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5 February 2015

눅21:1-4 하나님께 평가 받은 과부 두렙돈

들어가는 말

학창 시절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는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좋은데 그 친구가 교회에 나가지 않은 것이 달랐습니다. 그 친구를 전도하고 싶어서 여러모로 대화를 나누다가 드디어 그 친구가 함께 교회를 가기로 했습니다. 그 교회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공덕 도서관 뒷편에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교회에 나간 이유는 그 친구가 바로 그 근처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에 하필이면 목사님은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한 시간 내내 하셨습니다. 너무 민망하여 그 친구와 나는 교회를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친구를 다시 교회에 인도할 기회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목회자가 되어서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해야합니다. 강해설교의 장점은 성경을 따라 설교를 해야하기 때문에 내 임의로 본문을 옮길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기 때문에 기록해 놓은 성경은 설교자가 하고 싶든 하기 싫든 종놈은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듣고 싶든 듣기 싫어하든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본문을 만나면 저에겐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자의 임의적인 메시지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께 설교 머리에 이런 말씀을 올리는 까닭을 여러분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의 친구가 단지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등져버리는 우를 여러분이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Gold가 신이 되어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민감하게 헌금설교에 역반응할 수 있답니다. 그만큼 내가 돈에 중독이 되어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는 겁니다.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내용입니다. 헌금의 자세를 너무 진솔하게 지적해 주시거든요. 그러나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가 이처럼 유명하게 된 데는 주님의 지극하신 관심이 거기 있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평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富者)들이 연보궤(捐補櫃) 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寡婦)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1)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막 12:41에 보면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때,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21절에서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연보궤 앞에는 부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상당한 액수를 헌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부자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시는 것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의 모든 헌금 행위를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  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본문에 보면 부자는 여러 사람이었고 가난한 과부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었다고 했습니다. 과부가 연보궤에 넣은 두 렙돈은 허용되는 가장 적은 헌금이었습니다. 렙돈(Lepton)은 호리’라고 번역된(12:59)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두 렙돈'. 막 12:42에 의하면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입니다. 그리고 네 고드란트는 한 앗사리온, 또 열 여섯 앗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참조, 마 20:9,10). 결국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돈으로 지극히 보잘것없는 액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부자들의 많은 헌금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과부의 두렙돈이 무엇이기에 보십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바로 두렙돈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삭을 바쳤습니다.
한나에게는 사무엘이 바로 두렙돈입니다.
한나가 그 독자 사무엘을 바쳤습니다.
모세에게는 집고 있는 지팡이가 바로 두렙돈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를 바쳤습니다.
안드레가 데려온 어린 아기의 오병이어가 바로 어린아기의 두렙돈입니다. 그의 오병이어는 어떤 부자의 헌신보다 크고 아름답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값진 향유가 바로 두렙돈입니다.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어치의 향유를 바쳤습니다.
삭개오에게는 그가 모은 재물이 두렙돈입니다. 재산의 반을 바쳤습니다.
도르가는 자신의 손에 있는 바늘이 두렙돈입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바늘을 바쳤습니다.
맹의순이란 사람(정연희;내잔이 넘치나이다)은 중국 선교사로 쓰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선교는커녕 6.25때 남하하던 중, 북한 국인으로 오인을 받아 포로수용소에 들어갑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중국 군인들이 포로수용소에 잡혀 들어오면서 부터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을 섬기는 사역자로 쓰임받습니다. 그가 자신의 두렙돈을 바쳐 충성했을 때, 그는 감동어린 작품이 됩니다.
서울 강동구 판자촌 철거할 때의 사건입니다. 판자촌은 철거되고, 교회 또한 철거 대상으로 통지를 받고, 문은 폐쇄되었습니다. 그러나 포크레인으로 교회 철거작업을 하던 사람은 자기의 포크레인에 할머니가 잘려 나오는 모습을 보고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허리굽은 할머니는 폐쇠된 교회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에 걸려 나온 것이었습니다. 놀란 정부는 그곳에 교회를 세우도록 허가를 해주었습니다. 판자촌 교회 할머니의 필사적인 기도는 그 교회를 살린 눈물어린 두렙돈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두렙돈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올려드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두렙돈을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2. 많이 넣었다 평가하셨습니다.
(3)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寡婦)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절대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헌신자의 중심을 평가하십니다. 헌금하는 사람을 절대 평가하시는 분입니다 (참조, 시 51:6).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심같이 그들이 드리는 헌금의 척도도 절대기준을 따라 판단하십니다.

  각자의 처지를 먼저 보십니다. 부자들의 처지는 분명히 풍족한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처지는 가난합니다. 빈핍이 그녀의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처지에 맞추어 비교하여 보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처지에서 얼마의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 양은 과부의 두 렙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거액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처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드린 헌금은 부자의 처지에서 평가하십니다. 가난한 자의 처지에서 드린 헌금은 가난한 자의 처지에서 평가하십니다. 주님은 각자의 처지에서 하나님께 향한 그의 헌신의 평가를 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 평가입니다.

때문에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 부자들의 풍족한 중에서 드린 헌금보다 많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청년이 산골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의 신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눈을 떠보니 으르렁거리던 호랑이가 자기도 기도를 하고 있더래요. 응답되었다고 좋아하였더니 호랑이 왈, 자기 신에게 식기도 했다고 하더래요.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다같이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십니다. 그런데 가인과 그 제물은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부당하다고 항의하지 마십시오.  평가기준에 맞추면 됩니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어떻게 15만 미디안 군사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군사가 더 강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평가는 절대 평가입니다.
열두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0:2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중심을 축복하셨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코미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다윗이 승리하게 되어있는 싸움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절대기준의 평가에 맞추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400명의 앗세라 선지자에 맞서서 갈멜산상에 섰습니다. 그런데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절대기준을 존중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왜 주님으로부터 평가를 받습니까?
그 구차한 처지에서 드렸던 두 렙돈은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과부에 비교하면, 상당히 많이 드렸지만, 그들의 헌금은 하나님께 크게 헌신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빈핍한 가운데서 드림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함으로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처지에서 볼 때 주님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칭찬하실 만큼 감동이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우리의 헌신을 절대 평가하시는 분입니다 (참조, 삼상 16:7).
우리의 헌금 생활은 주님께 얼마나한 절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3. 전부를 넣었다 칭찬하셨습니다.

(4)저들은 그 풍족(豊足)한 중(中)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寡婦)는 그 구차한 중(中)에서 자기(自己)의 있는바 생활비(生活費) 전부를 넣었느니라


부자들이  연보한 것을 주님은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칭찬하였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헌금의 양을 따라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헌금을 귀중히 보시지만 모든 헌금을 칭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가난한 과부의 구차한 중에 드린 헌금을 칭찬하고 계실까요?
생활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가 어린아이가 가진 먹을 것 전부였던 것처럼 두렙돈은 그 여인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사렙다 과부가 밀가루 한줌과 작은 양의 기름이 그들이 가진 양식의 전부인 것처럼 두렙돈은 그 여인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바나바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은 재물은 밭을 판 돈 전부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의 전 재산이 오직 두 렙돈(?)이란 말은 아닙니다. 두렙돈이 과부의 전 재산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활비 전부입니다.
오병이어가 어린아이의 전재산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음식의 전부였고 그는 그 오병이어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밀가루 한줌과 작은 기름이 사렙다 과부의 전 재산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엘리야에게 바친 밀가루 한줌과 작은 기름은 가진 음식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렸습니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은 바쳐졌습니다.

부자들이 평가받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바친 연보가 소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연보궤에 넣은 헌금은 귀중한 재물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없어도 살 수 있는 재물입니다. 없어도 살 수 있는 그러나 있으면 더 좋을 그런 정도의 재물이었습니다.
장정만 5천명이 모인 그날 밤의 만찬석상에 음식이라곤 어린아이의 오병이어뿐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음식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 아이보다 풍성한(많은) 음식을 가진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그 아이보다 맛있는 음식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보다 값비싼 음식을 가진 사람도 잇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신 주님께서 그들의 음식을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온전히 드려진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를 평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가 헌금한 양에 대하여는 말씀하시지 않고, 없으면 살 수 없는 '생활비 전부!' 거기에 담겨있는 중심을 칭찬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사람들에게 이 과부가 비록 두 렙돈을 헌금했지만 생활비의 전부를 바쳤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과부는 그 두렙돈을 낸 후, 굶어죽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 과부의 인생을 끝장났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 구차한 중(中)에서 자기(自己)의 있는바 생활비(生活費) 전부를 넣'은데서 과부의 인생은 끝장이 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됨을 알아야 합니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란 책에서 인간의 행복이 have에 달려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그에 비례하여 행복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소유란 짠 바닷물과 같아서 마실수록 갈증이 더합니다.
그러나 그 바닷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할 때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구 70%를 바닷물로 채우셨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도 소중한 바닷물 전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몽땅 내놓았다면 그를 모자란 사람처럼 나무라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못할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놓은 바닷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작품을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선교사님들이 두렙돈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시대의 두렙돈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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