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 어떤 일을 행하실까?
우리들은 어떻게 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할 수 있을까?
특히 새로운 제직, 새로운 사역을 맡으면서 새롭게 마음가짐을 세워 봅니다.
[마 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데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면서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주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성도들은 그분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유기체적인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이를 위하여 지체된 우리가 확실히 고백해야 할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쓰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특징은 주님을 높이 존중해야 할 사람으로 여겼으며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그를 두었으나,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까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와(마 11:27-)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고전 12:3) 아무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은 구원을 받는 데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께 대해 확실한 신앙고백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쓰임 받은 베드로의 특징은 신앙고백이 확실합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고백이 흔들릴 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고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주님을 따라 나섰을 때,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가 당대에 누구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 확실했다는 점입니다.
2004년,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확실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마 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페트로스-작은 바위)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기초가 되는 거대한 암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3:11)
이렇게 볼 때, 반석은 거대한 암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이 거대한 암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작은 바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성도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어디에 세우시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거대한 암반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벧전 2:4-8/행 4:11-12/시 118:22).
[벧전 2: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지칭했으며, 반복해서 말하기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습니다(엡 1:20-23/엡 4:8-16/엡 5:23/골 1:18참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구약전체를 통하여 반석은 인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신 32:45/단 2:45/시 18:2).
38세의 노총각이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얼마나 감격스런 사건인가?
그러나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엄마가 24시간밖에 못산다는 사형선고를 전해 받았다. 결혼 준비는 엉망이 되고 그들은 죽어가는 엄마곁으로 달려갔다. 24시간이 지나도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 예정대로 결혼식을 치루기로 했다.
결혼식이 있는 바로 그날 엄마가 다시 코마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랴부랴 결혼식을 마무리한 그들은 신혼여행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달콤한 신혼여행의 꿈은 산산히 망가졌다. 어머니 곁으로 달려간 그들은 신혼여행 대신 어머니 장례에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참 기가 막힌 이 상황 속에서 그는 모래폭풍을 체험했다. 환상적인 결혼의 기쁨을 날려버렸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 가운데서 소중한 것을 얻는 감정을 체험했다. 신부 된 그녀의 진심어린 돌봄과 이해 속에서 신부로부터의 깊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신부에 대한 큰 신뢰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 아내만 곁에 있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동역자만 든든해도 좋은데 만세반석 위에 내 인생이 선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을 어디에 세우시길 원하십니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기가 쉽다 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울 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된 고백이 아니고, 인위적인 고백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고백이었습니다.
[마 16: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이루어진 서머나 교회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복입니다.
2.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16: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십니다. 주님은 이미 여러 가지 상징들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셨으나(요 2:19/요 3:14/요 6:15/마 9:15/마 12:40-41), 이제는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막 8:32).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시지 마시기를 권함으로써 마태복음 4장 8-10절에 나오는 사단의 시험을 반복하였습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의 좁은 길에 거치는 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단은 다시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눅 22:31-이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셨고 신자의 삶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지고 순종하며 주님을 따름에 있.어 세상과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과 영광이 언제나 함께 다닌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벧전 4:12-19/벧전 5:1/벧전 5:10).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것만이 행복의 보장이라고 생각하여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5년동안 두 마디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수도원의 법이었다.
5년의 수도를 마치면서 그는 두마디를 했다. ‘음식이 나쁘다(bed Food)’,
또 5년의 수도를 했다. 그때 그는 다시 두마디를 말했다. ‘잠자리가 불편하다(bad bed)’.
그리고 또 5년을 더 수도했다. 그가 떠나며 남긴 두 마디, ‘더 이상 여기 있지 않겠다.’
그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15년간 이 수도원에 있으면서 한 일은 오직 불평밖에 없었으니 그런 말에 놀라지 않겠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컴퓨터 칩이 모래 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3. 자기부인으로 하나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까지 잃을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할 때, 하나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부인해야 할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융이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발견한 것은 35세 이상 인생의 중반을 넘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종교와 씨름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사람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신 질환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정신 질환을 치료할 수 없었답니다.
자기부인이란 자신의 고집과 주관, 경험, 자존심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강함뿐만 아니라, 약함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스몰리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작가는 지진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맹모삼천을 실천하는 그의 부모는 자꾸만 이사를 했다. 부모는 그에게 반장을 하기 원했으나 사실은 낙제를 하고 말았다. 모래폭풍을 체험했다.
약한 점들을 극복하려고 20번씩을 노력해 다시 씀으로 진주로 바꾸었다. 자기의 고통을 진주로 만들었다 . 12권의 책을 써서 상도 받고 했다. 3학년 때, 글쓰기 등에서 낙제한 것을 아는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무리하는 말
1. 반석 위에 선 확실한 신앙고백
2. 고난(십자가)을 두려워하지 않음
3. 자기부인으로 하나님 일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주님의 사람들에게 열쇠를 맡기십니다.
열쇠는 천국에서의 베드로의 청지기 직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열쇠는 청지기의 권한과 직분을 상징합니다(사 22:22/눅 11:52). 베드로는 이 열쇠를 유대인들과(행 2장), 사마리아인들(행 8장), 이방인들에게(행 10:1-), "믿음의 문을 열어 줄" 때(행 14:27) 사용하였습니다.
금년 들어 우리 서머나 봉사부에서는 좋은 청지기 한 분을 세웠습니다. 이 청지기는 이경세 집사님이십니다. 이분은 연세가 7순이 넘으셔서 직분을 맡을 수 있는 학년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성실하시고 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다가 아, 이분이 바로 누가복음의 시므온과 같이 성전에서 쓰임 받으시기에 적합한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봉사부에서는 그분께 열쇠를 맡겼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교회를 사용하셔야 할 긴급한 상황이 되시면 늘 이 집사님께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그분께 열쇠를 맡깁니까?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든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시간을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서머나 교회에 열쇠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우리 주님의 열쇠를 맡을 수 있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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