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5 February 2015

눅20:19-26 이중인격 치료법

들어가는 말

이중인격이란 인간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악의 모순된 2중성을 말합니다. 인격이 둘로 나누어져서 서로 분열된 채 전연 연락이 없습니다. 두 인격은 동시에 활동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이 활동할 때엔 다른 인격은 잠재합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말입니다.

학식이 높고, 자비심이 많은 지킬박사는 인간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악의 모순된 2중성을 약품으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상에서 약품을 만들어 복용한 결과, 악성을 지닌 추악한 하이드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점차 악이 선을 이겨, 약을 먹지 않아도 하이드로 변신하여, 지킬박사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마침내 하이드는 살인을 하고 경찰에게 쫓겨, 체포되려는 순간 모든 것을 유서로 고백하고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R.L.B.스티븐슨;1886년 간행. )

지킬박사가 선한 일을 할 때, 하이드는 침묵합니다. 하이드란 악한이 활동할 때, 지킬 박사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둘은 동일인물입니다.

여기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인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안에서도 이런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璨?백성들의 영적 지도자들로서 종교성이 있습니다.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십일조를 합니다. 율법을 엄격히 지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없습니다. 기도하여야 할 성전에 장사를 허용합니다. 선지자들을 핍박합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질책을 받습니다. 이중성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이중성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아뢨습니다.v21을 보세요.

당신은 바로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바로 가르치십니다.
당신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참으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v.19-20을 읽어보세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올무가 숨겨져 있습니다.

(19)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百姓)을 두려워하더라
(20)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治理)와 권세(權勢) 아래 붙이려하여 정탐(偵探)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義人)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이것이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이중성입니다.

왜 이 말씀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까?
'당시 예수님의 지혜가 이렇게 출중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의 이중성을 알리기 위해서 입니까?'
이런 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에 암의 뿌리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런 이중인격을 치료하시기 원하십니다.


1. 사람은 누구나 이중성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그렇기를 바라는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 이상이 아무리 숭고하다고 하더라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때 두 사이에서 형성되는 성격이 이중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이중성은 인간의 이상과 연약함의 부조화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이중인격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마존 계곡에 사는 부족 중에는 [쿠바드]라 하는 독특한 풍습이 있습니다. 가정에 자녀가 태어날 때는 엄마가 해산의 고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가 엄마와 함께 누워 해산의 아픔을 감당하는 겁니다. 아빠가 음식도 절제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태어나면 한두 시간 쉰 후에 곧 일어나서 아이 출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을 영접합니다. 들판에 나가서 일도 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산후 조리를 하는 엄마처럼 아기와 함께 누워 있습니다.

    좋게만 보자면, 아마 해산으로 수고하는 엄마를 위로하기 위한 마음에서 출발한 미풍양속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새로 자녀를 얻은 아빠를 생각해봅시다.
    남편이 아내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이 제도가 일반화된다면, 죄된 인간에게 있어 이중성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아내의 아픔에 동참할 마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 이상적인 관습에 매여 있어 마음은 떠나 있으면서 외식만 취할 수 있습니다.
    해산한 아내 입장은 훨씬 더합니다. 산후에 쉬어야 할 몸이 사회관습을 따라 무리한 일을 해야 할 때, 얼마나 그 외식이 극심하겠습니까?

이런 이중성은 인간에게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까지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함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몸부림치는 까닭은 독버섯처럼 일어나는 이중성을 경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계목회자세미나에서 박종순목사님이 들려준 웃자고 만든 흥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천사가 은퇴를 앞둔 성실한 부부를 찾아왔습니다. 저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하였습니다.
먼저 부인을 찾아가 소원을 물었습니다. 부인은 부부를 위한 세 가지 티켓을 구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들어가 쉴 수 있는 별장의 티켓과 그곳에 갈 수 있는 비행기 티켓과 그곳에서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의 티켓입니다.
이번엔 남편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는 이 소원이 다 좋은데 자기 부인 대신 서른 살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상대가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천사가 두 사람의 소원을 만족시켜주었습니다. 어떻게 충족시켰겠습니까? 남편을 30세 더 늙은 할아버지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남편의 이중성을 고발한 우화입니다.
이런 이중인격은 모든 사람이 옛사람 안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중성은 삶의 현장에 산재해 있습니다.

위선자 그의 입에는 꿀이 있지만 마음에는 칼이 있다.(중국속담)
위선자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악마에게 충성하는 자다.(메튜헨리)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여서 감히 사람들에게 고백할 수조차 없는 이중적인 일을 행한 적은 없습니까? 죄를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통해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


2. 이중성에는 죄가 있습니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奸計)를 아시고 가라사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과 권세 있는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때,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더욱 미워하였습니다. 죽이려 했습니다. 1] 시기와 질투란 죄 때문이지요.
마침내 그들은 교묘한 간계를 꾸몄습니다.

(20)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治理)와 권세(權勢) 아래 붙이려하여 정탐(偵探)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義人)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의인을 가장한 '정탐들'이 막 12:13에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헤롯당원은 종교적 당파와는 무관한 정치적 당파의 일원으로서 로마 정부에 협조하는 헤롯 괴뢰 정권 아래서 녹을 먹고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종료 단체의 일원인 바리새인들과는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책잡기 위해 사두개인과도 결탁했듯이(참조, 눅 20:1) 헤롯당원들과도 결탁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에게만 주어진 사형권을 이용해 예수를 살해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2] 계략입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당시 로마는 피지배 국들로부터 인두세를 받았습니다. 이는 국민 수대로 1인당 1년에 한 데나리온씩을 거둬들였는데, 그 액수는 얼마 안 되었지만 민족적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유대인들은 이것으로 인해 자존심이 무척 상해 있었습니다. 아첨하는 말로 예수님을 안심시킨 서기관과 대제사장의 정탐꾼들은 바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 부분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에 잡아넣으려고 3] 음모를 꾸몄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그들은 예수께서 가하다고 하면 반유대적 인물로 예수님을 몰아갈 수 있었습니다. 불가하다 하면 로마 총독부에 고소하여 정치범으로 몰 수 있었습니다.

    발람은 말하는 내용이 참 선지자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렬하여 그의 삶을 움직여 갑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외형상으로는 재산의 절반을 교회에 내놓은 충성된 부부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를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타내는 간교함이 있습니다.
이런 이중성이 치명적인 까닭은 외형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까지도 선한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하나님은 그 실상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파악하고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하셨습니다.
데나리온(Denarius)은 납세를 목적으로 만든 로마의 화폐입니다. 이 은전에는 황제의 얼굴과 동물의 형상이 새2겨져 있고 ‘거룩한 아구스도의 아들 티베리우스 아구스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를 지님은 4]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 여겨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마 22:19).

    시기와 질투
계략
음모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중인격의 죄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이중성은 헌신으로 극복됩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쌀 씻은 물을 아껴 버리지 않습니다. 통에 담아 놓습니다.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 또한 버리지 않고 그 통에 담습니다.
그러나 이 구정물이 가축에겐 유익합니다. 양식과 음료가 됩니다. 위의 맑은 물을 꽃밭에 주면, 아름다움 꽃이 피어납니다. 가축들의 영양 있는 음료가 됩니다. 가라앉아 있는 음식물들은 돼지 양식입니다.

이 세상의 혼탁한 모습이 이 구정물통과 유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깨끗한 물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정치계, 경제계, 교계까지 다 혼탁합니다.
그러나 구정물을 가축들에게 유익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종교가 이 현실을 이중적 잣대로 대합니다. 구정물 같다고 하여 세상을 극복의 대상으로 봅니다.
불교에서는 苦行함으로 生老病死, 五慾七情이란 구정물을 극복하려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라마단의 금식과 하루 5번의 기도, 성지를 향한 순례(티벳지역에서 선교하고 오신 분의 엎어지는 고행의 성지순례) 등도 그 구정물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도 수도원 운동 같은 이중성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근본적인 답은 가이사의 것을 악하다 하나님의 것을 선하다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나는 구정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다윗이 나단의 지적을 받고 자신의 이중성을 인정하였을 때, 그 자신이 구정물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하였을 때,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헌신입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이 이중적 사고를 극복하는 답입니다. 사람들이 이중화되는 이유는 이기적인 죄성이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기 싫어하는 죄성이지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가이사에게 주기 싫고 하나님께 바치기 싫은 것입니다. 부모님께 주기 싫으니까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외식을 부리는 것이지요. 대신 그는 가이사는 악하다, 가이사는 사탄에 속하였다 하면서 가이사에게 주지 않습니다.  자기는 이중화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가이사 역시 하나님께 쓰임 받는 한 청지기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헌신할 때, 이중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지킬 박사는 그 이중성으로 파탄의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중인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멸해 가는 모습은 우리 모든 인간을 슬프게 합니다.
우리 내면에 두 내면이 있습니다. 이중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중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선한 손아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대신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납시다. 어떤 사람도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중성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의 헌신이 이중성이 끼어들 공간을 완전히 제거한 것입니다.

    선다싱의 '희말라야의 눈꽃'에는 감동 깊은 어미 새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산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새 한 마리가 오히려 그 숲을 향해 날아갑니다. 온 산에 불길이 치솟고, 숲속을 혀를 날름거리며 불길이 타오릅니다. 그러나 그 새가 그 숲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돕니다.  하늘을 화염이 덮습니다. 그 새가 그 화염 속으로 쏜살처럼 날아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마리의 새도 자신을 헌신할 때, 우리에게 사랑의 고귀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중성의 문제는 심각한 죄악이지만 회개와 헌신이 있는 곳에서는 더 이상 기생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중인격을 극복하기 원하십니다.(노하덕목사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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