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소자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건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생존경쟁력이 출중하지 않습니다.
언어생활에도 약점이 많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고상하지 않습니다.
별로 존경할 점이 많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소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 모두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그렇습니다. 이버지가 그 아들 잃기를 원할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소자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답을 제시하십니다.
1.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합시다.(15-18)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킵?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
리라
이런 본문을 읽을 때, 사람들은 보통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래 (15) 여기 죄를 범한 형제가 있구나. 내게 사기를 쳤거나 해를 끼친 못된 짓을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일대일로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 증인을 세우고, 그래도 안되면 교회에 알리라. 그래도 듣지 않으면 출교시키라는 말씀이구나.'
이는 너무 기계적이고 은혜가 되지 않는 해석입니다. 오늘 말씀을 좀더 가깝게 해석하려면 죄를 범한 '네 형제'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네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이웃도 아닌 형제입니다. 내 형제라니까요. 내 자녀가 죄를 범하였을 때, 내 친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말씀입니다.
칼처럼 죄를 권고하고, 증참케하고, 교회에 말하고, 안들으면 잘라버리겠습니까?
아니지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접근하는 자세가 다르지요.
아마 이해하는 측면에서 접근할 것입니다.
왜 그 형제가 그런 끔직한 죄를 범하였을까?
우리는 그 형제를 이렇게 변호할 것입니다.
"연약한 소자이기 때문입니다.
소자이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소자이기 때문에 허물이 많습니다.
소자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면역이 약합니다.
소자이기 때문에 죄의 권세에 쉽게 굴복합니다.
소자이기에 그가 죄를 이길 만한 대인이 못되고, 죄의 권세에 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권세가 그를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런 소자를 어떻게 하라 명하십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실족시키지 말고 영접하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고 바로 섰다고 생각하는 성숙한 자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방법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죄로 더러워진 형제를 무조건 영접하는 일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밖에 나가서 옷이 더러워진 아이가 집안에 들어오고 싶어하면 무조건 맞아들여서 아랫목에 앉히고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들어오게는 하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먼저 조용히 찾아가서 권고하는 일입니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보편적으로 어느 정도 건강한 사람은 그 죄를 지적해 주면, 받아들이고 회개함으로 죄 문제를 극복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하여 주었을 때, 그는 바로 회개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범죄히였습니다. 닭이 세 번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해주신 말씀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적해줄 때, 회개하고 죄문제를 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결코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세 사람이 함께 가서 그 형제를 증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confirm하라는 말씀입니다. 독일어로는 'wird festgestellt Zeugen'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꼼꼼히 죄를 진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끝으로 교회가 처리하도록 합니다.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왜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밟습니까?
죄를 처리하는 일은 영적 암을 치료하는 일입니다. 암덩이를 떼어낸다는 것은 참으로 큰 모험입니다.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잘못 수술하면 순식간에 암이 퍼져나갑니다. 수술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 환자를 죽음 가운데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암 환자를 수술할 때는 혼자 힘으로 안될 때, 방사선과 의사의 도움을 받는다든지 다른 동료 의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병원 전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도 도리가 없을 때, 그 의사는 손을 놓아야 합니다.
형제 안에서 역사하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소자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소자를 회개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오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연약한 소자가 죄의 종노릇을 하다 잃어버린 바 되지 않도록 성도들과 교회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 이정문 장로님께서 엡4:22 말씀을 전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죤 번연의 해석을 소개하셨는데 참 신선했습니다.
옛 습관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썩은 것은 미련을 가지면 안됩니다.
아낌없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썩은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사람을 망치는 죄 덩어리는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 곁에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어떤 허물과 죄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가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한 사람 소자를 구원하려는 여러분의 헌신을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아무리 물이 많아도 목에 묻은 떼를 누군가 닦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떼를 닦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죄 가운데 빠진 당사자와 그 허물과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힘을 써야 합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합심기도를 통해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능으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소자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되니까 내팽개쳐두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팽개쳐두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과 세리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알아보시면 됩니다. 저들의 구원을 위해 전 생애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이방인과 세리처럼 죄 가운데 머물고 있는 그 지점이 바로 기도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힘으로 안되고 능으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로 되는 일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방인과 세리는 소자 중의 소자입니다.
누군가 그와 함께 기도하는 일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실족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주님의 임재 하심은 소자를 위한 소망입니다.
한 소자의 구원을 위해 두세 사람의 힘쓰고 애씀이 통하지 않을 때, 주님의 임재를 위해 두세 사람의 합심 기도는 매우 아름다운 시도입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요즈음 기도에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계십니까?
흡족하지 않으신 분은 오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내 주위의 소자가 누구인가를 적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합심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약속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실 것을 믿습니다.
3. 용서를 통해서입니다.
권면을 해도 안됩니다.
기도를 해도 안됩니다.
이런 경우의 소자가 있다면 그는 매우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관계를 과감히 끊어버리고 저주해야 합니까?
그런 때는 저주하지 마시고 용서하십시오.
소자를 살릴 수 있는 성도의 마지막 태도는 용서입니다.
소자이기에 범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그 소자가 소중합니다. 소자이기에 형제가 범죄 하였을지라도, 주님의 사명을 위임받은 성도는 그 형제의 죄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받은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땅에서 풀 수도 있고 묶을 수도 있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일곱 번의 용서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큰 용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세번의 용서를 정답으로 제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곱 번을 용서하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큰마음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무한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하기 힘든 일이 고부간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주간에 우리 교회 연세가 가장 많이 드신 몇 분들과 함께 다과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곳에서 나온 고부간의 이야기를 한 편 전하여 드립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너무나 고통을 당하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의사를 찾아가서 시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자신의 심정을 호소하였습니다. 대책을 물었습니다. 의사는 따뜻한 인절미를 아침마다 시어머니 식탁에 올려드리라고 권했습니다. 지금은 인절미보다 더 맛이 있는 음식도 구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옛날 인절미는 시어머니에게 더 없는 감동을 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며느리는 열심을 다해 인절미를 만들어 시어머니 아침 상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는 그 인절미를 자시고 목구멍에 인절미가 걸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못살게 구는데도 며느리는 오히려 귀한 인절미를 아침마다 상에 올리는구나! 저렇게 착한 며느리를 내가 못살게 굴다니…… .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시어머니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의사가 알려 준 처방전의 내용은 사실 서로 간의 용서를 낳는 사랑의 약이었습니다. 달걀이 귀한 시절에, 어떤 며느리는 아침마다 달걀을 놓아 드려서 시어머니 마음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절미든 달걀이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로 대하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아는 자는 남을 용서하는 자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21-35절의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가 범한 결정적인 실수가 무엇입니까? 주인이 탕감해준 일만 달란트가 그를 움직이는 감동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소자 되었을 때, 주인은 그를 용서함으로 그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소자된 동관에게 작은 용서조차 나누어주지 못했습니다. 일만 달란트짜리 용서보다 자신이 동관에게 빌려준 백 데나리온이 엄청나게 커 보인 것입니다. 주인이 거저 준 일만 달란트짜리 용서가 백 데나리온 짜리 자신의 의보다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았더라면 그는 동관을 용서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도 몸도 감옥에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용서는 소자를 일으키고 영접하게 하는 값진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용서를 주시면서 우리도 이 용서란 재산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자를 용서하지 못함으로 값진 보배인 용서를 놓치고 사는 실수를 범하고 삽니다. 이것은 매우 큰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크게 보이고 내가 이룬 의가 작게 보이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소자를 실족시키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많지만 연약한 소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그런데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를 사용할 수 있는 형제를 만날 때, 우리가 듣는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내 입장에 서 있다면 그렇게 쉽게 용서를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용서도 사람 나름이지요."
"저도 용서하고 싶은데 잘 안 되요"
이처럼 용서가 어렵습니다.
사실 실제적으로 용서한다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 고국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북간의 골이 휴전선보다 훨씬 깊습니다. 남북문제가 사상적인 옷을 입고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습니다. 남북문제가 우리 고국에서는 매우 심각한 형편입니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 큰골을 내고 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세대와 전후 세대간에 심각한 골을 내고 있습니다.
동서문제도 실체가 없는 허구입니다. 도대체 영남에서 태어났고, 호남에서 태어난 것이 무슨 미워할 만한 주제입니까? 그것이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할 일입니까? 그런데 용서하지 못할 존재인 것처럼 우리 민족 안에서 불편해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와 나눔보다는 반목과 질시와 무정함이 가득합니다. 서로 힘을 합해도 살아남기 힘든 세계에서 답답한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족간의 현실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만이 이 골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용서의 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의를 전혀 주장할 수도 없고 내세울 수도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용서가 크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떤 허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이,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 저주의 빚, 사망의 빚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갚아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렘 31:34)고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자신은 의인인양 형제를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이웃의 티를 정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형제가 내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면, 나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를 아십니까?
성도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죄를 짓지 않아서 깨끗한 자가 아니라, 죄인 되었을 때에, 경건치 않은 자였을 때에, 연약한 자였을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은혜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의를 전혀 주장할 수도 없고 내세울 수도 없습니다. 나의 의는 간 곳이 없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용서가 크게 보이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