중 7명은 장차 순교자의 길을 걸어 갈 사람들이었다. 세상 어느 신학교가 졸업생 50%이상을 순교자로 바쳤을까?
황창해, 한순옥, 장도신, 최정식, 전관묵님은 6.25 사변을 전후하여 순교하셨고, 주재명님은 동란 중 납북 당하셨다. 살아서 주님께 쓰임을 받은 황금천, 전병홍, 김지세, 최의동, 정찬준 목사님은 그와 함께 한국 기독교계에서 귀한 역할을 감당하신 분들이다.
합격 통지서를 받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따라 나섰다.
신학교가 개학되자 그는. 당장 처리하기 힘든 것들을 모두 아내에게 남겨 두고 홀로 봉천 행 기차에 올랐다. 그의 어깨에 맨 카메라 한대가 생계 수단의 전부였다. 정리되는 대로 봉천으로 오겠노라 눈물을 글썽이던 아내의 모습이 차창에 어른거렸다. 앞 날에 대한 긴장감과 지난 것들을 벗어버린 해방감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갔다. 손에 든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신학 수업 기간은 그에게 있어 참으로 복된 기회였다. 어지럽게 흩어진 신앙 지식을 정리하고, 기독교 정통 보수 신학 위에 목회관을 견고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어머니, 아내, 자녀들과 삼 년 동안이나 떨어져서 지낸다는 일이 힘든 일이었지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가족과는 기차를 하루 종일 밤낮으로 타고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곳에 떨어져 살아야 했으므로, 방학이 아니면 만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신학 수업에 전념하고,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는 수업이 없는 틈을 타서 사진을 찍어 주고 생활비를 충당했다. 처음에는 학교나 교회에서 공적인 사진 촬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차츰 여러 곳에서 사진 촬영 부탁이 왔다. 그는 기숙사 방에 특별한 시설을 설치하여 찍은 사진을 인화하곤 했는데, 여기서 얻은 수입이 적지 않아서 학교 수업에 드는 모든 비용을 감당하고도 늘 신안진 가정에 생활비를 보내 주곤 했다.
신학 수업을 하던 중 김치묵(YMCA 총무 역임), 황금천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회장 역임), 박화목(기독교 방송국, 시인)님과 함께 4중창단을 조직하여 교회를 순방하기도 했다. 당시 봉천에는 서탑 교회(정상인 목사 담임), 십간방교회(이학인 목사 담임)등 열심 있는 교회들이 있어서 활발히 구령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봉천 신학교 교장으로 계시는 정 목사님의 서탑 교회를 다니며 교사로 봉사를 하였다. 공부하는 틈틈이 배구로 동급생들과 심신을 단련하며, 기숙사에서는 식도감을 맡아 식사를 배급하며 봉사하였다.
서른 살이 넘은 그에게 신학 수업은 힘든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과업을 비롯해 사진업까지 해보았지만 신학 수업만큼 힘들지는 않았었다. 가장 힘든 것은 나를 부인하는 일이오, 지금까지 형성된 많은 가치관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바른 신앙과 신학을 배우고,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차 목사로 선교사로 사역할 일을 생각하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기도하면서 고쳐 나갔다. 산만한 신학 지식들을 보수신학으로 재정립하였다.
어지러운 정국 가운데서 생명을 내놓고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가슴에 주님을 위한 비장한 각오들이 늘 긴장을 이루고 있었다. 버림받고 나그네 되어 상하고 찢긴 동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불타고 있었다. 특히 고국에서 들려오는 일제의 기독교 탄압 소식은 온 신학교를 눈물바다로 만들곤 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양심적인 신앙의 선배들을 위하여 밤이 새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수님들이 바로 그런 핍박을 피해 이곳에 신학교를 세운 분들이므로 그분들의 강의와 설교에는 늘 일사각오의 비장한 결의가 넘쳤다. 학생들은 단순한 신학 수업보다 조국에서 고통 받고 있는 동족의 현실과 고통 받는 영혼들을 견딜 수 없어 하시는 교수님들의 뜨거운 영혼 사랑 속에서 신학 외적인 보물을 더 많이 얻곤 하였다. 신학 수업은 주님을 위해 생명을 내놓은 자들을 위한 순교준비 과정이었다. 신학 수업을 마치면 주님을 위해 죽으러 가리라는 기도가 뜨겁게 넘쳤고, 모두를 감동시켰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
믿음의 선진들 뒤를 조용히 준비하는 그들의 신학 수업은 그래서 순교 수업이기도 했다.
끝없이 완악해져만 가던 일제의 강탈도 마침표를 찍는 날이 왔다. 1945년 8월 13일, 일본 군경과 헌병들의 활개는 살벌하게 펼쳐지고 있었고, 일본도의 번쩍이는 기상은 여전해 보였지만 놀라운 소식이 시민들 사이에 입에 입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일본군이 더 이상 만주 땅에서 통치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소련과 만주의 국경 지대에 일본군의 통치를 접수할 준비를 갖춘 소련군이 도착해 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독사처럼 무섭던 일본군의 눈빛이 흐트러진 것처럼 보였다. 일본 경찰들이 트럭을 타고 도망쳤다는 얘기도 들렸고, 경찰서 앞에도, 서장 관저에도 수위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할복 자살을 할 망정 도망친다는 것은 도무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었는데, 이것은 사실이었다. 일본인 지도층은 벌써 도주한 사실이 시민들에 의해 목격되고 있었다. 일본인 가정들이 굶주린 시민들에 의해 강탈당하기 시작했다. “한중 합작 비상사태 대책위원회가 소집되면서 그도 또한 일본군이 패망하여 도주한 뒷수습을 하도록 그 위원회에 부름을 받았다. 전 날의 일제 치하에서 요시찰 인물들이 발언권을 주도하고 있었다.
1) 한중 양 민족의 신변 안전을 위한 치안대 조직
2) 민심 수습 선전반 조직
3) 식량 대책 (지금까지는 전표제로 식량을 배급하여 왔었음)
그들은 합법 정부가 나타날 때까지 책임들을 다하고자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계화삼 교사(당시 신안진교회 강도사)를 이 위원회의 치안 책임자로 세웠다. 조선 민족에게나 중국인들에게나 호감이 가는 인물이요 민심을 이해하고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그를 추대한 것이다.
그는 또 하나의 멍에를 다시 져야 했다. 다른 지도자를 세우라 극구 사양했지만 그의 풍부한 지난 날의 경력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 되게 한 것이다. 교회 일도 산처럼 쌓여 있는데 자치군 책임을 떠맡는 일까지 해야만 하다니 보통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 일도 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이제 그에게는 영혼 구원이 더 절실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쫓겨 났고, 동족이 심각한 혼란 속에서 분란을 겪고 있는데 세상 일이라 침묵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치군을 각 부대별로 편성하고, 자치군을 이끌고 배급 창고에 갔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일반 시민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배급 식량을 탈취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리 덮치고 저리 탈취하는 와중에 여러 사람이 중경상을 입고 있었다. ‘조금만 빨리 왔더라면 이 참상을 면했을 텐데!’ 안타까워하며 의사에게 환자들을 급히 옮겼다.
그렇게도 기다려온 해방! 그 기쁜 세상이 왔건만, 이를 맞은 현실은 이토록 큰 비극이 깔려 있을 줄이야! 어지럽게 흩어진 밤거리를 지나며 그의 마음은 한없이 착잡해져 옴을 느꼈다. 공백이 된 무정부 상태, 만주는 태풍의 한 중심부와 같았다. 일본에 대항해 장개석을 중심으로 잘 뭉쳤던 중국의 항일 세력들이 정권을 앞에 놓고 다른 얼굴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온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긴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정신들을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더구나 만주 땅에 사는 조선 민족에게는 중국의 현황이 더욱 깊은 관심사였다.
더구나 그는 자의든 타의든 이미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다. 정치적인 흐름을 바로 알아야 했다. 과연 이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혼란스런 사상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내 동족은 지금 어디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가 목단강 동북대학 정치과를 찾은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그는 그곳에서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마르크스 사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 수많은 지성인들이 공산, 사회주의 사상에 매혹되고 있었고, 그 사상만이 무너져 내린 이 세계를 구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가난의 원인이 지주들의 횡포와 착취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제가 강제 착취하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절박한 상황이 왔다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일본이 패배하여 떠나버린 지금에는 답을 경제 구조에서 찾고 있었다. 수많은 지주들이 곳곳에서 민중의 적이 되어 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정치학을 공부하면서도 쉽게 공산, 사회 사상에 동감할 수 없었다. 그가 그 무신론적 사상에 빠지기에는 너무 하나님을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상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도, 하나님의 섭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물질의 차가운 경제논리만이 물질 분배라는 미영 하에 번뜩이고 있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러나 그 사상은 오직 떡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사상이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사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시국은 이미 이 공산주의 사상이 천하를 휩쓸며 일제가 패퇴하여 떠나간 그 공백기를 무섭게 파고 들어갔다. 모택동이 서구 세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장개석 군대를 밀어붙이고 있었고, 수많은 민중이 이미 독버섯처럼 번져가는 공산주의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러시아 공시주의 괴뢰군인 팔로군이 북만에서 교회를 없애버린 사실이었다. 교회는 팔로군들의 거처나 마구간으로 벌써 접수 당해 버렸다. 곳곳에서 “위대한 스탈린 만세! 위대한 모택동 만세! 위대한 김일성 만세!”가 울려 퍼지며 일제치하의 학도병들도 어느새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완장을 바꿔 달고 활개치며 거리를 압도했다.
어느 곳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볼 수 없는 회색기지에서 그에게는 더 이상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공산 정권에 협력하여 그 사회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도 있었지만 그의 신앙 양심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숨어서 가정 예배를 드리고, 몰래 가정을 심방하며, 낮에는 정권에 협조하는 모양을 갖추어 가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불가능하여졌다. 팔로군 정치조문 12항에 종교, 집회, 언론, 신앙의 자유가 있었으나 그들은 기독교를 핍박할 수 있는 자유도 있었다. 탄백 대회가 바로 기독교 박멸과 지주계급, 반공산주의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제도였다. 공산 세계를 정착시키기 휘해 그들은 무서운 숙청을 계속하고 있었다.
동경성 강서교회를 담임하시던 최수헌 목사님이 그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최 목사님은 교회에서 공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큰 번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었다. 주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는데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픈 가슴을 안고 온 식구를 한 방에 모이게 했다. 정한 시간에 가족이라도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적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라(단 6:10)”
최 목사님을 감시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밀고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최 목사님은 가차없이 탄백대회에 끌려 나갔고, 그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전날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던 몇몇 집사, 성도들이 그를 음해하는 자리에 서있었다. 최 목사님은 수많은 인민들의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 침묵함으로 주님을 바라 보았다. 그는 주일에 가정 예배를 드린 죄로 수없이 많은 모독과 비판을 당한 후 풀려났다.
그리고 한 주간이 지나갔다. 주일이 어김없이 찾아오자 그는 또다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자일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 탄백대회에서 그는 더 혹독한 수모를 당해야 했다. 많은 육체적 핍박이 가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최 목사님을 인민의 적으로 지명하고 그들의 한풀이를 했다. 끝없이 날아오는 주먹들과 발길질 속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거의 시체가 되다시피 한 최 목사님을 집에 모셔다가 병 간호를 시작한 지 얼마 후 의식이 돌아온 최 목사님은 미음을 앞에 두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드린 이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기도가 되었다. 마당에 노는 아이들 중에 그를 감시하는 눈이 있었던 것이다.
최목사님은 더 이상 개정의 여지가 없는 자로 지명되어 탄백대회에서 그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동네마다 개처럼 끌려 다니며 인민의 적, 인민의 아편 보급자로 취급되며 고난 당하시다 끝내 순교하셨다. 그의 시체는 너무 끌려 다니고 얻어 맞아서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없는, 오직 그의 주님만 알아 볼 수 있는 형체로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는 중국 땅에 떨어진 순교의 한 밀알이 되었다. 그 씨는 얼마 후에 싹이 틀 것이었다.
순교를 당한 사람은 최 목사님뿐만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의 차가운 비수가 점차로 화삼의 매부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매부가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끌려 간 후 시체가 되어 나왔다. 많은 고문을 당하였던 것을 시신 가운데서 발견 할 수 있었지만 당국은 시신을 내보내면서 그가 음독 자살했다고 했다.
매부 곽남선을 장사 지내면서 그는 결심을 해야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바로 그의 곁에 다가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껏 그가 산 자 가운데 있었던 것은 공산군 지도자 가운데 옛 친구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더 이상 그도 안정 할 수많은 없었다. 그의 매부 장례식에서 한 친구가 “다음은 네 차례니 빨리 피신하라.”고 귀띔을 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많은 단체장직을 역임했고, 자치군 책임은 물론 신학을 배우고 교회 지도자로도 지냈으니 백 번 죽어 마땅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매부를 잃은 원통함이 무겁게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매부를 덮친 사망의 그림자가 온 가족 위에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인 한 공산당 간부의 이야기를 따르면, 내일 그는 체포 당하는 날이다. 그는 어떻게든 탈출해야만 했다. 가족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선 홀로 탈출하기로 했다. 그것이 공산당의 감시를 약화시키는 일이었고 도주하기가 용이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시간까지 온 가족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간구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3: 4~5)”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온 가족의 폐부 깊은 곳에 들어 박히고 있었다. 통금해제 시간이 왔다. 아침 7시는 이미 밝아오는 시간이었으나 바깥 세상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욱한 안개가 그 날까지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요소 요소마다 감시 대원들이 통행자들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안개는 그들을 덮고 있었다. 감시소 곁을 지나칠 때마다 너무 떨려 심장이 정지할 것만 같았다. 반 시간 남짓 달리니 겨우 급한 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햇빛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생각났다.
하나님의 돌보시고 지키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만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산시역까지 가려면 세 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다. 유난히도 뜨겁게 내리쬐는 벌판을 내리 달리면서 수없이 기도를 반복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이렇게 두려운 때가 없었다. 영고탑역은 동만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기차를 바꾸어 타야 하는 요충지였기에 공산당국자들은 많은 검사원을 이곳에 배치해 놓고 특별 검문을 실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탈출자들은 이곳에서 색출 당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이미 탈출 자 명부에 올라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혹시 그를 아는 사람이 아는 체라도 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고 불안했다. 다만 신안진에서 탈출해 나올 때 안개를 덮어 감시원들을 피하게 도와주신 그 하나님을 수없이 부르고 있었다. 영혼까지 미치던 십자가 상의 목이 타는 갈증이 이런 것이었을까? 역전 광장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와 같은 탈출 자인 것 같고, 나를 추적하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기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특별 색출대원이 오기를 기다리는지 승차가 지체되고 있었다. 참으로 지루한 몇 십 분이 지나자 사람들이 기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최대의 과제는 검문을 당하지 않고 기차에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기차에 뛰어 오르려는 순간,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승차를 미루고 그 자리에 서서 사태를 지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든 승객이 기차에 오르자 검문대원들이 문을 닫고 색출을 벌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등골에 오싹했다. 총을 찬 검문대원들에 의해 몇 사람이 잡혀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기차가 떠나도록 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그는 번개처럼 기차에 뛰어 올랐다. 출발하는 기차에 뛰어오르는 그의 등을 누군가 밀어 주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 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에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 1 ~3)”
동경성 역까지 달리는 기차 속에서 그는 끝없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피할 바위’가 되심을 또 한 번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외치고 있는 내면의 소리가 기차바퀴 소리와 어울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가 식은 땀 나는 도피 여행 가운데서도 동경성에 잠깐 내려야만 했다. 박경희 장로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오늘까지 그가 영적 순례의 길에서 감사히 정진해 온 것은 두 분의 기도 덕분이었다. 한 분은 그의 모친이요. 바로 다른 한 분이 박 장로님이시다. 박 장로님은 기도의 용장으로 그 차가운 북만주의 겨울을 기도로 녹이시는 분이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 사무엘 같은 분이시다. 그가 신학을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신 분이요, 목사가 되어 주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기도하고 계시는 영적 아버지였다.
차가 동경성에 머무는 한 시간을 이용해 박 장로님이 섬기시는 교회로 달려갔다. 교회 건물은 이미 팔로군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있었다.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가까스로 박 장로님을 찾았다. 절박한 낭떠러지를 쫓기고 있는 그와 박장로님, 서로의 손을 붙들고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미 기술한대로 최수헌 목사님은 순교하셨고, 다른 장로 한 분도 뒤를 따르셨다. 박 장로님은 그 순교의 길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끝까지 교회에 남는 일을 택하셨다. 그러나 팔로군들은 백발이 성성한 박 장로님을 죽이려 들지 않았다. 그는 팔로군의 마구간이 된 예배당 강단 밑에 엎드려 죽을 것을 결심하고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원들은 웬 미친 늙은이가 이렇게 귀찮게 구는가 하는 식으로 끌어내어 밖에 내칠 뿐, 죽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 장로님은 그들에게 죽여달라고 애걸하다가 총 개머리판에 얻어 맞고 발에 차이다가 끝내는 몇 사람이 사지를 들어 밖에 내팽개쳐 버림을 당했다는 것이다. 박 장로님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빛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게, 계 장로! 순교의 면류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닌가 보오.”
박 장로님의 주님을 향한 이 뜨거운 가슴은 그의 평생을 따라 다니며 신앙 고백처럼 울렸다. 기차 시간을 맞추어서 돌아와야만 했기에 그는 더 이상 박 장로님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박 장로님은 그의 두 번째 고향이기도 한 백두산 기슭에서 기도로 한 알의 밀알이 되겠노라 말씀을 남기셨다. 기차 바퀴 소리와 함께 박 장로님의 삶을 되새기며 그는 동경성을 떠났다. 그는 그 이후 더 이상 그의 생애에 박경희 장로님을 만날 수 없었지만 박 장로님이 그를 위해 하시던 기도는 남아서 그를 움직였다. 그가 기도하는 목회의 길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된 까닭이 박 장로께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박 장로님은 그에게 있어 산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박 장로님처럼 기도하다 박 장로님처럼 주님 곁에 가리라’
백두산이 저 먼 발치로 보이는 도문에 도착한 것은 하루가 지나고도 해질녘이었다. 기름은커녕, 석탄으로도 연료가 넉넉지 않을 때 인지라, 콩을 태워 그 열 기운으로 기차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도문역에 서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두만강을 바로 건너 남조선까지 내리 달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집안 식구들이 따라올 때까지 도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길에 머무를 것인가!
연길 인근에 있는 용정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요, 아직 외 질녀 곽대영이 살고 있었다.
윤동주의 삶이 녹아있는 용정이었다.
그는 1943년 7월 여름 방학 때 귀향하기 직전, 이곳에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그가 남겨놓은 ‘십자가’는 지금 공산당에 쫓기고 있는 계목사의 마음을 잘도 담았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용정은 독립 투사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늙어늙어 가는 일송정의 푸른 소나무 곁을 거닐며, 천년 만년 흘러 온 해란강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살펴보았다.
‘이곳에서 활발히 선교활동을 하시던 귀한 선교사님들은 지금 어떻게 되셨을까?’
북만주와는 달리 이곳 동만주에서는 예배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시한부적인 자유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종교의 자유가 조금 있다 해도 그것은 메말라 가는 논바닥처럼 점차 위축되어갈 것이었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논의 낮은 지대로 우글거리며 몰려드는 가뭄 속의 올챙이 떼들처럼 용정에는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동만주에서 힘있게 사역하시던 서금찬, 이권찬, 문재란, 김용락, 최문환 목사님들은 벌써 남쪽으로 떠나고 없었다. 이규환, 유성걸, 최문성, 이동섭, 김경진, 윤인석, 이병섭 목사님들이 비장한 각오를 하고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만나자마자 연길에서 사역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어떻게 우리 손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닫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문에 못질하기까지 남은 자가 됩시다.”
그는 번민이 되었다. 자신의 앞길을 생각하면 과감히 남조선을 향하고 싶었다. 동만주가 북만주와 같이 많은 희생자를 낼 것은 자명했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공산주의의 거대한 물결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래도 여기에 남아야 하는가? 지금 당장 교회가 문닫지 않았다고 해서 남아야 하는가?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떠날 명분이 없었다. 두만강을 건너자 마자 주님께 호통을 들을 것 같았다. 로마 교인을 두고 떠나고자 했던 AD 64년경의 베드로, 그가 주님께 섭섭한 말씀을 들은 것처럼 책망을 받을 것만 같았다.
“네가 버리고 간 로마교인들을 만나러 가노라”
그가 이곳 교회를 두고 남쪽으로 가면 주님이 얼마나 섭섭해 하실까 생각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가족들의 안부가 궁금한 고로 곧 내려오겠거니 생각할 때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도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서금찬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다 떠난 연길교회의 청빙을 받고 부임했다. 교인들의 반수가 벌써 남쪽으로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아직 남은 교인 수만 해도 300명 가까이 되었다. 여섯 분의 장로님께서 56명의 집사님들과 함께 힘있는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찬양대원들의 성가는 비장한 충성을 담고 있었다. 모든 성도들이 눈 앞에 다가온 적으로 인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있었다. 누구나 교회의 바른 방향을 위해 동참하고 있었기에 사소한 다른 의견들은 얼마든지 양보하기도 했다. 교회는 순교를 각오한 성도들로 인하여 생명이 넘치고 있었고, 언제든지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나그네들, 언제 왔는지 모르는 성도들이 주일마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계시록 2:9-10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교우들을 위로했다.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지난 주일까지 충성스럽게 예배 드리던 성도가 이번 주일엔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왜 교회에 오지 않았는지, 어디를 향해 갔는지 묻지 않았다. 그는 필연 남쪽 어느 곳인가를 향해 갔을 것이었다. 그 대신 언제 왔는지 모르는 낯선 얼굴들이 떠난 성도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특히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수난이 더욱 심각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곳곳에서 순교하고 교인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목자를 치리니 그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지방에서 교회를 잃은 성도들이 아직 예배가 허락되고 있는 연길 시내로 몰려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연길교회는 때아닌 부흥이 일고 있었다.
연길 교회는 그의 목사 안수를 노회에 청원했다. 1946년 5월 11일, 동만노회는 긴장감이 도는 시국 가운데 그의 목사 안수식을 가졌다. 노회장인 이규환 목사를 비롯하여 유성걸, 최문성, 윤인석, 김우용 목사등이 그의 목사 안수를 집례했다. 시내 중국인 교회에서도 몇 사람을 보내 목사 안수식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산 당원들도 이 집회를 주시하고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 눈에는 교인들이 정성을 다해 준비한 떡 잔치와 선물들이 못마땅했다. 교인들의 살림 도구며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믿음에 따라 정성을 다해 가져왔으나 공산당원들의 눈에는 노동함이 없이 얻는 유해한 착취로 생각되었다. 교인들은 행여나 소리가 날까 하여 땅굴 속에 들어가서 떡방아를 찧어 내놓았지만, 공산당원들의 눈에는 이런 잔치야 말로 부르주아들의 썩어빠진 사고방식에 불과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만 공산당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교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목사 안수는 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또 한 사람의 배출을 의미했다. 지방 곳곳에서 교역자들이 숙청당한 소식이 들려 왔다. 목사들은 놀면서 인민을 착취해 먹는 해로운 존재라 해서 당연히 죽여야 마땅한 죄인으로 취급 당했다. 종교는 당시 중국을 패망의 길로 치닫게 하는 아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영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착취자들을 뿌리뽑자는 구호들이 곳곳에 나붙으면서 신실한 주의 종들이 인민들의 재판에 끌려 나가서 비판을 받고 돌과 망치에 맞아 순교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연길교회에 이런 피 바람이 벌써 몰아치고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제직들이 벌써 인민 재판대에 서기도 했었다. “이제부터 예수를 믿지 안겠소.” 하면 준비해 놓은 술과 담배를 대중 앞에서 먹게 하고 그 동안 금지했던 통행증을 발급해 주었다.
그러나 남은 자도 있었다. 최인구 집사는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킨 신앙의 용장이었다. 그는 예외 없이 몰아 닥친 인민재판에서 수 많은 자아비판과 공갈, 협박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그의 주님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갖은 수욕을 겪고 빈 창고에 갇혔다. 영하 25도의 혹한이 만주의 어두운 밤을 삼키고 있었다. 변변치 못한 의복이 그를 지킬 수 없었기에 그는 그날 밤 창고에서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공산당원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 같은 신앙은 영하 25도의 추위도 어쩌지 못했다. 아침에 시체를 거두러 갔던 공산당원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그를 보고는 저으기 놀라면서 그 다음날 저녁에는 빨리 얼어 죽으라고 그에게 냉수를 끼얹었다. 그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로 그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어 공산당원들이 최 집사의 시체를 치우려고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엄청난 사실을 목격하고 할 말을 잊은 채 서있었다. 그의 온 몸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불 같은 기도가 동만주의 겨울 한파를 넉넉히 이기고 있었다. 놀란 공산당원들이 즉시 그를 석방하면서 다시는 예수를 믿지 말라 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구하신 하나님께서 최 집사를 구하신 것을 생각하고 온 교우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핍박은 교회에 전반적으로 더욱 심해졌다.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 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사 8: 1~3)”
용정의 교회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용정까지 무너지면 바로 이웃인 연길은 내일에 닥칠 일이었다. 밤을 새고 나면 열 가정 정도씩 종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주일 간격으로 떠나던 교인들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아무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쥐도 새도 모르게들 떠나갔다.
그의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얼굴을 못 보겠다 싶어 집에 찾아가면 벌써 떠나버린 후였다. 집도 세간 살이도 모두 남겨두고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주인이 떠나간 집의 마루에 앉아 떠나간 성도와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차가운 세상 바람이 가슴을 스쳐갔다. 자신이 공연한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자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우리 손으로 교회 문을 닫을 수는 없지!” 모든 허탄한 생각들을 털어버리듯 그는 훌쩍 빈 집을 나서곤 했다.
밤이 오면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 왔다. 동회다 반회다 출역회다 하여 자아비판을 하고, 되지 않는 이야기들로 세뇌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는 목사이기 때문에 더욱 견디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나가지 않자니 반동으로 몰리겠고 나가려니 심히 괴로웠다. 어느 날은 그에게 전투지역 물자보급에 동원될 일꾼으로 지원하라고 강권했다.
“동무도 출역 책임이 있수다.”
각박한 현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한 일이 많았다. 견디다 못해 그는 팔로군 본부를 찾아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당신들의 발표한 정강을 보니 종교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즈음 당신들은 곳곳에서 교회 문을 닫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너무 박해가 심하니 뭐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어리석은 일인 줄 알지만 부딪혀 본 것이었다.
“우리는 정강대로 동무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박해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올시다.”
때는 이미 목전에 이르렀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한 교회 모습을 그들의 음흉한 미소 가운데서 읽을 수 있었다. 근래 열심히 읽기 시작한 요한계시록을 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계 17: 7)”
어느 때보다 계시록, 다니엘서, 에스겔서가 깊이 다가왔다.
‘그렇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짐승들이 만주를 집어 삼켜도 하나님의 말씀은 승리하리라. 한번 마음을 정했으니 사자 굴이라도 가리라.’ 비장하게 각오를 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교회를 그들이 접수하겠지. 그리고 나와 몇 사람은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가 팔로군 본부를 찾은 지 몇 날이 못되어 신호가 떨어졌다. 격동하는 세파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 하는 몇 가정을 돌아보고 오니 보안서원들과 공산당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웃집에 사는 전 집사가 급히 그에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주었다.
“공산당원들이 예배당에 말을 몰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전 집사는 특히 교회와 계 목사에게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계 목사를 당국에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집사인 그의 아들이 공산당 본부를 찾아가서 계화삼 목사가 헌금을 강요했으며, 낸 헌금을 착복하여 살아 간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눈 앞에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를 하고 집 안에 들어서려니 공산당원 한 사람이 사립문 곁에서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를 잡아가려는가 보다.’ 생각하며 조용히 그는 다가갔다.
“계 동무! 날 아시겠소?”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안면이 있었지만 그것이 이 험한 세상에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교회 집사도 살기 위해서라면 목사까지 밀고하는 마당에 안면 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이 비상한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그를 찾은 것을 즉감했다.
“계 동무, 오늘 밤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인민재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제가 계 동무의 도강(두만강을 건넘)을 돕겠습니다. 밤 1시에 만납시다.”
그를 잡아가야 할 공산당원이 그를 도강하도록 돕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면 사자 입도 막으시지 않으셨던가? 오히려 다니엘을 음해한 사람들을 그 사자 입에 주지 않았던가? 그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기도 했다. 그는 사립문을 열고 들어갔다. 온 가족이 그를 둘러 싸고 앉았다. 이미 각오한 사람들인데도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어머니는 곧 기도를 시작했고, 눈물이 쏟아지는 아내를 바라보기가 민망하여 그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북만에서 동만으로 탈출하던 때가 번개처럼 스쳐갔다. 남편조차 없이 사남매를 데리고 노모와 함께 갖은 고생하며 오던 아내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제 아내는 다섯 번째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것도 이미 만삭이 되어 있었다.
새벽 한 시면 그는 떠나야 했다. 그가 가는 곳이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이 될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는 죽음일른지 알 수 없었고, 도강까지는 몇 개의 초소가 가로막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초소를 다 통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는 다시 홀로 떠나기로 했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 어디서 언제 어떻게 기다리겠다는 기약도 없이 그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익은 말씀이 혈관을 뜨겁게 타고 흘렀다.
“내가 곧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의지되는 순간이 왔다. 주님만이 그의 길이요 생명이셨다.
공산당원이요 그 중에서도 간부인 젊은이가 약속대로 밤 한시에 찾아 왔다. 그는 성경 한 권만 들고 갈 바를 모른 채 집을 나섰다. 감시소를 하나, 둘 빠져나갈 때마다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하였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한 걸음걸음을 옮길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솟아났다. 새벽녘이 되었을 즈음에 두만강 기슭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탈출을 도왔던 공산당 간부는 행운을 바란다면서 여명 속으로 사라져 갔다. 누구에게도 이 비밀을 말하지 안도록 신신당부하면서·····.
얼마 전 읽은 사도행전 12장 말씀이 생각났다
.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그는 그를 안내한 공산당원에게서 베드로를 안내한 천사를 생각했다. 그가 사라진 두만강 가에 서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내가 누구오며 내 집이 무엇이기에 베드로를 인도하신 주님께서 오늘 저를 인도하십니까?’
1947년 5월 14일, 그는 두만강을 건너 고국에 다시 돌아왔다. 30년 전 그는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30년의 만주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다시 넘어왔다. 그저 살았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30년 전에 고국을 떠나는 이주민으로 두만강을 건너 강 북쪽 만주 땅에서 단을 쌓았던 어머니, 이제 그 아들은 남으로 다시 도강하여 두만강 남쪽에 단을 쌓고 있는 것이다. 한 교회의 지도자요. 5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돌아왔다. 다만 그 모친과 아내와 자녀들은 아직 만주에 남아 있었다. 그가 돌아온 북조선 땅, 또한 짙은 어둠이 내래고 있었다. 공산 정부가 이미 이곳까지 들어섰지만 그래도 내 민족, 내 고국 아닌가 생각하며 위로를 삼았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해방이었던가?
사람들은 매우 활발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수많은 이주민들이 이번에는 만주에서 고국 땅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초라하고 감당하기 벅찬 봇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행정당국에서는 밀려드는 이주민들에게 공민증을 무한정 발급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살아 넘어온 것도 감사한데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었던 공민증까지 거저 받고 보니 꿈같기만 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선대하시는가 생각하며 감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도우시고 계심을 믿었지만, 그에게 갈 곳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숙제는 아직 풀어야 했다. 연길에 있는 식구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삭이 된 아내와 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 어린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는 너무 무력하고 가난한 자로 이주민들의 물결 속에 휩쓸려 혼자 서 있는 것이다.
그가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누군가 등을 반갑게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니 지 장로님이었다. 연길교회에서 함께 교회 지체들을 돌보며 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분이다. 참으로 천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지 장로님은 회녕에다가 식구들을 옮겨놓고 그곳에 장 공장을 차리셨다고 했다. 연길에서도 그 일로 성공을 했던 분이었다.
지 장로님은 미안해 하며 소련군 표 4천 다릭과 평양행 기차표를 사 주었다. 믿을 수 없이 섬세하고 큰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 한번 의식하며 감사했다. 연길에 가서 장공장 운영에 필요한 중요한 재료를 가져 오겠노라면서 급히 떠나는 지 장로님을 보내면서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은 큰 모험이었지만 지 장로와의 만남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여비와 기차표를 공급받을 수 있어서뿐만 아니라 연길에 있는 식구와 연락할 수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얼마 전, 연길에서 바람처럼 종적을 감추었던 지 장로님,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나버린 지 장로님의 빈 집을 심방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던 생각이 났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여정을 확신하며 힘있게 발길을 남으로 옮겼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의 길과 생명이 되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하나님은 나보다 더 믿음이 좋으신 어머님과 아내도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자.’
지 장로님을 만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체험한 그는 우선 식사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남양시가를 향하는 발길은 가벼웠다. 연길을 떠나면서 남양에 가겠노라고 했던 안창준 장로 생각이 났다. 이곳에서도 잡화상을 경영하려니 생각하고 수소문하였는데 역시 그랬다. 기쁨으로 만날 수 있었다. 믿음의 형제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맛있는 냉면을 사이에 두고 시절을 초월한 웃음을 나누었다.
그곳을 떠나 평양을 향해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힘있게 달리자 납처럼 피곤한 몸에 졸음이 쏟아졌다. 식구들과는 점점 멀어져 가는구나 생각하니 초조한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도중에 장모님 (양신실)과 처남(김병수), 처조카(김동일)가 살고 있는 성진에서 내렸다. 이틀 동안을 묵으면서 연길 식구를 데려올 방도를 연구했다. 어떻게든 연길에서 국경까지 나오게 한 후 평양에서 상봉할 수 있도록 협력을 구했다.
시절의 혼탁함을 비웃기나 하듯이 동해물은 더욱 맑았다. 햇빛을 받아 비취 빛을 눈부시게 발산하는 것을 보노라니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이 생각났다.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평양 신학교로 직행했다. 신학교 졸업식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서문교회를 가득 채운 졸업식이 이성휘 박사의 주례와 백승진 목사의 설교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축제여야 할 졸업식장에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축사조차 없이 졸업식은 조촐하게 끝났다. 외풍이 이곳에서도 위력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만주 신학교 동창들도 많이 참석했다. 함께 공부했던 동창들이 다수 이곳 교회에서 힘있게 일하고 있었다. 장도신 목사는 가루개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그곳은 그때 김일성의 서기장이 된 강량욱이 담임했던 교회였다. 주재명 목사는 평북 선천에서 섬기고 있었고, 최정의 목사는 용천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그들은 서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장 목사는 평양에서 함께 일하자고 했고, 주 목사는 평북 철산 중앙교회에 목회자가 없으니 그곳에 가자고 했다. 주 목사의 간청이 너무도 간절하여서 또 한번 어려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이곳 평양에서 식구들을 만나 38선을 넘을 생각이었다. 공산주의를 만주지방에서 이미 깊이 체험했다. 교회와 공산주의의 조화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이나 이미 톡톡히 당해온 바 아닌가?
그러나 이곳 교회 지도자들은 긴장감 속에서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내 조국이니, 조선땅의 무신론자들은 중국과 다를 것이다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주님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말씀하셨는데도. 그도 그것을 믿고 싶었고, 더구나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나섰다 하면서 당장 빈 교회를 두고 나만 살자고 떠나기가 힘들었다.
평양에는 김구 선생이 평화 통일을 기대하며 김일성과 협상 차 온다는 소식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김구 선생이 어떤 분인가! 그는 무엇인가를 해낼 것 같기도 했다. 평양 거리에 벽보를 붙이고 김구 주석을 환영하는 프랭카드가 걸리고 기독교 민주당이 결성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는 자의반 타의반해서 결국 다시 평북 선천에 도착했다. 철산중앙교회는 이 소식을 받자 바로 청빙위원을 보내왔다. 이 교회를 담임하시던 김신규 목사님이 평양 장대현교회로 전임하신 뒤 공백이 된 그 자리에 그를 청빙한 것이었다. 교인들도 간절히 기도하던 차라, 응답받은 것으로 알고 그를 맞아 감사했다. 넘치는 환대와 환영 속에서 사역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연변에 있는 식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지역 갑부인 정의순씨 댁에서 기숙하고 있었다. 믿음이 독실한 정의순씨의 부인은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하는 자세로 그를 섬겼다. 하루 이틀이 아닌 여덟 달 동안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쇠약해질 대로 약해진 심신을 회복한 감사의 기간으로서 15kg의 체중을 회복했다.
수넴여인이 엘리사를 환대했던 기억이 났다.(왕하4:8-10)
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9.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10. 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
그의 은인 정의순 씨는 공산당원들에 의해 순교했다. 그러나 그 힘들던 시절에 주의 종을 환대한 정의순 씨댁의 사랑, 그것은 그가 가는 곳마다 전파되는 노래가 되었다.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철산골에는 중앙교회 이외에도 허덕화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동부교회가 있었고, 인근 지역까지 헤아리자면 40여 교회가 넉넉히 되었다. 평북노회를 결성하고 30여명의 목회자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했다. 모이면 신앙의 자유를 위해 간구하고 남조선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체계가 굳어지면서 교회를 주목하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보안서원들이 교역자의 동정을 감시한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돌고 있었지만 장날만 되면 인근 시골 마을에서 전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지방 교역자들도 그의 집에 몰려오곤 했다. 라디오가 귀한 세상인지라 그의 집에서 남조선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 가운데 특히 그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 사람으로서 이성달 목사가 있었다. 그는 장날만 되면 노방전도를 하자고 나섰는데, 그의 전도 열심은 특심이었다. 성결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그는 유별난 전도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천당에 열린 문을 들어갈 때~” 창가조의 구성진 목소리로 한 삼분 동안 숨 한 번 안 쉬고 읊노라면 장보러 온 사람들이 뭔가 하고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여러분! 예수 믿으시라요. 예수만 믿어야 삽네다.”
고유의 평안도 사투리를 되는 대로 섞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날들이 많다 보니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도 많이 있어 좋았지만 금방 감시대원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도는 노골적으로 금지 당했다.
숨을 조여오던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정세는 죄경화 색채를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1948년 봄, 어용 목사 강양욱은 북조선 기독교도연맹 평북지부 결성대회를 가진다고 선포했다. 라디오, 신문, 동맹통신, 선전벽보, 광장 할 것 없이 요란스럽게 과대선전을 하였다. 보안서원들은 앞장서서 교역자 집을 찾아 다니면서 꼭 참석해야 함을 설득하는 한편, 그들은 교회에 대한 유화정책도 병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난 날 북만, 동만에서 겪은 경험은 이것이 올 때까지 온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된서리가 교회에 미칠 증거가 완연했다.
입회하면 김일성 지지 성명서를 내야하고 그 이후로는 공산당의 회유대로 하나님 대신 김일성에게 충성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회의에 불참하자니 반동분자로 처단 당할 가능성이 컸다.
결성대회를 하던 날, 그는 봇짐을 싸 들고 죽을 각오로 산에 올라갔다. 그날 결의대회에 참석한 허모 목사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정상인 목사가 위원장이 되어 성명서를 채택하고 “교역자들이 단결하라”는 결의를 이끌어낸 대회였다 한다.
“결의는 쉬우나 실행이 무겁지요”
무엇을 위한 단결인가!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이것은 기독교회를 옥죄일 시작에 불과했다.
그가 만주를 혈혈단신으로 벗어난 후, 가족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우선 식량 문제가 극심했다. 노모와 다섯 자녀, 그리고 해산달이 가까운 임산모만 남게 되었으니 누가 의식주를 책임지랴! 목사가 남기고 떠난 식구들을 돌보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때였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그들은 통행증조차 없어 농촌으로 갈 수도 없었다. 얼마 남은 일본지폐는 이미 쓸모 없이 되어 버렸고, 배가 고파 보채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어머니와 임산모는 기도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때로 이 사정을 안 교인들이 자기들도 곤고한 가운데서도 얼마의 식량을 가져왔다.
먹기보다 굶기를 더 많이 한 그들은 통행증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목사가 있을 때에야 목사니까 주지 않았다 하겠으나 목사 가족이야 무슨 죄가 있느냐는 여론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통행증발급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장이 문제였다. 그는 늘 교회 종을 치던 사찰이었는데, 반장이 되자 매몰차게 교회에서 돌아섰다. 아마 지신의 전력을 숨기고 보상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목사 가정에 통행증 발급해 주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보다 못한 동장이 중간에 나서 통행증 발급을 중재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통행증 발급을 거부했다. 퉁퉁 부은 임산모와 어린 아이들의 우는 소리를 듣다 못한 동장이 다른 반장을 권면해서 마침내 통행증을 발급해 주었다.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던 온 가족은 그 통행증을 받아 들고 울음 바다가 되도록 서럽고 감사해서 울었다.
통행증을 받은 온 식구는 두만강을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우선 가는 길목을 탐구하기 위해 행상 차림으로 국경 지대를 오가면서 여러 차례 두만강을 답사했다.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를 피해 노모와 어린 아이들과 임산부가 건너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려서 걸어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네 살 먹은 셋째 아들 형식은 어떻게 걷게 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먼 길은 힘들었다. 더구나 두 살이 된 이식은 누군가 업고 가야 할 형편이었다. 맏아들 원식이 국민학교를 마쳐 갓 지나가는 12살이니 도움은 되겠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무리였다. 생각다 못해 온 식구가 일단 용정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곳에서 국경까지 가는 기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보존할 짐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 버려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사할 때 늘 해오던 식으로 옷가지는 가능한 대로 많이 껴입고 당장 먹어야 할 음식을 챙긴 후 용정을 향해 떠났다. 가을로 접어드는 동만의 찬 바람이 나그네들의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길고 긴 여정을 어떻게 갈 것인가! 흡사 전쟁과 같은 상황 속에서 뱃속에 있는 어린아이가 노중에 태어나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나오미와 룻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어찌하든지 지옥과 같은 만주 땅을 벗어나려는 마음과 어린 자녀들을 살리고 보려는 일념이 두 고부간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한 걸음씩을 옮겼다.
연길에서 태어난 정식이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한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잠시도 기뻐할 수 없는 현실이 몹시 무거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정에 장티푸스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지칠 대로 지치고 허약해진 온 식구를 여지없이 강타하기 시작했다. 약은커녕 끼니조차 먹을 음식조차 없는 처지에 이 독한 장티푸스를 만났으니, 헤어날 것 같지 않았다. 장티푸스는 아이들부터 차례로 온 식구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다시 한번 생명을 내놓은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식이를 낳고 몸조리를 해야 할 산모는 불같이 열이 오르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이들이 한 고비를 넘기는가 했더니 어머니가 장티푸스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다 함께 쓰러지지 않은 것만을 감사할 뿐이었다.
한달 반이 넘도록 꼬박 몸서리쳐지는 염병과의 씨름을 해야 했지만 급박한 현실은 앓아 죽을 틈조차 없이 몰아쳤다. 국경까지 가는 화물차가 있다는 소식이 왔다. 이 차를 놓치면 다시 국경까지 갈 수 있는 기회가 올 기약은 없어보였다. 어머니와 아내는 자신들이 죽더라도 아이들만은 두만강을 건너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펄펄끓는 열로 인해 병으로 인해 사시나무처럼 떨며 부딪히는 이빨을 악물었다.
두만강 가에 도착한 것은 12월 24일 오후였다. 백두산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두만강은 혹독한 추위가 닥치자 이내 꽁꽁 얼어 붙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갓 태어난 손주 정식이를, 아내는 두 살 난 이식이를 업고 얼어 빙판이 된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열두 살 난 원식이는 원숙이와 형식이를 양손에 쥐고 미끄러운 얼음판을 건넜다.
장티푸스를 앓고 있는 어머니의 몸에서는 독한 열이 무섭게 치솟고 있었다. 혹한 속에서도 아랑곳 없이 흐르는 땀으로 인해 목이 탔다. 얼음장을 깨서라도 목을 축이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전진할 기운이 없는 어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두만강 얼음 위에 앉아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는 국경만이 아니라 천국까지 넘어 울리고 있었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어머니가 알지 못한 크고 은밀한 일은 무엇일까?
그때였다. 어머니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식이를 업은 채로 그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무릎을 일으켰다. 비록 극한 상황이었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 솟고 , 염병이 떨어졌다는 확고한 승리감이 들었다.
어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 소련군 감시병이 다가와 있었다. 감시병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아녀자 일행을 둘러 보았다. 법 없이 넘어오다 감시병에게 발각되었으니 공포로 두려워해야 할 이들이 두려움은 커녕 감동하여 서있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감시병은 이내 그들의 작은 봇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봇짐을 뒤지고 몸수색을 한들 신통한 것이 나올 까닭이 없었다. 성경책과 계 목사의 졸업장, 사진들을 뺏고는 통과시켜주었다.
어렵게 국경을 넘었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 겄도 없었다. 밤은 어두워 오는데 어린 아이들과 짐스런 이 연약한 가족을 영접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한 곳 몸을 뉘일 만한 데가 없었다. 국경의 밤은 더욱 춥게 다가 오고 있었다.
눈을 들어 사면을 살펴보니 맞은 편 회녕 시가에서 조그마한 불빛이 비쳐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물어물어 드디어 한 교회를 발견하였다. 김인덕 목사님이 담임하는 교회였다. 어디를 보나 거지 일행이 분명한데 목사 가족이라 하니 방 하나를 내어 주었다.
교회는 성탄 이브의 설레임과 성탄 맞을 준비로 분주해 있었다. 교회 직원들과 청년 몇 사람이 난로에 불을 피우고 성탄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춥고 배고픈 나그네들을 돌볼 틈도 없이 바빴다. 다음 날, 성탄 축하 예배가 있었다. 그들은 성탄 헌금조차 변변하게 드리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30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에 돌아와 맞는 성탄절이었다. 빈손으로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 왔지만 마음에는 큰 감사가 넘쳤다. 보배이신 하나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이 오셨으므로,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의 나그네 생활은 풍요함을 누렸다. 그들의 연약한 현실은 질그릇과 같아서 산산 조각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어도 그들은 품 안에 보배이신 예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보배가 바로 이천 년 전 그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성탄절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되었다.
그들도 동방박사들처럼 예물을 드리고 싶었으나 그들에게는 황금도 유향도 몰약도 없었다. 그 겨울 크리스마스에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되어, 그러나 가장 감사하는 성도로 성탄 예배에 참석했다. 지난 30년간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 안에서 크고 비밀한 일을 이루신 그 주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했다.
하지만, 교인들은 가족들의 외모를 보고 부담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탄 인사 한 마디 따뜻이 건네오는 교인들이 없었다.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섭섭했지만 지금이 어떤 시국인가 생각할 때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자리를 일어섰다. ‘어디 우리 같은 나그네가 한둘인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만주에서 넘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교회로서 오죽이나 어려움들이 많겠는가?’ 생각을 고쳐먹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때 저쪽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그들을 반갑게 아는 체했다. 고성룡 성도였다.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에 어머니가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이었다. 의란구에서 전도한 사람이었다. 천사를 만난 것과 같았다. 누추한 일행을 안고 눈물을 글썽이더니 “이게 웬 일인둥? 국경 유치장에서 나왔게구만. 집으로 가십찌비.” 하는 것이었다. 일행은 기도의 응답으로 알고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고성룡 성도는 성진에 사는 계 목사의 처남 소식을 전해주었다. 처남은 벌써 수 차례 이곳을 다녀갔단다. 행여 건너오는 동생을 만날까 하여 국경지대를 수 차례 순회하였다 한다. 고성룡 성도는 가족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 주고 노비까지 듬뿍 쥐어주었다. 그가 준 노비는 남편 계화삼 목사와 약속한 평양 가는 기차를 타기에 거의 부족함이 없는 돈이었다. 조금 더 필요한 경비는 만주서 만들어 온 개엿을 팔아 충당했다. 회녕의 고성룡 성도 집에서 하룻밤 따뜻한 사랑을 받고 12월 26일 밤, 일행은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평양만 가면 남편을 만나리라 생각하니 이제까지의 고통이 눈처럼 녹아버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평양에 도착해보니 남편 찾을 길이 막연했다. 그 당시 평양에는 교회가 70여 개 정도 있었다. 유숙할 장소는 물론이고 먹을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이곳저곳 교회 순례를 계속하자니 이건 거지 중에도 상거지였다. 몇 군데 큰 교회를 찾다가 무안만 톡톡히 당한 적도 있었다.
이 혼란한 시국에 만주 모퉁이에서 목회를 시작하다 이곳에 흘러 들어 온 무명의 계화삼이라는 목사를 누가 안다는 말인가?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거의 40여 교회를 찾아 갔어도 그 결과는 같았다. 그러다 정인선 목사를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정 목사는 그들이 목사의 가족임을 전해 듣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어했다. 거지도 이런 거지가 있으랴 싶은 계 목사의 가족을 맞아 일단 방을 내주었다.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고 어려운 사정을 듣더니, 자신이 계목사를 찾아보겠노라고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초면인데도 그는 자신의 일처럼 나섰다. 여기저기 알아 본 그는 가루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분이 만주에서 넘어오신 분으로서 계 목사님의 친구요 동창인 장도신 목사라고 알려 주었다. 얼마 후 한 걸음에 달려온 장 목사를 만난 온 식구는 기쁨으로 울음 바다를 이루었다.
장도신 목사는 온 가족이 무사히 넘어 왔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계 목사가 있는 철산을 방문했다. 며칠 후에는 가족들을 인도해서 철산으로 데려 왔다. 천신만고 끝에 온 가족은 재상봉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만나는 자리가 또 다시 울음 바다를 이루었다.
공산치하에서 요시찰 대상에 들어 있는 목사가 이런 일들을 추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생사를 주님의 손에 맡긴 장 목사에게는 못할 것도 없었다. 일을 마치자 그 많은 수고를 하고 나서도 밥 한 그릇 대접받는 것을 사양하고 떠났다.
교회는 사택을 정리하고, 도착한 계 목사님 가정을 위해 필요한 살림 도구들을 가져왔다. 양식과 의복, 그릇들을 가져오는 성도들의 발길이 저마다 즐거웠다. 험한 피난길에서 얼굴이 반쪽이 되어버린 아내와 온 발목이 퉁퉁 부어서 기동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얼굴도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선천에서 목회하시는 주재명 목사, 용천의 최정식 목사, 연화동의 김철수 목사, 풍천의 허은 목사님들이 그의 집에 모여 왔다. 가족 상봉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만주 교회의 형편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다. 만주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제는 북조선에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감사하면서도 계 목사는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평안북도 기독교 연맹이 결성된 이후 그들과 협력하지 않는 교역자들에 대한 탄압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씩 보안서에 가서 사건이 있건 없건 심문을 받았다.
‘누가 방문했는가, 어디 어디를 다녔는가, 설교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누가 연보를 얼만큼 했는가?’
땀이 나는 나날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보안서에 날마다 가서 보고하기 위해 사는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십 리 이상은 여행조차 금지되어 있었고, 기독교 연맹 아래 이름만 걸어놓았지 교회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목회하는 목사도,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교회와 연관된 사실만으로 힘든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다고 삼팔선이 열릴 희망도 없었고, 신앙생활에서도 갈증이 생기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도무지 희망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 신앙생활이나 잘하고 살겠노라고 처자를 거느리고 떠나가기도 했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는 말씀이 생각났다.
1948년 5월, 북조선 인민공화국은 기가 막힌 법을 하나 발표했다. 모든 지주들은 소유한 토지로부터 300리 밖으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지주란 대지주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에게 땅 한두 마지기라도 빌려준 사람들은 모두 지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법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교회로 볼 때에도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생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 거의 떠나야 했기에 온 마을은 너나 없이 초상집이 되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한 채 38선이 가까운 장연이나 해주 근방으로 몰려 갔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38선을 넘고 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텅 빈 예배당을 찾았다. 수 많은 성도들이 이곳에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하였던 곳, 주일마다 나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던 장소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 예배 장소도 무너져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의 길고 긴 침묵은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다. 북만에서 동만으로 또 북조선으로 쫓기고 쫓기며 하나님의 힘을 간구했었다. 어느 때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목숨만 겨우 유지하게 하실 뿐 무서운 고난을 허용하고 계시는 듯했다. 그가 태어나서 평양과 만주를 헤매며 이곳 철산에 오기까지 하나님은 계속 일관된 자세를 견지하고 계셨다. 끊임없는 침묵과 적절한 연단,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늘 도우심!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또 다시 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곳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죽기까지 머물러야 할 것인가?’ 새벽기도를 하러 사기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장도신 목사님이 생각났다. 이대로 머물면 계목사도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이다. 떠난다면 어떻게 떠날 것인가? 돈이나 많으면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배를 삯 내어서 남쪽으로 가고 싶었으나 그에게는 여덟 식구는 고사하고 자기 한 사람을 위한 여비도 없었다. 더구나 그가 온 가족과 다시 만난 것은 불과 얼마 전이 아닌가?
‘이대로 있다가 순교하면 좋지 뭐!’ 하고 생각하다가 “주여!”하고 불러 보았다. 가만이 일어서서 풍금 곁으로 걸어갔다. 몇 손가락을 움직여 풍금을 눌러가며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찬송가의 가사가 그의 감정을 어쩌면 그렇게 도 잘 묘사했는지 몰랐다.
‘나그네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래, 믿음의 길이란 이렇게 떠나는 나그네 길이지! 아브라함이 그렇지 않았는가? 떠나고 또 떠나며 믿음을 지킨 아브라함의 말이다.
그 아들 이삭이 힘들여 우물을 파고, 강탈하려드는 자들에게 미련없이 우물을 포기하며 떠났지 않던가. 나는 이제 몇 번이나 더 교회를 포기하고 떠나야 하는가!
믿음의 조상을 묵상하다 보니 새로운 힘이 났다. 찬송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다니다가 쉬일 때 답답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날 반갑게 하소서”
그때 사람 찾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허은 목사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풍천이 가까운 길이 아닌데 이 난리통에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예배당을 나섰다. 너무 반가워서 “이게 웬 일입니까?” 외치니 얼른 입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렸다. 조용히 하라는 눈치였다. 방문을 걸어 잠그자, 허은 목사는 은밀한 목소리로 방문한 목적을 이야기 했다.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교인 한 사람이 남한으로 넘어가는 배를 한 척 구했는데, 몇 가족과 간단한 짐을 싣고 떠나려다가 그 교회 허은 목사님을 모시고 가기로 했단다. 값없이 타고 가는 배편인지라 팔복이란 딸 하나만 데리고 가려는데 감시가 심해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단다. 결국 하루를 지체할 수밖에 없었고, 허은 목사는 지체한 하루를 틈타 계 목사에게 달려 온 것이었다. 계 목사를 두고 홀로 가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는 것이었다. 계 목사에게 뱃삯이 있을 리가 없음을 알고 허 목사는 당시 귀하게 취급되던 표준주석, 흑기(黑奇)주석, 사전을 팔아 친구의 뱃삯을 지불했다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은 감히 생각하기 힘든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사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맏아들 원식이만 데리고 떠나라 했고, 어머니도 대찬성을 하셨다. 즉시 장로님들과 집사 몇 사람을 불러서 상의를 했는데,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도 삼백 리 밖으로 떠나야 하는 시국의 절박함을 알고 짐을 챙기고 있다고 했다. 늙으신 어머니와 연약한 처자를 모두 철산에 두고 또다시 떠나야 하는가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공신주의 사슬은 끈질기게 그를 찾아 다니며 가족과 헤어지게 했다. 북만주에서 동만주로, 동만주에서 북한땅으로, 북한땅에서 다시 남한으로 가족을 떠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온 가족이 눈물 바다를 이루며 기도하던 중 허은 목사님이 먼저 떠나겠노라며 자리를 조용히 일어섰다. 공산당에게 발각될까 하여 배웅조차 사양하며 사립문을 지나 사라졌다. 계 목사는 사람들에게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고 원식이에게 책가방을 메워 가지고 집을 나섰다. 약속한 이득수 장로님 댁에 도착하니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 기다리며 일행은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논밭에 일하러 간 농부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깊어 가면서 인적이 끊어질 때쯤 일행 6명은 밤 10시가 되어 두 어부의 안내를 받아 조그만 배에 몸을 실었다. 여섯 사람이 타고 가기에는 너무도 작은 쪽배였기에 금방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배 젖는 어부는 그들에게 뱃바닥에 납작 엎드리도록 지시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라앉을 것 같고 엎어질 것 같았지만 무엇보다 검문하는 배들에게 발각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밀려 들어온 조수를 이용해 뱃사공은 재빠르게 뭍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콧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노를 저었다.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는 모양이었다.
긴장된 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 “어디로 가는 누구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몰에 사는 아무개인데 즐낙 거두려 갑네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식은 땀이 엎드린 일행 모두를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다가오던 배가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돌아서는 모양이었다. 첫 검문소를 이렇게 통과하자 “휴” 하고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조금 들고 허리를 펼까 했더니 꼼짝 말라는 엄명이 떨어진다. 또 다른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생 이런 고통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조각배의 울퉁불퉁한 밑창이 온몸에 배어서 견들 수가 없었다.
마침내 두 번째 검문하는 곳에 이르렀다. 첫 번째와는 달리 검문소와 배 사이에 등불로 신호만 주고 받았다. 밤이 맞도록 노를 저어 가더니, 여명이 밝아 올 녘쯤 하여 큼직한 중선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똑같은 조각배 몇 척이 이 중선을 향해 저어오고 있었다 사공들은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 왔다는 말을 했다. “저 배가 38선을 넘을 배올시다.” 중선은 마흔두 명이 타기에는 너무 허술한 곳이 많았다. 낡을 대로 낡은 이 배가 과연 38선을 넘을 동안 떠 있을까 걱정이 앞서는데 일행을 싣고 온 조각배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이 중선은 고기 잡는 풍선으로서 일제가 징용하여 4마력짜리 동력기를 달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기름이 귀한 시절이라 송탄유를 부어서 겨우 사용하던 배인데, 인천까지 이르려면 순풍을 만나야 이틀 하고도 반나절이 요구되는 기가 막힌 배였다.
일행이 출발한 곳은 신미도 옆 가도였다. 배가 출발하자 사람들은 남한으로 간다는 기쁨에 즐거워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38선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하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겹쳐서 초조한 표정도 역력했다. 당시에 38선을 넘어 배로 탈출하는 사람이 많았고, 넘다가 경비정에게 발각되어 처참한 종국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북조선에서 땅과 지위를 박탈당한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남쪽을 향해 탈출하고 있었다.
한참을 잘 달리는 게 신기하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배의 발동이 꺼졌다. 기관실에서 고치려고 애를 쓰는데도 천금 같은 시간만 자꾸 흐르고 있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망원경을 가지고 살피던 선장의 얼굴이 새파래져서 내려왔다. 보안 경비정이 이 배를 향해 접근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 다시 발동이 걸렸으나 중대한 결정이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달아나는 데까지 달아나야 한다고 했지만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편에서는 가까운 섬에 배를 대고 승객들이 섬에 피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진 갑판 위에서 두 목사는 손을 맞잡았다. 어디로 피한다고 생명이 보장될 것인가? 하나님밖에 피할 바위가 없어 보였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짠 그물에서 빼어내소서(시 31: 104)”
유심히 경비정의 동태를 살피던 선장이 망원경을 눈에서 떼더니 기쁜 소식을 전했다. 경비정이 쫓아 오는 것을 멈추었다는 것이었다. 이쪽 배의 동정을 살피는 모양이란다.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받아 외쳤다.
“하나님의 종들이 탄 배라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고 긍휼을 베푸심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했다. 모든 승객들의 가슴에도 안도와 기쁨이 넘쳤다. 얼마 후, 이름 모를 섬에 잠시 정착해서 선원들은 식수와 식량을 구하고, 하선한 승객들은 일단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밤이 깊기를 기다려 다시 발동을 걸었다. 자정에서 반시간 가량이 지났다. 한번 경비정에 놀란 후라 뱃사람들이나 승객들은 매사에 신중해졌다. 이대로 38선을 넘을 것인지, 중국 방향으로 가다가 중국 대륙이 가까운 깊숙한 지점에서 방향을 돌릴 것인지를 의논했다. 후자를 결정하고 뱃머리를 바다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뱃사람들은 이 길이 해안을 타고 38선을 넘는 것보다 훨씬 풍랑의 위험이 크다고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풍랑보다 동족의 총칼에 더 많이 죽었거나 행방불명이 되어 있었다.
대륙 방향을 선택한 배의 갈 길이 멀었다. 속도를 높이고, 돛을 올려 바람의 도움을 받아 이틀을 항해하였다. 서해 중심부에 들어서자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풍랑이 거세어지면서 배는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리해서 달려온 발동이 이내 꺼져버렸다. 풍랑 가운데서라도 발동이 걸려 있으면 좀더 나을 텐데 큰일이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썩을 대로 썩은 배에 사람과 짐을 넘치게 실은 배인지라 풍랑 앞에서 살아남을 여망이 없어 보였다. 선장은 살고 싶으면 가지고 있는 짐짝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했다. 목숨보다는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든 무거운 것들이 바다에 던져졌다. 싣고 오던 송탄유 통도 줄로 군데를 묶어 바다에 띄웠다. 배보다 몇 갑절 큰 파도가 입을 벌리고 달려와 덮치자 아우성과 비명이 파도에 묻혔다. 선장의 명령대로 배 밑창에 몰려든 사람들은 심한 구토를 시작했다.
“허 목사님, 이제 살 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앞에 가기 전에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합시다. 요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혹시 우리를 살리실런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들은 냄새가 진동하는 배 밑창 구석에 머리를 박고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요나를 선지자로 보내시기 위해 바다를 움직이신 하나님, 바울을 로마에 보내시기 위해 230여 명의 생명을 구하신 주님, 우리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살려 38선을 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의 복음을 가지고 땅끝까지라도 가겠나이다.”
지금까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돛대가 부러졌다고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울부짖다가 죽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따라 갑판위로 갑시다. 거기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마음껏 회개하고 기도합시다.”
몇 사람이 기우뚱거리며 그들 뒤를 따라 올라왔다. 그들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세례를 받으면서 서로 허리를 꼭 껴안고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물쏟듯 하라는 말씀이 기억났다. 회개의 눈물이 밀어 덮치는 파도에 뒤범벅 되어 얼굴에서 흘러 내렸다. 땀인지 눈물인지 배를 덮친 바닷물인지 얼굴을 뒤덮고 입을 적셨다.
얼마나 긴 몸부림이 지났을까? 금방 엎어질 것 같던 배가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쏟아지던 폭풍우가 개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늘에서 햇빛이 비추는 것이 아닌가? 기도를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망연자실했다. 자기들이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북을 향해 매섭게 불어오던 바람이 동남풍으로 바뀌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사망의 늪을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의 얼굴에 가느다란 희망의 희색이 피어 올랐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닷물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 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여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 5~7)”
서쪽 저 바다 끝에 중국 상선들이 보였다. 중국 해역까지 밀려 온 모양이었다. 누군가 외쳤다. “천진 앞바다 아니야?” 모를 일이었다. 살았다는 기쁨도 잠깐,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배의 몰골이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중국해역까지 밀렸으니 인천까지 란 멀고 먼 길인데, 발동기는 고장이요 돛대는 처참히 부러져 있었다. 바람은 분명 동남으로 배를 밀고 싶어하지만, 바람을 이용할 길이 없었다.
누군가가 그때 옷을 펴서 바람을 막았다. 너도나도 의복이며 천들을 펴서 바람을 막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손이 모아지고, 지혜가 모아지고, 마음이 모아지면서 배는 동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허기져서 몹시들 지쳐 있었지만 자신들의 수고가 배를 움직이는 것을 보고 힘들을 내고 있었다. 부러진 돛대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세워졌다. 여기 저기 바람을 이용할 수 있는 기구나 통들을 세우고 바람을 한 점이라도 더 이용하려고 애를 썼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여기 저기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지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바다는 언제 폭풍을 만났느냐는 것처럼 평화로웠고, 밝은 달빛은 맑은 하늘이 은빛을 마음껏 쏟아 내리고 있었다. 바다는 쏟아지는 달빛을 받아 어두움 중에서도 비취 빛을 잃지 않았다. 노를 저을 때마다 은빛이 현란하게 피어 올랐다. 그때 누군가 섬이 보인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저기 서 지쳐 잠든 사람들이 일어났고, 흥분한 선장은 백령도 앞바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대청도와 소청도가 눈 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솟아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윤곽을 드러내는 섬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고마울 수 없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계 목사와 허 목사도 서로 부둥켜 앉은 채 무릎을 꿇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 15: 2~13)”
선장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호탕한 소리로 외쳤다.
“목사님!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죽을 고비에서 목사님이 믿고 의지한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누구보다 이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많은 경험 속에서도 이러한 기적은 처음이요,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라 했다. 불신자였던 선장이 힘있게 사람들 앞에서 증거할 때 옆에서 듣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믿는 사람들은 희색이 만연하여서 “아멘, 할렐루야!”를 연발했다.
멸치잡이를 하는 배를 소리쳐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아직도 대청도에 닿으려면 십 리가 족히 남아 있었다. 배들이 와서 난파선이 다된 배를 끌고 대청도로 향했다. 바람은 이미 끊어져 자체 힘으로 갈 힘이 없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배가 대청도에 닿자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펄떡펄떡 뛰는 사람, 목놓아 우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두 목사는 모래밭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외쳤다.
“우리 다같이 38선을 기적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예배를 드립시다.”
사람들이 목사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토록 감격에 넘친 예배를 이제까지 드려 본 적이 없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그들이 찬송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다. 그들이 14일간을 소망 없는 배 안에서 망망한 바다를 헤맬 때, 아무도 살 소망을 갖지 못했다. 끝없이 몰아 닥치는 폭풍과 파도가 그들의 모든 꿈을 깨버렸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불어 닥친 역풍이 그들을 38선 이남땅까지 데려오리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을 해내신 것이었다. 적어도 두 목사님과 신앙을 가지고 탈출한 사람들이 그것을 확신했고, 선장을 비롯해서 다수의 불신자들이 그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바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사망의 폭풍우 속에서 체험했다. 계 목사는 허은 목사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은 생애를 더 사용할 계획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허은 목사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두 목사의 하늘을 바라보는 눈에는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눈물이 되어 흘렀다. 평생 동안 그토록 깊은 회개와 감사를 해본 때가 있었던가?
마음들이 좀 가라앉자 심한 공복감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식량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불법적으로 38선을 건너온 사람들이므로 경찰의 까다로운 조사를 남겨놓고 있었다. 경찰들의 조사는 잔인할 만큼 까다로웠지만 두 목사들은 그 신분으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간단했다. 그러나 함께 온 42명중 몇 청년들은 사정없이 취조를 당했다. 무수히 두들겨 맞고 간첩으로 오지 않았는지를 자백하라 했다. 두 분 목사들이 가서 신분을 보장하겠노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목숨을 걸고 자유의 땅이라고 찾아 왔더니 너무하지 않느냐고 눈물로 호소하는 피난민들의 간청도 소용없었다.
검문을 마친 피난민들은 비록 누추하지만 자유를 가슴에 안았다. 선장과 배 주인 그리고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은 배 수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대청도에서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배가 수리되는 대로 서울로 갈 것이었다. 두 목사에게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곳 대청도의 면장이 나서서 그들을 인천으로 가는 해군 훈련생의 배를 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해안 경찰의 조사를 통과하여 자유로운 몸은 되었지만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다행히 허은 목사가 서울 안국동교회에서 사역한 적이 있다면서 그곳을 한번 찾아 보자고 했다.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남한의 목사님들에 비해 그들을 방문한 일행은 너무 초라했다. 저마다 한 손에 아이 하나씩을 붙들고 남루하기 그지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가난한 목사들은 얼마든지 이 교회를 찾아 올 것이었다.
감사한 것은 교회는 역시 살아 있었다. 그 교회 권사님으로부터 정성 어린 따뜻한 점심을 대접받았다. 얼마 만에 이런 식사를 대하는가? 함께 데려온 아이들의 볼이 찢어지도록 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권사님의 얼굴에 안쓰런 표정이 스쳐갔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동창 황금천 목사나 이환수 목사를 찾아 보기로 했다. 천신만고 끝에 이환수 목사 댁을 찾았다. 이 목사는 동의학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당분간 그곳에서 자기의 일을 도우면서 사역지를 찾아 보자면서 따뜻이 맞아주었다.
서울은 거지들의 도시 같았다. 삼백만이 북에서 넘어 왔다느니 사백만 명이라느니 의견이 분분했다. 서울은 어디를 가나 가는 곳마다 피난민들로 차고 넘쳤다. 길가든 공터든 틈만 있으면 냄비들을 걸어 놓고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자기도 했다. 여기저기 대소변 냄새가 거리에 넘치고 있었다. 많은 목사들이 이 피난민들을 위한 사역에 뛰어들고 있었다. 천막을 쳐가면서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나그네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는 이환수 목사가 마련해준 방에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목사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을 짓지 않았다. 북한에서 가족이 내려올 때까지 부담 갖지 말고 머무르라면서 조석으로 극진한 대접을 했다.
매달 한 차례씩 황해도 교역자 모임이 열렸는데 그가 거처하는 방이 그때 모임처가 되었다. 황금천, 이환수, 김무봉, 손영환, 박찬목 목사 등이 모이곤 했다. 모일 때면 전도 현황과 교회 기도 제목들을 나누고, 허은 목사와 그의 사역지를 위해서 기도하기도 했다.
1948년 6월 3일, 모임에서 그들을 지방에 파송하자는 의견을 모아 허은 목사를 전북 고창에 파송했다. 김성묵 목사가 추천한 곳이었다. 계화삼 목사는 손연환 목사를 따라 전남 영산포로 내려갔다. 손 목사는 영산포를 중심으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손 목사를 도와 영산포교회에서 보조 사역을 한지 두 달이 지났을 때, 영암읍 교회에서 사역자를 찾는다는 소식이 왔다. 영암에서 영산포까지는 50리가 넘는 길인데, 김동흠 장로와 조 집사라는 분이 찾아왔다. 영암지역은 물 좋고 산수 좋은 곳인지라, 사람도 좋고 교회도 좋습니다. 와서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손 목사는 계목사보다 더 기뻐하였다. 큰 짐을 벗었으니 잔치를 벌이자며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함께 모여 감사예배를 드린 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일터, 영암 교회로 가는 구나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가슴이 설레고 감사했다. 이 격동의 시기에도 하나님께서 곳곳에 교회를 세워 놓으시고 이 연약한 종을 만주에서 여기까지 인도하시는가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나를 도우라”는 음성에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그 동안 사랑의 빚을 진 교회 지체들을 찾아 보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푸짐하게 준비했다. 손 목사님의 헌신된 사랑의 마음이 상에 넘쳤다. 없는 살림에 어디서 그런 음식들을 준비했는지 몰랐다. 그만큼 준비해 놓고서도 준비한 것이 없다고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였다. 새벽기도들을 마친 교회 일꾼들과 영암교회에서 계 목사를 청빙하러 온 김동흠 장로도 함께 식탁을 마주했다. 헤어지는 자리였지만 서로를 흡족해 하였다. 그때였다. 밖에 잠깐 일을 보러 나갔던 조 집사가 헐레벌떡 달려들어 왔다.
“사모님이 왔당게라우. 사모님이!”
“사모님이라니, 아닌 밤에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리?”
“웨메, 손 사모님이 여기 계신디, 계 목사님 사모님 말고 또 있소?”
“웬 난리랑가”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평안북도와 전라도가 얼마나 먼 곳인데 그 많은 식솔과 함께 달려 왔단 말인가? 더구나 남북 사이엔 38선이 그어져 있어 특별히 훈련 을 받은 특공대들이라도 그곳을 통과해 이곳까지 도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들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환수 목사가 설렁대는 사람들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아니 뭐가 그리 놀라워요? 계 목사님 가족 상봉하게 해달라고 꼭두새벽부터 기도하던 때는 언제고·····. 홍해 바다도 가르신 하나님께서 38선 가르는 게 그렇게 어렵겠소?”
잠잠한 채로 모두 고개들을 끄덕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듣고 계셨단 말인가? 계 목사는 고개를 숙였다.
“하나님, 내가 누구오며 내 집이 무엇이 관대 이렇게 환대하여 주십니까?”
철산에 있을 때도 그 불가능한 형편 속에서 장도신 목사님과 함께 나타났던 가족의 모습이 스쳐갔다. 어떻게 이곳까지 살아 올 수 있었을까? 보고 싶었다.
그는 이적이 났다고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서 문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러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거지 중의 거지 모습 그대로였다. 모친과 아내의 얼굴은 한 달 사이에 10년이나 늙어 보였다. 그렇게 보고 싶던 아이들이건만 얼른 안기가 민망하리만큼 피골이 상접했다. 짐승들의 우리에서 꺼내온 아이들 같았다.
우선 목욕탕으로 서둘러 데리고가 여기저기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 식탁에 앉히니 사람 모양이 났다. 손 사모님이 준비한 송별 음식상은 이들을 맞이하려고 준비한 환영 잔칫상이 되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기도만 하고 있었을 뿐 그 기도가 이렇게 빨리 응답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도행전 12:12에서 만났던 베드로 구원 사건이 생각났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이런 기적이 오늘 날에도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삼팔선이 저들에게만 열렸단 말인가! 김일성이 특별 열차를 보내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차가 있다 한들 차비 한 푼 마련할 길 없는 우리 가족 아닌가! 이 대 식구에게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일까? 꿈에서라도 있었으면 좋을 그런 일이 분명 현실로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36편)
계목사를 환송해드리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목사 가족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듣기 시작했다.
허 목사와 함께 계 목사가 38선을 넘어 남하한 후, 계목사 사모는 허은 목사 사모와 함께 월남할 길을 이리저리 궁리했다. 어떠한 길이 가능한지를 알려고 해주까지 두 번이나 다녀왔다. 사리원까지도 다녀왔다. 어느 날은 보안서원에게 잡혔다. 며칠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수상스런 여행이 아니야 하여 심문도 당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해주 방문은 유익했다. 허 사모님은 해주에서 월남하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계 목사 가족은 그 많은 안내 삯을 지불할 길이 없었다. 가족들이 걸어서 월남하는 길밖에 없었다. 해주에서 시무하시는 계순완 목사와 여러 가지로 상의한 끝에 만주에서 월남하고 있는 피난민 신분을 살리기로 했다. 다행히 그들은 만주에서 발급한 양민증을 가지고 있었다.
철산에 돌아오자 마자 온 가족은 만주 피난민으로 행장을 바꾼 뒤 평양 친척집에 잠깐 들려 숨을 돌린 다음, 다시 해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보원서원들이 수시로 그들 곁을 오고 갔다. 모친과 아내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간구하였다. 보안서원들은 마치 그들을 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지나치곤 했다. 해주에서 내린 가족은 계순완 목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참으로 절박한 기도를 밤새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는 죽음의 공포가 기도 사이사이로 뚫고 들어왔다. 새벽까지 몸부림치며 기도를 계속하다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을 붙들고 일어섰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만주에서부터 수없이 부딪혀온 죽음과의 만남, 그 고비들,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이미 하나님의 손에 맡긴 우리 가족의 생명들인데 무엇을 더 의심하랴? 모친의 불 같은 신앙은 더 뜨겁고 견고했다. 아침 일찍이 온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들어섰다. 이제 두 시간만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38선이었지만 그들을 향해 총 뿌리를 겨누고 있는 38선을 향해 정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걸어갔다. 신안진에서 연길까지 갈 때도, 용정에서 두만강을 건너 철산까지 올 때도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14:13)
해주시를 벗어나자 길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38선이 막힌 지 오래 되고 보니 풀이 무성해져서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논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을 만나 길을 묻고. 더듬더듬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농부들은 청단 가는 길을 물을 때마다 놀라워했다.
“청단이요? 38선을 어떻게 건너시려구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참으로 무모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한나절쯤 헤매면서 나가가노라니 어디서 멈추라는 소리가 들렸다. 감시막에서 총을 겨눈 군인 몇 명이 뛰어 나오더니 남루하고 피로한 민간인 것을 보고 총뿌리를 이내 거두었다.
“도대체 동무들 정신이 있는기요? 여기매가 어딘데 어슬렁 거리는기요?”
“서울갑니다.”
모친이 말했다.
“서울이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소리에 검문소원들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일제히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검문소 안으로 피난민 일행을 데리고 들어갔다. 봇짐을 모두 풀어헤치고 몸 검사를 샅샅이 했다. 무엇 한 가지 수상할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이 남루한 아녀자들이 북만주로부터 내려오는 피난민임을 확인했다. 옷차림이나 말이나 양민증이 충분히 보증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이 좋은 북조선을 두고 가난하고 미제국주의 앞잡이인 남조선에 가려는 이유가 뭐냐 캐물었다.
“만주 신안진에서 아들이 사진관을 했는데, 해방 후 서울로 가노라고 떠났으나 삼 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은 연약하고 노쇠한 몸으로 생활력이 없어요. 동회 반장은 출역에 나와야 식표를 주겠다고 하지만 늙고 병들어 나갈 수도 없게 됐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어 품팔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왔지만 더 이상 살 길이 없어서 죽는 셈치고 아들을 찾아갑니다.”
모친의 대답을 들은 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넘어가지 못하도록 잡아둔들 어느 한 군데 쓸모 없이 보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결정 난해사항이었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상의하더니 놓아 주면서 위협적인 한마디를 했다.
“저 경계선에 있는 본부에 가면 당신들은 큰 봉변을 당합네다. 기래도 좋으면 마음대로 하시라요!”
이미 죽으면 죽으리라고 떠난 몸,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남으로 열린 길을 따라 걸어가는 남루한 가족들을 보내며 검문소원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쯤 남쪽으로 가노라니 창고 같은 건물 두 채가 서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신음 소리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방도로 북조선을 탈출하다가 잡힌 사람들이었다. 소름이 끼쳤지만 그들은 태연히 길을 따라 가며 총을 든 보안대원들에게 다가갔다. 총을 든 소련군인도 함께 서있었다.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흐트러짐 없이 정도를 따라 걸어오는 아녀자 일행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겁 없이 당연한 듯이 걸어오는 피난민들을 보지 못했다면서 여러 말로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남조선은 거지들의 천국이요, 미제국주의 개들의 꼭두각시가 판치는 곳인데 그곳에 가느냐? 차라리 지옥에 가는 게 낫다.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앞 검문소에서 고백한 그대로 말을 하자 앞 검문소에 전화를 걸었다. 여러 가지로 심문도 하면서 조서를 꾸며갔다. 몇 시간의 지루하고 초조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달래고 호령을 치고 위협을 하면서 저 창고에 있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지난 밤 저 아래 바다를 건너가다 잡혀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중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가족 일행을 불러 자기들은 해방 후 3년간을 38선에서 검문했지만 그 동안 누구도 그 길을 두려움 없이 당신들처럼 걸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말했다.
“여성 동무의 손을 봐도 일한 손이요, 양민이 분명하니 반동은 아닌 것 같소, 그러므로 남조선에 보내주니 북조선 인민들이 잘 살고 있다는 것과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을 높여 주어야 하오.” 라는 당부를 한 후 군인 한 사람을 부르더니 그 일행을 남조선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열면 닫을 자가 없는 하나님의 큰 손’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천사가 베드로를 위해 감옥 문을 열고 끌어 인도한 성경 말씀처럼, 지금 북조선 38선 감시병을 안내자로 삼아 38선을 건너게 하시는 손길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사는 저 남쪽 감시소를 한 채 가르키면서 “저기로 가시라요. 만일 무시기 소리가 나면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꼼짝 말고 거기 서 있어야 합네다.”하고 살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 병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북쪽 오던 길로 부리나케 돌아났다. 그 병사가 일러 준 데로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노라니, 대한민국 병사가 나타났다. 온 몸을 수색하고 목사 가족이라고 신분을 설명하자 두말 없이 트럭에 태워 청년 피난민 수용소로 보내주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1~14)”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날 38선을 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있을까? 당시 38선은 참으로 건너기 힘든 때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을 위해 38선을 여신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산 넘어 또 산이 있다고 38선만 겨우 넘었을 뿐 계 목사를 찾는 일이 문제였다. 수천만 인구 종에서 어디에 있는지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요즈음처럼 통신기구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1940년대 말이었다. 사람 찾기가 별을 따기보다 힘들었다. 정함이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장안 거리마다 넘쳤다. 여기저기 사람 찾는 광고도 있었지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한 가지 길은 계목사가 목회의 길을 가는 교회 소속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난번 평양에서 계 목사를 찾아갔던 방법대로 교회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베다니교회(현 서울 영락교회)에 피난민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를 들었다. 과연 소문대로 교회 뜰은 온통 천막으로 뒤덮혀 있었다. 천막 어느 모퉁이라도 끼어볼까 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으나 발붙일 틈이 없었다. 난감한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섰다. ‘오늘까지 인도해오신 에벤에셀의 주님!’ 하고 불러 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누군가 다가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김 장로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 사무실에서 봉사하면서 산적한 피난민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 교회의 보호를 받고 있는 모든 피난민이 목사, 장로들의 가족이라 설명하면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받아들일 틈은 없지만 밤이면 자기 사무실이 비니까 그곳에서 자라고 배려해 주었다. 낮이야 여기 저기 찾아 다녀야 할 것이니 밤만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사무실을 정리하며 피난민들을 돌봐야 하는 사무원들에게는 부담을 주어 미안했지만,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했다.
아침마다 거리로 몰려가 피난민들에게 배급하는 주먹밥들을 공급받아 허기를 겨우 채운 온 식구는 낮이면 시장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살피며 계목사 찾아 수없이 묻고 또 물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모는 온 식구와 더불어 백방으로 다니며 교회란 교회는 모조리 훑어 나갔다.
그렇게 찾던 어느 날, 청파동 숭의 학사에서 이환수 목사를 만났다. 그는 계 목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으로 온 가족은 호남선 열차를 탔다. 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정부가 피난민을 지방으로 분산할 목적으로 무료로 갈 수 있는 교통편을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비좁은 호남선 열차 속에서 생존을 위한 열악한 환경에 시달려야 했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로 넘쳤다. 계목사가 있는 곳을 알아 찾아가는 것이요, 나라에서 무료 기차까지 배려한 셈이다. 이만하면 감사할 만하지 않은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명기 33:29]
밤새워 달리던 기차가 장성 갈재굴을 넘다가 헉헉거리더니 이내 멈추어 섰다. 갈재를 넘기 원하는 몸부림을 20분쯤 계속했을까? 석탄 연기는 객실에 가득찼다. 승객들이 고통을 호소하는가 했더니 어린 정식이가 질식해버렸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물을 적신다. 인공호흡을 한다. 법석을 치렀다. 정식이는 겨우 회생했다. 더 이상 이런 고난이 없기를 기도하면서 장성 갈재굴을 빠져 나왔다. 기차가 겨우 영산포에 도착하였을 때, 계목사를 위한 환송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복된 식탁은 가족상봉을 축하하는 기쁨의 잔칫상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1948년 8월 6일, 잊을 수 없는 새로운 사역이 영암에서 시작되었다. 월출산의 거봉이 온 읍내 사람들의 기개를 대변하는 듯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읍내 사람들은 저마다 김씨 가문이다 유림 사상이다 하여 어깨에 힘을 주고 살고 있었다. 양반 후예들은 무너져 가는 가풍을 지키는 최후의 전사라도 된 듯했다.
영암읍교회는 이런 풍토에 뿌리를 온전히 내리기 위해 이미 30년째 악전고투 중이었다. 아직 영적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였기에 50명의 교인들이라지만 큰 힘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이곳 군수도 장로 자제분으로 신앙 있는 가문에서 자란 모양이나 유림들의 텃세를 많이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몇 사람의 목회자들이 이곳을 거쳐갔지만 여전히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자력이 없었다.
계 목사 가족은 그날까지 용광로 속같은 고난의 골짜기를 달려왔으므로 그들과 동행할 면역성을 가지고 있었다. 쌀이 없으면 보리쌀로, 그것도 없으면 고구마나 나물 등으로, 그것도 어려우면 죽을 끓여 연명하면서 복음 사역에 전념했다. 이번에는 몇 달이나 있다 떠날까 먼발치로 바라보던 교인들의 의식이 점차로 불식되어 갔다.
그는 읍내의 위용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는 교회당부터 개축할 결심을 하고 80여 평의 기초부터 닦기 시작했다. 생명을 내놓고 온 가족이 뛰어들어 돌을 골라낸다. 흙벽돌을 찍는다 나서자 교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적은 사상의 대립이었다. 이제껏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교사상의 틈을 비집고 공산주의가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이웃이라 할 여수와 순천에서 대규모 반란 사건이 터져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반란에 실패한 반란군들이 지리산을 타고 월출산까지 스며들었다. 무서운 것은 읍내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신뢰하는데 있었다. 이런 풍조는 이른바 좌경사상이라 하여 당시 지식인층까지도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던 때였다.
계 목사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면서 기독교 복음만이 유일한 삶의 길임을 역설했다. 유교 사상도 공산주의 사상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외쳤다. 그는 누구보다 공산주의자들의 허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 : 12)”
그러나 그의 강한 복음적인 메세지는 당시 사회풍토에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일부 유교적인 사고에 깊은 뿌리를 가진 교인들이나 공산주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그런 반정서는 이내 반교회적이고 반목사적인 분위기를 이루기 시작했다.
여순반란 사건의 여파가 영암을 흔들고 있었다. 더 이상 사역을 추진하기가 어려웠고 교회 신축 사업도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를 외지에서 유입된 목회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악담도 나돌았다. 그는 같은 읍에 있는 지한홍 목사, 전성빈 목사와 연합하여 부흥회도 개최하고 복음의 물을 피우려 애썼지만 여전히 차가운 반응만 되돌아 왔다.
그때 광주 숭일고등학교에서 교목 요청이 들어오자 그는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기로 했다. 2년의 사역기간을 마감하려니 착잡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특히 몇 사람의 충성된 성도들과 저들의 협력은 발걸음을 떼어 놓을 수 없게 했다.
그가 떠난 얼마 후 6.25사변이 일어났고 영암교회는 순교의 장으로 변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장로, 집사를 중심한 교회 중심교우 28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죽창으로 찔러 죽였던 것이다. 읍내에서 좀 떨어져 위치한 우림교회에서는 40여 명이 예배당과 함께 불에 태워져 순교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짐같은 고난을 당하면서 순교했지만, 그들의 평생 소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주께 더 가까이 나가기 원했던”그 소원을 이룬 것이다.
영암읍에서 극성스럽게 일어났던 공산주의자들은 불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의 면류관을 쓰는 예수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 순교의 자리에 계 목사를 남겨두지 않으셨을까? 훗날 그는 그 힘든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덤으로 살게 된 여생이니 하나님 앞에서 저들이 다하지 못한 일들을 감당하며 더욱 충성되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와 함께 영암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도 순교의 면류관을 쓰지 못한 두 증인이 남았는데 김종민 장로와 감광선 장로였다. 그들은 계 목사의 추천으로 숭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 당한 성도의 후손 중에 복음을 가지고 김종효 선교사가 있다. 그는 6.25때 부모님과 다섯 형님이 순교하셨다. 한 사람을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드려도 가문의 영광일진데, 온 가족을 올려드린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는가 묻는다. 선진들이 이땅에서 다하지 못한 일을 감당하겠노라 도미니카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순교자 가정의 대를 아름답게 이어 주께서 피로 세우신 십자가를 도미니카에 세운다. 선교지에 십자가 보혈을 자랑하고,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있다. 적도의 뜨거운 태양열이 부럽지 않은 그 가문의 열정이 후손까지 이어진다. 맏아들 또한 신학을 마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어가는 동역자로 헌신한 것이다. 김종효 선교사는 수도 산토스도밍고에서, 맏아들은 지방에서 현지 교회를 세우고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사모는 사역 중 무서운 열병으로 쓰러졌다. 수년을 반신불수로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열정을 굽히지 않는다.
2년 사이 아홉 사람의 사역자들이 다녀갔다는 그 힘든 교회를 묵묵히 섬기는 저력이 어디서 온 것일까? 사모가 토착 열병으로 반신불수가 되는 고난의 길을 갈지언정 끝까지 복음을 꽃피우겠다는 저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랑하는 맏아들까지 그 고독한 선교사의 길로 가는 헌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순교의 피는 세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김 선교사는 훗날 그의 선교 사역을 수행하면서 복음을 전해 준 계 목사에게 감사의 글을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퍼렇게 선 칼날을 들고 영암교회를 위협할 때도 믿음을 지키고 순교의 면류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일 수 없다. 한두 명이 아닌 스물 여덟 명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 순교를 목도하고도 다시 복음을 들고 적도의 섬나라까지 뛰어드는 후손을 둔 것도 우연일 수 없다.
계 목사는 영암으로부터 순교 소식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우리 기독교인이 한 순간 한 순간을 얼마나 책임 있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지, 교회 생활 속에 얼마나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지. 그리고 순교로 앞서간 성도들의 몫까지 다해 믿음의 경주를 하리라 결심했다.
1950년 3월 20일, 계 목사는 광주 숭일고등학교 교육 목사로 부임했다. 진달래꽃들이 개나리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그를 환영하고 있었다. 광주라는 도시는 그를 포근하게 했다. 묵중하게 무게를 잡고 눈 앞에 좌정한 무등산을 바라보노라면 듬직한 안정감이 생겼다. 전남 노회도 그를 크게 환영했다. 교목 일만 맡을 것이 아니라 광주서부교회까지 겸임하라는 권고를 했다. 김재석 목사가 사역해온 서부교회는 사택까지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생활이 쉽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의 목회도 많은 풍상을 거쳐 오면서 잘 다듬어져 있었다. 교인들은 그의 부임을 따뜻이 환영했고, 젊은 학생들과의 생활 또한 훈훈했다. 만을 6.25가 없었다면 그의 광주에서의 사역은 매우 낭만적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광주에 온 지 석 달 만에 6.25가 터졌다. 민족 전체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기가 막힌 소식들이 들려 왔다. 주일 아침에 38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이어서 서울도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광주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런 기세라면 며칠을 기다릴 것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긴급 직원회가 열려 여름방학을 앞당겨 실시하고 이 난리를 피하고 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피부로 체험해온 그로서는 옳은 결정이라 생각했다. 집에 돌아 온 그의 주변에 식구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앉았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북만주에서부터 동만주, 북한, 평양, 철산, 그리고 38선을 넘어 서울 영암을 거쳐온 험악한 순간들이 눈 앞에 아직 선했다. 이 공산주의 망령은 언제까지 따라올 것인가?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아래서 신앙 생활이 양립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신앙인들이 결정에 혼선을 빚고 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간단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손길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다만 방법이 문제였다. 지금까지 몇 차례고 반복된 것처럼, 막내 아들 정식이는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어가는 두 살배기였고, 위로는 칠순에 이른 노모님이 계셨다. 어린 5남매와 노모를 모시고 이 난리통에 어디로 어떻게 간단 말인가? 지금까지 그 먼 북만주에서부터 겪어온 고민이었지만 여전히 풀 수 없는 숙제였다. 하나님께서만이 그 극한 곤경 속에서 해답이 되어 주셨을 뿐이었다. 다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가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지만 그러나 이번에도 돌보실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할 때 마음에 위로와 평안이 찾아왔다.
“그러나 양떼들은 어떻게 하노?” 노모님이 묻자 “떠나야지요.” 하고 그는 무겁게 대답했다. 교인들간에는 대부분 합의가 되어있었다. 공산치하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현실에 타협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끝까지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교인도 있었지만 건물은 공산주의자들의 거주지나 사무실로 바뀔 것이었다. “먼저 원식이와 떠나세요.” 아내가 가볍게 입을 떼었다. 마음이 가벼울 수 없는 상황에서 가볍게 문제를 풀려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노리는 것은 목사이지 목사 가족은 그 다음이었다. 더구나 유엔이 6.25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국민들에게 한 가지 소망이 되고 있었다. 당장 공산주의자들이 광주에 몰려올 기세였으나 유엔군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잠깐 계 목사가 몸을 먼저 피하고 시국을 보아 가면서 가족이 합하자는 것이 생각이었다.
대가족의 생계 보장도 없이 또 다시 아내에게 노모와 어린 자녀들을 맡겨놓고 떠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아 있는 것은 함께 죽자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에 그는 가족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 드리고 무거운 발길을 남쪽으로 향했다. 목포를 거쳐 제주도로 피신할 생각이었다.
맏아들 원식이의 손을 잡고 광주역으로 향했다. 무수한 피난민들로 붐비는 군중 틈에서 이미 서로 약속한 박찬목 목사(광주 중앙교회 담임) 일행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목포에서 제주도에 가는 배편이었다. 이미 배라는 배는 만선이 되어 있었다. 많은 배삯이 필요했지만 이렇게 많은 피난민과 함께 바다를 건너다가 당할 일을 생각할 때 용기가 나지 않았다. 38선을 넘어 남하할 때 당했던 풍랑이 소름 끼치게 되살아 나면서 발길을 돌렸다. ‘저 바다에 다시 내 생명을 맡기느니 순교의 면류관이나 바로 쓰자.’
돌아온 계 목사를 보고 온 집안 식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오는 공산군을 대항하여 결사적인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광주는 그 방어망 안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계 목사는 더 이상 광주에 망설이고 있을 수 없었다. 당장 코앞에 밀려오는 공산군을 피하기 위해 국군의 보호망 안을 향해서 움직여야 했다. 이번에도 박찬목 목사와 함께 피난길에 나서자 영암에서 함께 광주에 왔던 김종민 장로가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박 목사는 재봉틀 한 대를 메고 있었다. 다리도 뜯어 버리고 몸통만 남은 재봉틀이긴 했지만 쇳덩어리이고 보니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봉틀 하나만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으려니 하여 짊어지고 나선 것이었다. 박 목사의 사모는 재봉틀로 옷을 잘 짓는 솜씨 좋은 분이었다.
1950년 7월 6일 이틀을 꼬박 걸어서야 겨우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고등성경학교를 이끌고 계신 차남진 목사를 찾아가자 그 힘든 난리 가운데에서도 따뜻이 일행을 맞아 주었다. 순천에는 조동진 목사가 매산진 중학에서 교목으로 있었고, 광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많은 목사들이 순천에 모여 들었다. 그들과 함께 며칠을 머무는 동안 이런 저런 대책들을 논의했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국군이나 유엔군이 이곳 순천을 사수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지만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국군이 사수하려 할지라도 순천이 전투 지역화할 공산이 컸기에 대부분 목사들의 의견은 순천을 떠나 부산지역으로 피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박찬목 목사였다. 이틀 동안 재봉틀을 메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몸부림치며 옮기느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어깨는 까지고 등은 부르터서 피멍이 들어 있었으나 버리자고 생각하니 재봉틀은 정말 생명 줄과 다름없는 재산이었다. 재봉틀로 옷만 기워주고 옷을 만들어 주면 먹을 것은 걱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정함이 없고 멀기만 한데 옮길 재간이 없었다. 여기저기 피난짐을 실은 우마차가 지나가긴 했지만 가난한 목사의 재봉틀을 그냥 실어 줄만 한 여유는 없었다. 그는 순천을 떠나 진주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그들의 식솔을 먹여 살릴 재봉틀을 버리기로!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움직일 기운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교훈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계 목사님! 제가 이 나그네 길에서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그분께 생명을 맡기고 떠나지 못했습니다. 재봉틀에 믿음을 많이 두었습니다.”
박 목사의 진심 어린 회개는 주변 동행자들의 심중에 많은 웃음도 주었지만 두고두고 깊은 교훈을 주었다. 박 목사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피난민들이 처음 출발할 때 힘에 닿는 대로 짐들을 챙기고 떠났다가 한 가지씩 버리고 갔다. 보기에 좋고 값진 것이 버려졌으면 바꾸어서 짊어지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은 대부분 피난민들을 구원하기 보다는 짐이 되었다. 동족간에 피 흘리며 싸우는 처참한 전쟁의 와중을 쫓겨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전쟁 중에서도 일하고 계셨다. 수많은 성도들은 정금처럼 빚어져 갔다.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시편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이제 더 이상 세상 멍에를 지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만 메고 가겠습니다.”고 다짐하던 박목사의 비장한 결심이 수많은 성도들의 결심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던 재산들이 그토록 쓸모 없게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민 대열은 인생의 종점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 것처럼 비장했다. 동편에 해가 뜨면 가고 또 가다가 해가 지면 빈집을 찾아 들었다. 금방이라도 주인이 돌아 올 것만 같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어떤 집에는 피난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없었는지 곡식도 조금 남아 있었다. 피난민들은 남은 곡식을 끓여 허기를 면하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러다 지척간에 쫓아오는 공산군들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소스라쳐 깨면 꿈이었다.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마광되었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살륙을 위함이요 마광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네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임함이로다 ~ (겔 21: 9~12)”
참으로 모든 백성이 흔들리는 칼날을 피해 쫓기고 있었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살륙을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카로운 고통 속에서 정신 없이 볶이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빨갱이 때문이라고 했고, 김일성 때문이라고도 했고, 자유당 정부가 부패했기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계 목사는 그렇게만 말할 수 없었다. 자꾸만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난국에 무력하기 그지 없는 자신이 안타깝기만 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 소망을 잃은 피난민 대열을 향해 무엇인가를 외치고 싶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평생을 두고 신봉해온 복음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외치고 싶은 복음은 목까지 올라와서 계속 감돌다가 다시 내려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조용히 주님을 불렀다.
북만에서부터 밀리고 또 밀려 온 계화삼 목사는 이제 최남단 남해안 벼랑에 섰다. 어디를 어떻게 가자는 계획에 따라 이곳 마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 예수를 위하여 일어선 것이 죄(?)라면 죄였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비릿한 냄새를 맡으면서 전국토에 자행되고 있는 살상을 생각했다. 형제가 형제를 향해 총칼을 겨누고 피를 뿌리는 이 잔학상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광주에 남아서 공산군 통치에 떨어졌을 가족들을 생각할 때 기가 막혔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피난길에 온 가족이 나섰다가 노모와 어린 자녀들 때문에 다시 광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스쳐가면서 가장으로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더욱 괴로웠지만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언제나 내 힘으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길렀던가? 오직 주님께서 책임져 오시지 않았는가? 만주에서 두만강을 건너올 때나, 38선을 넘어올 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었다.
‘나의 삶도 나의 생명도, 가정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아직 다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겼다. 상한 마음에 위로가 차 올랐다. ‘가자, 주님이 허락하시면 부산까지라도 가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며칠 후에 부산을 향하여 떠나간다는 배표를 구하기로 했다. 마산도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얘기가 시중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만주에서 잘 알고 지냈던 김창수 목사가 사역하는 곳을 갔더니 그도 짐싸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만 노운거 목사님은 확고했다. 그는 평북 철산에서 목회하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분으로서 밀려 닥치는 피난민 접대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사수하려는 비장한 결의를 갖고 있었다. 공산당을 피하여 신앙을 찾아 나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순교를 각오한 사역자의 결의를 존중해주고 싶었고, 계 목사 자신 역시 끝까지 남아서 학교와 교회와 가정을 사수해야 하지 않았었나 하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 디딜 틈이 없이 가득하게 피난민을 실은 배가 긴 뱃고동 소리를 남기고 마산을 떠났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남해안의 섬 사이 사이를 배는 기우뚱거리며 가까스로 헤쳐가고 있었다. 몇 시간이면 갈듯한 거리를 14시간이나 걸려서 부산항에 도착했다. 항구 도시 부산은 부둣가에서부터 자유롭게 짐을 푼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돌들을 세워 냄비를 걸고 밥짓기에 여념이 없었고, 사람들은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들어볼까 하여 여기저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회들은 연일 피난민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학교든 공원이든 빈틈만 있으면 피난민들로 채워졌다.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이불보로 천막을 피고 그 안에서 웃음 꽃을 피우는 가정들도 있었다. 부러웠다. 가족과 함께 올 수 없었던 것이 못내 마음 아팠다. ‘죽든지 살든지 함께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천막 하나 더 들어설 틈이 없는 부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멀리 고동하기가 어려우신 모친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올망졸망 줄줄이 자라는 아이들,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자녀들을 잘 돌보지는 못할 망정 사지에 버려두고 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끝없이 밀리고 휘돌아 가는 시국의 파도 속에 온 가족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공산주의 사상의 회오리는 극동의 한반도를 온통 휘몰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으련만 엎어지고 깨어지는 와중에서는 고통밖에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너무도 그 고통이 심할 때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 : 3 ~12)”
극한 환난 가운데서도 한국 교회들의 역할은 정극처럼 빛났다. 부산 초량교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회들은 모든 시설을 피난민들을 위해 개방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복음 전도자들이 이곳저곳에 천막을 치고 혹은 거리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계화삼 목사도 우선 봇짐이나 풀기 위해서 여기 저기 교회들을 찾았다. 초량교회 같은 곳은 벌써 교계의 알만한 분들로 이미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변두리를 돌다가 겨우 부민동 고등성경학교 (오정동 목사 담임)를 찾았더니 그곳도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김병석 목사가 그를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 하는 바람에 그 옆자리를 부비고 앉을 수가 있었다. 콘센트집 마루바닥이었지만 허리를 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감사했다. 몇 주야를 부대끼며 밀려온 몸이 불에 녹은 납처럼 풀어졌다. 정부에서 배급하여 주는 양식과 소금국을 끓여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시국의 전개를 예의 주시하고 지내면서 여기 저기 교회들을 방문하여 기도하고 시간을 갖기도 했다. 마산이 공산군의 손에 떨어지고, 포항까지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하여 졌다. 영동방위선이 무너지면 부산의 운명도 하루 아침에 결정될 것이라 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목사와 그 가족들은 감포로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선교본부에서 유엔군과 합의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는데, 부산이 공산화 될 경우 목사들이 제일 먼저 처단 당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감포에서 목사들을 배에 태워 일본이나 미국에 후송하려는 계획이었다.
계 목사도 무덥고 힘든 길을 걸어 감포까지 갔으나 울산해국학교로 가라는 연락을 다시 받았다. 감포는 적화된 포항에서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목회자 가족이 한 마음이 되어 비상시에 내릴 피난 명령을 준비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 시간을 가졌다. 계 목사는 식량 배급을 담당하다가 얼마 후에 십자군 훈련에도 한몫을 감당했는데, 목사 자제 중 20대의 청년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세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밀고 밀리는 난투를 거듭하면서 낙동강은 동족의 피로 물들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너무 쉽게 잃어갔다. 그때 부산 초량교회에서 박형룡, 박윤선 두 분을 강사로 모시고 구국기도회가 열리자 수많은 사람이 울산 대기소를 떠나 부산 초량교회로 달려갔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조국이 공산군의 입에 들어갈 것만 같았다.
“사무엘이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 :2)”
구국 기도회는 한 주간 뜨겁게 진행 되었고, 기도회를 마치면서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아군의 승전보를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들 놀랐다. 하나님께서 그 날카로운 공산군의 예봉을 꺾어놓으셨다는 확신들이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 위에 넘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서 성공했다는 낭보가 들어오자 좌중에는 감사가 넘치고 있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사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제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 7 : 12)”
서울이 다시 아군의 수중에 들어왔다는 낭보가 부산 전역을 울렸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무더운 장마 구름처럼 잔뜩 덮고 있던 절망들이 삽시간에 걷히기 시작했다. 그대신 다가오는 가을 하늘의 푸르름이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웃음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비록 굶주림에 찌들렸던 사람들의 허기가 현실을 어지럽게 하였지만 용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계화삼 목사는 목포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해병대를 책임지고 있는 백 소령을 찾아갔다.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은 십자군을 조직한다, 종군목사를 모집한다 하며 분주했다. 계화삼 목사도 과거에 만주에서 자위대를 지휘했던 경험을 살려 군사 훈련에 협력했다. 그러나 가족의 형편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일에 전념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먼저 가족을 찾은 후에 종군하는 일을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지정된 부두로 오라는 백 소령으로부터의 연락이 왔다. 뜻밖의 응답에 계목사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목포를 향해 힘있게 항진하는 군함 갑판 위에 서서 한없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시 95 : 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 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 96 : 1~2)”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찬송이 나오고 있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내 주를 찬양하여라/ 저 돋는 장한 아침해, 저 금빛 나는 해 내 주를 찬양하여라/ 힘차게 부는 바람아 떠가는 묘한 구름아 내 주를 찬양하여라.
다 외울 수 없는 찬송 가사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부르는 찬송이지만 은혜가 넘쳤다. 남해 바다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가을 하늘빛을 받아 청초한 평화를 펼치고 있었고 한려수도의 더없이 아름다운 섬들이 항해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초조한 피난대기소를 벗어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계화삼 목사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넘쳤다. 지금껏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가슴을 설레며 갑판 위를 거닐었다. 3개월이란 기간은 긴 세월이 아닐 수 있었지만 계화삼 목사에게는 견디기 힘들 만큼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고,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의 굴 속에 떨어진 다니엘처럼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짐들이 하나하나 벗겨져 파도 거품처럼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목포와 광주 사이에 있는 함평군에 아직 인민군이 많이 남아 출몰하는 탓에 목포에 도착해서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타려는 계획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교량들도 곳곳이 파괴된 관계로 당분간 기차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다. 목포 남부교회 조관제 목사나 양동교회 김무봉 목사를 찾았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어서 순천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여수 가는 군함을 타고 결국 순천에 도착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될 가족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었다. 군인 전용열차를 타고 마침내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주역에서 집까지는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마침내 집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마음은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행여라도 무슨 변고가 있지는 않을까? 모두 생존해 있을까? 아니면….. 하지만 망설일 수는 없었다.
“어머니, 접니다. 살아 계십니까?”
문이 굳게 닫혀있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택 문을 세차게 흔들며 소리치는 계 목사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음성을 듣고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놀라움으로 식구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그의 가슴은 안도감과 벅차 오르는 기쁨으로 주체할 수 없이 끓어 올랐다. 눈 앞이 흐릿해 지면서 삽시간에 온 식구를 껴안고 한바탕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온 식구가 무사했던 것이다. 다만 극한 상황의 공포 속에서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계목사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사 몇 사람이 찾아 왔는데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목사님 가족을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교인들 중에는 공산당에 협조하면서 교회 성도들에게 해를 입힌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인민군에 협력했던 그들조차 그 시대의 피해자일 수 있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런 배반자들까지도 부르시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었고 누구는 용서할 수 있었다. 우리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웃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신다. 노래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에서 자유케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웃게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바다를 여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으로 노래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웃게하셨다.
이삭이라 이름하고 온 마을 사람들로 더불어 웃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큰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다윗으로 춤추게 하셨다.
그의 아내 미갈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자유 춤을 두리둥실 추게 하셨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뜨거운 광야의 정오 우물 가에서 그녀는 큰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달음에 마을로 달려갔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고한 그분을 와 보라
그녀를 얽매고 있던 모든 줄은 끊어진 채 그녀는 춤추고 있었다.
수가성 여인으로 웃게 하시는 예수님
그분 곁에 그 마을 사람들은 머물고 싶었다.
아브라함으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신다.
이스라엘로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찬양하게 하신다.
다윗으로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덩실덩실 춤추게 하신다.
석 달간이었지만 광주 시민들이 겪은 고생은 극심하였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당한 연단은 컸다. 공산주의자들이 가는 곳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교회를 무섭게 박해했다. 예배당은 인민군이 머무는 막사로 사용되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민재판에 희생되었다. 안이하게 생각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이 많이 고난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서 어떤 교인들은 타협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인민군에게 협력하기도 했다.
광주가 국군에 의하여 수복되자 가장 기뻐한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새벽기도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평화로운 시절에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오락가락하던 교인들이 불 같은 고난 속에서 정신들을 차렸다. 주일 예배는 말할 것도 없이 모이기를 힘쓰고, 모일 때면 은혜 받기를 사모했다.
그러나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다. 연로한 김 장로는 힘있게 일하고 있던 계화삼 목사를 몇 차례나 곤궁에 빠지게 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피난 봇짐을 꾸리고 광주를 떠났을 때 그는 교회에 남았다. 어떻게 해서든 교회당을 지키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인민군이 광주에 와서 그 교회를 접수할 때까지 김일성 사진 걸어 놓고서라도 몇 번 예배를 드리기도 했는데 그것이 김 장로의 의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틈만 나면 계 목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계 목사의 피난은 그에게 이해해 줄 수 없는 악한 행위였다. 그는 늘 스가랴 11장 17절에 근거해서 계 목사를 삯군목사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만나는 사람에게 수근거렸다.
“ 화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그에 따르면 계 목사는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였다. 계 목사가 공산치하의 여러 가지 무서움을 체험해본 기독교인으로 도피의 당위성을 설명했지만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수받는 데도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계 목사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일했다. 보다 못한 청년들이 일어나서 예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김 장로를 밖에 끌어내는 일도 몇 차례 일어났다.
계화삼 목사는 이 곤고한 가운데 오직 기도로 묵묵히 하나님 앞에 섰다. 대적하자면 꼭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세치 혀로 어떻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랴 싶었다.
흐르는 물에 옷을 행구며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하네.
나의 행위에 티 없다거나
마음에 죄 없다는 말 더욱 아닐세.
아무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순결해야지 싶어
마음을 빨고 서 있네.
자숙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 그는 한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를 괴롭히던 김 장로가 반신 불수가 되어 더 이상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계 목사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결과를 기도 제목으로 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교회만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교목으로 일했던 숭일학교에서도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 6.25동란 중에 학교에 남아 끝까지 교육을 담당했던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일성 치하에서 공산주의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쳤을 망정 남아서 지켰다. 그러나 교장을 비롯한 많은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수많은 난제들이 쌓여 있었다. 동란 중에서 교직원 사례를 받지 못한 교사들의 처우 문제부터 시작하여 복잡하게 인간관계까지 얽혔다.
교목인 계 목사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학교 지도자인 교장과의 완충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기대되었다. 그것은 상당한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별로 은사가 없음을 절감했다.
그는 교목을 사임하고 교회 일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학교는 상당한 퇴직금을 지불해 주었다. 세 칸의 방을 가진 집과 1,500평 남짓한 채소밭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소원을 이루셨다면서 너무도 흡족해 하셨다.
서부교회 사역에 전념하게 되면서 동란 중에 찢겨진 교회 상처가 많이 치료되어 갔다. 동란 중 공산정권에 협력했던 부역자 처리 문제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새벽기도회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밀려들어 왔다. 그들은 전쟁 중에 자신들의 생명 문제를 많이 생각한 사람들로서 깡그리 무너져 내린 전후의 폐허 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갈망하고 있었다. 계 목사는 찢긴 시대의 아픔 속을 걸어 가며 많은 사건을 처리해 가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많이 생각하였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죠? 주인이 올 때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태복음 24:45~46)
‘주님, 제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끝없이 몰려오는 상한 동족들을 몇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쟁으로 황폐된 교회를 세우려면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동족들을 무수히 보고 또 만나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무능한 자신을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말씀이 있었다.
“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그는 왜 지금까지 이 중요한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였는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더구나 신학계에는 자유주의의 물결이 넘쳐오고, 성경유오설이 곳곳에서 대두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다. 신학교를 새롭게 일으키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라 생각하니 큰 소리를 외치고 싶을 만큼 힘이 솟아났다. 그는 이제까지 머뭇거리던 신학교 운영 문제를 자기 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야 이 민족의 상처는 치료된다. 지금 비록 헐벗고 먹지 못해 고통 당하지만, 영혼을 사랑하는 참된 목자들이 일어나면 그 아픔도 치유될 날이 온다. 공산주의자들이 믿음 있는 목사들을 많이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순교의 피를 값지게 하실 것이다. ‘
그는 노회에서 뜻을 같이 하는 몇 분 목사님과 함께 이 문제를 협의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신학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일에 전폭적으로 동의했지만 일 년에 몇 개월 공부시키는 고등성경학교만으로 교회 일꾼들을 길러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형편들이 어려워서 주간에 교육을 실시하기는 힘들 것 같으니 야간에라도 신학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최인원 목사 등과 손을 잡고 대지동(大之洞, 양동으로 바뀜)에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교실과 기숙사를 세워가는데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때로는 손수 교사를 짓는데 필요한 흙벽돌을 만들기 위해 흙을 이기기도 했다. 납처럼 무거운 몸을 이겨내기가 힘이 들었어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라 생각할 때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당시 광주에서 존경 받던 정원모 목사님을 교장으로 모시고 이름하여 광주신학교라 했다.
계 목사는 학감 일도 병행했다. 성경도 교수하였다. 학교가 규모를 잡혀 가면서 박영환, 신복윤 교수들도 모셔왔다. 그렇다고 고등성경 학교 일을 그만 둔 것이 아니었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일도 무거운 사명인데 노회에서는 교육부장, 성경학교와 신학교에서는 교수 직분을 맡았다. 순간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깨달았다. 그 가운데 신학교에서 교수한 로마서 강의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신앙도 훨씬 깊은 체계를 이루어 갔다. 농부가 추수를 하면서 그 열매가 주는 기쁨에 심취하듯 계 목사는 영적인 목자를 키우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이사야 50:4)
하나님께서는 계 목사로 하여금 성경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포근한 품을 제공했다. 만주 신학교를 마치면서 수없이 쫓겨오느라 경황이 없었던 삶과 신앙을 조용히 정돈해 볼 수 있었던 복된 기회였다. 이일저일로 분주한 광주에서의 생활 5년이 하루같이 흘러갔다.
1955년 9월, 목포지역은 자유주의 신학이 범람하고 있었다. 목포지역을 복음으로 지키던 김민봉 목사는 거센 도전으로 고전하다 성경유오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목포노회에서 밀려났다. 충격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공격을 받고 견고한 교세가 한 순간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김만봉 목사는 2백 명이 넘는 교인과 70명의 집사, 7명의 장로가 모여 목포제일교회를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할 호남 중심 교회 중의 하나가 필요했다. 진리와 눈물이 교회에 넘치고 있었다. 긴급한 상황에 놓인 목포제일 교회에서의 초빙이 왔다. 광주에서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역을 정리하기로 했다. 일본 천리교 적산가옥을 넘겨받아 개수한 건물이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교회를 신축하라고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교회는 목사가 말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너무나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복음에 성실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부지런한 교회 지체들이 교회를 충성되게 섬기고 있었다. 평온하고 좋은 교회에 일꾼으로 보내주셨구나 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가 견고하니 자체교회 건축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외부의 연약한 교회도 도울 여력이 있었다.
영암교회가 생각났다. 영암교회는 6.25사변이 일어나기 조금 전까지 사역하던 곳이었다. 비록 그 곳 교인 일부와 성경관이라든지 교회행정 문제에 차이가 있어 자신이 떠나왔지만 애착이 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6.25사변 때 수십 명의 순교자를 내지 않았던가? 황폐하여 버린 영암교회를 생각하면서 지금도 기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전쟁으로 무너져 내린 영암에 개척교회를 세워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젊은이 몇 사람이 이 사역을 위해 자원했다. 한 주간 시간을 내어 단기 전도여행을 떠났다. 북을 매고 노방전도를 영암에서 시작했다.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영암 교회 재건에 눈물로 헌신했다. 강응무 목사를 2대 목사로 파송하였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80명이 모이는 교회로 새롭게 섰다. 교회 지체 가운데는 6.25때 순교한 유가족들이 함께 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목포제일교회 사역 중 슬픈 일도 겪었다. 그 모진 세파를 견디고 믿음과 살아오신 모친의 별세는 계 목사의 사역에 큰 손실이었다. 74세란 연륜은 당시로서 장수한 것이었고, 또 언젠가 헤어져야 할 길이었지만, 그에게는 눈 앞이 깜깜했다. 세상을 반쪽이나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가 목사가 되어 어려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고, 그가 사망의 여러 음침한 골짜기를 헤쳐 나오면서 그만큼 쓰임 받은 것도 어머니 기도 덕이었다. 이 땅에서 비록 험악한 세월을 보내셨지만, 평화롭게 하나님 나라로 떠난 모친을 보면서 그분이 평소에 사모하던 성경 말씀을 되새겼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세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
1956년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총회가 열렸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 41회 총회였는데, 계 목사는 목포노회를 대표한 총대로 참석했다. 총회장 이대영 목사는 중국 산동성 선교를 계승할 선교사를 구한다는 특별한 보고를 했다. 1912년 총회 탄생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선교의 꽃이 미처 피어나기도 전에 중국 본토가 공산화됨으로 선교가 중단 된 채 있었다. 다행히 LA에 사는 재미교포 김선숙 성도가 매월 100불씩 선교비를 후원하겠노라 소식을 보내왔고, 이제 선교 자원자가 필요했다. 우선 대만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중국에 선교문이 열리면 본토에 들어가 선교할 사람이어야 했다.
계 목사를 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이미 만주에서 오래 살았으므로 중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그를 향한 시선은 마치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는 하나님 눈빛처럼 느껴졌다. 사실 계 목사 자신이 내면에서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하고 있었다. 남대문 교회는 자녀 교육비와 여비를 부담하겠노라 자원했고, 파송식도 그 교회에서 하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목포 제일 교회였다. 당시는 선교라는 말 자체가 교인들에게 생소한 때였기에 당회도 여전도회도 펄펄 뛰었다. 사모의 손을 잡고 통사정하는 여전도회장의 만류가 눈물겨웠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황금천 목사가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왔다. 여러가지로 설득함으로써 결국 교회는 눈물로써 그들의 사랑하는 목회자를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는 바울의 고별연설을 생각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 곧,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중략-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23~32)”
1957년 4월 10일 목표제일 교회를 사임했다. 좋은 사역지였다. 교세도 안정되어 있었고 목회 전망도 좋았지만 중국 선교라는 대 사명이 그러나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사실 이를 사임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주에서부터 북한을 거쳐 6.25사변을 치르기까지 고난의 늪만을 거쳐왔던 사역에서 이제야 겨우 안정된 삶이 보장되지 않았던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안정이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또 미지의 땅으로 정처 없이 떠나야만 하다니 말이다. 물론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 모퉁이에서 강렬하게 부딪혀 왔다.
총회석상에서 선교사로 선출되고 임명 받을 때의 심정은 감사와 기쁨, 그것이었고 일사천리로 열리는 선교사로서의 길은 하나님께서 끌고 계심을 느꼈다.
“하나님의 종은 언제든지 주인이 원하시면 떠나는 나그네 입니다. 이 세상에 정처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성에 이르기까지 가고 또 떠나야 합니다. 종에게 이 땅의 기업이란 과분한 짐입니다. 하늘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그의 기업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향해 여러분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끊임없이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경주해야 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시작한 믿음의 경주를 죽을 때까지 했습니다. 그 힘든 경주를 모두 마쳤을 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라 부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쁘게 그를 영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밤 여러분의 인생 경주를 마치신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십니까? 우리 다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도성을 향해 나갑시다. 겨울은 그쳤습니다. 비도 그쳤습니다. 꽃은 피었고, 새는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장, 하나님의 포도원을 향해 일어나 함께 갑시다. 저희들도 앞장서서 나아가겠습니다. 대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까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겠습니다. 일어나 함께 갑시다.”
그러나 막상 본 교회가 베풀어 준 환송회를 갖고 격려와 기도를 받으면서 그곳을 떠났을 때, 더 이상 내 생활의 뿌리가 이 세상에 없구나 생각하니 그 상실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고독이랄까, 허전하다 할까 아니면 불안감이랄까! 몇몇 성도들의 눈물 어린 눈빛을 뒤로 하고 목포를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사모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연신 훔치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는 계목사의 목도 이내 잠겼다.
서울역에 도착했다. 총회 전도부장인 황금천 목사를 비롯한 몇 사람이 소형 트럭을 대기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남대문 교회는 황대원 장로를 보내어 필요한 식품을 준비해 놓았다. 삼각산 기도원에 올라가서 출국하는 날까지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기뻐했다. 산에 오르기 전 남대문 교회에 들려 감사예배를 드렸다. 교회에 감사한 마음도 전했다.
대만으로 출국하는데 필요한 절차도 끝나고 이제 비자가 나오는 동안 기도원에서 기도로 준비만 하면 된다. 기도원 측에서도 계 목사가 선교사로 결정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극진히 환대했다. 그는 한 달간 기도원에 머물면서 틈만 있으면 소나무 그늘이 가리워진 기도반석에 올랐다. 한적한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장차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길을 주님께 의탁했다. 기도원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주님과 함께 지내는 그 시간이 너무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베드로가 변화산에 머물던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그 시간이 얼마나 좋았으면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을까? 이해할 것 같았다.
대만으로 떠날 날은 더욱 가까워 왔다. 그들은 이 산에서 내려가야 했고,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야 했다. 그런데 출국 며칠 전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선교사를 총 책임지고 지원해 주기로 되어 있는 총회가 비행기 삯을 지불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 목사는 이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행기로 못 가면 배로 가면 되겠지 생각했다.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선교사 비행기 삯조차 지불하기 힘들다면 앞으로 어떻게 선교사를 지원할 수 있을까를 묻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대신 그는 선편으로 가기로 하고 여기 저기 배로 가는 길을 찾아 보았다.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부산에서 배로 갈 수 있는 길을 발견 했다. 부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이동찬, 이순경, 장승찬 등의 목사님들이 환송파티를 준비하고 온 가족을 따뜻이 보내 주었다.
1957년 5월 8일, 그에게 있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밝았다. 선교지로 출발하는 날이다. 붕!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리고, 그는 고국을 떠나 선교지로 출발하는 것이다. 70년 전에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배를 타고 인천항구에 도착함으로 선교의 꽃을 피웠던 한민족이 이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계화삼 선교사는 그 개척자로 서 있는 것이다. 초기 선교사로서 선교지를 향해 배 위에 오르는 감회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비록 화물선의 선원들을 위한 방 한 칸이었지만 온 가족이 앉아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다시 갑판에 나가 환송하러 나온 몇 분 성도들과 목사님들의 손짓에 답하였다. 배웅하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에 가려 가물가물 사라져갔다.
처음 순조롭게 출발한 항해는 깊은 바다에 접어들면서 높은 풍랑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38선을 넘을 때 14일을 조그만 배 안에서 부대껴본 경험도 있는데 이 큰 배에서 무엇이 어려우랴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38선을 넘을 때 타고 온 배보다 훨씬 크고 힘도 센 화물선이었지만 깊은 바다에서 몰아쳐 오는 집채만한 파도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 없었다. 하루가 삼 년처럼 깊게 느껴지는 항해를 하고 있었다.
파도에 밀리면서 온 식구가 얼마나 배 멀미를 하는지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얼마나 있어야 목적지에 도착하느냐고 물었더니 나흘이면 가는 길인데 이번 날씨를 보니 한 주일은 고생할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꾹 삼켜버리고 싶었던 총회에 대한 원망이 마음에서 꿈뜰거렸다.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약속대로 비행기 삯을 지불했다면 이 죽을 고생은 하지 않을 텐데……… . 한편으로는 요나 선교사와 같이 하나님 뜻을 거스른 소행이 없는가 돌아 보고, 또 한편으로는 바울 사도가 로마로 갈 때의 고통스런 파선 과정을 헤아려 보면서 섭섭한 마음을 참았다. 선교사가 떠나는데 사탄이 방해하는 구나 생각하니 더욱 기도로 이겨야겠다는 결의가 일어났다.
예정보다 이틀이 늦은 1957년 5월 13일 대만의 기륭항구에 도착했다. 난롯불처럼 후끈거리는 남국의 열기가 온몸을 감쌌으나 사경을 헤맨 그의 일행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땅이었다. 중국선원실의 그 지독한 썩은 냄새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살 것만 같았다. 기륭을 둘러싸고 우뚝우뚝 선 상록수들이 무더운 기운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었다.
경찰들의 검문을 마치고 나오니 부두에 환영 나온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서 있었다. 누구를 환영하러 저렇게 어린 학생들까지 나왔나 하고 주의를 두리번거리 노라니, 그 중 한 사람이 “계 목사님 가정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답했더니 반갑다고 환영객이 몰려들었다. 알고 보니 한인협회와 교회 식구들이 어린이들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러 온 것이었다. 울컹한 무엇이 목에 걸렸다.
‘주님, 이 미천한 종이 무엇인데 이렇게 환대하십니까?’
환영은 부두에서 끝나지 않았다. 교회에서 푸짐한 음식과 과일들을 마련 해 놓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음식과 과일들을 맛보면서 이 인정 어린 교회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 드렸다. 사람들은 어떻게 배를 타고 대만까지 올 수 있었느냐면서 신기한 표정들을 짓기도 했다. 엿새 동안의 악몽이 한꺼번에 다 풀리면서 마음이 평온해 졌지만 휑하게 들어간 아이들의 눈을 보는 순간,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국 교포들이 사는 곳이면 그렇게 하듯이 대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대만에는 교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다만 목회자가 없었다. 정성원 권사는 그 교회의 개척자로서 그녀는 상해에서 남편 봉명석씨를 사별한 후 대만으로 이주해온 분이었다. 계 목사의 누님과 함께 평양 숭의여중을 다니신 분이라니 더욱 반가웠다. 상해에서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였던 분으로서 대만에 도착해서도 남편을 위해 쏟을 정성을 모두 교회에 쏟고 있었다.
계 목사에게 선교비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 미국의 김현숙 권사도 사실은 정성원 권사의 친구였다. 정성원 권사가 미국의 김현숙 권사에게 대만교회의 형평을 말하자 김 권사는 매월 100불씩 선교비를 새로 오시는 계 목사에게 지원하기로 했고, 선교비 1년 분 헌금을 선불했다. 따라서 대만선교는 헌신적인 정 권사와 김 권사의 헌신 위에 세워져 있었다. 계화삼 목사는 정 권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대만 한인 교회를 기초로 선교정책을 전개하기로 했다. 정 권사는 이미 수도 타이뻬이와 기륭, 고웅 세 곳에서 전도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계 목사는 정 권사와 함께 선교 전략을 검토하면서 수도 타이뻬이를 선교 본부로 삼자는데 합의 했다. 기륭과 고웅은 모두 항구 도시여서 수도를 선교 거점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계 목사보다 3개월 먼저 도착한 박락규 목사였다. 그는 어업에 종사하는 우리 교민들을 상대로 교회를 세우려 했다가 정 권사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도 타이뻬이로 사역지를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은 교민과 학생들인데 교회가 두 개라니 찬성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좋은 길이 없었다. 결국 그는 타이뻬이로 옮겼고, 대만 국립대학과 정치대학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립했다. 계 목사가 수도 타이뻬이에 교회를 세워 선교전략을 펼치려는 계획은 차질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달이 못되어 박락규 목사가 계 목사를 찾아왔다. 더 이상 타이뻬이에서 목회를 할 수 없어 왔으니 처음 계 목사가 권면한 대로 고웅 교회로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실없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지만 시골 교회야 감당치 못하랴 싶어 소개장과 함께 보냈다. 그러나 일 년도 채 못되어 계 목사는 큰 후회를 해야 했다. 박 목사는 그곳에서 어떤 교인과 불미한 사건을 일으키고 범죄자로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9개월 동안 한국을 서너 차례 다녀왔고, 결혼을 주선하며 미선교부와 함께 일한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아무튼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선교지에 와서 물을 흐릴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속이 상하기도 했다.
어떻게 되었든 계 목사는 타이뻬이에다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대북한인 장로교회를 세웠다. 1957년 6월 26일이었다. 독립운동을 힘있게 전개했던 김홍일 장군이 대한민국의 대사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열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와 더불어 홍성욱 영사의 부인도 예배에 참석했다.
주변의 중국인 교회들도 계 목사의 교회를 세우는 취지에 깊이 동감한다면서 적극 협력을 했다., 예배당을 빌려 사용하는 것도 흔쾌히 허락했다. 모리라는 일본인 부흥사가 설계하였다는 그 교회는 한국교회의 모형을 본떴다면서 서로의 만남을 기뻐했다. 유학생들도 교포 가족들과 섞여서 다채로운 행사를 벌이면서 즐거워했다. 12명의 유학생들, 원창식 씨, 이동근 씨, 박문찬 씨, 김사통 씨 등 모두 58명이 교회를 이루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땅부터 복음화시키리라 생각하니 힘이 났다. 선교를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교회 건축을 교인들과 논의 했다. 빌려 쓰는 교회에서는 예배나 겨우 드릴 뿐 선교활동을 밤낮없이 전개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했기 때문이다. 새로 부임한 김신 대사나 김용권 영사도 모두 신자들이어서 좋았고, 해외의 동포들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접촉한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 김신 대사를 중심으로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대만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런 선교 취지를 이해하고 적극 협력해 주었다.
이만 불 가량의 헌금이 모여졌다. 기쁨이 온 교회에 넘쳤다. 전에 없던 생동감이 교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당시 이만 불이면 엄청나게 큰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천여 평의 대지를 수도 타이뻬이에 마련할 수 있었다. 마음과 마음을 합하여 믿음 안에서 나가노라니 응답이 있고 너무 기뻤다. 대사관 직원들도 교회 일을 자기 일처럼 도우며 오직 한 민족만이 해낼 수 있는 결실이라면서 서로 기뻐했다.
그러던 1959년 가을이 오던 어느 날, 싸늘한 바람이 한국 교단으로부터 몰아쳤다. 9월 총회에서 WCC가입 문제로 인하여 교단이 분열된 것이다. 통합과 합동이 그것이다. 양측이 다 이름은 합하자는 뜻이 확실했지만 합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골과 상처를 서로간에 내고 있었다. 차라리 통합이니 합동이니 하는 이름보다 나은 명칭은 없었을까? 북한과 남한이 이념의 분쟁으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싸우던 것보다 더 추했다.
선교사로 파송된 계화삼 목사의 입장이 어려워졌다. 어느 한편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전혀 무관한 곳에서 발생한 분열이지만 그 영향은 가장 컸다. 선교비를 지원받아야 하는 그로서는 어느 한 진영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갇힌 인민군들이 남북한을 선택해야 했듯이 그도 또한 어느 한편에 서야 했다. 양 진영에서 그를 향한 손짓이 강했다. 선교사가 많지 않았던 그 당시에 계 목사는 귀한(?) 존재였다. 현실을 고려하자면 당연히 통합측에 서야 했다. 선교비를 지원하던 교회와 지도자들이 통합측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합동측에 더 가까웠다. 세계 교회협의회(WCC)의 이념들이 그에게는 낯설었다. 그는 단순한 성경적 신앙을 가지고 선교에 헌신한 터였다.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그와 신앙노선을 함께 한 친구들일 대부분 합동측에서 손짓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합동측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결단은 즉각적인 현실 문제를 일으켰는데 지금까지 비교적 성실히 오던 선교비가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편으로 오면 선교비를 두 배로 지급하겠다고 몇 차례나 독촉하던 분들이었는데 말이다. 선교비는 두 달이 가도 세 달이 지나도 종내 무소식이었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주워온 나뭇조각을 보고 어느 파선한 배의 한 모퉁이에 붙었던 것이려니 하는 생각과 함께 대만 선교도 이렇게 파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이 일어났다. 그가 이렇게 우려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동역자 정 전도사와의 관계가 미묘하여 지고 있었다.
1957년 계 목사는 본국 선교부에 요청하여 정 권사를 전도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 받은 적이 있었다. 특별히 신학을 그녀가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 목사의 지도를 받고 또 선교지인 점을 감안하여 이해를 해준 배려였다. 그러자 여전도회에서는 정 전도사에게 선교비를 보내주기로 결의했다. 좋은 출발이요 동역이었지만 총회가 갈라지자 정 전도사에게도 난처한 입장이 닥쳤다. 그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던 여전도회 회원들이 대부분 통합측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모여 의논한 끝에 정 전도사의 선교비도 중단시키기로 했다. 합동측 선교사 밑에서 일하는 전도사에게 선교비를 지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 전도사가 선교비를 받지 못하는 것이 계 목사 때 문이라는 소문이 교인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좋지 못한 소문은 꼬리를 물고 달려가 계 목사가 못된 사람이라는 인신매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소문을 까마득하게 모르는 계 목사로서는 사람들의 표정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특히 정 전도사와 친밀한 사람들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겹치면서 대만의 선교비전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중국 선교의 모체가 되어야 할 타이뻬이 교회는 더 이상 건축 문제를 진전시키지 못할 상황에 떨어졌다. 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건축 문제를 책임지고 일해오던 김 대사가 계획의 변경을 발표한 것이었다. 요지인 죽, 건축은 먼 장래를 내다보고 지어야 하므로 교민들이 많이 사는 기륭에 짓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선교정책을 어떻게 버려두고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고 발언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계 목사로부터 많이 멀어져 있었고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겨우 반액을 양도 받아 가지고 타이뻬이에 조그만 교회와 정원을 마련했다. 백여 자리가 들어서는 좁지 않은 공간에 사택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한번 분열된 교인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갈라져 가고 있었다. 타이뻬이와 기륭을 버스로 오고 가면서 주일마다 예배를 인도하던 계 목사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기륭교회 교인들의 동태는 심각했다. 어민들로 구성된 기륭교회는 정 권사가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늘 돌보아 온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정 전도사 편에 너무 깊이 기울어진 나머지 계 목사를 도둑처럼 대하였다.
계 목사는 정 전도사와 만나서 현재 당한 어려움들을 심각히 논의한 끝에 대만 선교 협약을 세웠다. ‘ 총회가 갈라졌고, 두 교역자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할 수 밖에 없지만 대만 선교까지 갈라질 수는 없다. 교인들에게 개인의 입장을 선동해서 교인들을 분열시키지 말자. 총회 손님들 접대는 어느 진영에서 오든 합력하여 하자.’ 이런 요지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이었을 뿐, 서로간에 사역하는 영역이 구별되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총회에서 오는 메세지가 두 사역자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맹세를 하고 통일된 선교정책을 밀고 나가자 했지만 동상이몽을 꿈꾸는 셈이었다.
정 전도사가 자신을 후원하는 여선교회와의 대화를 원활히 트기 위하여 귀국했다. 계 목사는 이때 여 전도회에 특별 청원서까지 써 주었는데 비록 계 목사가 그 총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정 전도사를 그들이 계속 후원해 주도록 요청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 전도사는 그 청원서를 여전도회에 내 놓고 계속 선교비를 후원해 주도록 요청했다. 한경직 목사는 여러 전도 회원들을 권면하여 그 일을 계속하도록 했다.
‘과거 우리 나라 선교사를 보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두 분이 서로 다른 교파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인천에 내렸고 서로 분란 없이 선교를 잘했다. 하물며 우리는 같은 장로교요, 계 목사님은 결코 싸움을 좋아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교비는 계속 보내는 것이 좋겠다.” 이런 요지였다.
그러나 문제는 대만에서 더욱 커지고 있었다. 기륭교회 예배를 인도한 후 계 목사가 타이뻬이로 가는 버스를 타려하자 기륭교회의 남녀집사 몇 사람이 같은 버스에 오르는 것이었다. 함께 예배 드리러 가는가 생각했는데 예배를 마치자 교인들을 좀 소집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직들이 모인 자리에서 계 목사를 정면으로 공박했다. 대만의 모든 교회가 정 전도사의 수고 위에 설립된 것인데 모든 영광을 계 목사가 독차지 하였고, 정 전도사는 고난만 당한다는 것이었다. 19개 항목으로 조목조목 낭독하는 내용은 가관이었다. 그 죄목에 따르면 계 목사는 정 전도사의 선교비를 못 오도록 한 자였고, 이번에는 정 전도사를 아예 한국으로 쫓아냈다는 것이었다. 이성애 집사 등 몇 사람이 일어나서 기륭교회 일을 왜 타이뻬이 교회에 와서 말하느냐고 끊었지만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계 목사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중국 대륙을 향한 선교 열정을 가지고 대만땅에 도착한 지 이 년여! 당장이라도 날아 오를 것 같던 선교 정책이 암초에 걸린 것이었다. 그대신 자신은 말할 수 없이 못된 놈이요, 사기꾼처럼 공박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선교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싸움인 것을 익히 들어왔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헤매는 것을 성경에서 잃었었고, 사탄의 공격은 최전방의 선교사부터 시작되리라는 것도 각오했던 바였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선교 정책이 난파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정 전도사는 신실한 동역자로, 중국 선교의 동반자가 될 것으로 확신해왔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게 늘 감사해 왔던 바였다. 한국 총회는 그들을 지원하는 후방의 주력 부대로 생각할 때마다 든든하고 믿음직 했었다. 생활과 선교 정책 수행이 어려울 때마다 그 어려움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형제였는데 후방 주력 부대인 총회로부터 폭격을 당하는 꼴이 되어 있었다. 힘을 합쳐 동역해야 할 동역자가 등 뒤에서 비수를 가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기륭교회 교인들의 횡포는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바다와 싸우면서 생존하는 교인들의 성격들은 매우 직선적이었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에 옮겼다. 엊그제까지 말씀에 은혜를 받던 그들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소문의 파도에 휩쓸려 정신들을 차릴 수 없었다. 계 목사는 바닷가에 나가 목놓아 외치고 외쳤다.
“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왜 한국 총회 분열에 희생양이 되어야 합니까? 제가 언제 정 전도사의 선교비를 가로챘으며 선교비를 중단시켰습니까” 언제까지 저는 이 애매한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합니까? 중국 대륙의 문은 까닥거리는 기척도 없는데 우리 선교 정책은 여기서 좌초되어야 합니까?” 바다는 대답이 없고 대신 세찬 파도가 거친 바람을 타고 발등을 쳤다.
그날 밤, 새벽 두 시쯤 되었을까, 중국 해군이 권총을 차고 들이닥쳤고, 술에 만취한 기륭 청년들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 “ 다쓰다쓰” 쏘아 죽이겠노라고 온 집안 식구를 협박 공간하는 터에 어린 아이들은 와들와들 떨었다. 그 앞에서 버티던 아내가 나무 토막처럼 무너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내일 밝은 아침에 이야기하자고 간신히 달래 보내고 아내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전부터 가끔씩 나타나던 고혈압 증세가 그날로부터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 주님, 제 처자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가 잘못할 일이 있으면 제 영혼만 거두어 가십시오., 할 일을 제대로 시작조차 못하였는데 웬 잡 것들이 이렇게 몰려듭니까?”
그는 간밤의 사건을 교회 일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정 권사가 뜻한 대로 일을 마치고 대만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어느 날은 저녁 예배를 기륭교회에서 인도하고 나오는데 남녀교인 몇 사람이 둘러 쌓았다. 험한 말로 악담을 하는가 하면 침을 뱉는 사람까지 있었다. 교회 사택에서 떠나라는 것이었다. 주먹을 들어 치는 사람, 옷을 찢는 사람,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제법 자라서 청년이 되어가던 아들들이 아버지를 위해 주먹을 휘두르려 하는 순간 계 목사는 그들을 강하게 제지했다. 수없이 오가는 저주와 악담과 폭력 속에서 그는 오직 한 성경 말씀만 생각하고 있었다.
“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님, 왜 이런 고난이 저에게 닥쳐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감사할 뿐입니다.”
또다시 기절하지 않도록 사모를 대피시키고 정 전도사를 불러오게 했다. 정 전도사를 데려오라는 말에 횡포를 부리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자리를 뜨자 대신 구경하러 나온 대만 사람들이 웬 일이냐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우상의 신전도 아닌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어 온 목사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저런 봉변을 당하는가 하는 눈초리였다. 정 전도사가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찢겨진 계 목사의 의복과 봉변당한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서 있었다.
“ 정 전도사,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총회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교인들에게는 알리지 말자고 다짐한 지가 몇 달이나 되었다고 이 상황을 야기시킵니까?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밖에 표현치 못한 단 말이요?”
그때 상황은 정 전도사의 몇 마디 말에 따라 얼마든지 호전될 수 있었다. 그가 발벗고만 나선다면 처음 연합하여 선을 이루려던 선교정책이 다시 전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끝내 호전되지 않았고, 그가 사택에서 나가지 않는 한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계 목사에게는 당장 옮길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찢긴 옷을 보관해 두고 총회 책임자들에게 보낼까 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해지기까지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눈물을 씻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기륭교회 헌당식 때 교회 공로패를 만들어 정 전도사에게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교사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했다.
그 날 밤 그는 하나님 앞에 심각한 모습으로 엎드렸다. “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이러한 수모와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선교지에 온 지 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무엇이 잘 못된 것일까? 이 모든 것이 정말 교단 분열 때문일까? 정성원 전도사가 잘 못 처신한 것이 모든 이유가 될까? 혹시 나에게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을까?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선교 대상을 한인 교포에 한정하여 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만에 보내신 것은 중국인을 선교하라는 것이었는데 자신은 5년간 말하기 쉽고 통하기 쉬운 교민들만 상대로 모든 사역을 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려하신 사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일어났다.
‘ 그래, 중국인 선교에 주력해야 돼!’
그렇게 생각하니 그와 교제를 갖고 있는 몇 사람의 중국인 전도자들이 생각났다. 맨 먼저 주화팅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는 한국인 선교사로 산동에서 일했던 이대영 목사가 전도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학교까지 부부가 함께 마친 신실한 복음 전도자가 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당곤, 왕명은 전도사 등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협력하여 중국인 선교에 주력하기로 작정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한결 삶이 가벼워졌다.
1961년은 그의 선교 방향 설정에 중요한 해가 되었다. 고난은 쓰렸어도 좋은 방향을 찾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선교사가 아니라 전도 목사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륭교회 교인들의 무례하고 창피스런 추태가 타이뻬이 교회에 전해지자 그 교회 지체들이 일어났다. 특히 김신 대사의 부인 임 여사의 자상한 마음씨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선교를 위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준비 해 놓은 헌금 중 천불을 떼어 사택을 마련해 주었다.
1963년 11월, 갈등을 겪던 기륭교회를 정 전도사에게 맡겨 선교하도록 했다. 계 목사는 수도 타이뻬이를 계속 사역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모가 쓰러졌다.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모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사모는 교회 수난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
특히 박성권 전도사 방문 사건은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정 전도사가 추천하여 타이뻬이교회 전도사로 일하도록 한 그곳 신학생이었다. 한국 총회 여전도회에 추천하여 그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도록 해놓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전날 사모를 찾아와 요즈음 그의 생활비가 한국 총회에서 오지 않는데 계 목사님이 어떻게 한 것 아니냐고 따지다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을 겪으면서, 이런 일들로 인해 사모의 병세는 더욱 악화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모의 병을 참으로 안타까워하며 위로했다.
이제나 나을까 기대하던 사모의 건강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아지기는 커녕 계속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머리가 깨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병원을 찾아 의사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 싶은데,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통원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다행히 교인 중에 남편이 고교 교감인 부인이 발벗고 나섰다. 타이뻬이 대학 병원에 입원시키고 진단을 받게 했다. 치료에 별 차도가 없었다. 이번에는 미해병대 동양연구소 병원이 용하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곳에 가서 진단을 받게 했다. 병에 대한 뚜렷한 답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다. 요양소가 좋을까 하여 대만 요양소에 들어갔다. 좀 길게 시간을 잡고 요양에 들어갔다. 사모는 자력으로 걸을 수도 없었다. 손수레에 중환자가 된 사모를 싣고 요양원을 향하는 계 목사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1964년 6월 23일! 그 날은 계 목사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영원히 잠들었다.
누가 그녀를 외로운 선교지에 묻게 하였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견딜 수 없는 질병으로 몰아갔을까? 장례식에 온 누구도 이런 의문에 대하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은 사모가 북만주의 혹독한 겨울 날씨도 거뜬히 이겨냈었고, 공산 정권의 잔혹한 핍박도 넉넉히 이겨낸 신앙의 용사였다는 것이다. 38선 경계선을 어린 자녀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당당하게 건너온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런 담대한 사모를 아직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꺾어버린 장본인은 누굴까? 계 목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아브라함 품으로 갑니다” 떠나는 그녀의 평온한 모습 속에 또 다른 38선을 건너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8:35-36)
사모에게는 너무도 적합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도 머지않아 자랑스런 아내가 건너간 38선을 그처럼 아름답게 건너리라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찬송을 부르며 예배드리는 그 곁에서 자녀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있었다.
“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
한 줌의 재로 변한 아내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는 계 목사, 그의 머릿속에는 앞서 간 부인과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세 살 때, 그녀는 부친을 잃었다. 신학문 보급이다, 독립운동이다 하여 늘 가정을 밥 먹듯이 떠나 살던 어느 날, 부친이 가정에 찾아와 어느새 세 살박이가 된 어린 딸을 무릎에 앉혔다. 깊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일순간이었다. 어떻게 알고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쏜살같이 담장을 넘어 도망쳤다. 일본 순경의 거센 추격을 피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는가 했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소련행 기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의 부친을 신학문의 선구자요, 독립운동가요, 재능이 여러 가지로 출중하신 분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였지만, 그녀의 가정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생활만 더 힘들고 고될 뿐이었다. 결국 남은 식구는 더 버틸 여력이 없어서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로 온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장성한 그녀의 진가는 계 목사와의 결혼 생활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북만주에서, 동만주에서, 북한 철산에서 또 남한 광주에서 끈질기게 목을 조여오는 공산정권의 마수를 잘도 버텨냈었다. 계 목사를 늘 먼저 피신시킬 때마다 가진 돈을 모두 쥐어주면서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었다.
“ 당신만 먼저 탈출하세요, 이곳 식구는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공산당이 노리는 것은 당신 목숨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녀는 기꺼이 보따리 장수로 변했다. 보따리 장수는 늙은 시어머니와 6남매 자녀를 살리기 위한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탈출 경로를 익히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녀는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뜻을 보여 주시기를 기다리곤 했다.
“ 답답하다.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주지 않으시니·····.”
그 자손들이 자주 듣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으시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면 백주에 38선이라도 두려움 없이 건너갔다. 38선을 지키고 있던 북한 군인이 당돌히 다가온 그녀를 향해 호통을 쳤다. “ 아주머니 정신이 있소? 개만 지나가도 총알이 콩 튀기듯 하는 38선을 무얼 믿고 오는 거요?” 그러나 그 호랑이 같던 군사가 사모의 몇 마디 설명을 듣고 “ 해가 지면 이 길로 걸어 가시고, 돈이나 귀중품은 잘 간수하시오. 소련군이 알면 모두 끝장이오.”
그녀는 겉으로 볼 때 분명 평범한 여성이었으나 그녀가 아니었으면 식구 중 누구도 38선까지 넘을 사람은 없었다. 공산정권의 그 강한 쇠사슬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했다. 생명뿐만이 아니라 계 목사가 목회자의 길에 선 후에는 모든 생활비까지 벌어가며 가족을 부양했던 그녀였다. 밭을 일구고 보따리 장사를 하기까지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나 했다.
6.25때는 계 목사를 부산에 피난시켜 놓고 엿장수까지 했었다. 그러나 틈만 있으면 성경 보는 일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선교지에서도 틈만 있으면 불쌍한 이웃을 섬겼다. 밭에 콩을 심고 그 콩으로 된장을 담그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눠 주곤 했다. 가난한 유학생들을 데려다가 닭죽을 몇 차례고 먹인 죄(?)로 사모가 유학생과만 어울리고 교인들은 돌보지 않는다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면 옷 한 벌도 사 입은 적이 없었고, 자신을 교회 앞에서나 남편 앞에서 내세우는 적도 없었다. 새벽기도부터 어려운 심방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늘 계 목사의 살아있는 분신이었다. 아프고 싶어도 아플 틈이 없었고. 마음 편하게 누워보지도 못하고 살던 아내였다.
“계 목사! 나와! 네가 뭔데 교회를 차지하고 있느냐?”
밤마다 술병을 들고 찾아오던 무지한 선원들, 심야에 권총 들고 위협하던 괴한, 남편들을 바다에 보내고 밤마다 과부 정 전도사의 집에 모여서 수군거리는 아낙네들·····.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했다. 하나님을 뵙고 싶은데 나타나시지 않으니 답답하다고 했다. 예수님 없이 죽어가는 같은 병실의 환자를 불쌍하다 챙겼다. 어느 날은 천사를 만났다고도 했다. ‘ 하나님을 뵙고 싶으면 세상 욕심을 끊어라. 네가 욕심이 많아서 데려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자식 욕심을 끊지 못하겠다고 했다.
머리맡에서 잠이든 맏딸 원숙을 깨워서 아버지를 불러오라 했다던 아내, 후회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라도 아버지를 불러오라고 했다더니 “먼저 아브라함 품에 간다”면서 이내 잠이 들었다. 평생 가야 로션 한 번 발라보지 못했던 아내가 그날은 어떤 화장한 얼굴 보다 더 고와 보였다. 살았을 때 곧잘 보던 주름살 조차 보이지 않았다. 천사가 그런 얼굴이겠지! 어디 얼굴만 천사 같은가? 터질듯한 머리를 동여매고 “ 이 손이 썩기 전에 고추장이라도 담궈 놓고 가야겠다.”던 그 마음은 천사가 아니었던가? 계 목사는 교회당 바닥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닿도록 엎드렸다.
27. 그러나 꺼버릴 수 없었던 선교의 열정
계 목사의 생애에 계속되는 길고 어두웠던 삶의 터널의 끝은 사모의 죽음과 함께 끝났으면 싶었다. 그는 남은 자녀들과 함께 사모 없는 제 2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늘 곁에 서 있었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그의 짐을 나누어 지던 사모가 이제는 더 이상 그 곁에 없었다. 사모의 빈자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한없는 공허와 고독함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자녀들은 비틀거리는 아버지가 안타까웠는지 귀국해서 새롭게 목회를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떠냐 제안 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면 할수록 그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곳에 보내신 뜻이 있으신데,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대만에 파송하신 까닭은 중국인, 특히 대륙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한 전초기지를 건설하는 단계에서 커다란 암초에 버린 셈이었다.
‘나는 혹시 믿음 없는 대만 교민들 위에다 선교기지를 세우려 했던 건 아닐까?’
대만 교민들 속에 이미 깊숙이 뿌리 내려온 정 전도사, 총회가 파송한 계화삼 선교사, 머리가 둘이었다. 키를 넘겨주지 않은 정전도사를 두고 교회를 운영하다 보니 교회는 늘 암초에 걸렸다. 게다가 한국 장로교단은 합동, 통합으로 분열하여 대만이란 선교지를 자기 편으로 삼으려는 욕심들이 두 사람 사이에 파고 들었다. 그 결과 사역자와 교인들은 두 교단 사이에 끼어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사모까지 잃어버리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이제 어떻하면 좋은가? 어떻게 이 총체적 고비를 넘어갈 것인가?
중국인 중심의 선교에 전념하기로 방침을 정했던 그는 이제 과감히 실행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교민 중심의 선교를 아주 내려놓으리라. 나는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이니 현지 원주민 중심의 선교로 전환하리라.
교민들 목회는 정전도사님께 맡기고, 나는 대만 원주민들을 선교하리라 내려놓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면 서로 부딪힐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불가능하고 절망적으로 생각되던 중국 선교란 거함을 암초 위에서 뒤로 빼냈다.
그는 이렇게 선교 정책을 정리한 후, 한국을 방문했다.
이번 그의 한국 방문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교단이 그의 선교 정책을 받아들이고 추인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자녀를 위해서였다.
이제 장성한 자녀들 결혼과 독립시킬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
장녀 원숙을 성결교 총회 총무로 일하던 김동완 목사의 장남 김성헌과 결혼시켰다. 결혼식은 1964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김윤찬 목사의 주례로 이루어졌다. 큰 위로와 기쁨의 순간이었다.
계 목사에게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 곧 귀한 사모를 선물로 허락하셨다. 준수한 인품과 열정적 신앙으로 칭찬을 받으며 사역하던 이선직 전도사를 사모로 주신 것이다.
1965년 2월 8일자 기독 신문은 이선직 전도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인물 평을 간단히 싣고 있다.
“계화삼 선교사 사모가 되신 이선직 여사는 8년동안 국내에서 전도사로 시무할 때 교회에 많은 덕을 세웠고, 담임 목사를 기도와 심방과 전도로 정성스럽게 봉사하여 교회를 부흥되게 하는 정열을 다한 귀한 하나님의 여종이시다.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신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다.”
기독신보의 이선직 사모에 대한 기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 본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계 목사는 복된 이 사모와 새로운 꿈을 가지고 선교지에 도착했다. 이 사모는 6남매의 자녀 양육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평생 그들을 보살피는 일에만 전념했다. 계화삼 선교사와 이 사모 슬하에 자녀가 없는 이유다.
계화삼 선교사를 아는 사람들은 척박한 선교사 생활에 자녀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다는 데 생각을 같이 한다.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 저마다 호소하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계목사의 자녀 희생은 극심했다.
6남매 중 누구도 제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격동기 생사를 건 탈출과 새로운 환경에 부적응을 반복해가며 자녀들이 바로 자랄 기회는 줄어만 갔다. 만주, 한국, 대만을 짧은 기간에 거치고 있기 때문에 중국어 한국어 어느 한가지도 자유롭지 못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으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야 했다. 사회에 바로 적응할 기회도 놓쳤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브라질에 이민을 떠났다.
첫째 딸은 한국에 출가시켰으니 이제 이식, 형숙, 정식이 대만에 남아 있었다. 이식은 벌써 수산 전문학교 졸업반이 되어 실습선을 타고 있었다.
계선교사는 늘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역에 전념 할 수 있는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 사모와 함께 돌아온 계 목사는 선교 사역에 의욕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중국 선교를 위해 기도에 들어갔다. 사모와 합력하여 힘써 기도하는 한편 타이뻬이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 기도에 합력할 것을 호소했다. 아직 예배당이 마련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빌려 쓰는 국민학교 교실에서 주일마다 기도회를 계속했다. 기도의 불이 점차 붙기 시작하자 교인들 간에 어서 예배당을 마련하자는 의견들이 일어났다. 주일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새벽마다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좀 더 빨리 기도 운동을 일으켰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스쳐갔다. 기도하지 않고도 중국 선교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기도 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고 50일이 지나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예배당을 허락해 주셨다. 기도 운동이 시작된 지 두 달 만에 받은 응답이었다. 큰 기쁨이 교회 안에 넘쳤다. 주일 밤 예배도 드리고 새벽기도회도 자유롭게 드리면서 중국 원주민 선교를 할 수 있는 조직으로 정비해갔다. 자신이 구상하여 총회의 인준을 받은 선교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국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산동선교를 계승하자.’
야무진 결의가 기도를 통해 영글어 갔다. 충분한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현지 원주민 주화팅 전도사를 찾아가서 그가 구상한 중국인 전도전략을 놓고 함께 의논했다. 그는 대만 북부에 있는 토성이란 지역을 선교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토성지역은 원주민의 갖가지 우상을 섬기는 곳으로 무지몽매하기 그지없는 흑암의 땅이었다. 주 전도사는 전부터 이 곳을 위해 기도해오던 중이었으나 그곳에서 전도하며 생활하려면 생계대책이 없어서 여러가지로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계 목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동역자를 허락하셨음을 감사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바울을 특별이 준비해 놓으시고, 바나바로 하여금 그를 찾아가게 하신 주님의 손길을 느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계 목사는 이제 본국 총회에 연락하여 선교비 후원만 해결하면 되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미 일심동체가 되어 중국 산동지역 선교를 해낸 바 있었다. 더 힘들고 어려울 때 전국의 교회들이 이를 위해 기도하였었고 선교비를 모아 지원했었다. 추수감사절 헌금 가운데 십 분의 일을 모았고, 여전도회는 성미운동을 벌여 선교비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었다. 이 액수는 웬만한 교회 일년 예산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계 목사는 주 전도사와 협의한 내용을 총회 선교부에 알리고 후원을 요청했다. 총회 선교부는 관계 임원들이 실행위원회를 열고 계 목사의 선교취지를 충분히 들은 다음, 계 목사의 선교 정책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선교부는 재일교포 선교 이상으로 중국 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주화팅 전도사는 대회가 파송하는 유급 전도사로 달마다 미화 50불씩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전국 여전도회가 그 선교비를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중국 원주민 교회 토성중화 기독교(이하 토성교회로 약칭)는 1964년 10월에 설립되었다.
주 전도사는 은혜에 보답을 충분히 했다. 주일마다 새롭게 개종한 교인들이 늘더니 일 년이 가기 전에 60명 이상의 큰 교회로 성장했다. 이 교회를 방문하고 큰 감명을 받을 혜성 교회 여전도회 회장 이 마리아 집사는 50불을 헌금했다.
토성교회 성장에 힘을 얻은 계 목사는 이년 후 푸첸교회 개척을 추진했다. 평안교회 안중완 씨와 무명의 성도가 대만 선교를 지원하겠다고 하여 산동사람 왕명은 씨 부부를 사역자로 세웠다. 푸첸교회는 타이뻬이 교회와 산성교회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왕명은 전도사 부부는 어린이 선교 사역에 특별한 은사를 가진 분들이었다. 주일학교를 풍성하게 이끌며 주변 사람들을 복음화 했다.
타이뻬이 중화기독교는 1967년 봄에 세워졌다. 서울 충현교회에서 관광차 대만을 방문했던 분들이 계 목사를 만나 선교 도전을 받았다. 이동진 장로를 중심으로 대만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그들은 계 목사의 사역에 협력할 의사를 보였다. 당시 계 목사의 선교 열정은 방문단의 신앙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한 주일간의 대만 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그들은 30명이 한가지로 뜻을 모아 중국인 선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계 목사는 당곤 전도사를 사역자로 영입하여 타이뻬이 중국인 선교를 맡겼다. 1957년 이후 10여 년 간의 선교 사역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계 목사는 세 중국인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례를 베풀고 때로 복음을 전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타이뻬이에 돌아와서 한인교회 예배를 인도했다. 눈코 뜰새 없는 사역으로 몸은 피로했지만 심령은 새로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세 교회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성찬식을 베풀고., 어려운 사정을 따라 말씀과 권면으로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 어려운 일은 한국으로부터 약속된 선교비가 제때에 도착하지 않는 일이었다. 타이뻬이 한인교회는 교세가 약했다. 본국에서 오던 선교비가 웬일인지 자주 중단되었다. 이제 갓 수산하교를 나온 셋째 아들 이식이 배를 타고 돌아 오는 날이 기다려질 지경이었다. 그가 배를 타고 번 돈을 원주민 교회 운영비로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계 목사 부부는 묵묵히 맡은 선교 사역을 감당해 갔다. 선교비가 오면 먼저 중국 현지인 선교사들을 찾아가 전해주고 격려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는 현실의 열악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그 아름다운 구원을 진행하시는 것이 행복했다.
안타까운 것은 타이뻬이 한인교회였다.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는 선교 전초지로 원주민 교회를 후원할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다. 사소한 개인사로 여전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한국 교단 분열의 여진이 잔잔하다 싶으면 다시 일어났다. 대사관 직원 가족과 유학생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 마다 시험의 바람을 몰고 왔다. 또 교인 중에는 이런 교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그 교파의 주장을 절대시 함으로 교회에 풍파를 몰고 왔다. 그들은 기륭교회를 맡은 정 전도사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계 목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견딜 만 했다.
계 목사가 대만 선교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미묘한 곳에서 발생했다 .
“채 선교사 임지에 무사히 도착, 한·중 양국 교회의 열렬한 환영리에”란 기사가 기독신보 109회에 머리기사로 실렸다. 1967년 4월 26일 교계 인사들의 환송을 받으며 김포 공항을 떠난 채은수 선교사. 그는 분명 한·중 양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대북의 국제 공항에 내릴만한 중요 인물이었다. 이미 대만에서는 계화삼 선교사의 눈코뜰 새 없는 선교 사역이 얼마든지 일꾼을 부르고 있었다. 계화삼 선교사의 진취적인 선교를 후원하자는 취지로 총회가 선교 80주년을 기념, 채은수 선교사를 대만에 파송한 것은 적시에 바른 결정을 한 것이었다. 더욱 총회가 동남아를 거쳐 이스라엘 땅까지 선교를 하겠다는 선교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대만 현지 선교사 계화삼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 화려한 선교구호가 위험스럽게 비쳐졌다. 1967년 들어서면서 선교비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식으로 오고 있었다. 그의 선교비를 감당하는 남대문교회 홍 장로의 형평이 매우 급박한 모양이었다. (계 목사는 훗날 홍 장로의 자살에 이르는 불행한 사건 기사를 보고서야 이유를 이해했음.) 계 목사의 생활이 어려운 것은 다음으로 하더라도 생활비를 지불하기로 한 중국 현지 교회에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미 파송한 계화삼 선교사 후원을 제대로 못하는 총회가 또 다른 선교사를 파송한다니 …………….. .
그러나 계화삼 선교사는 채 선교사가 파송 됨으로 이런 난관들이 잘 해결되려니 하며 은근히 희망을 걸고 기대 했다.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원활치 못한 대만 원주민 선교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동안 받은 상처에 위로를 받으며 같이 손을 잡고 중국 선교를 위해 일할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채 선교사가 대만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채 선교사를 맞이하고 보니 적잖이 당황이 되었다. 본국 총회 선교부로부터 가족들 비행기표만 겨우 마련해서 빈손으로 현지에 도착한 것이다. 채선교사의 살림 도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새로 가재도구를 살 형편이 못되어 계화삼 선교사집에 있는 사림을 나누어 주었다. 젊은 선교사는 쓰던 물건을 계선교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부터 채 선교사는 총회와 계 선교사 사이에서 계화삼 선교사에 대한 덕스럽지 못한 일을 전하곤 하였다. 통합 측 정 전도사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소식도 있었다. 비가 오는 어느날 누가 대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채 선교사에게 보내준 침대와 살림 도구가 비를 맞고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너무도 이상하여 알아보니 정 전도사 편에서 돈을 꾸어 새 살림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선교사가 주었던 살림 도구를 되돌려 보낸 것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총회에서는 채선교사가 도착한 후로, 미흡하게나마 보내오던 선교비조차 건너뛰는 때가 잦아졌다.
선교비는 메말라가고, 도움을 기대했던 채선교사와의 협력은 갈수록 어려워져 갔다. 채 선교사가 어학이 끝나면 좀 함께 일할 수 있겠나 싶었는데, 어학이 끝나면서 단독적인 교회를 세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창립 예배에 계 목사가 참석하였더니 계 목사에게는 한 가지 순서도 맡기지 않았다. 복음 사역자로 동역 해야 할 같은 지역의 선교사끼리 이러한 불신의 강이 있나 싶으니 씁쓸했다.
계 목사는 막다른 길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선교 사역을 후원할 총회지원은 끊어져 가고, 동역해야 할 선교사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른 교단에 적을 둔 정전도사는 가시 역할을 했다.
계화삼 선교사의 대만 선교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것인가? 하나님, 이 사역을 계속하길 원하시면 길을 열어주십시오.
다음 사역지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채 선교사에게 대만 선교를 맡겨라. 그는 젊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다.’
내면에서 이런 생각이 움트기 시작했다. 어차피 좁은 어장에서 두 사람이 동역 할 수 없다면 젊은 선교사에게 맡기고 나이 든 내가 떠나는 게 좋겠다. ‘
이는 선교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총회를 돕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선직 사모의 생각은 완강했다.
“선교지에 뼈를 묻읍시다.”
계 목사는 충분히 사모의 심정을 알고 있었다. 당장 끼니를 이어갈 식량이 없어도, 그래서 산에 캐온 산나물로 죽을 끓여 먹다 굶어 죽더라도 불평하지 않겠다는 사모가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순교할 일에 순교해야지 얽히고 설킨 인간 문제 속에 자신을 매장해놓고 순교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계 목사는 자신의 근래 심정을 솔직하게 사모에게 내놓았다. 선교를 선교사란 간판만으로 할 수는 없었다. 복음 전하는 일을 뒤로하고 반목과 질시가 난무하는 풍토 속에 계속 사역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선교방향을 일단 우회하자고 자신과 사모를 설득했다.
당시 중국의 사정도 비우호적이었다. 곧 열릴 수 있으려니 해서 대만에 와 기다리는 데 중국 본토의 상황은 갈수록 공산주의 체제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문화혁명의 바람이 전 대륙을 몰아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믿음의 씨조차 모조리 뽑혀 버리는 모양이었다.
“주님, 저희가 중국 선교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겸손히.”
계화삼 선교사는 왜 내가 대만 선교지를 떠나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대만 선교사로 출발할 때는 대기 선교사로 떠났으나 대기의 사명이 끝났으니까?
대륙 수복의 길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젊은 선교사에게 물려줌이 마땅하니까?
신구 두 선교사는 공동으로 합의서를 작성하였다. 총회 선교부와 본인들이 각기 보관하기로 했다. 이로서 대만 선교를 작별하는가!
총회 선교부 서기로 일하는 최동진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근래 한국인들이 남미를 개척하기 위하여 떠나고 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일꾼이 필요하다. 우리를 그곳에 파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답변은 시원치 않았다. 우선 총회 형편이 선교비를 지원할 수 없고, 또 이미 양승만 목사가 내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남미 개척 교민들에게 복음 사역자가 다수 요청되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갑시다.”
계 목사는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남미 방향으로 마음을 확정했다. 다만 어느 나라로 나아갈 것인가 기다리기로 했다. 두 아들은 벌써 브라질에 정착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목회자가 필요하다면서 어서 오라는 요청이 와 있었다. 그러나 계 목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몰랐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싶었다. 두 부부가 간절히 기도한 후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남미의 나라 대사관을 찾기로 했다. 그 곳 대사관이 허락하면 그 나라로 가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알아보니 아르헨티나 대사관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다. 그는 대사관에 가서 사유를 말하고 이민 신청을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길을 열어 주었다. 계 목사는 대만에서 쌓아온 선교 사역을 모두 채은수 목사에게 인계했다. 투청교회 건축기지 소유권과 타이뻬이 한국 기독교 재단법인, 대만 선교부 인장까지 모두 인계했다.
1969년 6월 9일, 대만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막상 떠날 날은 다가오는데 비행기 삯이 없었다. 가재 도구를 모두 내다 팔았지만 역시 부족했다. 그 때 셋째 아들 이식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아버지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이식은 자기가 일하는 선박회사에 가불을 신청해보겠노라고 하더니 며칠 후 그는 일년 분의 월급을 차용해왔다. 그 돈을 합하니 남은 식구가 아르헨티나에 갈 수 있는 여비가 되었다. 눈물을 감추고는 부모님을 못 본 척하며 이식은 밝게 웃었다. 이식은 앞으로 일년간은 노예 아닌 볼모로 바다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비행기 값을 더 벌어서 아르헨티나로 오게 될 것이었다.
그토록 열렬한 환영 속에 도착했던 대만 땅, 그러나 그는 조용한 나그네로 떠나고 있었다. 대만 선교생활 열두 해가 그의 눈 앞에 바람 앞의 책장처럼 넘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오라는 것도 없이 꼭 어디로 가겠다는 것도 없이 순례자처럼 또 다른 대륙을 건너가는 계 목사의 가슴에는 그러나 꺼버릴 수 없는 불씨가 살아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하라고 주신 복음의 불씨였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 : 6)”
주님, 선교에 쓰임 받기 원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을 수만 있다면 땅끝까지라도 가겠습니다. 아르헨티나가 바로 나의 이방되게 하시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이 되기 원합니다.”
미국에 잠깐 들려 친구 노희선 목사집을 방문한 후 아르헨티나를 향하기로 했다. 미국은 계 목사의 가족을 너무도 왜소하게 만들었다. 입은 옷차림, 통하지 않는 생소한 언어, 지금까지 말로나 들어왔던 월등한 문화 시설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생각하였다.
‘미국만 와도 이렇게 좋은데 천국을 가면 어떠랴? 어서 가서 그날을 준비하자.’
좀더 쉬어 가고 싶은 안일한 마음을 부추기며 초라한 봇짐들을 아르헨티나행 비행기에 실었다.
30. 아르헨티나에 세운 이민 교회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한 것은 1967년 3월이었다. 새벽 4시경에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선직 사모 이외에 정식과 형숙이 함께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계 목사님!”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무슨 소리를 잘못 들었거니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다시 계 목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아는 이가 없을 텐데 누가 나를 부르는가 의아했다.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반갑게 기다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예!”로 대답한 후 공항수속을 마쳤다.
그들은 이곳 아르헨티나에 사는 한국 교민들이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집사들이라고 소개했다. 교회 분란 중에 나뉜 7가정이 교회개척을 준비중이이라 했다. 그들이 준비해놓은 짐차에 모든 짐을 싣고 가면서 계 목사를 몇 주간이나 기다리게 된 사유를 들었다.
미국 감리교회는 한국 이민들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소속된 한성웅 목사를 남미 감독의 자격으로 꼬리엔떼에 파송했다. 교회를 세운 한 목사는 부친인 한병혁 목사도 함께 모시고 교회 사역을 하고 싶었지만 장로들의 생각은 달랐다. 한 교회에서 한 가족인 두 목사에게 사례비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 장로들 생각이었다.
교회를 회복하려는 여러 노력도 무위에 돌아가고 중재에 나선 7집사 가족만 외톨이가 되었노라 했다. 그렇다고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7가정이 돌아가며 예배 드리던 중, 그 중 장수천 집사에게 한 소식을 받았다. 미국에 사시는 아는 목사(김희호 목사)로부터 계화삼 목사가 이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다. 몇 주일 전부터 기도하면서 계목사가 오는 걸 기다렸노라 했다. 잠시 고개를 들고 종에게 할 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남미 특유의 두툼한 소고기 아사도를 구어 먹으면서 하나님의 환대하심에 감사했다.
주님, 종이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입니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다. 계 목사 가족으로서는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언제 먹어보았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슨 교단에 속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서로 입장이 서로 달랐다. 특히 감리교에서 나뉘어 온 교인 중 홍 집사는 감리회 정치에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처음부터 교파 문제로 불편하고 싶은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렇다고 계목사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보편적인 교회명을 지었다. 이름하여 “대한 예수교 아르젠틴 제일교회”. ‘장로교’에 속한 교회란 표현을 접음으로서 좋은 합의점을 찾은 듯했다. 계 목사로서는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선교적인 차원에서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의했다.
처음에는 가정(황준영 집사)집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몰려드는 교인들 때문에 더 이상 가정집을 사용할 수 없었다. 까라보보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 건물 하나를 빌렸다. 마게도냐로부터 이민 온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힘있게 사역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몰려드는 교인들로 인하여, 이 교회도 장소가 협소함을 느꼈다. 교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흩어진 교인들이 장로부터 어린이까지 여기저기서 몰려 온 것이다. 계수하여 보니 장로가 11사람, 집사가 64명이었다.
예배 공간과 교육 공간 확보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교회 건축을 기도하자는 의견들이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모인 교회는 독특하기 마련이어서 이곳 사람들과 문화 차이가 많았다. 두 공동체 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1969년,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교회는 널찍한 집을 한 채 구입했다. 마당은 예배당을 하나 짓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온 교우들의 뜻을 모아서 계 목사는 마당에 예배당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인 중에는 여러 방면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월남 전쟁을 거쳐 남미로 온 기술자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토목, 전기, 수도, 건축 등 없는 분야가 없을 만큼 노동력이 풍부했다. 그 외에도 모든 교인들이 시간을 내어 봉사를 자원했다. 특히 점심이나 저녁 시간은 잔칫집이 되어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쉐타를 짜다 말고 점심 시간이 되면 일을 하기 위해 몰려왔다. 서로 음식을 즐겁게 나누면서 식사가 끝나면 벽돌이라도 쌓으며 봉사하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여 집사들은 음식으로 봉사했다. 수십 명 분량의 밥을 지으랴 김치를 담그랴 활기가 넘쳤다.
교회가 세워지는 동안에는 누구 한 사람 행복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들이 믿음 속에서 일어나고 성도간에 아름다운 교제와 기쁨이 충만했다. 교회를 사랑하며 수고하는 교인들의 소문이 번져가고,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뛰기를 삼 개월이 지나자 반듯한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교회를 짓는데 쓰임 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긍심이 넘치고 있었다. 하수도 공사를 하던 중 체험담을 나누며 허리를 잡고 웃었다. 어떤 성도는 막힌 하수도를 뚫기 위해 김치통으로 똥물을 퍼냈노라 말했다. ‘집사님, 그때 똥물을 누가 뒤집어 썼지?’ ‘똥퍼낸 김치통은 어떻게 되었지?’ 하면서 허리를 잡고 웃었다. 이런저런 일로,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이항섭 집사는 모래 짐을 나르다 등이 온통 벗겨진 일을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주님을 섬겨 기쁘다고 했다. 기공 예배를 드리던 날 주의 거룩함이 성전에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이렇게 소중하구나 생각하면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음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고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스 3 : 10~13)”
`아르헨티나 까라보보에 세워진 한국인교회는 한국 이민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곳곳마다 음식점을 세우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영적 음식점을 세웠노라고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교회가 서 가는데 늘 이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예배당이 서고 교육관 시성이 갖추어져서 힘있게 복음 사역을 해나가려 할 때 문제와 시험도 있었다.
교회 부흥과 함께 몰려든 교인 중에는 아직 신앙인격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는 새로 온 최정국 씨가 목사 까운 한 벌을 준비해왔다. 다른 교회 목사님들처럼 예배 인도시 예복을 입으면 예배 분위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준비했노라면서 목사님께 드리고 기쁘게 돌아갔다. 계목사는 그 까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데 다음 주일 장수천 집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나오는 계 목사를 찾아왔다. 목사님, 예배 시간에 꼭 까운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까?’ 따지는 것이었다. 천주교와 같은 의식주의에 흐르는 것 같아 역겹다고 했다. 계 목사는 그것이 시험이 된다면 입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은 예전처럼 까운을 입지 않고 정장차림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이번에는 가운을 사드린 최 씨가 계 목사를 붙들고 “목사님, 목사님께서 가운을 입으시니까 참 좋던데 까운을 입지 않으셨습니까?” 하면서 섭섭해 하는 것이었다.
사건이 조금 이상하게 진행되는구나 생각했지만 믿음 약한 성도가 상처받는 것이 인 되 보여서 그 다음 주일은 까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다.
이렇게 되자 장 집사는 몹시 마음이 상했다. 평소 범사에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교인 가운데 입심이 있는 박민홍 집사와 합하여 성의착복의 부당성을 장문화하여 교인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저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싶었는데, 두 견해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주일 예배를 마친 직후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장 집사 부부가 최 씨 부부를 붙들고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장 집사 부인은 최씨 부인의 머리카락을 휘어 잡고 머리가 훤하게 뽑아 놓았고, 남정네들도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까운을 왜 입느냐, 까운 입는 게 어때서 그렇게 아니꼬워 하느냐?”
이런 요지였다.
그러나 두 가정의 관계를 이미 알아오고 있던 교인들은 그들의 싸움이 까운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최 씨와 장 집사는 서로 맞은 편에 가게를 열고 있는데 그곳에서 서로 원수처럼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로 입교한 최 씨가 목사에게 까운을 사주자 교회 터줏대감인 장 집사가 심사가 꼬여 그렇게 반대 했다는 것이었다.
성도라면 의당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피 흘리기까지라도 싸워서 마귀의 궤계를 이겨야겠지만 이런 경우는 너무나 힘이 빠지는 일이었다. 합당한 권징을 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노라 했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교인들이 선교지에 와서 선교는 못할 망정 그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판 싸움질을 한 것이다.
어려운 일은 이런 것만이 아니었다. 이 교회 초창기부터 교회 행정에 깊이 관여하였던 홍 집사와의 관계였다. 그는 누가 보기에도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가 감리교 출신이었고, 그 교파 정신에 투철했다는 점이다. 그의 생각에는 교회 대표는 목사일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 교회는 장로교가 되어서도 아니되었다. 계 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요, 목사였으므로 계 목사의 교회 행정이나 목회관이 그의 심중에 늘 경계심을 일으켜 오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교인들은 장로교 목사인 계 목사와 생각을 함께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민 오는 많은 교인들이 장로교인들이었으므로 장로교 목사인 계 목사 주변에 몰려든 그들의 운집은 교회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홍 집사의 강한 교파의식과 장로교 목사인 계 목사의 목회관은 조화될 수 없는 불씨를 이미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교회 대표권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현지인 까라보보 목사가 계 목사를 찾아왔다. 그는 종교청에서 보내온 서류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계 목사를 당연히 교회 대표라고 생각하여 서류를 계 목사에게 내놓고 싸인하라 하자 현지 언어에 자유롭지 못한 계 목사는 무심코 싸인을 했던 것이다. 그 서류가 종교청에 보관되어 종교청은 아르젠틴 제일교회 대표를 계 목사로 등록해 놓았다.
그런데 교파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홍 집사가 이 사실을 확대하여 말을 내기 시작했다. 계 목사가 제일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종교청에 등록해 놓고 장로파로 바꾸려는 계략을 짰다는 것이었다. 사실 계 목사로서는 당연히 장로교 간판을 걸고 목회하는 것이 좋았지만 그러나 계략을 꾸며서까지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폭되어가는 교회 대표권 등록 사건은 장로교파와 감리교파 사이의 깊은 교파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한 교회 안의 두 교파의식은 교회가 하나로 융화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확인한 셈이었다. 이로 인한 미묘한 사건 전개는 교회에서 일어나서는 아니 될 부덕한 열매들이었다. 또 인간들의 미묘한 심리를 사탄이 마음껏 이용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부흥 일변도로 달려가는 계 목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자신의 목회를 돌아보게 했다. 한 지붕 아래서의 두 교파가 한 교회로 존립할 수 있는가! 이는 훗날 계 목사가 이 교회를 떠나고 난 후에도 끊임없는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이 문제로 인하여 철모르는 교인들이 얼마나 고난을 당했는가를 듣고 훗날 마음 아파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무튼 아르헨티나에서의 목회는 성공적이었다. 그 날까지 목회를 돌이켜 볼 때, 목회가 정상에 서 있음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힘을 얻었고,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계 목사 부부를 사랑했다.
마침 그때 캐나다 토론토에서 계 목사에게 청빙이 왔다. “와서 도우라”는 것이었다. 계 목사는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데 미지의 세계에 가서 다시 시작한다 생각하니 망서려 졌다.
그러나 토론토라는 개척지가 갖는 매력도 있었다. 그곳은 한국 이민들이 몰려드는 이민지였다. 더구나 캐나다는 만주 지역과 함경도 지역에 많은 선교사를 보낸 나라가 아닌가! 그가 용정에서 사랑을 받았던 선교사님들에 대한 좋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캐나다에서 오신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조선 민족을 사랑하고, 조선 민족을 위해 병원을 짓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만주에서 체험했던 그로서는 그 선교사의 나라에 가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을 믿음으로 섬기는 일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가장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교회 안에서 굳게 뿌리 내리고 있는 감리교인들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캐나다에서 그를 부르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유주의 신앙에 반대하여 나온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 보수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다. 이곳에서 감리교 출신 교인들과 갈등을 빚고 있던 그에게는 마음이 많이 쏠리게 마련이었다. 이민들은 속속 그곳에 몰리고 있었다. 남미에서 교단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계목사가 토론토로 눈을 돌리게 된 중요한 계기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확신하는 정통보수 신앙을 확립하는 교회의 필요성이었다. 보수 신앙을 가진 교인들이 모여 그런 목회자를 찾는다고 부르니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단적인 일로 갈등 속에서 사역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이곳 아르헨티나 제일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이니 자신이 떠나도 하나님께서 잘 지켜주실 것이다. 결단을 내리기가 쉬었다. ‘교회는 주인 되신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 교회가 성장하는데 귀하게 쓰임을 받은 것으로 감사하자. 나는 이 교회의 주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회가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르헨티나 제일 교회 사역을 후임자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자 교회가 발칵 뒤집혔다.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새벽기도에 나와 울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계목사를 귀하게 생각하는 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알고 계목사를 붙들고 일어 났다. 그렇지만 이미 계 목사의 결심은 굳어 있었다. 교단적인 차이로 싸우면서까지 교회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계 목사의 모친은 캐나다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세운 마르다 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쓰임을 받았고, 그 역시 캐나다 선교사님들의 빚을 졌다. 이제는 그 빚을 갚는다는 명분도 있었다.
‘복음의 빚을 갚는다’, ‘복음에 빚진 자’ 로 떠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계 목사는 새로운 사역지로 떠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남미에 이민 와서 사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캐나다로 떠나갈 때마다 축복해주던 그가 이번에는 축복을 받을 차례였다
.
32. 동족들과 함께 남미에서 북미로
캐나다의 이민 역사는 미국이나 남미의 나라들보다 짧았다. 한국인의 캐나다 이민은 1960년대 중반기에 시작 시작됐다. 계목사가 캐나다에 도착하기 10여년 전에 캐나다 정부는 노동인구 부족에 따른 인력수급정책으로 제3국에 대한 이민의 문을 넓게 개방하였다. 이렇게 개방한 문으로 독일에 광부로 혹은 간호사로 떠났던 한국인들과 남미로 떠났던 이민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던 한국교포들은 풍토와 생활 면에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 캐나다를 이민지로 선호했다. 그들은 재이민 형식으로 캐나다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서독에 취업 차 나갔던 교포들, 그리고 조금 후에 월남 등 제3국에 용역 수출로 나갔던 해외파견 기술자들이 이곳 캐나다로 새로운 삶의 부푼 꿈을 안고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국내의 가족 혹은 친지들에게도 이곳으로의 이민을 권유하고, 캐나다 정부는 이를 수용함으로서 한국 이민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모여든 이민자들에 의해 초청을 받은 계목사는 토론토에 첫 번째 보수교회라 할 수 있는 중앙교회에 참여했다. 1972년, 중앙교회에 부임할 당시 토론토 거주 한국인이 약 5,000명 정도를 헤아리게 되었다.
토론토에서 중앙교회가 설립 되기 전 3개의교회가 있었으나 대부분 토론토 사회의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 바탕을 교회였다. 한국에서 보수적 신앙을 쌓아온 성도들에게는 여러모로 마음에 불편했다. 자유주의 노선에 동의할 수 없던 성도들은 새로운 “보수신앙 중심의 교회”를 갈망하고 있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신뢰하는 장로 교회가 서기를 계속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1972년 9월 10일 30명이 모여 창립예배를 드린 중앙교회는 바로 그런 바램의 기도응답이었다. 민상기, 고성원, 이정호 세 사람의 장로들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인도하며 예배 처소와 목회자를 찾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내정되어 초빙된 목회자가 바로 계화삼 목사였다.
중앙교회의 계목사 담임목사 청빙시에, 계목사는 자신의 신앙을 밝혔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바른 신앙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돼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선포된 말씀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창립초창기의 중앙교회 성도들은 이런 계목사의 신앙을 듣고 중앙교회 창립준비회의 중심으로 담임목사 청빙건을 주요 안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의견을 교환한 결과 초대 담임 목사로 남미 아르헨티나 제일교회에서 시무하는 계화삼 목사를 청빙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리고 청빙서를 계목사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교회가 창립 된지 3개월 만에 그 응답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계목사는 1972년 9월 4일, 교회의 청빙을 수락했다.
계화삼 목사는 1972년 12월 16일에 토론토 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남미 아르헨티나 제일교회를 개척, 3년 5개월간의 눈물 어린 기도와 노력 끝에 교회가 성장하고, 성전건축과 교육관 건립을 마친 계화삼 목사는 이제 꾸준한 교회 성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토론토 중앙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고,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중앙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나이는 60세였다. 마지막 목회지다 생각하고, 담임 목사 청빙에 응하게 되었다. 계화삼 목사는 1972년 12월 16일 중앙교회로 부임하여, 바로 다음날 12월 17일 (주일)에 취임예배를 드렸다.
(글쓰는 이의 변: 이하는 등장 인물들이나 그 자손들이 대부분 계 목사 주변에 생존해 있어서 인명을 밝히지 않음)
1972년 12월, 토론토 땅은 혹심한 추위가 몰아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따스한 봄볕을 누린 것이 하루 전인데 토론토는 벌써 겨울이었다.
따뜻함을 기대하며 공항에 내린 계목사는 처음부터 차갑게 몰려드는 한파에 몸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분위기가 남미와는 판이했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쉴새 없이 움직이고, 몸짓은 민첩했다. 남미에서보다 몇 박자가 빠른 삶이었다.
계 목사 가족을 영접하러 나온 한 집사가 반갑게 인사했다. 남미에서 오신 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계 목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없습니까?”
계 목사의 장남인 계원식은 브라질을 거쳐 이곳 토론토에 와 있었던 것이다.
차에 오른 계 목사가 묻자 그는 차를 몰고 가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목사님, 놀라지 마십시오. 며느님이 크게 부상당했습니다. 아드님도 다치셨구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드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아, 날벼락 같은 소식이라니!’
맏며느리가 중상을 당했다니 주님, 무슨 뜻일까요?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리는 그의 마음 한편에 또 다른 의문도 일어났다.
‘아들네는 부상을 당했으니 그렇다 치고, 이미 공항에서 기다리겠다던 다른 교인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교통사고로 어지럽혀진 아들 집을 먼저 방문했다. 그래도 다행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교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했디.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감사와 환영의 물결로 출렁거려야 할 교인들이 씁쓸하고 떱떨한 표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많이들 기다리다 지쳤나 생각하고 싶은데 그 이상의 무슨 일이 있어보였다.
하긴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청빙하고 하는 일들이 쉬운 일은 아니지…………….. .
캐나다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알고 몰려오는 이민자들, 저들의 영혼을 구원할 양식은 무엇인가? 성경 진리 중심의 신앙으로 보수하는 교회를 일으켜 저들을 섬기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청빙위원 가운데 남미에서 오신 분이 있었고, 그들은 계 목사의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알고 있어서 계목사의 첫 출발은 좋았다.
그러나, 토론토는 날씨만 매서운 것은 아니었다. 목사에 대한 처우도 매서웠다. 어른만해도 80명 이상 모이는 교회인데 웬일인지 목회자의 살 길은 막연했다. 사택은 어느 교인 집 이층 거실과 3층 다락방이 전부였다. 이층 거실은 이미 그 집 주인의 살림이 빼곡히 들어 찾고 그들과 함께 사용해야 할 형편이었다. 음식을 준비하려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인이 음식을 짓고 난 후 부엌시설을 사용해야 했다. 음식을 상하지 않게 바깥문과 안쪽 문 사이에 놓곤 했으나 어떤 추운 날은 꽁꽁 얼어 붙어 있었다. 헌 냉장고라도 하나 구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지상 천국이라는 캐나다, 열악한 목회자의 생활 환경, 모든게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목회자 처우와 사례비에 무관심했다. 집주인은 방세를 독촉하는데, 계 목사 가정에는 지불할 돈이 없었다. 집주인은 캐나다에서는 집세가 하루만 늦어도 집을 내놔야 한다고 성화가 대단했다.
눈물로 부여잡던 남미 교인들이 생각났다. 그렇게도 원하는 교인들을 그냥 두고 왔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시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지난번 미주 총회 때였다. 어떤 사람이 계 목사의 남미 사역을 열거하며 밀림의 성자라고 칭찬을 하자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일침을 주던 생각이 났다. “성자가 양떼를 버리고 갑니까?”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들이야 교회 내부사정을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훌쩍 떠나버리는 것도 잘한 일만은 아니었다.
아무튼 토론토 사역에서 초기부터 덜그럭 소리가 나는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남미에서 이민 온 남미파, 독일에서 날아온 광부 간호사 출신의 독일파. 그리고 고국에서이런저런 줄을 따라 오는 사람들, 각기 파를 이루고 자신들의 필요가 달랐다. 안경도 달랐다. 다른 시각의 안경을 쓰고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다.
목사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은 놀랍게도 중앙 교회의 중직을 맡은 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목사에게 방을 세로 준 것도 그렇지만, 목사 가정을 아주 가볍게 대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에게 새로 부임한 목회자는 빈 방에 들어와 집세나 꼬박꼬박 내고 생존하는 그런 존재인 걸까?
근래 남미에서 이주해온 모 집사가 뻔질나게 계 목사의 방을 들락거리는 것도 문제였다. 이 눈치 없는 집사님이 집주인 장로님이 남미 출신을 미워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로 사는 사택을 자기집 드나들듯 했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선직 사모의 따뜻한 대접이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남미에서 온 목사라 남미에서 온 교인들만 감싸고 돈다는 소문이 나도는 판에 남미에서 온 실속 없는 집사가 사택을 찾아 와서 하는 일이 그저 장로들 흉보는 일이었다.
‘장로가 되어서 십일조도 안하고, 헌신이 없다. 집사인 자기가 하는 일을 장로가 하지 않으니 교회가 되느냐’는 둥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말들만 골라 하는 것이었다.
장로인 집주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미웠을까도 싶었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부터 시작해서 풀기 힘든 인간적인 문제들이 교회에 쓰레기처럼 넘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 목사는 지난 60년 목회 경륜을 살려 전차와 버스를 타고 그 넓은 토론토 바닥을 끊임없이 누볐다. 만나고 말씀을 공급하며, 기도하고 위로하며 교인들을 격려하고 다둑거렸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이민교회 문제는 카펫에 쌓인 먼지처럼 끊임없이 푸석거리며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심방 때 목사님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다니시는 지 모른다고 싫어했다. 교통 사고로 다리뼈가 부러진 며느리가 돌 볼 수 없는 어린 손자를 보살펴주어야 하는 죄(?)였다. 멀고먼 길을 찾아 심방간 목사가 어린아이 손을 잡고 있다 하여 대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반 년이 지나가도 문제의 실타래는 풀어도 풀어도 다시 얽혀가고 있었다. 이쪽을 풀면 저쪽이 얽히고 저쪽을 풀면 이쪽이 얽혔다 이대로 가다가는 목사 위임식조차도 못하고 말 것 같았다. 해야 할 복음 사역은 뒷전에 있고 산적한 문제만 풀고 다녀야 하는가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교회 책임 있는 몇 사람과의 불협화음은 전 교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973년 6월 계 목사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장로들을 만났다. 담임 목사인 자신이 모든 책임일 지고 물러나겠노라고 하자 그들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계 목사는 6월 14일자로 사임 하고 LA로 떠났다. LA에서는 대환영이었다. 목회자가 없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던 교인들이 모여서 당장에 교회가 이루어졌고, 그 동안 문제에 시달리던 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자신을 그렇게도 애타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하니 새 힘이 솟았다.
그러나 문제는 토론토 중앙교회에서 일어났다. 모든 문제를 책임지고 계 목사가 떠났지만 문제는 전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계 목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긴급히 9인의 수습위원을 구성하고 계 목사가 떠나게 된 경위와 교회 문제를 협의했다. 그들이 계 목사를 떠나게 한 문제의 장로를 책임 추궁해대자 그는 다시 계 목사를 모셔오지 않으면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화를 LA로 걸어 눈물로 계 목사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수습위원회는 긴급히 두 사람의 대표(장로와 집사)를 LA로 보내 계 목사를 모셔오게 했다. 계 목사는 원치 않는 멍에를 다시 져야 하는가 생각할 때 답답했으나 토론토에서 LA까지 와서 사정하는 성도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지만 끝까지 자기를 고집하던 몇 사람은 중앙교회를 떠나 복음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는 다시 나뉘어져서 몇 교회로 섰다. 중앙교회는 50여명의 교인만 남게 되었다.
1973년 7월 22일, 주일 주보의 교회 소식란은 이렇게 적혀 있다.
『제 2항, 본교회 설립 당시부터 물심양면으로 심혈을 기울이시던 000장로님(주보에는 이름이 나와 있으나 여기에서는 밝히지 않음)과 그 부인 000권사님은 이미 정하신 바 뜻이 계시어 교회신설을 위하여 본 교회 시무를 사면하시고 가셨습니다. 섭섭한 마음 금할 길 없으나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7배의 축복이 새로이 섬기시는 교회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떠난다는 자체가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떠나는 사람에 대한 업적을 소개하고 축복의 말씀까지 곁들여 보낸다는 것은 요즈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흐뭇한 모습이기도 했다.
교회 중직을 맡던 분들이 훌쩍 떠나버리자 교회는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남은 자들은 오직 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하던 교회지체들에게 희색이 차츰 감돌기 시작했다. 날마다 드리는 새벽기도회에 헌신하는 성도들이 늘어났다. 그늘에 가려 빛도 이름도 없이 지내던 성도들이 일어나 전도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루어갔다. 조금쯤은 덜 똑똑해 보이고, 부족한 점도 곧잘 눈에 띄는 이들인데, 그들의 수고 위에 맺힌 열매는 옹골졌다. 교회에 태풍이 휩쓴 지 일년이 못되어 교인 수는 140명의 출석교인으로 늘어 났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심을 깨달았다. 교회 건축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1974년 5월, 교회의 뜻있는 분들과 함께 성전건립위원회를 구성했다 어렵지만 어려움 중에서 주님을 의지할 때 함께 하시고 그분의 교회를 은혜롭게 세우시던 하나님을 그는 이미 체험해왔던 것이다 교회는 성전건립위원회를 구성했다. 또 그 동안 계속되는 교회 시험들로 인하여 미루어 오던 계 목사의 목사 위임식도 거행하였다. 부임한 후, 한해 반 동안 계 목사는 언제 그만둘지 모른 채 박빙 위를 걸어왔던 것이었다. 위임식과 함께 몇 분의 교회 직원도 취임했다. 김경원, 김소남 권사와 유득이, 박능상, 홍무장 집사였다. 계 목사가 부임한 후 처음 있는 경사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소망으로 부풀었다.
창립 2주년을 바라보던 1974년 6월 9일, 교회에서는 계화삼 목사 위임식과 함께 초대권사 및 안수집사 취임식을 가졌다. 이날 예식에는 권연호 목사가 설교를 담당했으며 그 밖에 박상순 목사, 임대훈 목사, 안병한 목사 그리고 이정호 장로, 강신혁 장로 등이 취임 및 안수식 위원으로 수고했으며, 예식 후 본교회가 성의껏 준비한 축하 연회가 친교실에서 베풀어졌다. 고국땅, 낙후된 섬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곳에 세워진 약한 교회를 돕자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한창 부흥의 열기가 붙던 어느 날, 제직회에서 L장로와 P집사 사이에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교육에 관한 일을 상의하던 것이었고 서로의 의견이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L장로는 너무 화가 났다. 집사 주제에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몰랐다. L장로는 계 목사에게 P집사를 치리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계 목사는 그런 일로 어떻게 치리를 하느냐고 답변했다. 고집스레 치리를 주장하는 L장로의 집을 떠나야 했다. L장로와 Y목사의 뜻이 하나가 된 것을 보았던 것이다. L장로는 Y목사와 함께 얼마 후 성산교회를 세워나갔다. 배신감과 쓰라림이 가슴에 응어리졌다. 이러한 지체의 분열이 무슨 뜻이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훗날 그는 갈라져 나간 교회들과 형제 관계를 이루고 함께 노회를 이루어 가면서 새로운 섭리를 발견했다.
“교회가 갈려 나갈 때는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함께 노회를 세우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보수신앙을 이어갈 교회를 하나의 교회만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보수신앙을 이어갈 노회를 세우시기 위한 계획이 있었나 봅니다.”
계 목사는 당시 심정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그것이었다. 처음 함께 시작한 장로들이 모두 곁을 떠나고 없었기에 새 일꾼이 필요했다.
1975년이 저물어가는 12월, 양문석, 박능상 두분 장로를 세워 당회를 구성하고, 이미 시작한 성전 건축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성전 건축을 위한 바자회를 개최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76년 9월 26일, 계 목사 성역 40주년을 맞았다.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감사예배를 드리는 마음 속에 나누어준 초청장 수보다 더 많은 감사가 생각났다.
『여기, 그리스도를 위해 일생을 살아온 한 종이 있습니다. 그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못되어도, 그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못되어도 그는 바울과 같은 사도는 못되어도 이 40년간을 지구의 반구를 누비며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한국 초기 선교사입니다.』
성가대가 정성껏 찬양을 준비하고, 성역 40년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사역한 모습을 알리는 기념 사진전도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의 꽃을 피우고 교회를 세우며 살아온 계 목사의 생애를 보고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40년을 돌이켜 보면서 진한 아쉬움도 보았다. 특히 이민 목회는 탁월한 목회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주, 북한, 전시의 한국, 대만 선교 사역 12년, 남미 목회 4년 어느 한때 편히 쉬며 자신을 돌이켜 볼 기회가 없었다. 안식년은커녕 안식월조차 없이 경주해 오기를 토론토 목회까지 포함하여 40년간 계속한 것이다. 특히 토론토 에서 개척기 세 장로가 모두 곁을 떠난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 자신의 한계가 더 피부에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은 장로들의 잘못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했지만 계 목사는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목사가 너무 완고하고 부족해서 교회 지체들이 이렇게 고통 하는 것이다.’
계 목사의 심신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1977년 6월 15일,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단에 오르던 계목사는 의식을 잃었다. 예배 10분 전에 전신이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청년들의 부축으로 Doctor’s Hospital로 실려갔다. 계목사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 이렇게 내 인생은 막을 내리는구나 생각하며 최후 기도를 시작할 무렵, 내 앞에 하늘에 닿은 큰 (자작나무)가 황홀하게 나타났다. 난데없는 눈보라가 이 큰 나뭇가지를 따라 눈으로 사정없이 덮치는 것이다. 이 나무는 이제 죽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는데, 다른 장면으로 환경이 바뀌면서 그 눈보라가 불길로 변했다. 옹기점에서 나오는 불길처럼 치밀어서 이 나무를 불로 태우는 것이다. 나무야말로 이젠 정말 죽고 살 소망이 없는 것이라고 단념할 때에 또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 불줄기가 물줄기로 변하는 것이다. 이 물줄기는 타버린 이 나무를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이었다. 온 지면은 물바다가 되었고 불타버린 나무 조각들은 물 위에 둥둥 떠있었다. 이 나무는 이것으로 끝장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츰 지면에 물이 거두어지고 자욱해진 안개와 훈기가 돌면서 내 마음에는 이상한 느낌이 떠오르는 것이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이 나무는 목련화 꽃송이 같은 꽃봉오리가 신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새 생명은 돌아온 것이다. 지면에서 풍겨주는 향기가 내 코에 쾌감이 돌면서 그때 내 정신은 맑게 돌아오기를 시작한 것이다. 너무도 신기했다.”
계목사는 살아났다. 당시 수술 준비를 하던 의사들이 모든 진찰의 결과를 모으더니 신기해 했다. 살아날 수 없는데 살아났다는 것이다. 다시 소생함을 얻은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소중한 뜻을 가지고 계심을 깨닫고 감사했다. 온교회는 집중적으로 기도하다 응답을 받았다고 많이들 기뻐했다.
그러나 병원 밖에서는 가공할 사탄의 음모, 또한 펼쳐지고 있었다. 계 목사가 쓰러진 사건을 두고 온 교회가 협력해서 기도하는 이면을 타고 든 것이었다. 평소 서로 용납하지 못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계 목사가 쓰러진 사건을 두고 음해공작이 자행되었다. “눈물의 여인이 쓴 편지”라는 송신자 불명의 편지가 일시에 여러 가정에 날아든 것이었다. 그 사연인 즉, 계 목사가 쓰러진 것이 하나님의 저주였다고 Y장로가 말을 했다는 것으로서 그 익명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Y장로의 입장이 매우 미묘해지고 말았다. 계 목사와 Y장로의 동역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음해공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Y장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사탄의 공작에 이용되었으리란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Y장로는 결국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이 “눈물의 여인이 쓴 편지”사건은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용납하는 일이 얼마나 힘 드는가, 용납하지 못할 때 그 틈을 사탄이 얼마나 교묘하게 뚫고 들어와 교회를 휘저어 버리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사경에서 일어난 계 목사는 교회 문제를 매우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었다. ‘그렇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니, 주님께 맡기자. 너무 교회 문제에 연연해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이토록 고난을 주시는 것도 감사히 받아들이자.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내 나이 65세, 좀 더 젊고 의욕이 넘치는 일꾼을 찾아 교회를 맡기도록 하자.’ 이렇게 생각을 정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죽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은 사탄이지 교인들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그는 범 교회적으로도 할 일이 많았다. 1977년 초에 벌써 캐나다 노회를 창립하면서 대외적으로 분주해져 있었다. 1978년도에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를 필라델피아에서 창립하고 그 총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12월 18일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취임한지 4개월 만에 제 2대 총회장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그 해 4월 칼빈신학교를 열어 평신도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계 목사는 이제 더 이상 한 교회 지도자일 수만은 없었다. 교회도 그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1978년 12월, 성탄이브, 후임 목사를 조용히 세워놓고 그는 은퇴했고, 토론토 중앙교회는 그를 원로목사로 추대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 : 1~2)”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을 좇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했다.
33. 교회를 살리는 일이라면
계 목사가 교회에서 은퇴하자, “와서 도우라”는 요청이 왔다. 갓 태어난 반석교회가 목자를 잃고 도와 달라는 요청을 했다. 간곡했다.
반석교회를 세운 임대훈 목사가 미국 유학 차 떠나버렸던 것이다. 반석교회는 계 목사 부부를 맞아 은혜로운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교인들은 한 주가 다르게 모여 들었다. 이전 교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약한 교인들을 말씀으로 세워갔다.
이선직 사모의 교회 봉사는 모든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을 심어갔다. 궂은 일, 괴로운 일이 있는 곳에는 늘 사모가 함께 있었다. 손수 만든 반찬을 들고 늘 위로하는 일에 전념했다. 교인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시간이 와도, 사모는 먼저 식사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식구들을 살피고 어린아이 가진 부모들을 먼저 먹게 하며 아이를 돌보았다. 많은 성도들이 반석교회에 나아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곤 했다. 그의 설교는 늘 선지자적이곤 했다 .교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 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도는 늘 넘치곤 했다.
어떤 성도가 계목사 사택을 방문했다가 갖춘 살림이 초라한 것을 보고 돕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사모는 감사한 마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한 마음을 남겼다.
‘어떤 나그네가 기거하는 숙소에 사치스런 가재도구 사들이며 사는 것 보았는가 !’
그냥 우리를 교회 관리인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이 감사했다, 그래서 종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감사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 일하는 봉사자들을 생각할 때 감사했다.
그 일하시는 분들을 보면 감사하고 즐거웠다.
어떤 날은 쓰레기 차가 지나가는 날이었다. 교회에는 여러 성도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쓰레기를 잘 처리해야 했다. 특히 행사가 겹치는 날은 쓰레기가 넘쳤다. 그날 따라 쓰레기가 많다. 어떤 쓰레기는 밤에 짐승들이 와서 탐을 낸다. 낙훈 같은 짐승이 봉지를 뜯고 먹고 가느라 봉지를 뜯고 이곳 저곳에 쓰레기를 흩어놓기에 신경이 쓰인다. 언제 저 많은 쓰레기를 치울까 사모는 교회 창 밖을 보고 있다. 그때였다. 밤이 깊어가는데 교회 장로 한 분이 교회를 찾아 왔다. 쓰레기를 모두 밖에 잘 내놓고 긴다. 궂은 표정 한 번 없이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곤 하는 장로님이 너무 감사하다. 커다란 복숭아를 들고 돌아가는 장로님을 부른다. 선물이에요. 손에 쥐어 즌다. 그 장로님도 환히 웃는다.
쓰레기를 치워서 좋고, 장로님을 섬겨서 좋고, 사모님도 장로님도 서로 행복했다.
성도들은 서로 섬기고,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반석교회가 한참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같은 노회 소속인 성산교회는 어려움에 처했다. 모든 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노회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가서 청빙해 온 S 목사가 일년밖에 시무하지 않고 자신이 넘쳐 신임투표를 실시했던 모양이나 그 투표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답답한 일이 일어났을까?
목회자는 정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노출되곤 한다.
정답을 제시해야 능력 있는 목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떤 목사님이 ‘그건 병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구태어 내가 정답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 아니 될 수만 있으면, 목회자는 그 답을 내가 내놓지 말아야 한다.
내가 옳다고 내놓은 답이 정답이 아닐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정답이었을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정답으로 어떤 결과를 미치는가는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정답은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다. 그런 열린 마음으로 그 문제 앞에 설 때, 성령께서 그 답을 친히 마련하시는데.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답이 되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꿈꾸는 것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얼마나 감사하고 노래하며 목회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일로 감격하며 목회할 수 있는데……… . 시편 말씀이 생각났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앞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수많은 문제 속에 살면서 포로된 백성을 돌려 보내실 분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다..
정답을 내놓으려는 조급함으로 하나님께서 답이 되시는 은혜를 막지는 않았을까? 불신이 더 이상 우리 생애에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도 너무 조급해서는 안되는가 싶다. 그 S목사도 훗날 자신을 돌아보며 목회를 잘했다. 30년 후에는 미주 총회의 총회장도 역임했다. 너무 조급함으로 조그만 교회에 신임투표를 강행하다 불신임을 받은 s목사나. s목사를 내 보내고 교회를 소용돌이 속에 빠뜨린 교인들이나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조급하지 않으시다. 조급했던 성산교회를 훗날까지 붙드시고, 연약한 목회자를 연단하여 키우신 하나님은 부요하시고 넉넉하시다.
계 목사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쯤은 일찍 깨달은 노회 어른이었다. 불신임으로 교회를 떠나게 된 젊은 목사를 살리기로 했다. 문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성산교회를 나 몰라라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반석교회의 담임목사이지만 동시에 노회 총회의 어른이기도 했다. 노회임원들과 상의를 했다. 자신이 반석교회를 그 젊은 목사에게 맡기고 문제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성산교회를 회생시키는데 쓰임 받고 싶다고 했다. 노회 임원들은 계 목사의 희생적인 자세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요즈음 세상에 누가 꽃처럼 피어나는 교회를 후진에게 넘겨주고 문제 많은 회오리 바람 속에 뛰어든단 말인가? 욕심 없는 계목사를 그럴 수 있느냐 묻곤 했다.
반석교회는 난리가 났다. 계 목사의 충정 어린 마음이야 백 번 이해하지만 반석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중요했다. 더구나 왜 이웃교회에서 불신임 당한 목사를 잘되고 있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고 모든 교인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계 목사는 성산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묵묵히 결단을 시행했다.
성산교회는 계 목사를 맞아서 새로운 부흥이 일어났다. 스무 명도 채 안되었던 교인들이 목사와 한 뜻이 되어 교회를 새롭게 세워 나갔고, 교회가 견고해지자 성전건축을 일으켰다. 아담한 집을 헌물 받아 교회 건물로 개조했는데 채수평 집사가 교통이 좋은 자기 가게를 성전건축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한 사람의 결단이 성전 건축에 불을 붙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훗날 교회를 세우는 목사로 불러서 남은 생애를 사용하셨다. 많은 교우가 성전 건축에 피땀을 쏟았다.
계 목사는 성산교회에서 쓰임 받으면서도 기도원 설립 계획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가 토론토 중앙교회를 은퇴하면서 맏아들로부터 미화 3만 불을 선물로 받은 게 있었다. 그의 기도 제목이 구체적으로 응답된 것이었다. 그는 그가 받은 돈을 들고 노회로 달려갔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조그만 집밖에 살 수 없는데 노회가 이 헌금에 덧붙여서 기도원을 세울 수 없는가?”
중앙교회 후임, 정 목사가 일어섰다.
“우리 교회에서 돕겠습니다.”
1984년 6월, 토론토에서 한 시간여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있는 트레일러 파크를 구입했다. 약 10만평 (79 에이커)의 부지에 50만 불의 헌금을 쏟아 기도원을 세웠다. 이민 교회 교인들의 컬컬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기도할 수양관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성도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돌 하나라도 나르는데 쓰임 받고자 밤을 세워 일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예배당이 서고, 식당이 섰다. 이름하여 ‘예수원!’ 많은 성도들의 피와 땀과 헌신이 모여서 이민 교회사에 길이 남을 기도원을 이룬 것이다.
계화삼 목사는 예수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성산교회를 사임했다. 오진형, 정연욱 젊은 청년들과 함께 예수원에 남아 산적한 업무를 이루어 갔다. 온종일 일하고 납처럼 무거워진 몸을 뉘이면서도, 그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다. 장차 이곳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쉬임을 얻게 될 성도들을 생각만 해도 기쁨이 솟았다.
이런 일련의 일들에 쓰임을 받으면서 계목사는 노년의 그로 하여금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신다
노래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에서 자유케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웃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바다를 여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으로 노래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웃게 하셨다.
이삭이라 이름하고 온 마을 사람들로 더불어 웃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큰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은 다윗으로 춤추게 하셨다.
그의 아내 미갈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자유 춤을 두리둥실 추게 하셨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뜨거운 광야의 정오 우물 가에서 그녀는 큰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녀는 한 달음에 마을로 달려갔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고한 그분을 와 보라. 그녀를 얽매고 있던 모든 줄은 끊어진 채 그녀는 춤추고 있었다.
수가성 여인으로 웃게 하시는 예수님, 그분 곁에 그 마을 사람들은 머물고 싶었다.
=
아브라함으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웃게 하신다.
이스라엘로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찬양하게 하신다.
다윗으로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덩실덩실 춤추게 하신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예수원을 찾아 반석교회 교인들과 담임목사가 올라왔다. 반석교회는 계 목사의 사랑과 헌신이 듬뿍 배인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반가웠다. 그 동안 반석교회는 계 목사가 없는 동안 많은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계 목사가 강요하다시피 후임으로 세운 S목사가 반년 만에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교인들은 그 후임으로 K 목사를 모셔왔다. 그러나 교인들은 갈수록 줄어갔다. K목사는 새한교회와 합하고 싶어했는데 새한교회에서도 그를 목사로 모시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석교회 교인들의 다수가 동의하지 않자 K 목사는 교인들을 예수원에 두고 떠나버렸다. 기도원에 왔다가 목자를 잃어버린 반석교인들은 방성대곡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슬프게 우는 소리가 나는가 이상하여 살피러 온 계 목사는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었다.
“계 목사님, 우리 좀 살려 주세요. 반석교회 좀 살려주세요.”
계 목사는 ‘아니오’라고 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반석교회는 계 목사에게 있어 너무도 귀한 사역지였다. 교인들은 양처럼 목자를 따랐고 목사는 자식처럼 교인들을 사랑하던 터였다. 반석교회는 기도원에 올라와 교회문제를 해결 받고 돌아갔다. 계 목사는 반석교회를 담임하면서 예수원일도 같이 병행했다. 뚜렷이 내놓을 업적은 없었지만 목회자나 교인들이나 모두 행복했다. “우리 목사님!”. “우리 교인들”이라 부르며 모이면 감사한 세월이 3년 이상이 흘러갔고 그의 나이도 이제 칠순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교인들은 사랑하는 노목사의 설교들을 모아 설교집을 내드렸다. 설교집 “준비된 식탁”은 여러 교인들에게 설교집으로 읽혀졌다.
그는 88년을 마무리 하면서, 김재열 목사를 반석교회 후임으로 세웠다. 그날 따라 모진 한파가 토론토 공항을 뒤덮고 있었다. 계 목사는 조촐한 신임목사 환영식장에서 겸손한 메시지를 전하였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29)”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중심을 남기고 계 목사는 조용히 반석교회를 떠났다. 교인들은 노목사의 아름다운 퇴진에 진심 어린 공경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35. 중국선교에 남은 여생을 쏟아 붙다
1989년, 계 목사는 인도 선교사 마틴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진리를 찾는다. 마틴은 성경을 인도인과 아시아인들이 읽어볼 수 있도록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가 인도에 도착하던 첫날 그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인도를 위해 내 자신을 불태워 버리겠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흑해 북부의 거친 곳에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전도하다가 쓰레기 더미 아래서 죽어 갔다. 그는 고생스런 여행과 고열에 시달리다가 아르메니아 토킷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지금까지 19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여생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제 머지않아 주님 앞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주님께 죄송한 일이 있었다. ‘중국 선교!’ 바로 그것이었다. ‘문만 열리면 중국에 달려 가겠습니다.’ 했던 자신의 기도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더욱 감사한 것은 팔순이 가까워 오는 그 앞에 굳게 닫힌 중국이란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캐나다 중국 대사관으로 달려가서 중국방문을 신청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입국비자를 들고 만주로 달려갔다.
그는 무엇보다 두고 온 교인들이 궁금했다. 연길 땅을 방문하여 연길교회를 방문했다.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중국 정부가 승인한 삼자교회가 그 교회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동경성 강서교회에서 순교하신 최헌수 목사의 가족을 찾아 보았다. 그 분의 손녀 따님이 처소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정말 놀라웠다. 중국에는 기독교인은 없다 생각했던 자유진영의 기독교인들이 회개했다. 그곳에 사는 여러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고, 그 중에는 계 목사의 손으로 세례를 준 사람도 있었다. 계 목사는 자신의 청소년 시절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여러 가지 추억을 돌이켜 보았다. 그가 깊은 밤 건너던 두만강 가에도 서 보았다. 자신이 남은 생애에 이곳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캐나다에 돌아온 계 목사는 뜻있는 사람들과 교회에 자신이 중공여행 가운데 수집한 선교 계획을 보내고 교회와 성도들이 동참해주기를 호소했다. “중국에 교회를 세웁시다.” 그는 어떤 곳에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를 제시했지만 누구 한 사람 호응이 없었다. 그는 몇 달간을 안타까움으로 기도했다.
“주님. 이게 웬 일입니까? 이것이 귀한 일인데 왜 침묵하십니까?” 계 목사는 어느 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내밀한 음성을 들었다.
“네가 지금 가진 것이 얼마냐?”
“주님. 제가 가진 것이요? 천불입니다.”
“그것을 먼저 내놓아라.”
그가 예로 답한 그 다음날 미국 모 목사님으로부터 그의 선교 사역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다. 그의 놀라운 체험을 노회회원들에게 이야기 하자 노회가 발벗고 나섰고, 그가 원로목사로 있는 교회도 적극 동참했다. 그렇게 헌금을 모아 중국에 보낸 뒤 얼마 후, 보낸 헌금으로 세운 교회 모습을 사진을 통해 볼 수 있었다.
1992년 가을, 그는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 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은대 목사가 함께 동행했다. 그가 중국연길에서 시무한 연길중앙교회에서 그가 캐나다 토론토에 세운 중앙교회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감사했다. 연길교회의 유두봉 목사는 자신보다 40년 앞서 시무한 대선배를 맞아 만주 교회 역사를 들었다. 그는 계 목사의 만주교회 역사가 자신만 듣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것을 깨닫고 계 목사에게 간청을 했다.
“내년 이곳 연길에 신학교를 개설하려 하는데 만주 교회사를 강의해 주십시오.”
1993년 9월, 계 목사는 팔순 노구를 이끌고 만주땅으로 다시 향했다. 세 번째 중국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꽃피울 기회였다. 3개월의 기간이 문화생활에 익숙해진 그에게는 쉽지만은 않았다. 만주의 매서운 겨울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만주 교회역사를 듣기 위하여 먼 곳에서 달려온 뜨거운 후진들의 눈동자가 그의 남은 힘을 불타오르게 부채질 하고 있었다. 이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죽어도 자신에겐 영광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그가 다시 돌아와 50년 전의 이곳 기독교 역사를 강의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 일에 쓰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3차 여행 기간에 그는 도문교회에서 김보운 장로의 자제(김영일 장로, 현 도문교회 담임)를 만난 것이다. 김 장로는 그가 45년 전 두만강을 건너 탈출할 때, 망을 보아주며 탈출을 돕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살아 있다니·····. 그뿐이 아니었다. 그분의 부인께서 85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타났다. 경비원들의 동정을 살피면서 아스라이 사라져간 그 날의 김 장로 모습을 그 아들의 얼굴에서 읽으며 조용히 중국을 떠났다. 이별의 손을 흔드는 사람이 45년 전의 김 장로인지, 오늘의 그 아들인지 두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두 사람이요 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있었지만, 복음을 안고 한 목표를 향해 가는 한 그리스도인의 제자들이었다.
그도 또한 그 길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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