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5 February 2015

눅14:15-24 내 집을 채우라

어제 여선교회에서 양로원에 갔습니다. 저는 운전사 겸 찬송가 반주기로 반주도 할 겸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10여 년 전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던 배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젊은 날, 시인이셨습니다. 그보다 귀한 점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권사님의 모델적 인물로 평이 좋으셨던 분입니다. 늘 기쁨과 감사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분이셨습니다. 배권사님께서는 참 좋은 양로원에서 아이 같은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10여 년 만인데 그분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달라진 모습으로 계셨습니다.
저는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서히 변하고 있지만  변하는 정도만 다를 뿐, 결국 변하게 되고, 그 변한 존재에 따라 맞는 적절한 처소에 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한 아름다운 처소에 초대받아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1.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바리새인 두령 집에 초대받아 가신 예수님께서는 고창병 든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때, 하나님 나라 잔치에 담긴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7-11절)는 겸손이요, 잔치를 배설하고 누구를 초대할 때에는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라(12-14절)는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과 긍휼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약속하시고, 이제 사람들을 데려다가 강권하여 채우라 하십니다. '큰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초청의 강권성과 구속 사역이 섭리를 알려주십니다.

겸손과 긍휼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유심히 듣고 있던 손님 중에 한 사람이 진지하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者)는 복(福)되도다.

'야,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일이 정말 복된 일이군요!' 감탄하여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진실한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또한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의 잔치를 베푸셨을지라도 그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무용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 왕국에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무임승차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이나 이방인들은 그 왕국 잔치에서 저희 임의로 배제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배타적이었습니다(Barnes, Geldenhuys,
Childers).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보증수표를 받은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와 그를 통한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천국과는 멀어 보이던 유대인들, 창기요 세리와 죄인들, 나아가 이방인들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첫 번째 초청을 살펴봅시다(16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많은 사람을 청(請)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간(時間)에 그 청(請)하였던 자(者)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準備)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一致)하게 사양하여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든 것을 준비(準備)' 하시고 값없이 주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납니다. 주인은 음식을 준비한 다음에 '많은 사람을 청(請)'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와서 참여하라고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초대를 이 시간 감사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천국의 초대장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과 유대인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들을 복음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셨습니다. 천국잔치를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개방해 놓으셨습니다. 초대하라고 종들을 모든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이 복된 종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초청을 오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절)."

318장을 1,2절만 함께 찬양합시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들은 체하려나.

2. 초청받은 손님들은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18)다 일치(一致)하게 사양하여
.....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참석을 피할 이러 저러한 구실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請)컨대 나를 용서(容恕)하도록 하라 하고

한 사람은 밭을 샀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과연 좋은지 아닌지를 가서 살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처음 사람이 '밭을 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농부일 수 있습니다. 그는 농토를 늘리고 재산을 늘렸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저는 농사를 짓는 현장에서 농부들의 땅에 대한 애착을 체험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애착이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적이며, 육적인 재산을 늘리고 확장하는 행위가 영적인 일에 둔감하여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안습니다. 세상 밭을 사랑하다가 영적인 밭을 잡초만 무성하게 황폐하게 버려 두어선 안됩니다. 신앙인은 재산의 증식에만 매달린 나머지 영원한 천국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고 포기하는 우매함을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그는 밭을 보러 가는 일을 다음 날로 미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밭을 경작하는 일이 현실적으로는 중요한 일이지만 자신의 이해타산에 급급하여 잔치 초청을 거절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특히 유력자의 큰 잔치 초청을 거절하고 그분과‘선전포고’와 같은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19)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試驗)하러 가니 청(請)컨대 나를 용서(容恕)하도록 하라 하고

겨리는 소나 말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말하며, 짐승을 두 마리씩 묶어 헤아리는 단위로도 쓰입니다(삼상 11:7).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소를 둘씩 짝을 지워 밭을 갈았습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소는 서로 체구와 힘이 비슷해야 했고, 새로운 소들은 주인에 의해 길들여져야 했습니다. 한 마리의 소만 살 수 있어도 좋은데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므로 새로 산 소를 시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인생의 전부입니까? 가장 중요한 일입니까? 그 인생에서 최상의 우선 순위입니까? 그 시간에 꼭 그 소를 시험해보아야만 합니까? 시험하는 일을 미루면 안됩니까? 지나치게 자신의 일에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죄입니다. 세상일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전자가 이 세상에서의 지나친 자기 만족을 암시하고 있다면, 후자는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의무로 부름 받았을 때 그 의무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우리로 변명하게 하는 주범이 이것들입니다.

(20)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여기 새로 결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당한 변명일 수 있습니다. 새로 결혼한 사람에게는 군대도 면해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보면, 정당한 이유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장애가 됩니다.  그는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댔으나 사실은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같이 데리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환영받았을 것입니다.  장가를 들었다는 핑계로 하늘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이 율법의 정신을 잘못 악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잔치는 부부가 공히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잔치요 보다 더 아내의 기쁨을 충족케 해 줄 수 있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민족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일반적으로 무시하였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큰 잔치'(16절)에 정식으로 초청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구약 율법에 충실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잔치에 초청을 받고도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① 밭을 샀기 때문에, ② 소를 샀기 때문에, ③ 결혼했기 때문에(18-20절) 등의 이유로 스스로 복된 초청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 탐욕과 쾌락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24절).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꺾인 참 감람나무 가지로 비유했습니다(참조, 롬11:17, 18).
우리 삶에 [적용]해 봅시다.  사람들은 흔히 물질의 소유나 가사에 집착하다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등한히 여기고 삽니다. 우리는 일이 너무 바빠 기도할 시간도 성경 읽을 시간도 예배드릴 시간도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살다가 결국 우리들의 영혼을 파멸시키지는 않을까요?



3. 하나님나라 잔치는 채워졌습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主人)에게 그대로 고(告)하니 이에 집주인(主人)이 노(怒)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者)들과 병신(病身)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者)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인이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가난한 자(者)들과 병신(病身)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者)들을 데려오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이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병들었기 때문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다리를 상해 절뚝거리기 때문에 감히 바라볼 수 없었던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사모하는 자들을 초청하라 명하셨습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밭을 보러 갈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몸이 불편하여 밭을 경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조차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들을 귀한 천국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그러한 손님들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날의 끼니를 위해 염려하던 가난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달려왔습니다.
장애로 인하여 소외되고 골목으로 밀려나 살던 외로운 사람들이 골목에서 달려왔습니다.
앞을 못보던 소경들은 지팡이를 집고 달려왔습니다.
발을 상해 저는 사람들은 절뚝거리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잔치집은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가난하였고,
병으로 고생하였고,
앞을 보지 못하였고,
다리가 불편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던 사람들로 넘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고,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도 주님의 은혜를 많이 누렸었기에
주님과 함께 있기에 익숙하였습니다.
그들 귀는 주님의 복음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유대 종교인들은 그들이 천국 잔칫집에 초청될만한 의가 없다고 말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초청한 큰 잔칫집의 자리는 아직도 빈자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22)종이 가로되 주인(主人)이여 명(命)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십니다. 풍족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빈자리를 남겨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루가 천 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22절).
오히려 있는 소중한 자리는 누구를 위해 마련된 것일까요? 주인은 말씀하였습니다.

(23)주인(主人)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强勸)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주인의 잔치에 마지막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주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처음 정식으로 초청 받았던 사람들처럼 신분도, 의도 없었습니다.
두 번 째로 부름 받았던 '시내 거리와 골목에서 데려온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 수준에도 들지 못합니다.
길과 산울 가에 버려진 채
잡초처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자들입니다.
성안에 살지도 못하고 성문밖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리갈까 저리갈까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데 모여 살지도 못하고 산울가에 흩어져 삽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의 영역 밖에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을 강권하여 데려 오라 하셨습니다.
자기들을 초대하신 분이 얼마나 존귀한 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초대받은 잔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강권하여 끌려온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그들로 집을 채우게 하였습니다(참조, 엡 2:11-13).


나무를 심거나 울타리를 손질하기 위하여 고용된 가난한 노동자들!
너무 최하층에 속해 있어서 사람 수에도 들지 못했던
너무 가난하여 존재의미조차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강권(强勸)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그들을 강요하여서라도 데려 오라 하십니다.
열의 있게 초청하라 하십니다.
절박한 말로 초대하여 데려 오라 하십니다.

예화]
고구마 전도라는 책에 작두도사를 전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관을 쓰고 한복을 입고 있는 작두도사에게 "안녕하세요 아저씨!" 인사합니다. 손님인가 반가이 맞는 도사에게 "교회에서 왔노라 인사한 후, "혹시 예수님 믿으세요?" 했다가 별 쌍스런 욕을 다 먹습니다. 그런 그 집을 나오면서 "그래도 예수님 믿어보세요. 너무 좋아요!" 합니다.
며칠 후, 그는 다시 들려서
"아저씨 안녕하세요? 제가 아저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버럭 소리지르는 작두 도사에게 "그래도 예수님 믿어보세요. 너무~ 좋아요!"
영업방해라 고소하겠다는 그에게 "그래도 예수님 믿어보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세 번 째 들렀다가 왕소금 벼락을 맞고도 "아저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에 3년째 누워있는 그의 아들의 병치료를 해주면 믿겠다는 말을 듣고, 작두도사를 교회로 인도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작두도사의 형님이 대구에서 목회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설득하고 또 설득하면서 거기에 동의하여 구원에 참여토록 하는 사랑의 강권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이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비어 있는 자리가 찰 때까지 계속되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구속 사역이 완성되는 시기까지 '큰 잔칫집'의 '빈 자리'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지구촌의 '길과 산울가'를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강권(强勸)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달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권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자의 수는 차게 될 때까지.
'이 천국 복음의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이것은 이방인들의 초청을 가리키며, 그들로 교회가 가득 채워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자의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절대적인 사항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누가 구원받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만 땅끝까지만 복음을 전파하라 명하십니다.

맺음말

성경에 기록된 잔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교회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긴박함과 확장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잔치를 열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청 받아 온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 주인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종들을 시켜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수효에 맞추어 음식을 장만하고 자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제는 잔치 시간이 임박하였고 준비한 음식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이 잔치는 자기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구원의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구속의 복음을 전파케 하였습니다. 기왕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메시야 되시는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초청받은 자들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약속 불이행이며, 또 그것은 초청한 주인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헬리어로 '오르기스데이스'는 '형벌, 징계'라는 뜻으로, 또 '분노, 복수'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즉 복음의 손길을 업신여기며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에 대한 징계의 때가 임박하였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진노의 때는 있습니다. 곧 심판을 가리킵니다. 이 심판이 이르기 이전에 마련된 잔치 자리는 다 채워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더욱더 시급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아직도 빈 자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사역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명령은 오늘날 우리들이 땅 끝까지 이 세상 끝날 까지 그리스도의증인들이 되어 아직도 비어 있는 이 잔치석을 채워야만 할 것입니다.
(노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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