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5 February 2015

눅15:1-2,;15-3 아버지 사랑 안에서 누림을! !



[들어가는 말]

탕자를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는 둘째 아들도 돌아오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눅15:1-2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형식입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세리나 죄인들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다는 거죠.

오늘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맏아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비유되는 맏아들입니다.

율법에 흠이 없어보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문제가 없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1] 맏아들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동생은 허랑방탕한 삶으로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짓고 사는 동안에도 그는 밭에 나아가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2]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동생이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그 품을 떠나 제 고집대로 사는 동안에도 그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命)을 어김이 없거늘"


  두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맏아들에게 당연히 소를 잡아 주어야 합니다.
분명 공의적인 측면에서, 맏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럼요. 그리고 작은아들을 받아들여서 맏아들과 친구들이 잔치를 즐기는 동안 작은아들에게는 종처럼 심부름을 시켜야 합니다. 그가 말한대로 말입니다.

 [예화]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데요. 한 아들은 학교에서 점수를 잘 맞아왔습니다. 둘째 아들은 엉망입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피자집에 갔습니다. 맏아들에게 사주면서 둘째 아들은 맏아들이 먹는 것을 보기만 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을 위해 소를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27)대답(對答)하되 당신(當身)의 동생(同生)이 돌아왔으매 당신(當身)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因)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리고 이 성실한 아들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29)아버지께 대답(對答)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命)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 맏아들은 아버지의 공의(상식)를 벗어난 아버지의 행위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30)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爲)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러 해 충성되게 아버지를 섬긴 자신은 염소 한 마리도 잡아 주시지 않던 아버지께서 방탕하게 지낸 동생을 위해서는 소를 잡아 환대하시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4] 그는 분노를 품고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베푼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28)저가 노(怒)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命)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爲)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들어도 옳게 생각되는 이유를 그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자신의 옳게 보이는 듯한 이유 때문에 그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자신의 의에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사랑을 누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매우 소중한 보물 중 하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누림입니다.
  어린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십니까?
그 사랑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어제는 날씨가 틈틈이 맑았습니다.
저는 두번 호숫가에 나갔습니다.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두번 나갔습니다.
그때마다 참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과의 관계를 누립니다.


  3]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아들의 말과 행동이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내 자신 안에서나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옳은 듯하나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의 말이 다 옳으면, 아버지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5] 맏아들은 아버지와 한마음을 품어야 했습니다. 함께 즐거워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일꾼이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이 하나님과 한마음을 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슬퍼하시는 일에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예화]

  탈무드에 보니까 몸은 하나인데 얼굴이 둘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둘로 보아야 합니까?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까? 아큰 막대기로 몸을 푹 찔러보세요. 두 얼굴이 함께 아파하면 한 사람이지요.
성도가 아파할 때, 목회자가 아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일 수 없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아들(죄인)에 대한 아버지(하나님)의 기다림과 용서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율법에 성실한 큰아들과 같습니다.
죄인과 이방인들(작은 아들)은 집을 나간 둘째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죄 범한 죄인과 이방인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이 대변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합법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율법주의적이며 독선적인 나머니 그들은 단지 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한 죄인들을 사랑으로 교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하고 진실한 회개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을 거부했습니다. 동생과 하나됨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죄인이 회개하고 아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의 집안에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아들은 제 위치를 찾아서 기쁩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서 기쁩니다. 이제 이 집은 온전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도 잔치를 천국에 베풀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계심을 알고
겸손함으로 그 보좌 앞에 나아가는 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성경본문]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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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잔치

눅15:11-32

들어가는 말

50년 가까이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그에게 "체신장관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주일 성수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보장에 주신다면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백화점왕' 워너 메이커입니다.
그가 이런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가난했던 그는 1달러 50센트짜리 성경을 월부로 사서 읽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가장 큰 자산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일은 우리 인생 성패를 좌우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기 원합니다.

1. 탕자는 어그러진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둘째 아들은 세리들과 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돌아와 다시 태어납니다. 회개한 의인이 됩니다.

(11)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中)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各各) 나눠 주었더니

1] 둘째 아들은 처음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분깃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가면, 자신의 인생이 보장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재산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만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일과 그 권위 아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세상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살았지만, 아버지께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지배(권위) 아래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말로만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뜻을 지나치고 살았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를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는 그에게 재산을 줄 수 있는 대상이지 아버지의 품에 있는 사랑과 축복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은 그에게 부담스럽습니다. 구속이 되지요.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먼 나라로 떠나갑니다. 그 먼 나라는 돼지를 사육한 것으로 보아 이방인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5:15). 그는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유리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2] 그는 그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재물과 인생을 낭비하며 죄 아래 빠집니다.

(13)그 후(後)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虛浪放蕩)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죄악에 빠져 올바른 사고 기능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삶을 살 때, 그의 참된 자아는 사라집니다.
3] 방탕은 그에게 자유가 아닌 죄의 노예로 새로운 신분을 갖게 합니다.

(14)다 없이한 후(後)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窮乏)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百姓) 중(中)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者)가 없는지라

파괴적인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빈곤에 휩싸입니다. 세상에서도 천대받고 살아야 하는, 돼지를 먹이는 품꾼의 처지로 전락합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의 돼지치기로 전락하는 수치를 당합니다. 아버지와 단절된 아들의 상황이 이처럼 부끄럽습니다. 사탄은 그를 타락시킨 후, 돼지우리에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본향을 잃어버렸습니다.
4] 그 때, "이에 스스로 돌이켜" 그가 아버지 곁에 있을 때와 비교하여 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비참에 떨어진 자신과 아버지의 풍족함을 돌아봅니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糧食)이 풍족(豊足)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罪)를 얻었사오니 (19)지금(只今)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堪當)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결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리란 결단을 합니다(회심). 그는 지금 맺고 있는 돼지의 주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아버지와 새로운 관계를 사모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자신을 의탁하기로 한 것입니다.
5]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21)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罪)를 얻었사오니 지금(只今)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堪當)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긍휼을 구합니다(죄고백)
결국 회개하여 하나님께, 곧 진정한 자아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 곁을 떠났지만, 그 결과 돼지치기로 전락했던 그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6] 회개한 아들은 아버지의 따뜻한 영접을 받습니다.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第一)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아들이란 영예로운 위치에까지 올리움을 받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죄의 권세 아래서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 돌아온 자녀들을 말합니다. 죄 아래서 감정에 이끌려 살다 하나님의 품에 돌아온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화]
존 뉴우톤이 하나님께 돌아와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됨
존 번연이 하나님께 돌아와 천로역정을 쓰는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됨
시이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로마제국을 세운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 아버지 사랑 안에서  누림을 가지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風流)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8)저가 노(怒)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恒常)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同生)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 맏아들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동생은 허랑방탕한 삶으로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짓고 사는 동안에도 그는 밭에 나아가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2]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동생이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그 품을 떠나 제 고집대로 사는 동안에도 그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命)을 어김이 없거늘"


   두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맏아들에게 당연히 소를 잡아 주어야 합니다.
분명 공의적인 측면에서, 맏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럼요. 그리고 작은아들을 받아들여서 맏아들과 친구들이 잔치를 즐기는 동안 작은아들에게는 종처럼 심부름을 시켜야 합니다. 그가 말한대로 말입니다.

  [예화]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데요. 한 아들은 학교에서 점수를 잘 맞아왔습니다. 둘째 아들은 엉망입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피자집에 갔습니다. 맏아들에게 사주면서 둘째 아들은 맏아들이 먹는 것을 보기만 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을 위해 소를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27)대답(對答)하되 당신(當身)의 동생(同生)이 돌아왔으매 당신(當身)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因)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리고 이 성실한 아들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29)아버지께 대답(對答)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命)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 맏아들은 아버지의 공의(상식)를 벗어난 아버지의 행위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30)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爲)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러 해 충성되게 아버지를 섬긴 자신은 염소 한 마리도 잡아 주시지 않던 아버지께서 방탕하게 지낸 동생을 위해서는 소를 잡아 환대하시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4] 그는 분노를 품고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베푼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28)저가 노(怒)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命)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爲)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들어도 옳게 생각되는 이유를 그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자신의 옳게 보이는 듯한 이유 때문에 그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자신의 의에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사랑을 누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매우 소중한 보물 중 하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누림입니다.
   어린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십니까?
그 사랑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어제는 날씨가 틈틈이 맑았습니다.
저는 두번 호숫가에 나갔습니다.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두번 나갔습니다.
그때마다 참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과의 관계를 누립니다.


   3]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아들의 말과 행동이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내 자신 안에서나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옳은 듯하나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의 말이 다 옳으면, 아버지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5] 맏아들은 아버지와 한마음을 품어야 했습니다. 함께 즐거워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일꾼이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이 하나님과 한마음을 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슬퍼하시는 일에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예화]

   탈무드에 보니까 몸은 하나인데 얼굴이 둘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둘로 보아야 합니까?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까? 아큰 막대기로 몸을 푹 찔러보세요. 두 얼굴이 함께 아파하면 한 사람이지요.
성도가 아파할 때, 목회자가 아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일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아파하는데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이 마음속에 고소한 마음이 있다면 하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맏아들과 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지라도 함께 잔치에 참여하기까지 동고동락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들이 분깃을 요구할 때,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먼 타향에 가는 것이 마음에 들리 없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뱀의 이빨보다 훨씬 더
쓰라린 아픔,
그것은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이리.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그 아들의 자율성을 존중하십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배은 망덕과 이기심과 패역함, 그 어떤 죄보다 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그러나 그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에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들이 재산을 탕진한 소식을 들었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낭패한 소식을 들었을 수 있습니다.

예화]

런던 빈민가에 한 청년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아버지로부터 '나는 너를 용서하마!'란 한 마디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런던 상류층에 사시는 분인데, 타락한 아들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리고 죽은 사람으로 그를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 아들의 임종 자리를 방문한 목사님 한 분이 그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당신에게 요셉이란 아들이 있습니까?"
"있었지만 쓸모가 없어 폐적했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에 있습니다. 그를 용서한다고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 말을 전해주겠습니다."
"아니오. 아이가 병들었다면 직접 만나 보겠습니다."
힘없이 용서를 비는 아들에게 그 부친은 말했습니다.
"오, 요셉아. 네가 나를 만나기를 원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오래전에 너를 용서했을 것이다. 가자 집으로."
"아버지. 저는 이제 행복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아들(죄인)에 대한 아버지(하나님)의 기다림과 용서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율법에 성실한 큰아들과 같습니다. 죄인과 이방인들(작은 아들)은 집을 나간 둘째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죄 범한 죄인과 이방인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이 대변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합법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율법주의적이며 독선적인 나머니 그들은 단지 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한 죄인들을 사랑으로 교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하고 진실한 회개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을 거부했습니다. 동생과 하나됨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죄인이 회개하고 아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의 집안에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아들은 제 위치를 찾아서 기쁩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서 기쁩니다. 이제 이 집은 온전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도 잔치를 천국에 베풀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계심을 알고
겸손함으로 그 보좌 앞에 나아가는 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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