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수만 명이 예수님께 모여왔습니다. 서로 밟힐 정도였습니다. 갈급한 그 군중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일은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는 수만 명의 무리들에게 양식 공급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영적으로 무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왜요?
제자들은 사실 몇 가지 큰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혼을 죽이는 유대인의 가르침의 위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영적 죽음의 위험입니다.
둘째는 세상에서 생명을 위협당하는 죽음의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육적 죽음의 위협이죠
셋째는 권세자들의 핍박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불신할 위험에 노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런 위협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 무장을 시켜주시려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교훈을 통하여 우리의 사랑하는 가정과 자녀와 교회를 지키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마음을 위해 주님께9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탐욕을 제거하고 내면을 말씀으로 깨끗이 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라.
남에게 짐을 지우지만 말고 남의 짐을 선뜻 져라
선지자와 사도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거하라.
그곳에서 성령은 힘있게 일하고 계신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엄청 격했습니다. 벌떼처럼 일어나 예수님을 죽이려 듭니다.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왜 이런 격한 바리새인의 증상이 나타날까요?
바리새파는 이방 그리스 문화를 거부하여 일어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화를 지극히 배격합니다. 그 와중에서 그들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었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이룬 무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난 무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인도하심을 받는 운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번제, 속죄제, 소제 화목제가 되는 일인데 그들은 제사란 의식만 있지 전적으로 태워진 것도 아닙니다. 속죄하지도 않아요. 빻아지지도 않았습니다. 화목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사만 드릴 뿐이지요. 이것은 무서운 누룩입니다. 오히려 신앙을 해치는 것이요. 백성들을 영적 사망 가운데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병세를 진단하여 치료법을 말씀하셔서,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비밀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문하고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 이미 이런 증세는 이미 중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주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진리가 순전히 보존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대신 자기들의 주장을 예수님과 그 공동체에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려 합니다. 신앙 공동체의 위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훈, 곧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이 공동체에 들어와서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함께 모인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진리! 사랑! 선교!' 이 세 가지를 교회의 목표로 삼고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경계해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탐욕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헌신
남의 짐을 지는 대신 남에게 짐을 지우는 일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거하지 않는 일
이런 누룩을 우리는 내 안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2.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3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오늘 본문에는 두려워하지 말 것과 두려워해야 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으면 끝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도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을 위협하는 세상의 가장 큰 무기는 죽음입니다.
인생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날은 신속히 날아간다(시90:10)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70년의 인생 중에서 잠자는데 20년, 일하는데 20년을 보낸다 합니다. 6년은 밥먹는 시3간이요, 4년 반은 잡담으로 보낸답니다.
더욱 심각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생을 하루의 시간과 비교한 것입니다.(국민일보) 깨어 있는 시간을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라고 본다면,
15세는 오전 10시 25분
20세는 11시 34분,
25세는 12시 45분
30세는 오후 1시 51분,
35세는 오후 3시
40세는 오후 4시 8분
45세는 5시 16분
50세는 6시 25분
55세는 7시 34분
60세는 8시 42분
65세는 9시 51분
70세는 밤 11시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루 중 몇 시에 와 있습니까? 저의 경우는 50이니 오후 6시 반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며, 정리해야 할 때요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요?
어떤 분(오몽근)이 죽음 앞에 선 인생을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는 아무리 그곳이 좋아도 태어날 날이 있습니다. 사실 그가 태어난 세상에는 찬란한 빛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엄마의 눈과 품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다해도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없고, 한번의 죽음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후, 저 천국에서는 이곳의 햇빛보다 더 찬란한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 눈보다 더 사랑에 넘치는 눈빛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를 향해 담대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심 앞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는 죽으심이 이 땅에서의 사역을 다 마치고, 천국 하나님 보좌에 복귀하는 한 숭고한 졸업식과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죽음이란 가장 멋들어진 경주를 마치고 상을 받기 위해 시상대를 향해 나아가는 경주자와 같습니다.
스스로 나병환자로 일평생을 헌신한 성 다미엔은 임종하던 시간에
"주여! 내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였습니다. 다미엔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드릴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일입니다.
한 때, 방탕한 삶으로 딸을 잃고 하나님께 돌아와 레 미제라불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로 쓰임을 받은 빅토르 위고는 죽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 일생을 다 끝냈소'라고 말하지 않고 '내 일과를 다 마쳤소'라고 말하겠습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오면, 나의 일과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그에 있어서 '죽음이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아모스 J. 타버)입니다.
결혼한 지 일년도 되지 않아 남편을 잃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새벽 경부 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그 남편의 차를 들이받은 것입니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서 교회에 다니던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는 태어났습니다.
시댁을 찾아 아기를 남편 무덤에 보이고 내려오는 그녀에게 시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오늘이 주일인데 왜 교회를 가지 않느냐?"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예쁜 아들을 줬는데도?"
"그래도 그래요."
시아버지는 그녀를 마당 앞 꽃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갖고 싶은 꽃을 꺾어보아라."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나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단다."
성도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님의 정원에 옮겨 심겨지는 모종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복된 말씀을 기쁘게 들어야 합니다.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3. 성령을 거역하지 말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면,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가 한없이 커 보입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성도들에게 핍박과 불이익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시인하기가 힘듭니다.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려 갈 때,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너무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함께 하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헬라어에서 '파라클레이토스'(保惠師)라 합니다. '곁에 있는 자'란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피고 곁에 서서 돕는 변호사'를 '파라클레테'라 하였습니다. 피고의 약점을 싸안고 변호하는 '위로자'란 의미입니다.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려 갈 때,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 곁에는 바로 참 변호자이신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정오만 되면, 교회에 들어갔다가 2-3분이면 나오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이상해서 사찰을 통해 사유를 알아보았습니다.
"나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 저입니다. 저예요!'하고 조금 기다렸다가 나옵니다."
얼마 후, 그 노인이 부상을 당해서 병원에 입원을 했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동이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불평 불만으로 투덜대던 환자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나고,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어느 날, 간호사 한 분이 그 이유를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이렇게 병실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내 방문객 덕분이야."
"방문객이라뇨?"
그분에게는 어떤 방문객도 없음을 알기에 의아해 하는 간호사에게 그분은 말했습니다.
"날마다 12시면 그분이 오셔서 저쪽에 서서 웃으면서 나에게 말씀하신다네.
'날세 나, 예수네!' "
이런 성령의 변호와 위로가 있기에 성도는 외롭지 않습니다.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늘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핍박 앞에서 나름대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책임지시는 손 안에 맡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무엇이 우리 공동채를 위협하고 있습니까? 뱀처럼 간교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까? 죽음의 권세입니까? 두려워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로 잠못이루며 궁리하게 합니까? 성령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