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27 February 2015

마가10:46-52 그가 진정 원했던 한 가지

들어가는 말

사람마다 시력이 다릅니다.
같은 사람도 나이에 따라 시력이 달라집니다.
가장 시력이 나쁜 경우 소경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소경이 아닐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육신의 눈은 완전히 감길 날이 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의 소경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적으로 소경은 많지 않지만, 영적으로 소경은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력에 대하여 유식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리창 밖으로 맞은 편 집을 바라보았습니다. 한 여인이 창가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한 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여인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름답다는 생각 이전에 정죄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리창 좀 닦고 살지 어떻게 뜨개질만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아침 자기 집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자기 집 유리창도 잘 닦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아름다움이 회복되었윱求? 자기 집 유리창이 더러워진 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유리창이 더러워져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실수가 많습니다. 내 자신이 소경된 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소경됨을 정죄하는 실수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디매오만 소경이고 나는 본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본다고 하니!”(요9:41)

본다고 생각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소경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된 예루살렘을 향해
저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성큼 성큼 다가가고 계셨습니다.
소경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그곳으로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소경된 인류를 보게 하시려고 죽음의 길로 나아가시던 예수님,
그 가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보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참빛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얻은 바디매오처럼, 이 시대에 주님을 만나 영적 시력을 회복하시는 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바디매오는 상처 입은 소경거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많아도 그 사람들 가운데서 나 자신이 존재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1] 바디매오는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장애인이 죄인 취급을 당하던 시기에 바디매오는 눈 먼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 열악한 시대에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사는 것만도 힘든 일인데,

   2]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요?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묻던 시기였으니 얼마나 소경된 일이 고통스러웠을까요?

   3] 더군다나 바디매오는 거지였습니다.

소경이라면 보호자가 있어서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재산이라도 넉넉하여 생활의 위협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사회 복지 시설이라도 잘 되어 있어서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을 넉넉히 받지도 못하고, 재산도 부족하여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지노릇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경되고
죄인되고
거지로 살아가야 하는 바디매오

4] 바디매오는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함으로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았습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부르짖음 가졌으나 그는 사람들로부터

잠잠하라

는 꾸짖음을 듣고 있습니다.
윽박지릅니다.
무시합니다.
말할 기본 권리조차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예화]
한 신부가 젊은 과부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며 신부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과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암이었습니다.
혹독하게 비난하던 두 여인이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신부님은 닭털이 든 봉지를 하나씩 두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들판에 나가 날리고 오라고.
돌아온 여인들에게 신부님은 그 닭털을 다시 주어오도록 부탁했습니다.
여인들은 울상이 되었습니다. 이미 날아간 닭털을 어떻게 주워올 수 있겠습니까?
신부는 답했습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니 용서를 해주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모함하는 일을 하는 일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바디매오는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런 바디매오를 보면서 우리는 쉽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떴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소경일 수 있습니다.

예화]

6.25 전쟁시 참호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흑인 병사가 말했습니다.
"나에게 내일을 보여주십시오."

그는 분명 눈을 뜨고 있지만 그는 내일을 볼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내일에 관한 한 소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이 되어 볼 수 없는 헬렌켈러는 그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만으로 과연 소경이라 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켈러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볼 수없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도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눈을 감고도 보는 세계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생소한 충격적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런 덕이 없으면 [[소경]]이라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디매오만 소경이 아니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보배로운 믿음이 없으면 영적 소경입니다.
덕이 없으면 소경입니다.
절제가 없으면 소경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소경입니다.
경건이 없으면 소경입니다.
형제 우애가 없으면 소경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소경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신의 성품을 아무 것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복음 9:41)

바디매오는 자신이 예수님이 필요한 소경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죄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있어야 부요해질 수 있는 거지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소경된 자요
자신이 영적으로 거지와 같이 가난한 자요
자신이 메시아가 필요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2. 바디매오는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바디매오는 소경의 자리에서 절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거지된 자리에 주저 앉아 자포자기하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신세를 한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뒷전에서 불평불만이나 하면서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올 때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올 때 비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의 능력을 덧입어 보기를 원했습니다.
메시아의 능력을 힘입어 거지 신분을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어나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외쳤습니다.
그것은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은 예수님께 나아올 때 어떤 비전을 가지고 나오셨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 나아올 때 어떤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거지된 신분만 자책하며 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자신의 소경된 처지보다
자신의 거지된 신분보다
주님을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볼 수 있다는 비젼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뭉개고 절망하는 대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힘있게 기도했습니다.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예화]

30세가 되던 어느 날
화니 크로스비는 뉴욕의 한 전도 집회에서 찬송 한곡을 만났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 믿어졌습니다.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주님 저도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무엇을 주 위해 할 수 있습니까?
묻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시를 쓰고 노래할 수 있는 은사를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65년의 시간을 더 주셨습니다.
무려 8000곡의 찬송가가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3. 무엇을 하여주기 원하느냐 물으시는 주님께 그는 보는 일을 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소원을 가지고 나아오는 자에게 무엇이든 하여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소원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으로부터 치료받을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던 바디매오는 자신의 소원을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당신은 이 시간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무엇을 대답하시겠습니까?

바디매오처럼 분명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계십니까?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구요?

예수님을 볼 수 없다면, 예수님을 볼 수 없으니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깨졌습니다.
볼 수 없으면 소중한 존재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있어도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진리가 있어도 보아야 그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꽃이 피었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은 아닙니다.
지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꽃을 누리고 살지요.
그러니까 감동이 사라집니다. 찬양이 사위어 갑니다.
이렇게 보면, 보게 되는 것은 구원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시력을 회복하여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경된 것 생각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디매오가 가장 필요로 하는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가 소원한 가장 절실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가 확실한 기도제목을 주님께 말씀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단지 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눈을 떠서 보게 되었다는 말씀 이상입니다.
그가 그렇게도 소원하였던 보는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의 한 부분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만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보는 일은 선물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1] '가라'는 말씀을 듣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의 선포 단계였습니다.
3] '그가 곧 보게 되었'던 치유의 단계입니다.
4] '예수님을 길에서 좇'는, 곧 예수님을 따르는 단계입니다.

말씀을 듣고, 구원의 소식을 듣고,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세상에서 상처입고 유리된 사람이 있습니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지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치료하심을 덧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청년들이 이곳 토론토에서 330 북쪽 마을에 사는 원주민들의 마을에 찾아갔습니다.
4박 5일 동안 그 보호구역 안에 있는 교회에서 먹고 자고 경건의 시간을 보내면서 원주민들을 위해 여름 캠프를 베풀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부단히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저들의 삶이 소경된 바디매오처럼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시대의 소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내 자신이 많은 인생부분에서 소경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를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치료하심을 입어 보게 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경된 이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누는 것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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