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요즈음 캐나다 토론토의 큰 사업 중 하나는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과 공원을 건립하는 일입니다. 토론토 동물원에 3에이커의 땅을 부여받아 3천주의 무궁화를 심어 장식하고 한국적인 조형 건축물을 함께 건립할 예정입니다. 이 일을 위해 토론토의 내노라는 한국인 유지들이 많은 교민들과 힘을 합쳐 추모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관에도 스코필드 박사의 흔적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그가 한국 사회에 기념비적인 존재로 삶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쓴 일을 넘어서라도 어떤 선교사보다 기념비적인 선교사업을 한국 민족 가운데서 남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념비적인 신앙의 용장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마리아의 신앙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진리입니다.
1. 예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본문의 한 여자는 다른 성경에 보면, 나사로와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입니다.
눅10장에 보면,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 泳汰都求?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가정에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에겐 집 주인으로서 준비할 일이 많았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그 일로 인하여 몹시 분주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서 주시는 말씀 듣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언니의 눈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 듣는 일이 중요하였기에 그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참다못한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그 집을 방문하신 까닭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일이 없어서 노닥거리고 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 길을 오신 까닭은 자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실 말씀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방책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란 위험 앞에 노출되어 계십니다.
1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님은 이를 미리 아셨고, 고난당하실 것을 몇 차례 거듭하여 제자들에게 알려 준비하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중대한 시점에 있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고 있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듣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한 날이 왔습니다. 문둥이였다가 고침을 받은 시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가정, 모두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베푸는 축복된 자리였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마리아는 이 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마리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왜요?
마리아는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예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 중대한 시점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주님 위해 기념할 만한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씀 듣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중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긴급한 상황이 촉박하게 진행이 될 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일이 닥쳐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를 붙들 줄 압니다.
기회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그대의 앞머리는 무성한가?
다가올 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대의 뒷머리는 없는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마리아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소중한 기회를 포착하였습니다.
기회를 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가까웠다고 성령께서 깨우침을 주셨을 때, 마리아는 즉각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헌신으로 채웠습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
마리아에게 있어 예수님 머리에 부은 값진 향유는 무엇을 표현합니까? 자신을 위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예수님, 그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대신 고난을 당하시게 될 주님의 값진 사랑에 대한 그녀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으면 그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부유하고 또 가진 것이 넉넉하거나, 죽은 자를 많이 사랑할 때, 기름을 준비하여 가지고 무덤에 가서 시신에 발라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시기 전에 값진 향유를 예수님 몸에 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향한 더 진실한 마음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기념비적인 신앙을 갖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듣는 일에 전념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빚어가기 시작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 안에 능력이 있거든요. 기념비적인 신앙의 용장은 말씀이 빚어낸 신앙의 용장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전념하여 듣고 계시는 여러분 이 말씀에 순종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묵상 시간에 전념하시는 성도 여러분 그 말씀에 순종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나는 이 시대에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찾으실 수 있는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요. 마리아처럼 듣고 믿음으로 신앙의 용장으로 해야 할 바를 깨닫는 축복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 예수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한 곳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 만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보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울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통분하신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때나 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무 사랑하는 나사로의 생명이 죽음의 권세에 의해서 휩쓸러 갔을 때, 예수님은 우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시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권능을 베푸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마리아는 부활과 생명의 권능을 체험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념하여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기념비적인 신앙의 용장으로 이 시대에 서길 원하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한 다윗이 기념비적인 신앙의 용장이 된 것처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마리아가 기념비적인 신앙의 용장이 된 것처럼,
살아계신 주님을 오른 편에 모시고 사는 축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자신의 값진 향유옥합을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접목시켰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3)
1] 주님께 필요한 것이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평소부터 예수님의 말씀 듣는 일에 전념하던 마리아는 지금 자신이 주님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몇 가지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신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향유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값진 향유를 맡기신 것은,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값은 무려 300데나리온 이상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할 때, 매우 값이 나가는 향유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리아에겐 아깝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값진 향유는 값진 분에게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바쳐 사랑하시는 주님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은 아깝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마리아는 대속적인 죽음을 맞으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였을 때, 비록 향유가 300데나리온 이상 값이 나가는 고급 향유지만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일에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가장 값진 향유를 조금만 부은 것이 아니라 몽땅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저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란 찬송이 마리아에게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어떤 분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값진 관을 사고, 비싼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장례식을 화려하게 하고 그렇게 요란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위해 많은 사랑을 베풉니다. 자주 찾아뵙고, 부모님의 말씀도 정신차려 듣고, 여행도 시켜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그렇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 표현은 바로 후자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세상적인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 옥합 향유를 온전히 바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에는 방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그녀를 책망하며 괴롭게 하였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1] 분통 터지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 이 향유를 허비(낭비)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처럼 많은 양의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사역만 소중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동기 자체가 다릅니다. 가룟유다에게 보이는 것은 향유라는 물질 자체의 시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있어서 향유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사랑에 대한 감격의 무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사랑에 감복한 마리아에게는 세상적인 값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사랑은 이성이나 계산보다 초월적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복한 마리아의 헌신 앞에서 세상 사람들의 계산은 무의미 합니다.
근검절약하여 사는 남편이 수고한 아내를 위해 그 생일에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좋은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물질을 허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허비를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돈으로 선교지에 보내면 한 달은 먹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일입니다.
3] 주님께서는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1] 힘을 다하여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사랑의 표현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값진 옥합 전부를 헌신한 마리아를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힘을 다하여(8)' 드린 헌신을 칭찬하셨습니다. 최선을 주님께서는 아름답게 보시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과부의 최선을 칭찬하신 주님, 마리아의 힘을 다한 헌신을 칭찬하신 주님께서는 나의 최선을 보십니다.
[2] 장사를 미리 준비한 그 중심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동기를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3]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 행한 일도 전해져야 할 기념비적인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값진 향유와 같이 가진 것을 가진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값진 향유옥합을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접목시키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기념비적인 신앙의 용장은 자신의 값진 향유옥합을 하나님의 목적에 연결시킬 때 이루어집니다.
[마무리하는 말]
리빙스턴의 전기에 나온 아프리카 추장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너무 기쁜 추장이 밀가루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밀가루 정도로 만족하는 분이 아니라고 돌려보냈습니다.
백마를 가져온 추장을 돌려보냈습니다.
추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머리핀을 가져온 추장을 돌려보냈습니다.
낙담한 추장은 반문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남은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 자신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귀한 점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그 사랑의 십자가에 보답했습니다.
나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깨뜨릴 때 그 향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시신 그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1311)
자신의 향유옥합을 무엇을 위해 열고 무엇을 위해 소비하고 계십니까?
들을 때 듣고, 체험할 때 체험하고, 열어야 할 때 엶으로 기념비적인 신앙의 용장이 되는 복을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성경본문]
마가14:1-9
1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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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 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 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 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떤 그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삽니다.
나는 구리 그릇이다.
나는 은 그릇이다.
나는 금 그릇이다.
나는 옥으로 만든 그릇이다.
내가 질그릇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지만 흔한 일은 아닙니다.
내가 질그릇보다 값진 은그릇이었으면 싶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은그릇보다 귀한 금그릇이라면 더욱 흐뭇해 합니다.
예술이라는 것도
그릇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상력과 이미지를 담는 문학(시·희곡·소설 등)이란 그릇이 있습니다.
시각적 미를 추구하는 시각예술(회화·데생·조각 등) 그릇이 있습니다.
그래픽아트(회화·데생·디자인 등 평면적 표현형태들),
장식미술(에나멜공예·가구디자인·모자이크 등),
조형미술(조각·모델링 등), 등이 모두 그 형제 그릇들입니다.
공연예술(연극·무용·음악 등),
청각적 미를 추구하는 음악(작곡 등)이란 그릇이 있습니다.
건축(실내장식 포함) 이란 그릇이 있습니다.
멜로디로 이루어진 음악이라는 그릇이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연극이나 영화같은 종합적인 그릇이 활발히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어떤 그릇이든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요
또,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그릇 안에 무엇을 담을까 고심을 합니다.
그릇 안에 담기는 그 내용물에 승부를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릇의 참된 가치는
내가 어떤 그릇이냐에만 달려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금그릇이라 할지라도 만일 썩은 오물을 담고 있으면 오물통입니다.
하지만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값진 보석을 담고 있으면 보석함입니다.
그리고 옥으로 된 병인데 그 안에 값진 향유를 담고 있다면 향유옥합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그릇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
그는 자신을 질그릇이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고
늘 그분을 자랑하고
그분의 향기를 상에 나타내고
그분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더 귀한 까닭은
그 안에 모시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날마다 옥처럼 소중한 자아를 깨뜨렸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깨뜨림으로
자신 내면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나타내었습니다.
자아란 옥합을 깨뜨린 그에게서는 늘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보석함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내 그릇 안에 있는 보배를 누리는 일입니다.
숲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숲에 들어가 그 숲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일은 더 귀합니다.
호수를 보는 것만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그 호수에 손을 담구어보고 수영도 해보고
그곳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과도 친밀하게 지내며 호수를 누리는 일이 더 귀합니다.
내 안에 계신 보배이신 예수님을 자랑하기까지는
그 보배를 누림이 전제됩니다.
그분이 주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분이 주는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로 인한 행복이 내 심령에 넘칠 때,
나는 더 겸손해질 수 있고
내 안에 계신 보배에 대한 자랑은 풍성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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