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5 February 2015

눅15:1-10 잃어버린 나를 찾는 길

들어가는 말

'상실의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잃어버린 사람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구리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으러 10년을 헤매다가 그 아버지까지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남편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한 순간에 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예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역시 무엇을 잃고 사는 사람은 아닙니까? 본문에 나오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그 당시 사회가 잃어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잃고 살았던 '중요한 나의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잃어버린 무엇을 찾아 구원하시는 주님을 만납시다.


잃은 것을 찾는 일은
1. 시각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여기 본문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사회가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권세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회 음지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카운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드실 때, 그들은 노골적으로 원망하였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삐딱한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뱀이나 쓰레기처럼 보입니다. 피하고 싶고 치우고 싶습니다. 자신들은 그들과 근본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비뚤어진 시각으로 인하여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잃어버린 바 된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한국에서 국4의 어린이가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비뚤어진 인간의 시각이 어린 아이를 살해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이 잘못된 시각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바 된 사람들의 정체성을 찾아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양 100마리를 기르고 있는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잃었습니다. 이를 안 그는 즉시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섭니다. 마침내 그는 잃은 양을 찾고, 너무 기쁜 나머지 이웃을 불러 잔치합니다.
이 비유를 보면 주님께서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뱀처럼 보고 쓰레기처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양이나 돈처럼 값진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다만 그들은 음지에 있어서 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찾아 빛을 공급해 주면 그들은 양지의 사람이 됩니다.

예화]
언젠가 저는 '포fp스트 검프'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란 주인공은 IQ가 75입니다. 게다가 척추 이상으로 양다리에 보조물을 달고 다닙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거절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놀림감입니다.
하지만 그 절망적인 소년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제니이지요. 어머니는 격려합니다
'넌 남과 다르지 않다. 지능이 좀 모자랄 뿐!'.
어머니의 집념으로 그는 일반 학교에 들어갑니다. 비록 여전히 놀림을 받지만 말입니다.
그에게도 인생의 봄이 왔습니다. 친구들로부터 구타와 놀림을 받던 그에게 그의 편에 선 제니가 외칩니다.
"포레스트, 달려! 무조건 뛰란 말이야!"
제니의 강한 눈빛을 본 그는 뛰기 시작합니다. 무거운 척추 보조물을 달고 있는 그가 달린들 얼마나 갈 수 있겠습니까? 달린다고 달려보지만 쫓아오는 아이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때, 제니의 외치는 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포레스트, 뛰어! 더 빨리 뛰어!"
그 순간 운명처럼 달려 있던 보조물이 떨어져나가고 그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놀림을 받던 어느날, 그는 그 놀림을 피하여 미식 축구 경기 중이던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립니다. 그리고 그 축구 감독의 눈에 띄어 축구선수로 뛰게 됩니다.
월남전과 새우 잡이를 거친 후, 잔디 깎기를 하면서 그의 달리기는 살아나고 몇 년이고 계속됩니다. 그를 따라 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를 영웅적으로 조명하는 메스컴에 그는 의미 깊은 한마디를 말합니다.
"나는 달리고 싶기 때문에 달립니다."

세상은 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바른 시각을 가진 그의 어머니와 제니는 절뚝거리며 살 수 밖에 없는 그의 인생을 달리게 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시각을 가졌느냐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로 인하여 바른 시각(인생관)을 상실함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잔치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소외감으로 힘들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주님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오늘 비유에서처럼 주님의 양으로, 하나님의 은화로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외로울 때 주님 품을 찾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시고 시각을 바꾸셔서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기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볼 점도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존재가 단순히 양지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양지에서 자라났을 뿐이라는 생각은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빛 가운데 있는 빛의 자녀요, 모든 세리나 죄인들은 어둠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시각에 더 가깝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에는 나의 잘못된 시각 때문에 잃어버린 바 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지난주간에는 한국에서 국4의 어린이가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비뚤어진 인간의 시각이 어린아이를 살해하였습니다.
우리는 시각을 바로 세움으로 삶의 현장을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잃은 것을 찾는 일은
2. 인생목적을 교정함으로 진행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인생의 목적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인생목적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목적은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죄로부터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가까이 지내는 모든 세리나 죄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인생에서 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죄를 밥먹듯이 짓고 사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의 존재란 엉겅퀴나 가시와 같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싫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까이 하시는 모습만 보아도 원망이 나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상한 악 취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죄와 친숙하게 보내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뱀이나 쓰레기처럼 멀리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앞에 서 있을 때, 예수님은 좋습니다. 잔치할 만한 일입니다.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습니다.
예수님의 인생 목적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 곧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약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그들은 바로 예수님이 찾고 계시는 목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찾아야 할 대상이지요. 고사리나 고비를 캐는 사람들이 그것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찾고 있는 대상이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란 책에 보면, 짐이란 사람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공적인 중소기업의 사장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었습니다. 회사의 공금을 횡령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영적인 문제에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교회를 나가겠다고 하자, '애들을 병신 만들려고 하느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못한다'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정을 떠나 다른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이런 사람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인 중에도 더러운 존재 아닙니까? 이런 인간과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지요. 그런데 그 책의 끝부분에 보면, 주님께서 그를 어떤 존재로 변화시켰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짐이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음지의 삶을 청산하게 됩니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가고 가정에 돌아왔습니다. 아내와 주님께 용서함을 받고, '2톤짜리 무게를 어깨에서 벗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자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 의자는 하나님께서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의자랍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냉소적이고 완악한 간통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만져주신 자신과 그의 가족 전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적용] 내 인생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너무 고상하고 의로운 나머지 어떤 사람과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은 바리새인의 시각입니까? 내 시각의 차이에 따라 내 연약한 이웃은 잔치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잃은 것을 찾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만납니다.
잃어버린 양이 있습니다. 이 양이 잃어버린 바 되는 일은 전적으로 양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이 목자는 양의 상실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아 나섭니다. 한 마리 불순종한 양의 무게가 마치 순종한 99마리 양의 무게만큼이나 되는 것처럼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를 찾으면 목에 메고 돌아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풉니다. 잡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그 양을, 찾았다고 잔치를 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메튜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악한 길로 나아가는 죄인의 경우는 잃은 양, 즉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과 같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잃어버려지고, 무리에게서 잃어버려졌으며, 자신에게서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며, 끊임없이 맹수의 위협을 받아 놀랐고 공포에 떨며,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 푸른 초장을 찾아 헤맨다. 그는 양떼로 되돌아오는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
  이 잃어버린 어린 양, 즉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들에 대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극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죄인들이 돌아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비록 그것이 곁길로 나가 방황하던 양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나의…양'이라고 부르신 사실을 주목하라.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6절). 그는 종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자신의 아들, 즉 위대한 선한 목자를 보내셨다. "찾았노라, 찾았노라"라는 말은 기쁨을 보여주는 언어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됨이 회개할 것 없는 많은 사람을 인함보다 더욱 크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회개에 이를 수 있다.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소망이 있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라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얻은 기쁨이 더 크다. 회개하기 전에 큰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후에 더욱 뛰어나게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많이 용서받은 자들이 많이 사랑할 것이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서 '1급장애인 이성재씨 부부 감동스러운 인생'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공군 소위 때 사고로 척추를 다쳐 끝난 인생이었는데 아내 격려로 미국서 MBA까지 받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기사입니다.

  22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가 있기 전까지 이씨는 ‘한국 최고의 파일럿(탑건)’을 꿈꾸던 젊은 공군 소위였다. 지난 77년 공군사관학교(25기)를 졸업한 그는 79년 10월 경북 예천 비행단 야간 순찰 도중 갑자기 차가 전복되면서 척추신경을 2다쳤다. 이씨는 2년여의 투병 생활 중 7번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한번 없어진 척추신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더이상 푸른 창공을 날 수 없다는 생각에 차라리 비행기와 함께 떨어져 죽었어야 했다”며 좌절하던 이씨를 재활의 길로 이끈 것은 고교시절부터 사귀어온 부인 이명진(46)씨의 헌신적 사랑이었다. 당시 예비신부였던 부인은 2년여 동안 병상을 지키며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설득했다.
  부인 이씨는 남편에게 “당신은 몸이 자유롭지 않지만 정신은 건강하다”며, 장애인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는 미국에 유학갈 것을 권유했다. 병상에서 좌절에 빠져 있던 이씨는 처음에는 “말도 안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부인의 간곡한 설득을 뿌리치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하던 부인 이씨가 이미 불구가 된 사람과 결혼하고 그를 따라 미국 길에 오르려 하자 주위에서는 모두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의 사랑을 막지는 못했고 이씨 부부는 82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 간 이씨는 유학 5년만에 콜로라도 주립대학에서 사회학·경제학 학사를,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부인 이씨는 남편 학비를 대기 위해 모텔과 아이스크림가게 등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했다고 한다.
  미국 유학시절 이들 부부는 “지금은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언젠가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남겠다”고 다짐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냈다.
  87년 9월 미국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 LA의 한 회계법인에서 일하던 이씨는 지난 90년 “고국의 하늘과 사람들이 미치도록 그리워서”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 후 이씨 부부는 미국서 살 때 다짐한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장애인과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 이사를 거쳐, 에너지업계의 중견 기업인 대양산업의 전무로 재직 중인 이씨는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했던 파일럿의 꿈이 아쉽지만, 뜻밖의 사고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돌아볼 수 있게 돼 오히려 내 인생이 더욱 풍부해졌다”며 활짝 웃었다.

한 여인이 장애인이 된 남편을 위해 이만큼 헌신해도 이처럼 감동적인데, 독생자를 내어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목자장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겠습니까?

마무리하는 말

저는 얼마동안 이가 하나 썩어서 고생을 했습니다. 이가 아프니까 이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의 고통이 크게 보입니다. 그분이 이를 치료하실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알아보기도 하였습니다. 답이 있을 만한 사람들과 그 문제에 대하여 대화도 해봅니다. 꼭 같은 고생을 해보지 않더라도 같은 입장에서 보면, 이해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시각이 달라져야 할 부분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존재가 단순히 양지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양지에서 자라났을 뿐인데, 자신들이 빛 가운데 있는 빛의 자녀요, 음지에서 태어나고 음지에서 자라난 모든 세리나 죄인들을 어둠의 자식들이다 나와는 종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거저 받고 천국시민이 되었으니, 세속적인 시각을 바꾸고 삶의 목적을 바꿈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는 잃어버린 우리를 찾는 지름길입니다.

(노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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