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20:29-34 소경된 나의 눈을 여시는 주

[성경본문]

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큰 행복은 우주를 주관하시는 전지 전능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로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이런 믿음을 가진 행복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마가복음 10:46-52에 보면, 이 소경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영생의 눈을 떠서, 축복과 행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믿음 안에서 소원을 가졌습니다.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캐나다에서도 시각장애자에게는 장애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시각 장애자들에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의식주 문제가 시급했습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그들에게는 온 세상이 막혀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소경이 갖지 못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1] 그것은 예수님을 뵙고 긍휼함을 얻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그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이 있음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와 레위 같은 세리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긍휼함을 얻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같은 죄인들이 주님을 만나 긍휼함을 얻었습니다.
배가 고픈 많은 사람들이 5병 2어의 축복을 통한 긍휼함을 얻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은 죽은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긍휼함을 얻었습니다.
중풍병자나 문둥병자와 같은 많은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긍휼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긍휼에 풍성하신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소원을 가졌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오늘 이 소경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긍휼함을 얻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말을 타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지나갈 때 그 곳에 허술한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 집안에서 어떤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춰 말에서 내려 그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한 여인이 자기 남편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그 남편의 머리에 손을 대보니 온 몸이 불덩이였습니다. 그 선교사는 즉시 해열제를 꺼내 그 남편에게 먹였습니다. 잠시 후 열이 내리고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부르짖은 기도는 하나님께서 상달되어서 달려가던 선교사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만들고 마침내 그 남편의 병을 고침 받도록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기도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긍휼함을 얻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심을 바라고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습니다.

2] 또한 그들은 보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소경 치고 눈뜨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시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은 모두 눈뜨기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소경이 보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했습니다. 눈을 뜰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바디메오를 비롯한 두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떠야겠다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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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이 뜻(소원)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단1:8절을 보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에 사용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가 없다'고 뜻을 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정한 소원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떠야겠다는 소원이 있습니까?
위로부터 거듭나겠다는 소원이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찾는 우리에게 주님은 언제나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가까이 오시는 주님께 외치십시오.

주여! 제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소망을 하나님께서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바디메오란 장애인의 부르짖는 기도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2. 약속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말끝마다 되풀이하여 부르짖는 이 소경들의 외침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메시아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확실한 언약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35:5)

모든 사람들이 이런 소경은 눈을 뜬 일이 없다고 포기하라고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메시아가 오시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으므로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인격적 언약(계약)을 맺는 분이십니다.
홍수후의 노아와의 언약(창9장),
아브라함과의 언약(창 15, 17장),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과의 언약(출34장, 신5장),
여호수아 및 백성과의 언약(수24장)
다윗과의 언약 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을 때, 다윗의 자손을 말하는 까닭은 메시아가 오실 때,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약속을  강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고 예언하신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렘23:5-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겔34:23-24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37:25-27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오늘 시각 장애인들은 비록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 안에서 다윗의 자손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 곧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온 천하에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눈을 뜨게 함을 받음으로 그분이 구약에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강도 8.2의 강 지진이 아르메니아를 강타하여 30,000명이 죽은 때의 일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그 경황 중에 아들이 있는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학교 건물은 이미 팬케이크처럼 납작해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자기가 아들에게 한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나는 항상 너를 위해 그곳에 있을거야."
아들이 늘 들어가던 건물 모퉁이를 그는 파기 시작했습니다. 울부짖는 부모들도 너무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그를 말렸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입시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소방서원이 다가와 그를 학교 잔해더미에서 끌어내면서 화를 냈습니다.
"사방에서 폭발하고 있습니다. 화재가 발생하고 있어요. 위험합니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빨리 돌아가세요. "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학교 모퉁이에서 그는 혼자 계속 일했습니다.
8시간, 12시간 24시간, 36시간 그리고 38시간을 파내어;t고 돌을 다시 끄집어내는데, 아들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마드!"
"아빠!? 저예요. 아빠. 다른 아이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어요. 제자 친구들에게 아빠가 살아 계시면, 아빠가 저를 구해주실 것이고, 그러면 친구들도 구조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아빠가 약속했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나는 항상 너를 위해 그곳에 있을 거야"라고.

공포와 굶주림으로 탈진한 33명 중 14명의 아이들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있든지 아빠가 아들을 위해 곁에 있을 것을 믿었던 그 믿음이 아들을 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믿으십니까?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신 재림의 주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든 성도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던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안는 날이 있었듯이, 다윗의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부르던 소경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3.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처음 그들의 기도는 즉시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듣지 않으신 분처럼 침묵하셨습니다.
그들의 처음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리들의 꾸짖음이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기도 응답은 없고, 오히려 고난이 밀려 왔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늘 즉각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에 때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지난번 천민찬 선교사 초청 집회가 있었을 때, 부인 선교사님이 간증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사랑으로 너무 강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고백을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침묵은 기도 응답 중의 하나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침묵하시고,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압력이 가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하여 끈질기게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기 위하여 그에게는 많은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르짖는 끈질긴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고 응답이 있기까지 기도했습니다.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로버트 쉴러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처럼 뜨겁고 열정과 목표가 있는 사람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기도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포기하지 마시고 부르짖어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 때 초나라에 공 손용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많았으므로 누구든 한 가지의 재능을 가진 자면 자기 집의 식객으로 지내게 했습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벼라별 재주를 다 가진 자들이 몰려 들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볼품없는 한 남자가 찾아와 "나는 고함 소리를 크게 내는 재주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 손용은 흔쾌히 그를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한 해 두 해가 지나도록 아무런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에 공 손용이 이웃나라에 여행을 다녀오다가 화적떼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 큰 강이 놓이게 되자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였다. 게다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강 건너에 있는 뱃사공을 불렀으나 듣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고함 소리가 크다고 했던 그 식객이 앞으로 나서더니 우뢰같은 소리를 내어 뱃사공을 불렀다. 그때서야 배가 그들을 향해 움직였고 공 손용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까지 부르짖는 기도는 복됩니다.

태평양 한복판에서 뗏목을 타고 표류하다가 20여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디 리컨 벡커(Eddi Rickenbacker)선장과 젊고 경험이 적은 다른 선원은 불같은 태양열과 탈수와 기갈 때문에 며칠만에 거의 죽을 지경에 달했습니다. 어떻게 긴 어려움 속에서 공포와 역경을 견딜 수가 있었는가? 질문했을 때, 그들의 대답은 한 마디였습니다. 기도한 것이 전부입니다. 기도하며 가보니 갈매기가 선장의 머리 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갈매기를 잡아 요기를 했고, 그것을 미끼로 고기를 잡아먹게 되었고, 기도하다 보니 얼마 후에 처음으로 비가 쏟아져 불볕 더위를 식혀 주었습니다.
그들은 용기를 얻었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2주일만에 육지에서 수 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던 것입니다. 기도만 했습니다. 기도한 것이 전부입니다.

시 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우리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신음 소리가 들릴 만한 곳에 계십니다.
주님은 정제되지 않은 소경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4. 우리 주님께서는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민망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compassion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연약한 자와 고통을 함께 당하고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바디메오란 장애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 복음 9장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소경을 보실 때, 그가 소경 된 것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오해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괴로운 것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지만,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 고통도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보실 때,

"너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게 될 장애인으로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된 것은 그 자신이나 그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는 관점으로 그를 만나셨습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마음만 나누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그 아픔을 나누신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요즈음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가 The passion of The Christ란 영화입니다. 수난으로 번역할 수 있는 passion을 com(함께)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함께 고난을 당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사건이 갖는 의미가  compassion입니다. 우리가 당할 고통을 함께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compassion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죄인의 눈물을 보시고 compassion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동족이 쓴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떤 사람이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 중 하나는 건널목을 건너는 일이었답니다. 신호등의 시간을 따라 설치해 놓은 곳이 건강한 사람이 부지런히 가야 겨우 건널 수 있도록 해놓은 곳이 많다고 합니다. 장애인들은 반쯤 건넜는데 벌써 빨간 불이 들어오곤 합니다. 장애인이나 노인들은 도저히 건널 수가 없습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살면서 새삼 놀라는 것은 이 사회가 약자에 대한 compassion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장애인을 향한 보실 때 compassion을 가지고 계습니다.
그들과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치료하시기에 앞서서 compassion하심으로 상한 그 장애인의 마음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사랑의 손으로 저들의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그 눈을 신 마음으로 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병을 고쳐주기 앞서 가장 좋은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나누어주셨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곧 보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십시오.
민망히 여기시는 그분을 붙들고 살아갈 때,
주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살아갈 때,
부르짖는 기도가 있을 때,
우리 곁에는 늘
긍휼히 여기시고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3절)

주님의 따뜻한 응답이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여 우리가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곁에 멈추어 계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십자가에서 compassion하시던 그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 영적으로 소경된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함께 당하시며 치료해 주십니다
이런 음성을 들으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들이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행복했던 까닭은 인간적인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헤리포터란 영화가 얼마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영화의 끝 장면에 노 교수는 해리포터에게 상당히 흥미 있는 말을 합니다.

"인생의 성공은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선택을 잘하여 행복에 이른 소경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함으로 눈을 뜨게 된 감동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른 선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에게 주신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까이 오셔서 여러분이 손을 뻗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까이 오셔서 주님을 부르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부르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향하여 손을 뻗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잡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음성을 들으시고 여러분을 향하여 귀를 기울이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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