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사람들은 삼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삼이라도 산지에 따라 질이 다르고 값이 다릅니다. 좋은 산삼은 인삼보다 크기가 작지만, 값은 수십 배 수백 배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의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의인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으로부터 난 의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인가에 따라 다릅니다. 사람의 의로움이 아름답지요. 그러나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의로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천국에 이르게 하는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의로움과 그 결과를 봅니다.
1. 하나님을 향해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기 참으로 귀한 삶을 살아온 모범 신앙인이 나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하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 중에서도 기도 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남의 것을 討索하지 않았습니다. 무력이나 속임수를 써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토색자들이 이 세상엔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나쁜 일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또한 불의한 처사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의로운 길을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다고 말합니다.(롬3:10) 하나님만이 불의가 없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도 의인을 말하라면 노아와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데, 소돔에는 그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 92:15)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는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계명에 충실한 삶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음란과 더러운 말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말씀을 사랑하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신앙인의 모범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 2회 금식을 지켰습니다(눅 18:12). 그것은 율법을 받기 위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는 週의 제5일(목요일)과, 하산(下山)했다는 週의 제2일(월요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종종 금식했습니다(마 9:14).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셨습니다. 영적 생활을 좀더 깊이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금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분명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십일조 생활을 하는 일은 매우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세상의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한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rcE[}m' dekavth 십일조(十一條 Tithe)는 하나님께 드리는, 수입의 [십분의 일]입니다. 토지의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창14:20).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유의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을 서약하였습니다(창 28:22).
말라기에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충실하게 하는 신앙인이 축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말 3:8, 10).
로마서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제물)로 드리라]는 전체성헌(全體聖獻)으로서 심화(深化)되고 있습니다.(롬 12:1)
고후9:7에서는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은 감사와 헌신 생활에 있어서도 성도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이런 신앙생활의 모범적인 면을 가지고 나무라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 또한 앞장서서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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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너무 귀한 신앙자세를 가지고도 인간이라면 늘상 범하기 쉬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신앙인이 왜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리새인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1] 그는 마치 성전에 온 모든 이유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기가 얼마나 선한가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처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큰 자만심을 가진 자입니다. 즉 그는 자신을 거룩한 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만만합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습니다. 즉 그의 기도를 듣고 있노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빚을 진 분으로 생각됩니다. 자신의 의외에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아무 것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화]
어느 변호사가 사무실을 개업하였습니다. 손님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그는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바쁩니다. 오늘 아침에도 손해배상 소송 사건을 거절할 만큼. 그러나 손님의 일은 어떻게든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른 손님이 오셔서 이만 전화를 끊겠습니다."
"손님은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손님은 머뭇거리다가 말했습니다.
" 저, 사실은 전화국에서 왔습니다. 선생님 사무실에서 신청하신 전화선을 이어드리려고요."
바리새인은 전화선을 이어주러 온 사람 앞에서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바쁘게 통화하는 척하는 그 변호사와 같습니다.
인간의 의가 이렇게 위선적이 될 때, 하나님의 앞에서 이런 의는 벗어버려야 할 누더기와 같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한 그의 기도를 보세요(11,12)
그는 따로 서서 기도하였지만, 그것은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혼자 자신의 의로운 행위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간구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분명 그는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도 은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간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사람입니다.
3] 그는 세리를 멸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 세리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거죠. 왜 기도하러 온 세리를 지목하여 토색하는 자이며 불의한 자이고 아주 무가치한 자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까?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형제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 자신의 선을 즐기며 세리의 악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의 감사 제목은 세리와의 다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 자신만 선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면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13)
세리는 바리새인과 대조적인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교만과 허세로 가득 찼던 것임에 반해 1) 세리의 기도는 몸둘 바를 모르는 겸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의 경우가 스스로 자만했던 것임에 반해 세리의 경우는 죄의 회개와 하나님 갈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로버트 리아톤(Robert Leiaton)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친구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다"고 했고
또 "티끌에 가까이 앉은 자가 하늘에 가까이 앉은 자이다"(He that sits nearest dust sits nearest heaven)라는 말도 있습니다.
잠언 16장 5절에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 찌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2) 그는 자신이 본질상 죄인임을,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부인하는 모습과 대조적입니다.그는 멀리 서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멀리 서 있습니다.
3)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왔으나, 자신의 죄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마음이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가슴을 쳤습니다.' 죄인의 마음이 먼저 회개하는 가책으로 가슴을 칩니다.
메튜헨리의 명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의 기도는 짧았다.
한숨과 탄식이 그의 말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분명하였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 외에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의 공로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공로의식이 없습니다. 그는 열심히 그 자비의 은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같은 내용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큰 죄는 오히려 큰 회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예화]
젊고 아리따운 숙녀가 옷감 가게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결혼 예복의 옷감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나는 옷감을 찾습니다."
"어떤 색깔로 드릴까요?"
"색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놓고 간 장갑을 발견한 점원이 그 숙녀를 뒤따라가 돌려주면서 궁굼했던 것을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소리가 나는 옷감을 고르셨지요?"
"제 남편이 되실 분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가 저의 옷감 소리를 듣고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 앞에서 소경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 큰 배려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그분의 배려를 받아들여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세리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까? 우리 자녀가 이 두 사람 중 어느 쪽에 속하길 원하십니까? 혹 바리새인의 손을 추켜올리고 눈물짓는 세리를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회개하는 세리가 저보다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틀림없이 자기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리는 죄의 사유하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녀로 대하여 주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불교에도 자비가 있습니다. 그 자비는 인류의 고통을 없게 해 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통이 정말 없어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기독교는 죄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복음서의 핵심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죄인을 의미합니다. 고집스런 양이요, 제멋대로 생긴 양이요, 약한 양이요, 허물 많은 양입니다. 그러나 그 양을 찾아 헤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왜요?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찾는 그 일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사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오늘 세리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기도한다면 얼마나 기쁘게 그를 안아 그 집으로 들이시겠습니까?
집을 나가 재산을 다 먹어버리고 터덜거리며 돌아온, 파탄자 탕자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의아해하고 당혹스러워 하는 맏아들의 마음과 태도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반지를 그에게 끼워주었습니다. 상속자로 그를 지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삭개오를 맞아 즐거워하시는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망의 고통을 당하셨을 때, 그분이 바라보시는 지평선 너머에는 오고 오는 수많은 죄인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사 54:8
(8)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런 죄인들을 위해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믿음이란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일 때, 인간의 삶은 변화가 됩니다.
예화] 어느왕자의 감화원 방문
"이 감화원엔 모두 의인만 있는데 어떻게 너같은 죄인이 이곳에 섞여 있단 말이냐. 당장 이 감화원에서 나가거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덧입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처참한 영국 감옥제도를 개혁한 존 하워드,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
전쟁 중에 버려진 환자를 살리러 뛰어든 나이팅게일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바리새인은 그의 자랑을 늘어놓는 데 바빠 기도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회개를 간과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의를 확신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것을 방해합니다. 더욱이 자신이 성취했다고 믿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로 하여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경멸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한 가운데서 애통한 심정으로 회개하는 자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노하덕목사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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