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5 February 2015

눅10:25~37 영생자의 이웃

[들어가는 말]
요즈음 날씨가 참 무덥습니다. 냉방장치를 해두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날이 더운 오후 2시 예배 시간에는 참 더웁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사무실에는 선풍기가 몇대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냉방장치가 부족해도 선풍기를 돌리면 시원하지요. 또한 우리 교회에는 선풍기를 꽂을 수    있는 전원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다만 선풍기를 가져다 꽂지 않은 것이 문제이지요.
영생이란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태초로부터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도 오셨습니다. 마치 전원이 우리 교회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도 주셨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장대 위에 높이 드신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바로 영생입니다.

1. 영생을 얻는 길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는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갖습니다. 당시 유대 지식인들도 영생에 대하여 관심이 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율법사 또한 이 질문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25절).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순수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한 질문 내용만은 훌륭한 주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생각을  아셨지만 그의 불순한 의도를 따라 대답하지 않고, 질문 자체의 지혜롭고 선한 면을 따라 대답하셨습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주님께서는 그가 사랑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답을 찾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율법사다웁게 하나님의 계명을 정확하게 요약해서 대답했습니다.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는 율법의 중요한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대하여 훌륭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최고의 사랑! 온 영혼을 다하여 하는 사랑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기울여 섬겨야 하는 사랑입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몸과 같이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흔쾌히 답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주님께서는 그의 답이 옳은 것을 인정하십니다. 사실 그의 답은 모범답안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대답에 대하여 그가 한 말이 옳다고 칭찬하셨습니다(28절). 그리스도 자신도 이것을 율법의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2:37).
주님께서는 간단히 대답하셨습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그 답안대로 행하라 하십니다. 답안은 옳으니 그대로 살기만 하면, 진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그가 알고 있는 답 속에 있었습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하시니

알고도 행하지 않은 죄는 모르고 하지 않은 죄보다 무겁습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이 세상에는 이런 모범답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모범답안을 발견하고 그 모범답안을 따라 사는 사람은 더욱 소수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습니
다.
영생을 얻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2.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이 난감한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을 주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그는 지금 자기에게 긴박하게 다가 온 일을 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자신이 영생 얻지 못한 자이고, 그 원인은 진리를 알기만 하고 행치 않은 데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리를 알면서도 이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스도께 시인하여야 한다는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 그로서는 자신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습니다. 자기자신은 나름대로 올바른 삶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의로움을 변호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기 속에 있는 그릇된 약점을 덮기 위해서 그는 다른 심각한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이 질문은 어렵지만 훌륭한 질문이었습니다. 누가 이웃이냐에  대한 논의는 그들 사이에서 충분히 토의되었고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웃 가운데서 인격이 있고 진리에 대한 배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주변에 사는 이웃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매우 친절하였고 겸손하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에
게 사랑하였고, 그래서 계명을 잘 지켰다는 생각이 자신 안에 있었습니다. 그가 속한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라는 계층 속에서 그의 이웃 사랑은 나름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계명을 말만하고 지키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나름대로 바른 기준을 가지고 지키고 있다는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웃에 대한 엄격한 잣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웃에 대한 잣대가 옳다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는 지역적이고 계층적인 이웃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임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당돌하게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그러나 그는 또 한번 자신의 한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이웃에 대한 제한된 사고였습니다.
"모든 이방인은 제외시켜라.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이웃이 아니고 우리 민족과 우리 신앙을 가진 자들만 우리 이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죽어 가는 이방인을 보고도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도와 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메튜 헨리)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웃을 생각할 때, 인종간 계층간의 구분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곤경에 처한 유대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구원받는 광경입니다.

한 유대인이 볼일이 있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습니다(30절).
그런데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매우 잔인하였습니다. 그에게 폭력으로 상처를 입혔고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의 돈을 빼앗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옷도 벗겨 갔습니다. 그는 버려졌습니다. 점
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차례로 그의 곁을 지나갔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제사장들이 여리고에 살면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들은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어떤 사유인지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그를 도우라고 외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르쳤을 뿐, 구출하는 행동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웃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사마리아인이 그 곁을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멸시할 뿐만 아니라 상대도 하지 않는 민족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쓰러져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자기 인생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들을 무시한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불행을 당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그 불쌍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주막이 있는 곳으
로 갔습니다. 이 사마리아인도 일이 바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막에 데리고 갔고 거기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막을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돈을 내어 주고 더 필요하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말하였
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두 데나리온은 두 달을 머물 수 있는 생활비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친구나 형제에게 기대할 수 있는 친절과 관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낯선 이방인이 그 일을 행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 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36절).
이 질문에 대해 율법사는 "분명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무 소중한 진리를 깨우쳐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도 자비를 베푼 자는 이웃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주의적인 관습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
랑이 없이 동족을 버려두고 지나가는 종교인이라면 그는 이웃이 아닙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그들이 비록 너희 민족이라 하더라도, 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이웃이 아닙니다.
이웃이란 자신의 사고방식 속에 금을 그어놓고 그 가치판단에 따라 선택적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냥 구하고 도와주는 마음이 이웃입니다.

[적용]

이 비유는 죄많고 불행한 인간에 대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 준다. 우리는 곤경에 빠진 이 불쌍한 여행자와 같다.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돕기 위한 동정심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곤경에 빠진
우리를 피하여 다른 것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축복의 예수 즉 선한 사마리아인이 오셨다. 그는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 이것은 그의 사랑의 풍성함을 보여 주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할 것을 촉구한다. "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졌으며 어떻게 이것을 갚을 것인가?"(메튜헨리)
이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진정한 이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 불우한 어린이가 쓴 편지를 읽고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을 도운 손길이 그렇게 아름답고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북한 어린이들도 도움을 입어야 합니다. 5살 미만의 사망률이
50%란 말을 들을 때, 너무 충격적입니다.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볼 때, 여러 가지로 생각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본문의 율법사와 같이 제한된 잣대를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만 돕는 것보다 자비를 베푼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보인다'는 책에 보면, 고바울이란 사람의 북한 탈출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출신 성분이 좋아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입니다.
그는 탈북 직후, 중국에서 만난 일본 여학생으로부터 미화$2,000의 도움을 받습니다. 물론 성경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경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 여학생은 목사의 딸로, 두 동생 역시 목회자로 중국에서 공부를 하던
중, 자신의 마지막 학기 학자금을 그에게 주고 귀국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북한선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인종이 같고 종교가 같으면 이웃입니까?
아닐 수 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여리고로 가다 부상한 나그네와 인종이 같고 종교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마리아인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북한과 남한은 인종이 같고, 지역이 가까운 혈육을 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그들은 원수였지 결코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같고 한국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마리아인과 같이 아픔을 당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으로 바르고, 자신의 나귀를 내어 주막집까지 가는 수고가 있어야 이웃입니다.


영생에  들어간 자의 이웃! 그는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성령의 바람, 사랑의 바람, 생명의 바람이 솔솔 불려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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