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세상 사람들에겐 큰 자가 되고픈 유혹이 있습니다.
어떤 단체나 가정을 막론하고 싸움이 있는 곳에 가보면, 큰 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이면에 질펀하게 깔려 있습니다.
주도권을 내가 쥐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들이 얽혀서 진흙탕을 이룹니다.
어른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도 표현이 다를뿐 대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래서 당시 제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천국에 대해 알고 싶은 순수한 갈망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와 크길 원하는 자신들의 세속적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자주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왕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 상에서 생생한 체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런 모습까지도 메시아 왕국의 중요한 부분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메시아의 고난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신 그 왕국이 오면 나는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도 그런 세속적 메시아관은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실 메시아 왕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메시아 왕국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아 왕국 안에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베드로의 위치는 무엇일까?
며칠 전에 데리고 산에 오르셨던 세 제자의 위치는 무엇일까?
’천국에서는 누가 큰가’라는 질문 자체는 매우 숭고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왕국에 대한 저들의 생각 자체는 순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무척 세속적이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
는 사도의 권면을 들어야 했습니다. (롬 12:16)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임에 틀림없습니다.
반드시 들어야 하는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마땅한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받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그 백성의 참된 가치관은 무엇인가?
1.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Tomas James의 글로 어른의 특성을 소개합니다.
비가 와도 바위는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와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에도 바위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차디차고 딱딱하여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다.
복음은 바위 위에 쏟아지는 소나기 같이 퍼부어지지만 당신을 부드럽게 하지는 못한다.
영생하는 산에서 미풍이 당신에게 불어오나 당신들은 생기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당신 위에서 빛나지만 그것이 당신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놀라운 복음이 전해지나 당신은 조금도 자라지 못한다.
당신은 친지들 속에서 10년 전보다 전혀 나아지지 않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는가?
성공했으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결혼식날 아침이 되었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였으며
장사지내는 날에도 그들은 변함이 없었다.
섰다!하는 어른적 교만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입장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弱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의존합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임을 자인합니다.
어린아이는 無識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아이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배고파요. 목말라요. 추워요."
미숙합니다.
그러나 미성숙하기 때문에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원합니다.
어립니다.
그러나 어리기 때문에 자라기를 원하는 간절히 원합니다.
날마다 키를 재보고 크고 싶어합니다. 자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없는 소망입니다.
어린아이는 기대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순수하게 요구합니다.
"밥 주세요. 음료수를 주세요. 입혀주세요."
어린이는 연약하여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없거나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지적하면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죄를 쉽게 회개합니다.
어린이는 그렇게 토하는 일이 쉽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토하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요.
어린아이는 흙과 같습니다.
비가 오면 부드러워집니다.
가뭄이 오면, 딱딱하게 굳고 겨울이 오면 얼어붙기도 하지만 작은 단비에도 적셔집니다.
문 앞에 나와서 부르시는 부드러운 소리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하나님 나라를 부러워하며 인사를 올렸을 때, 다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똑똑한 니고데모 어른은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질문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되는 유일한 길은 거듭나는 것입니다(요 3장).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큰 자가 되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어린이보다 어른이 되고 싶어합니다. 이는 단비를 받아들이고자 하면서 바위가 되고자 하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심보입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내 마음은 암반 같은 바위덩어리가 아닙니까?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고집덩어리가 아닙니까?
이런 바위 같은 마음을 심지가 견고한 것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니고네모란 어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건강이 약해서 좀 약해도 좋습니다.
좀 배운 것이 부족해서 무식해도 좋습니다.
허물과 죄가 좀 있어도 좋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해도 좋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애통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목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선 이 소자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자녀들을 비교급으로 보지 말고 최상급으로 보아라
이런 칭찬을 자녀에게 해주면 좋습니다.
너는 의미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평생을 나와 동행하던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실 것을 믿는다.
자녀를 위해 축복하십시오.
네 부모 다른 자식과 비교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축복하십시오.
축복의 언어 칭찬의 언어를 사용하세요.
너만 보면 행복해
하나님의 사람들아 거룩한 손을 들어 소자를 축복하십시오.
아인슈타인은 초등학교 꼴지였습니다.
통지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의 어떤 공부를 하든지 성공할 것 같지 않음'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과 다르시 때문에 너는 훌륳한 사람이 될 것이다.'
88올림픽에서 3금메달 1은메달을 걸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엘에이에서 가난하고 우울증 흙만 파고 있는 아이에게 한 사람이 다가갔습니다. 그 유명한 슈가레이였습니다. 그가 다가가 관심을 가졌을 때, 나는 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쁜 것이 없다고 했답니다.
너는 뛰기만 하면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그가 바로 88올림픽에서 3금메달 1은메달을 걸었던 그리피스 조이입니다.
소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자입니다.
소자는 잃어버린 양과 같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은 소자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렇습니다.
소자는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소자는 예수님께 너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자 중의 하나"라고 하실 때, 소자는 분명 어린아이와 같은 세상에서 '대수롭지 않은 작은 자'를 의미하지만, 작은 자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우리 중 잃어버린 소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시대에 잃어버린 작은 자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형제인 북한 동족입니다.
오늘 오신 정진호 선교사님은 이 시대의 소자인 북한 동족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오셨습니다.
물론 중국에 나가있는 우리 최장로님 내외 분도 이런 소자를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다.
3. 왜 우리가 이런 소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까?
1] 하나님께서 소자를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자에 무관심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2]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이런 실족케 하는 죄를 짓게 할 때는 "잘라 버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롬 14:1-23/고전 8:1-13).
물론 "잘라 버리라"는 말씀은 죄를 철저하고 완전하게,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갖지 말고 죄는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다루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를 가지고 즐기거나 놀아서는 안 됩니다."
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제거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고백하고 잘라 버려야 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 홈페이지 '나누고 싶은 글'에는 '이런 시절도 있었다우'란 제목으로 '육사교장의 편지' 한 부분을 따다 실어놓았습니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1000m 지하 광도에 들어가, 시신을 닦으면서 번 돈을 담보 삼아 차관을 얻어 경제 기초를 닦고, 월남 파병 군인들의 피를 담보로 경부고속 도로를 열었다는 기가 막힌 편지입니다.
제가 이 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바로 소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소자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작게 보지 않으시고 일인 당 연 평균 소득이 $100이 아니라 $10,000이 넘는 나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10,000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엄숙히 받아들이고 우리도 주님 말씀대로 소자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소자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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