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일찍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겨 두고 간 외아들과 함께 양 한 마리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습니다. 침식을 함께 하는 그런 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에게 꼴을 먹이러 나갔던 아들이 도둑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경위인즉, 그 마을 부자가 있는데 자기네는 많은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지게 키운 그 양이 탐이 나서 아들을 도둑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그 양을 빼앗아다가 관리를 접대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양을 잃은 것만도 억울합니다. 그런데, 아들까지 도둑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양과 아들을 동시에 빼앗긴 여인이 이 억울한 원한을 어떻게 하여야합니까?
1. 우리는 원한을 가진 과부일 수 있습니다.
한 과부(Widow Hn,m]l]a', chvra)는 사망의 권세에 남편을 빼앗긴 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말처럼 과부가 입어야 하는 특별한 조복(組服)을 입어야 했습니다.(창 38:14,19) 머리를 흩으린 채, 얼굴에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다(유딧 10:3-4, 16:8). 사회적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한을 늘 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억울한 일까지 당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사망의 권세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사회에서 천대 받는 것도 힘든 일인데, 과부는 원수를 만나,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그 원수에게 큰 원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원한의 내용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밤낮으로 재판관을 찾아와서 호소하였다는 말로 보아, 포기할 수 없는 중대한 무엇이었을 것입니다. 원수의 원한을
예를 들어 솔로몬 앞에 재판을 받으러 온 두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엄마에게 아기는 포기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왕에게까지 호소하여 찾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원수에게 입은 원한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억울하게 잃고 살아갑니다.
저는 작년 처형과 처남을 암으로 잃었습니다. 금년에는 친 누님이 위암 말기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역사하는 것을 들을 때, 사망의 권세에 대한 원한이 있습니다. 원한을 가진 과부와 같이 습니다.
저는 이동원 목사가 쓴 회개행전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또 다른 원수를 생각했습니다. 죄는 자아(自我)를 파괴하는 무서운 원수요, 죄에 대한 원한이 과부가 가진 과부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죄에 대하여 민감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으면 자기를 잃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일곱 가지 중요한 죄악' 리스트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독약처럼 무섭게 생각하여 그 죄악과 진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만입니다.
질투입니다.
분노입니다.
탐심입니다.
탐식입니다.
게으름입니다.
정욕입니다.
이러한 죄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일곱 가지 죄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죄(seven deadly sins)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먼저 교만의 죄란 원수를 생각해 봅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되는 교만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어서 하나님과 우리의 다리, 사람과 사람의 다리가 되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제자라 하면서도 교만으로 가득하여 있습니다.
이 교만 문제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교만이란 죄 때문에 여러 번 낭패한 원한 맺힌 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투의 죄란 원수가 때로는 우리 영혼을 마비시킵니다. 질투는 가장 강력한 감정을 동반하여 사람을 마비시키는 죄악입니다.
잘나가던 사울 왕이 내리막길을 치닫게 된 동기가 다윗에 대한 질투입니다.
아마데우스 영화에 나타난 비엔나의 궁중 악사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질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삶을 마비시켰던 이 질투 죄에 대한 원한을 가진 과부와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의 죄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과부일 수 있습니다.
가인을 마비시키고 살인자로 몰아간 것이 분노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불의한 현실 가운데서 고통과 핍박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2. 고난 중의 성도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파멸시키는 원수의 원한을 풀어주시도록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망과 죄의 분노의 권세에 대하여 우리는 원한을 풀어주시도록 간구하여야 합니다.
부르짖는 일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7-48)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7)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우리 자아를 파멸시키는 교만과 질투와 분노와 탐식을 풀어주시도록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평범을 사랑하고 이웃을 축복하는 수준에 이르기를 간구하는 겁니다.
99년 7월 4일에 인디아나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인 벤자민 스미스란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유원준이란 26살의 젊은 학생을 총으로 난사하였습니다. 한 주간이 지난 12일 오후 7시, 미 전역에 추모예배 광경을 방영하였답니다. 그때, 그 사촌형 박성호 목사는 가족을 대표하여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가족을 대표해서 재 사촌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형제의 꿈을 빼앗아가고 피를 흘린 미국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마지막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부르짖는 일입니다.
응답이 더딜 때 나타나는 반응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응답이 더딜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줄로 마음에 확신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을 수 없어 합니다. 인내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디 선생님이 어느 조그만 도시에 갔다가 신문을 본 스텝진들이 화가 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부한 무디를 머리기사로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고 대문짝 만하게 써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무디는 그걸 보고 껄걸 웃더래요. "이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르는구만. 나는 이보다 훨씬 더 교만한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하라 말씀하시는 싸인이니 겸손하도록 기도합시다." 인격살인이니 뭐니 하여 분노할 수 있는데 무디의 마음이 정말 통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밤낮으로 부르짖어야 할 기도가 이것입니다. 바로 이런 치명적인 원수(죄 문제)에 대한 원한을 해결해 주시도록 부르짖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옹호자셨습니다. 과부에 해당하는 [알마-나- hn:m;l]a'('almanah)]란 말은 구약에 54회 나오고 있는데 "아픔을 느끼는, feel pain"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의와 사랑으로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과부를 궁휼히 여기셨습니다(막 12:40).
초대교회도 과부 돕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낸 글 중에서 과부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를 비교적 상세히 말해주고 있습니다(딤전 5:3-16).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불의한 재판관과 한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관할하에 한 과부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억울한 일이 생겨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 요구는 끝까지 회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과부가 자신의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찾아와서 간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재물과 권력만을 알고 공의를 잊은 재판관이지만 과부의 번거로운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내와 끈기만으로 승리한 예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강청하는 기도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4)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6 )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 86:3)
주를 찾는 자는 버림당하지 않습니다.(시9:10)
본문의 배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이 있습니다.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낙망치 말고, 문제의식을 분명히 갖고 인내로 기도하라 하십니다.
마무리하는 말: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과부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어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간절함과 끈기가 부족했음을 알고 더욱 힘써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노하덕목사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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