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21:23-32 구원 불능자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들어가는 말]

지하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악한 죄를 지었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살 소망이 없어 보이던 그는 감옥을 살피다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지하 감옥에 손바닥만한 햇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어디선가 꽃씨 하나가 그곳에 날아와 돌바닥 틈새에서  그 햇빛을 받아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을 그 화초와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 소중히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감옥을 순찰하다가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어린 꽃씨 하나도 이렇게 사랑하며 키우는 사람이 그런 나쁜 일을 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에게 자유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감옥에 비추인 햇빛 같이 소중한 아버지의 사랑을 만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던 빛을 만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만납니다. 맏아들은 그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아들은 처음 자신의 거절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받아 소중히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는 한 가정을 넘어 유대 전 민족과 우리의 삶까지를 살리기 원하시는 중심이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ꡐ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ꡑ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그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이 햇빛(권세)의 근원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이 사랑(권세)이 하나님께로서 왔구나 인정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니고데모와 같이

ꡒ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ꡓ(요3:2)

이런 순수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로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 곧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이런 표적들을 귀신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 햇빛은 사탄이 우리를 미혹시키려고 보낸 것이라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에 비추이는 한 줄기 따스한 빛이 있거든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게 받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탄이야 내게 주진 이 아름다운 축복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우리를 미혹하려 들겠지만 우리들은 이 부정적인 사고를 떨쳐버리고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들의 안타까운 본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반문을 하십니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들이 돌로 칠 것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그들에게 진리의 보석을 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진주목걸이는 그것을 보석으로 생각하고 목에 소중히 걸 수 있는 사람을 빛나게 합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가 있으십니다. 예수님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천국복음을 가르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어떤 랍비에게서 좋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서 가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병을 고치는 권세가 있습니다.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시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문둥병자와 같은 불치의 병을 고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이런 권세는 어떤 의과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근본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권세입니다.
바디메오는 그 권세를 믿고 '다윗의 자존 예수여!' 외쳤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가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바알세붑에 지핀 것처럼 악담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주님은 어두움을 내어쫓는 참빛이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오늘 밤 네  생명을 취하리라 하시면 취하여 가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에게 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권세도 있으십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어야 합니다. 그분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라도 하나님의 메시아이심을 믿었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 사실을 믿을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값진 진리를 저들에게 건네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값진 영적인 보배를 귀히 여길 줄 몰라 결국 발로 짓밟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 많으십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권세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천국 복음을 전해주시는 권세가 있으습니다.
우리의 병을 고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사망을 이기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어두움을 이기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찬양하세요.

구주와 왕이신 우리의 하나님
땅위에 사는 성도들 다 찬양하여라
권능과 지혜가 한없는 하나님
그 위엄 영원하시니 다 찬양하여라(7장)



2. 하나님 사랑의 선물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여러분, 이 아버지의 말이 어떻게 들리세요?
아버지가 일꾼이 없어서 아들을 부려먹기 위해 하는 말로 들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으십니다. 이는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명령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말씀하십니다.

분명, 이 일은 매우 절박하고 시급한 오늘 해야 할 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라고 못을 박으신 것입니다. 신속한 순종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될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명령했습니다.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렇지만, 이 아버지의 말을 노예를 부리는 악한 주인의 말처럼 듣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이렇게 은밀하게 말합니다.
이 일은 고용인에게 명하신 일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자녀에게서만 거둘 열매가 있으십니다. 노예나 고용인에게 만날 수 없는 진한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이 명령은 아버지의 사랑에 넘치는 명령입니다.

자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삶으로 표현할 수 있는 복된 기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두 아들의 반응은 판이합니다.

첫째 아들은 ꡐ아버지여 가겠나이다ꡑ 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시급하고 뜨거운 중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뜨끈뜨끈한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아는 자녀는 복이 있습니다.
말할 때 그는 갈 마음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수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천이 결여된 신앙고백일 뿐입니다.
행함이 없는 약속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일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임을 명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뜨끈뜨끈하고 시급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신앙생에 늘 작심삼일에 머물고 맙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나님께 하고 어겼는지 모릅니다.
내가 묵살해버린 그리스도의 약속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이행되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려 보셨습니까?
성경 읽기에서, 기도생활에서, 서원 하는 일에서, 자녀교육에서 우리는 가겠나이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렇게 보면, 나는 너무 많은 경우에 큰아들과 같이 약속에 불순종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분이 매일 $1440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날 사용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돈이 매을 매일 $1,440 갖게 된다면 어떨까요?
제 아들 위로에게 물었더니 십일조를 하고 남은 반은 저축하고 20%는 부모님 드리고, 남은 20%는 자기가 쓰고 싶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루 1,440분을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어느날 이 사랑은 끝날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준 것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계산하자고 하실 날이 있습니다.

다 깎은 양, 절반 정도 깎은 양, 못 깎은 양으로 구별하여 우리에 몰아 넣은 다음 눈보라가 지나가고 다시 따뜻한 햇빛이 대지를 비칠 때 우리를 열고 양들을 끌어낸답니다. 그럴 때 이상한 것은 다 깎은 양은 앙상한 채로 살아 있는데 오히려 절반 정도 깎다 만 양은 예외 없이 감기에 걸리고 그 중 다수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복종을 전제로 합니다

데마의 안타까운 점이 무엇입니까? 가겠나이다 출발하였지만, 끝까지 경주하지 못한 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도 잘 지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으며, 시간을 정하여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는 물론이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도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희'로 불려지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 안에 끓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보배로 받지 못했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구원 불능자를 맏아들 안에서 보았습니다.



3. 아버지의 사랑을 늦게나마 믿고 순종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해라 하였더니, 즉시 망설임도 없이 "예, 가겠습니다." 했는데 나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무시하는 구원불능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둘째를 불러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해라 하였는데 "싫어요. 안 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이는 '세리 창기'와 같이 죄인으로 불리는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믿었다는 비유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버나드 로너간(Bernard J.F. Lonergan) 이라고 하는 신학자의 Method in Theology 라고 하는 책에서 회개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성적 회개가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첫째입니다.
둘째, 도덕적 회심이 있습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소중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소중하지 않습니다.
셋째, 종교적 회개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합니다. 회개입니다.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즐길 수 있는 것과 즐겨서는 안 되는 것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 불능자임을 깨닫고, 구원불능자를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것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1세기의 어떤 랍비 이야기입니다. 이 랍비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스승의 외침에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서 누가 자신의 사망일을 알겠습니까? 지금 죽을 수도, 내일 죽을 수도, 일년 후에 죽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랍비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래도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당장 회개하라는 뜻이고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최후의식을 갖고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께서  구원불능자를  회복시키심을 믿고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 ꡐ싫소이다ꡑ 거절한 것은 분명 잘못한 것입니다.
솔직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 불순종한 것입니다.
불성실한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후 순종했습니다. 회개로 인한 순종은 차선책입니다. 최선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차선의 순종도 구원 불능자를 회개를 통해서 회복될 때 귀합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원래 구원불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의 운동이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다윗의 위대성은 자신이 바로 구원의 불능자임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할 수 있었던 데 있습니다. 이점이 사울과 다른 점입니다.
베드로의 귀한 점은 자신이  구원불능자임을 깨닫고 회개해야 했을 때, 회개하였던 점입니다.
가룟 유다의 안타까운 점은 자신이  구원불능자임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자신이 구원가능자로 생각했을 때, 스스로의 의를 이기지 못하여 목을 매어 자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디 선생님에게 어떤 교인이 찾아와서 목사님이 읽으시는 성경책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에 줄치고 여기에 마크하고 여기에 글을 써놓고 성경책이 얼마나 복잡한지... 그런데 가끔 보니까 무어라고 쓰여있느냐 하면
"T.P."라고 써놓은 것이 많았습니다.
T.P.! "이것은 무엇입니까?"
"Tried. Proved." 내가 이 말씀을 듣고 보고 생활 속에 실천을 하고 그래서 이것이 진리임을 확증했다고. 시험해보고 입증한 것이라고, 내 생활 속에서 입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구절을 생활 속에서 입증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했던 무디를 하나님께서는 귀히 쓰셨습니다.
여러분은 얼마큼 순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차선이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회개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귀합니다. 행함이 없는 답변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신앙고백이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뒷받침하는 순종행위가 따를 때, 그 신앙고백은 가치를 갖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옳은 신앙고백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신앙고백과 반대가 되는 행위를 할 때, 그 신앙고백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은 신앙 고백에 의해서가 가니라 그 신앙고백을 뒷받침하는 행위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문둥병자 나아만이 왔습니다. 엘리사는 나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 하였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씻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까? 쉬운 일입니까? 사실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쉬운 것이지만,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본국으로 돌아가자 우리 나라에 강이 없느냐 여기까지 와서 목욕 할 일이 있느냐? 그럽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목욕이 아니라 순종하러 온 것입니다. 일곱 번 완전히 순종할 때에 그의 몸은 깨끗하여 어린 아이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너무나 깨끗하게 사신 분입니다. 이분의 삶이 너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엄격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 선생의 집 앞마당이 늘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마, 안주인이 부지런하기 때문이겠지'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느 낯선 청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저녁이면 나타나, 외솔의 집을 쓸고는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궁금해서, 이 청년을 기다렸다가, 물어 보았습니다. "여보시오. 대체 당신은 누군데, 이렇게 매일 청소를 해 주는 거요?"
그러자 청년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외솔 최현배 선생님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저는 예전에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을 사용했더랬는데, 하루는 제가 찬밥을 잘못 먹어 큰 배탈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굶으면 낫는다'고 하시고는, 혼자 굶기 어려울 터이니, 함께 굶자고 하시며 며칠을 같이 굶어 주셨답니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까지 저의 배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던, 선생님의 손길을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가진 것도 없고 해서, 이렇게 매일 마당이라도 쓸어 드리는 일로, 그 은혜를
드리는 일로, 그 은혜를 갚고 있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베푼 외솔 최현배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다 부족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불능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부족함이 많아 보이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느니라](31절)고 선포하십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 세리와 창기들의 손을 들어주심으로 주께서  보시는 참된 신앙의 가치를 전해주십니다.
[세리 마태], 귀신들렸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창기들은 모두 구원불능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 살길을 얻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이 구원불능자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보다 회개하고 돌아온 자를 선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18:21-22절을 보면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다 부족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부족함이 많아 보이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느니라](31절)고 선포하십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 세리와 창기들의 손을 들어주심으로 주께서  보시는 참된 신앙의 가치를 전해주십니다.
[세리 마태], 귀신들렸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창기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 살길을 얻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쁨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보다 회개하고 돌아온 자를 선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18:21-22절을 보면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마무리하는 말

H W. Beecher는 사람의 타락을 ‘구제 가능성의 타락과 구제 불능성의 타락’으로 구분했습니다.

타락!
이는 죄 아래 태어난 모든 인간의 출발점입니다. 다만 구원 가능한 타락자가 있고  구원 불능한 타락자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아담 아래서 구원 불능한 타락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비록 첫 사람 아담 아래서 구원 불능한 타락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구원 가능한 자로 하나님께 접목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아버지를 기쁘게 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두 사람 다 흡족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두 사람은 타락자들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맏아들은 말만 가겠나이다 하고 행함이 없었기 때문이오, 둘째 아들은 ꡐ싫소이다ꡑ란 말로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가겠나이다"하고 가지 않은 맏아들이 상징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구제 불능한 타락자입니다.
태만이든, 방종이든, 무관심이든, 이기적인 동기든, 영적 타락이든, 자만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말은 예 하지만 실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맏아들 신앙입니다.
관념 신앙이요, 죽은 신앙이요 불신앙이 됩니다.
구제 불능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라고 물는다면, 둘째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것입니다.
ꡐ싫소이다ꡑ 빗나가 버린 창기와 세리 같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리와 창기와 같은 타락자들은 구제 가능한 타락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까? 맏아들입니까? 둘째 아들입니까?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성경(마태복음)의 큰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세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영접하여 만왕의 왕의 권세 아래 거하시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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