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22:23-33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들어가는 말

모차르트가 길을 가다가 '모짜르트 연구회'란 간판을 보았습니다. 자신에 대한 연구라니 흥미로운 생각이 들어 그 곳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곡을 따라 열심히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설이란 것이 듣다 보니 아주 엉터리입니다. 듣다못한 모차르트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곡은 모차르트가 연애를 하다 시련 당해 작곡한 곡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그 말을 들은 해설자는 '모차르트 하면 내가 권위자인데 무식한 말을 하지 말라' 핀잔하더랍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시는,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해설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하여 엉터리 해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어떤 면께 대하여 무지하였습니까?


1. 부활에 대한 무지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유대의 종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 계급에 속합니다.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유력자들이 바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비교적 소수였으나, 교양도 있었고, 특히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다윗,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적 제사장 [사독]의 이름에 유래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었지만, 세속 문화에 대하여 열려 있었고 그만큼 세속적이었습니다.
희랍 정권이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때는 그 정권에 야합했고,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왕조의 친로마정책과도 영합(迎合)하여 지위를 누렸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적으로는 제사장 계급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공회의 의원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 덧붙이고 존중한 유전(遺傳-)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오직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일체 인정치 않았습니다(막 12:18, 눅 20:27, 행 23:8).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면에는 가족 내에 있을 수 있을 현실적 혼란을 원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이 부활을 바로 아는 일에 실패한 근본적 이유는



2. 성경에 대한 무지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일렀으되'라는 말로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 그들이 모세가 일렀다고 인용한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에 나오는 말씀 인용에 무리가 있습니다.
분명 성경은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해 후사를 이어주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신명기 말씀에서 전하시는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가문과 기업을 매우  존중하시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여서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택한 백성들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 사랑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중심은 제껴 놓은 채, 비현실적인 극한 상황의 성경 본문을 악의적으로 인용합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런 질문을 들을 때, 우선 우리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잘됨을 위해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성도들에게 때로 고난을 허락하시는 일이 있지만 그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소망을 이루게 될 경우에 한하여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성경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마귀적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마귀가 성경을 그렇게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온 마귀를 기억합니다(마태복음 4장)
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인도한 후에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인용합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마귀가 인용한 성경(시91:11-12) 말씀의 원 주제는 성전에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뛰어내릴 때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사는 사람,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철저히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마귀가 빼놓은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소중한 부분은 인용하지 않습니다.
듣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되는 이 말씀이 핵심 주제는 빠뜨려진 채, 사탄의 손에서 휘둘림당합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는 시험의 말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오늘 사두개인들이 이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 기업과 백성을 보존하시려는 하나님 사랑의 말씀 본 뜻과 의미를 왜곡하여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불신적 교리를 합리화시키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올무로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의  주제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이 사람들의 마음을 간단히 분석해 주십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하여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유머스럽게 비판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서 묻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으시지요?"
"그렇지."
"하루가 천년 같으시지요?"
"그렇지."
"그러면 하나님께는 일원이 일억 같으십니까?."
"그래."
"그럼 일억도 일원 같으시겠네요."
"그래."
"그럼 하나님 제게 일원만 주세요."
"그래. 알았다. 내가 일원을 줄께. 그런데 하루만 기다려라."

하나님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나의 말을 들으라 명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녀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지 말고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는 하나님 말씀 하나하나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을 역사적으로, 종합적으로, 실천적으로 적용시켜야 합니다.

잠언 4: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29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하신 말씀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 이해에 있어서 몇 가지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세히 성경을 연구했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존중하는 모세오경 안에도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부활에 대한 답변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이런 살아계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세는  출3:6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에고  아이미’란   말씀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에고 아이미!’, ‘스스로 계신’ 그분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을지라도 다시 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모세 5경에서 뚜렷이 말씀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활, 영생, 영적 존재를 알 수 없었다면, 한 발자국 더 나가서 역사 선지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부활에 대한 진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겔37:11~1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너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은 자도 있을 것이라”

그러나 그들은 모세 5경이란 성경만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부활에 대하여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의 바른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부활의  모습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만드신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결혼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31)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현실속에서는 그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했으나 그들만의 무엇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오랫동안 유대 사회의 노른자위를 독점하고 살았습니다.
헬라가 다스리던 때는  헬라정권에   협력하여 노른자위를 독점하였습니다.
로마가 통치할 때는 로마세력에 협력하여 기득권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고 가졌던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 이삭이 파는 곳마다 솟아나오는 우물을 보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야곱이 돌베게를 세우고 '크도다  이곳이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던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명예가 있었는데,
왜 100년 된 고목에서 피어나는 꽃은 볼 수 없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부가 있었는데,
왜 팔 때마다 솟아나는 우물이 없었을까요?
그들에게는 건강이 있었는데,
왜 그들이 정작 올라가야 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사닥다리는 없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380여전에 영국의 제임스 1세(1366-1625) 치하에서 도둑을 중형으로 다스렸습니다. 런던에 살던 암스트롱이란 사나이는 양을 훔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살아날 궁리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무릎을 탁 치면서 속으로 그럽니다.
‘우리 왕은 하나님 말씀이라면 꼼짝을 못하시니…… ’
기뻐하면서 간수 장을 만나 여보 간수장님 이번에 듣자 하니 임금님이 영국말로 성경을 번역하였다면서요, 나는 어차피 세상을 떠날 사람인데 저는 막연한 소원이 하나 있는데 마지막이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게 아니라 성경이나 한번 읽고 죽고 싶소. 임금님이 백성들의 소청을 잘 들어 준다 하니 한 가지 소청을 들어주세요. 간수 장이는 어이없는 요청이지만 상관에게 말하고 그 상관이 상관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임금에게까지 간 것입니다. 왕은 그 사람의 소원대로 성경을 넣어주고 다 읽을 때까지 사형집행을 보류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경 한 권이 감방에 들어왔습니다. 감방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암스트롱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말하기를 이 말씀을 새기기 위하여 하루에 한 줄씩만 읽겠다고 하였습니다. 당황한 간수는 그러면 도대체 얼마를 기다려야 하느냐? 그때 죄수는 처음부터 기간을 정한 것은 아니잖소. 이 말이 왕에게까지 전해지자 왕은 노하기는커녕 껄껄 웃으면서 그 녀석 좀도둑 치고는 꽤 맹랑 한 녀석이로구나 그만하면 익살도 제법인데 좋아 그렇다면 300년이 걸 려도 그때까지 형 집행을 연기하지 그리고 형 유예 기간 동안은 궁중에 서 살도록 허락하라 고 명령하였답니다. 그는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었답니다. 이때 제임스 1세가 번역 출판하게 한 성서는 흠정역 성경( King James Vission 1,611)으로 오늘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이 성경은 모두 1,189장 31,102 절 773,693 낱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을 바로 아는 자에게 구원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사형수에게 시편 51:1-4절을 라틴어 번역문을 주어서 그것을 잘 암송하면 사형에서 감형시켜주는 제도가 있었답니다. 이 제도를 통하여 영국에서는 지난 500년 동안 80 만 명의 사형수가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능력도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중에서 능력을 나타낸 일은 모세 5경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애굽백성  중에 열 가지 재앙을  분명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 오경에 나오지 않는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력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대로 다니엘이 사자굴속에서 죽지 않고 구원받은  기적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비를 넘치게 내리신 일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가 전해준  말씀에 순종함으로 문둥병이 나은 일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 시대에만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선지자를 통해서도 능력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사도를 통해서 능력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능력을 행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이 오해한 것은 모세 오경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한 일이오, 그것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임금이 선행을 행한 농부에게 상을 주기 위해 불렀습니다. 임금은 농부에겐 땅을 상으로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넓은 땅을 농부에게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이 땅에 원을 그려라. 그 땅을 네게 주겠노라”
그런데 말이 떨어지자 마자 더 큰 원을 그리기 위해 뛰쳐나갈 줄 알았던 농부는 자기가 서 있는 땅에 조그만 원을 그렸습니다. 의아한 쪽은 임금님이었습니다.
“좀 더 크게 그리지 그렇게 작게 그렸느냐?”
그 농부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 아닙니다. 저는 원 안이 아니라 원 밖의 땅을 원합니다.”

생각의 각도를 조금 바꿀 때, 세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우리의 사고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그냥 밀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질 때 땅 속에서 썩게 되고 새 생명으로 배태되면서 싹이 돋아나고 줄기가 생기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썩어질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사는 것이 부활의 모습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인간을 살리시는 일쯤 하나님께 정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활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 15:3-6에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고전15:8 “맨 나중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마무리하는 말

하나님 말씀과 능력을 알 때, 부활은 산자의 참된 소망이십니다.

동네 골치덩어리이던 빌리그레함은 예수님을 만난 후, 신앙과 인격을 회복하고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소문난 깡패요 난봉꾼인 김익두는 예수님을 만난 후, 신앙과 인격이 온전히 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따지는 까다로운 사람들에게 그는 ‘하나님은 볼 수 없으나 나를 보면 믿을 수 있지 않으냐?’고 할 만큼 감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니라”(32)

이와 같이 부활을 믿을 때, 우리의 육체는 영화롭게 됩니다. 육체에 사망의  권세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로 영생을 누립니다.
기쁨과 즐거움 환희와 영광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 자유자제로 작품을 만들어  가듯이 진흙같은 존재들을 놀라운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드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 어부를 불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베드로로 삼으신 하나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기독교인들의 원수 사울을  붙들어 위대한 사도 바울로  사용하시는 주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네
발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엄마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에게 지친 나머지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해야 할 지 고민스러워 했습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어린 시절 자기와 함께 사진을 찍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희망으로 가득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엄마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부활과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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