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자리에 누워 있었던 지난 한 주간을 보내고 밖에 나온 저는
심호흡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얼어붙은 공기까지 가슴 깊이 들여 마셨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서 마냥 걸어보았습니다.
고통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눕고 또 일어나 보았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서 몇 번이고 무릎을 꿇어보았습니다.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몇 번이고 찬양해보았습니다.
50년 이상을
한 순간 쉬임없이 숨을 쉬며 살았고
불편 없이 걸었고
고통 없이 일어났었고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찬양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은 예사롭게 되는 일이다 싶었는데
한 번 눕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일하고 싶은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전화를 받고 싶은데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전하고 싶은데 사랑을 전할 수 없습니다.
하늘 가득한 이 무궁무진한 공기를 들이쉴 수 없는 날이 있겠구나 싶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때가 오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걸을 수 없는 그날이 오겠다 싶어,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무릎 꿇고 기도하지 못할 그날을 위해 오늘 더 무릎을 꿇어야겠다는 결심이 섭니다.
그래요.
찬송할 수 있는 오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가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감격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고,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 고통이 있었지만, 그 고통 중에서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높은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세 제자 같은 마음으로 오늘 이 강단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까요?
예수님께 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삼일 후에 살아나심을 말씀하셨을 때, '그리하지 마옵소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적극 저지하다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땅에 속한 메시아가 되십사고 예수님께 권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또한 그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 오른편에 앉게 하여 달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나의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 된 자가 나만의 메시아를 고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에 갇혀, 메시아를 오해하고 의기 소침해 있던 그들에게
한 순간이 아닌 영원하신 메시아,
나만을 위함이 아닌 온 인류를 위한 메시아,
땅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우신 메시아를 보여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1. 영화로우신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기들만을 위한 땅에 속한 메시아로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열두 제자나, 유대인 몇 사람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나라의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실 때도 이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이미 사탄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땅의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유혹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로 먹음직한 떡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보암직하게 뛰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을 많이 보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모든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보지 않아야 할 것으로 무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영화를 얻기 위해서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사탄에게 절하는 일을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역을 시작해야 할 중추적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사탄이 유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호히 그 잘못된 것을 지적하시고, 엿새 후,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아야 할 대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막9:3에 보면,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메시아입니다.
영화로우신 영원한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참 빛이신 주님을 요1장에서 이미 만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고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바로 이 참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4f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리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예수님께서 밧모섬에 귀양가 있던 요한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신 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세상에 속한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메시아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구세주 얼굴 광채가 해같이 빛나네
그러나 예수님의 육신은 질그릇처럼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깨어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질그릇 같이 깨어질 때,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 나타내실 것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우리 질그릇 같은 성도들이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제자들은 비록 삶 중에서 깨어지는 질그릇과 같을지라도 그 안에 거하시는 보배이신 예수님께서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온 천하에 나타낼 줄 믿습니다.
값진 보배일수록 좋은 그릇에 담는다.
그래서 보석함은 아름답다.
그러나
깨어진 질그릇에 소중한 보배를 담고 사는 사람도 있다.
송명희 자매의 시를 읽으면서
레나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지선아 사랑해'란 책을 읽으면서
며칠 전 얼음판에 넘어져 갈비뼈에 금이 간 며칠간의 고통 속에서
깨어진 질그릇 속에
그 소중한 보배를 담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서글펐지만
그 아픔 속에 있는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에겐 비밀히 되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보석함의 가치로 보배를 평가할 수 없다.
보배는 담긴 그릇을 초월하여 보배일 뿐이다.
그 보배를 드러내기 위해
보석함은 늘 열려야만 하고
때론 깨어져야 한다.
깨어지지 않겠다
몸부림치는 보석함들 사이에서
깨어진 자아 사이로 빛나는 보배를 드러내는 질그릇은
떨어짐으로 열매를 드러내는 꽃잎처럼
사람이 지녀야할 마음이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볼거리가 참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TV를 보고 있으면, 볼거리가 많습니다.
저는 연속극을 담은 비디오를 빌려다가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 드라마가 다 끝나기까지 수십 시간을 밤늦게까지 보았습니다.
스포츠게임 안에도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인터넷 안에도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아이들은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데, 그 안에도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궁무진한 관광상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음식에도, 의복에도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자동차 쇼에도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백화점에 가면 볼거리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볼 것이 많다고, 보기가 좋다고 그 안에 푹 빠져 사노라면, 인생을 낭패하기 십상입니다. 정말 보아야 할 대상을 보지 못합니다.
볼 때마다, 보는 것이 정말 옳은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보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이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 보배함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뜨려져야 합니다.
우리 육신 안에 보배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깨어져야 합니다.
자아가 부인되어야 합니다.
스님들은 죽은 후에 사리가 얼마나 많이 나타나느냐로 평가를 하곤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깨어진 우리 삶에 보배되시는 예수님의 영광이 얼마나 나타나느냐로 자신의 신앙을 평가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땅의 만족만을 채워주는 그런 땅에 속한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보아야 할 분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이십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영화로우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내 영혼의 갈급함을 충족시켜줄 수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영생의 샘물이신 예수님께서 영적 갈증을 해갈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까?
2.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합니다.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1] 주관을 접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을 주님의 말씀에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 고백을 가진 우리 기독교인들이 곧잘 범하기 쉬운 잘못은 우리 자신의 생각을 신앙을 통해 실현하려 합니다.
본문을 잠시 살펴봅시다.
주님께서 높은 산까지 힘들게 올라가신 후,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특별한 배려를 하셨습니다. 그 분 곁에서 모세와 엘리야까지 수종들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영화로우신 주님을 뵈온 사람이 의당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웬 일이십니까? 이 높은 산꼭대기까지 우리를 데려 오셔서 영화로우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중심이 무엇입니까?"
이 깊은 사연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주간, 우리 교회 어떤 성도님은 꿈에 목사를 보았답니다. 그리고 복권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아, 주님께서 조심하라고 목사님을 보여주셨나 보구나!'
주님께 여쭤보지 않았으니까 정확한 주님의 답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만나게 해 주실 때, 그 의미를 잘 묵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을 뵈온 베드로의 하는 말은
[4]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하리이다
주님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을 비몽사몽간에 말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지는가!'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다. 주님께서 함께 사실 초막이 필요해서 그걸 지으라고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겠습니까? 아니지요.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주님의 생각을 도외시한 엉뚱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영적 감각이라면 비상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늘로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께 너무나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는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은혜 가운데 거할수록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정상에 머물고 싶어하는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정상에 머무는 것을 원합니다.
좀 솔직히 말씀드리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해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 잘못된 동기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혹시 대접을 받기 원하기 때문은 아닌가?
정말 섬기기 위해서인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가 힘있게 비약하던 시기에는 지금보다 목사도 적고, 장로도 적고, 집사도 적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도 넘치고 장로도 넘치고 집사도 넘치는 지금보다 훨씬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중요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저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 같은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이오 선지자입니다. 율법이 무엇이고,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그 방대한 율법과 선지자를 요약하여, 예수님께서는 마7:12에 그 답을 명확히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른바 황금률이라고 우리가 사랑하고 암송하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문제제기]
우리들은 너무나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고국 소식을 보노라면, 대통령도 형편없는 대접을 받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노씨라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해도 너무들 합니다. 노무현이라고 이름이라도 부르는 분은 상당히 예의있는 편에 속합니다. 놈현이라고 해요. 엥삼이, 뙤중이, 존두환, 노가리 이럽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맞는 일들이 종종 신문지면에 나옵니다.
부모님들이 존경을 받지 못해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겠어요.
사람마다 존경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존경받지 못할 때, 상처를 받았다는 표현을 합니다.
내가 존경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과 같이 상대는 바로 존경을 받아야 하는 대상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존칭을 붙여주면 존경을 받습니다. 붙여줄 뿐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존경을 해주면 그 사람이 돋보입니다.
말로 대접을 하십시오. 마음으로 대접하세요.
그리고 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을 대접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음식으로 대접하십시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아파서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는데요. 아들인 위로가 제 침대 밑에 이불을 들고 와서 깔고 잡니다. 아빠가 불편한 것 있으면 돕겠다는 겁니다. 보통 때는 곧잘 스쳐지나가던 녀석이 제가 부탁하는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순종하더라구요. 어린 아들이라도 그 인격이 존경할 만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물며 부모님이 왜 존경할 만한 점이 없겠습니까?
저의 어떤 제자는 아침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의 집에 들러 기도해주고 필요한 것을 챙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이지만 존경이 갔습니다. 하물며 선생님이 왜 존경할만한 면이 없겠습니까?
이웃사람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은 대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계2차 대전 중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며 생과 사를 헤메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에서 세계 아동기구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고난 중에서 결심했습니다. 일평생 나와 같이 굶주리는 삶들을 위해 일하리라고. 오늘 정상에 선 것은 내가 내려가기 위함입니다. (유니세프)란 아동 기구를 위해 헌신을 하였습니다.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의 이야기입니다.
높은 자리에 대접을 받으러 올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오드리 햅번처럼 내려가 대접하기 위하여 정상에 오르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런 복된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대표자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한 엘리야가 전해온 가운데 서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 주변에서도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3] 십자가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눅9:31에 보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외면하고 싶었을지라도 그들이 분명히 들아야만 했던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대접받는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고난받는 일에는 눈을 감고 싶어합니다.
목사로서 받아야 할 십자가라 있습니다.
장로로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집사로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도로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에 관한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감당하는 성도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고난을 감당하는 교회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가뭄이 오면 높은 곳에 있는 나무는 말라죽지 않습니다.
시냇가에 있는 나무가 말라죽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느냐 내리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으면서 어떤 분이 도서관에 기증한 '지선아 사랑해'란 책 한권을 통독했습니다.
지선 양은 한 때, 학력으로 보나 미모로 보나 정상에 근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대 유아교육과를 졸업반이던 2000년 7월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어떤 음주 운전사가 낸 6중 추돌 사고로 인하여 55%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4-5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중상환자로서 의사들도 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7개월간의 입원 11차례의 수술을 거쳐 급전직하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그에게 닥친 십자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예쁜 얼굴은 간 곳 없고, 철없는 아이들은 그녀를 보고 괴물이라 도망칩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그 절망의 지점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납니다. 그녀를 만나주시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놀라운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만난 지선이는 가해자에게 이렇게 말하라는 말을 책에 쓰고 있습니다.
"그냥 아빠 그 가족들이 찾아오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씻어 용서해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용서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그렇게 말해 줘"
그리고 그 사람이 자동차 보험에 들었다는 한 가지 사실 만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선이는 또한 놀라운 감사를 적고 있습니다. 교회에 갔다가 어린 아이들이 친구를 세우고
저것봐 이상한 사람이쟎아!
하는 소리를 듣고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괴물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라고 해주었으니까.
여덟 손가락을 자른 것을 알고도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라고 감사합니다.
지선이가 이렇게 감사하는 까닭은
예전의 제 모습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의 저 역시 사랑하고 계시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36일 만에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18명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지선이는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 그곳을 빠져 나온 데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선이가 쓴 건강한 장애인들에 관한 글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오체 불만족'의 주인공 오토다케,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를 쓴 레나 마리아,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장애인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의 맑은 눈빛을 보면, 그들이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선이는 나는 하나님의 VIP라고 선언합니다.
제 눈에는 지금의 제 모습이 정말 귀엽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손이,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이라서.... .
그리고 그분의 특별보호대상자라서 저는 기쁘답니다.
다시 한번 저를 바보로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에필로그에 적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그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저도 이 말씀을 붙들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왔는가?'
그리고 스스로 다짐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렇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함께 하신다.
예수님이 보이는 인생을 살자.
예수님이 보이는 목회를 하자!'
오늘 말씀을 받는 여러분들에게도 '인생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축복'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건은 제자들의 사역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눈이 어떻게 정상을 회복하였습니까?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마 17:6]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68년 4월 3일 죽기 하루 전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곳에 여러분과 함께 들어갈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민족으로서 약속의 나라에 끝내 들어갈 수 있기를 부탁한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마틴 루터 킹에게는 약속의 땅이 보였습니다.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만 듣는 성도에게는 예수님만 보이는 줄 믿습니다.
"변화하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통 변형이라고 쓰는 말과 같은 뜻으로, "내면 세계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 영광은 외부에서 온 빛의 반사가 아니라, 내적인 거룩함이 나타난 것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장 2절(rransfrmd)과 고린도후서 3장 18절(Changed)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님만 바라보는 목사!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 고난의 한 주간을 보내면서 받은 결론이 있습니다.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보아왔다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보이는 목사가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고 일어날 때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목사가 되리라 다짐하면서 일어날 때 힘이 났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다짐을 하면서 이 교회를 나서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보이는 성도로 교회를 나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로 세상에 나아가시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배경설명]
지난 주 월요일(5일) 밤, 최선수 장로님 배웅을 나가는 길에 얼음에 미끄러졌습니다. X-Ray를 촬영해보니, 갈비뼈에 가느다란 금이 두 군데 났습니다.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하고,
눕고 일어날 수 있다는 일이 이렇게 고맙고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주일, 모래 폭풍에 관한 이야기를 설교 중에 나누었는데 제가 그 폭풍을 만났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오늘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렸는데, 이 놀라운 은혜를 입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설교를 써서 오늘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사실은 제가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던 며칠 동안에도 제 안에 계신 예수님 그리스도시께서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제 안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계셨다 사실입니다. 어느 때보다 가깝고 맑게 빛을 주신 줄 압니다.
저는 제 육신이 온전히 깨어져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면,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온전히 눈으로 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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