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22:1-14 거절해서는 안될 사랑

들어가는 말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좋은 부모라면 자녀를 위한 좋은 계획들을 여러가지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 자녀를 가지면 좋을까 하는 계획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기를까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
결혼을 언제쯤 시켰으면 좋겠다
괜찮은 젊은이를 보면, 내 며느리나 사위 감이 아닐지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진정 우리를 이 세상에 지으시고 영혼의 부모이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떨까요? 우리를 위한 일들을 계획하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장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 아름다운 계획 가운데 가장 큰 대사는 혼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혼인이 이루어지면, 잔치를 베풉니다. 잔치가 돌잔치가 있고, 회갑잔치가 있고, 칠순 잔치가 있지만, 결혼잔치가 제일 흥겨운 까닭이 바로 대사라 이루어진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들의 혼인 잔치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동적인 초대 소식을 듣습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이 비밀스런 혼인 잔치 초대 사건을 바로 이해함으로 부모님과 사랑,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주일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혼인잔치에 초대하시는 사랑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우리는 잔치에 초대받은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상 깊은 초대를 잊지 못합니다.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은 귀하게 생각할 때 초대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초대합니다.
잔칫집을 빛낼 것으로   생각하여 초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잔치에 초대받을 때 기쁩니다.
특히 귀한 분이 초대할 때 더욱 기쁩니다.
'아, 이 귀한 분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초대하였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쁨이 있습니다.
그에 걸맞는  옷을  차려입고 잔치집에 나아갑니다.

잔치 중 가장 큰 잔치는 자녀 혼인 잔치입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이 절정을 이루는 곳입니다.
그래서 자녀 혼인에 부모가 물질을 아끼지 않습니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어제(2004,5,8)은 김상률 군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김영해 목사님께서 좋은 카드를 보내주시고
다시 전화를 주시고 그렇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는 천국은 이런 잔치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어떤 임금'은 잔치를 베푸시는 주체자,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잔치에 시중 들고 있는 종들은 선지자와 사도와 같은 주의 종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그 왕국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가족에게 주신 가장 큰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하시고 아들의 잔치에 초대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기쁨이요 감격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께서 에덴을 허락하시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런 큰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렇게 초대받은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면 생동력이 있습니다.

똑같은 지역을 하루에 5-6번 운전하는 흑인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흑인기사하고 얘기를 하게 되어서 똑같은 지역을 5-6번 운전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루하지 않습니까?
왜요? 오히려 그는 되물었습니다
처음에 운전할 때는 바하마 군도를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멕시코 연안 카리브 해의 '캔쿤'이라는 지역을 여행한다고 생각하고 운전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몇 번째입니까?
"지금은 파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도 마치 파도를 타고 있는 것처럼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실을 알고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생활에 이런 감격이 있습니다.

폐결핵으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20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극도의 절망감에 몸부림치다가 예수는 나의 소망이시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남은 시간을 주께 맡기고 헌신하자 라고 생각을 바꾼 다음에 빈민굴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이 청년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을 더 살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사선을 넘어서』를 써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고귀함과 희망을 깨우쳐준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입니다.

우리가 잔치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모든 좋은 음식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외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우리의 모든 장애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초청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그 잔치를 기뻐하며 누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옵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날마다 넘치옵니다.(543)


2. 초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마 22:3).

예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초대가 전달되지 않았거나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한한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랑되신 그 임금의 아들에게도 애착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왕자의 고귀한 결혼식에 대해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아예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관심 밖의 일로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일 때문에 거절하였습니다.
자기가 새로 산 밭에 가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업차 가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다는 이유로 왕의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거절은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초대를 전하는 종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왕에 대한 적대심을 가지고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마 22:4-6).

핍박하고,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당한 선지자들을 말할 뿐 아니라, 장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을 핍박하고,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 그날의 예언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스데반과 야고보가 사도행전에 보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남은 사도들이 이런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게릴라 콘서트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여기저기 하루 동안 콘서트의 장소와 내용을 돌아다니면서 홍보한 후, 5000명 정도가 모이면 콘서트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만사를 제껴두고 그곳에 모인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에 모여 온다는 것입니다. 5천 명이 아니라 일만 명도 모인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게릴라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콘서트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몇년 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우리 고국의 저명한 정치인들이 초대받아 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거절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도 어떻게도 초대받을 길을 열기 위해서 힘을 쓴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준비를 하고
우리를 너무 존귀한 자로 생각하여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초대를 사람들이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이 초대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감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 놀라운 초대를 나를 위한 잔치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3. 택함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제 혼인 잔치는 왕의 기준에 드는 사람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선하지 못한 악인이어도 됩니다. 농사지을 밭도 없고, 장사할 돈도 없어 사거리에서 얼쩡거리는 좀 한심한 사람이어도 좋습니다.
종교적인 지위도 없고
내놓을 선행도 없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세리나 창기여도 좋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상을 평생 섬겨온 이방인이어도 좋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로 확산되는 왕의 초청입니다.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이 유대인 중에서 응하지  않았을 때, 천국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청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주인이 보낸 종의 부름에 '나 이제 왔으니'  나아오면 됩니다.
파격적인 초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동서남북으로 전파되는 우주적 복음 운동의 확산을 가리킵니다. 무차별적 천국 복음운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약 복음운동 시대를 가리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2).
지금도 이러한 왕의 초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잔칫집 혼인 자리에는 손님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22:10).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구원받아 변화된 뉴톤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천국에 갔을 때 세가지 사실을 보고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당연히 올 줄 알았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어떻게 저 사람이 왔을까하며 놀랄 것이요, 셋째는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한가지 예복만은 입고 있어야 했습니다.

임금은 자기 잔칫집에 들어온 손님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임금은 뜻밖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잔칫집에 초청 받은 자가 예복을 입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올 경우에는 주인의 잔치를 경멸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는 큰 실례를 하였던 것입니다.
옷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 줍니다.
그래서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경찰관은 경찰복을 입습니다.
남자는 남자 옷을 입습니다.
여성은 여성의 옷을 입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예복을 입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두 사람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여행에 지쳐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마침 집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 들어가보니 아무도 없는 빈집이었습니다. 다행히 천장에 과일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가 결려 있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높은 천장에 매놓은 과일바구니에서 과일을 내어 먹을 길이 없었습니다.뛰어도 안되고 한 사람이 엎드려도 안닿는 지점이었습니다. 배는 고픈데 과일을 보고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화가 잔뜩 난 한 나그네는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렇지. 저렇게 높은 곳에 걸려 있지만, 분명히 누군가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있는 것 아닌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그 바구니에 미칠 수 있는 사다리를 발견했습니다.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떤 형편에서 그 집에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그 집의 좋은 것을 누리려면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번거롭지만 사닥다리가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와서 자리채워 준 것만도 감사한데 무슨 예복이 필요하냐고 말하면 안됩니다. 어떤 형편에 있다가 왔든지 그것은 본인의 형편이고, 혼인 예식이 행하여지는 잔치에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임금의 명령이 사환들에게 떨어졌습니다.
예복 입지 않은 자의 수족을 결박하라고 하였습니다.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바깥 어두움'은 어디겠습니까?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2:13).

이렇게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영적으로 보면, 예복문제는 단순한 옷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옷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안 입으면 단순히 쫓겨나는 게 아니라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입니다(요 3:3, 5-6).
어린 양 예수의 피에 세마포 옷을 희게 하지 못한 자였습니다(계 7:14, 벧전 1:18-19).
이는 AD70년에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습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백만이 넘은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이 받은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께서 가신지 40년이 안되어 성취되었습니다.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베푼 잔치의 풍요함을 누린 택한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마무리하는 말

   1930년대 대공황이 아메리카 전대륙을 휩쓸고 지나가던 때의 일입니다.
일터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의 늪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붉은 색 머리로 인하여 레드로 불리는 제니, 그는 어릴 때 승마를 배울 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1930년대의 경기 공황으로 생계조차 이어갈 힘이 없게된 부모님이 경마장에 맡기고 떠나버려 고아처럼 외롭게 자란 승마사입니다. 승마사라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은 적도 없어서 몇 차례밖에 대회에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비스킷', 이는 경주용 말 이름입니다. 그러나 태생은 좋았을지라도 체구가 경주용으로는 너무 작고 버릇도 야생마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이 두 존재가 좋은 주인(하워드 챨스)과 조련사를 만나 그들의 초대를 받습니다. 감격한 마음으로 주인의 상에 앉게 되고 따뜻한 주인의 배려 가운데 결국 미국 승마계를 제패하는 개가를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 레드란 승마사는 사고로 다리가 부스러지고, 비스킷이란 말은 인대가 상하여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에 떨어집니다. 기우는 달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그들의 잘나가던 인생도 마침표를 찍어야 할 형편입니다
인대가 상한 말, 그래서 안락사를 시켜주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되는 그 절망,
사고로 다리를 바삭바삭 부서진 상태에서 겨우 걷게 된 레드란 승마사
이 둘이 치열한 경마세계에서 살아날 길은 없어 보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서 다시 우승이란 행운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주인의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 동안 쉴 틈 없이 달려왔던 경마장을 떠나, 푸른 초장을 절룩거리며 걷기도 하고 그 잔디밭에서 쉼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대가 상했던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던 그 말이 회복되어 초원을 달리게 되고
그 곁에서 절뚝거리며 걷던 승마사 레드는 받침대를 발에 붙이고 말 위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종국에는 자기들과 같이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응원 속에 경마장에 다시 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친구 경마사의 격려를 받으며 당당히 우승의 감격을 누립니다.
'씨 비스킷'이란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런 문장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녀석을 치료했던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가 우리 모두를 치료해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치료해준 것이다

주인에게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이토록 복된 일입니다.
청함을 받은 것만 해도 감사한데 나를 청하신 분의 사역자로 택함을 받았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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