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고국에서 귀히 쓰임 받는 예수 향기 찬양단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찬양단원 여러분은 귀한 시간들을 쪼개서 여러 성도들의 기도 후원 속에 오셨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 찬양의 주제입니까?
1. 우리 위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67)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렇게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눈을 가리우고 때리며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희롱했습니다. 많은 말로 욕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게 종노릇하던 우리를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의 가문에 살게 하?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왕되신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게 하시는 선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생명의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선지자이십니다.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제사장이십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 인생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정 장로님은 약속 시간보다 세 시간쯤 지나서야 오셨다. 자동차 배터리와 제너레이터를 갈아 끼우고 오시는 길이란다. 배터리를 새로이 갈아 끼워도 제너레이터가 계속적으로 충전시켜주지 않으면, 5마일밖에 갈 수 없더라는 말씀을 하시며, 고개를 옆으로 저으신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 크리스천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일이 제너레이터에 연결된 배터리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좋은 배터리라 하더라도 제너레이터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5마일 가면 끝장나는 법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자질과 도덕과 인품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내 힘만으로 살아가려 하면 늘 고갈되고 마는 배터리와 같은 게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제너레이터에 연결된 베터리와 같이 계속적으로 새 힘을 주안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늘 새 힘을 주님으로부터 충전 받게 되는 것이다.
5마일 정도를 운전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사는 사람도 없다. 또 5마일 정도를 운전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라고 만드셨다.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우리 성도들이 힘써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은혜 받은 사실을 회상하며 살아간다. 십년 전에 첫 사랑을 회상하며 첫사랑을 회복하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10년 전에 성령의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얻기 원하신다. 몇 년전에 좋은 열매를 맺은 과일 나무에게서 금년 또한 좋은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
2. 하나님 권능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인자이기 때문입니다.(69)
예수님께서는 많은 권능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곁에서 체험하고 살았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의 주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찬양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얼마든지 체험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이 권능이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권능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리 교회엔 새벽 기도 시 매우 유용한 찬송가 반주기가 하나 있다. 20개의 다양한 악기로 찬송가를 들을 수 있는 반주기, 듣고 싶은 찬송가 곡은 수십 번을 반복해 들을 수 있는 반주기다. 오늘 새벽엔 40회를 반주하라고 버튼을 조정해 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반주기는 서른 번도 채우지 못하고 반주를 멈추고 말았다. 참 이상한 일도 있구나 싶어서 점검해 보니 코드가 빠져 있다. 전원이 계속적으로 공급이 되지 않으니까 반주가 중단된 것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찬양 반주기라 하더라도 내 힘만으로 찬양하려 한다면 전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찬송가 반주기와 같다. 충전된 배터리의 힘으로 몇 곡이야 찬양하겠지만 못내 그 힘이 스러지고 마는 찬양 반주기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전원에 연결된 찬송가 반주기와 같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전원에 연결된 찬송가 반주기와 같이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니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을 의지하면 찬양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우리 교회 반주기는 하루 24시간 1,440분 중에서 불과 한 시간 찬양 반주기로 쓰임을 받는다. 남은 23시간은 그냥 쉬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얼마든지 맺을 수 있다. 주님을 범사에 인정할 때, 주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영글어 간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생각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오래 참을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겸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장차 심판하실 주님으로 다시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 장차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Ninety-three"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불란서 혁명 이후에 불란서는 큰 혼란에 빠졌고 모든 백성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어느 부대 하나가 이동하면서 군인들이 숲 속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다가 기아에 지친 아주머니가 세 아이를 데리고 길가에 쓰러져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그런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상사 한사람이 빵 한 덩이를 던져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지체없이 이 빵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세 아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받아먹으며 그렇게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젊은 병사가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죠?" 상사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이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자기는 굶으면서도 자식에게는 줍니다. 자기 입에 들어간 것은 없지마는 아이들이 빵 한 조각을 먹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더 크게 기뻐하며 만족해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곽선희 목사)
우리는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만날 때, 감동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누구나 동의합니다. 그런 사랑을 배반한다면 죽여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나다.
한 200년 전에 중국에 선교를 할 때에 만들어진 전도지를 보니까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가장 높은 효도의 종교입니다" 그랬어요. 출애굽기 21장17절을 인용했습니다. 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출애굽기 21장15절, 레위기 20장9절에는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은 무조건 쳐죽여라. 신명기 21장 18절로 21절에 보면 패역한 자식,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고 징계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공회에 끌고 가서 증거를 내고 끌어내서 돌로 쳐죽여라. 패역한 자식은 죽여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악을 제하라. 이 무서운 성경구절을 전도지에 써 놓았어요.(곽선희목사)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 정도의 사랑을 훨씬 초월합니다. 외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는다고 핑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베푸시는 주, 구름을 타고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 천하에 나타내며 사는 백성들과 끝까지 배반한 자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린 양 보좌에 앉으신 인자, 그날에 양과 염소를 나누실 예수 그리스도!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능력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3.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70)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속죄물로 우리 중에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을지라도 그들은 거부함으로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목수의 아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찬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예수님을 무시했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오늘날도 세상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모독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신성을 모독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Victor Frankl은 히틀러의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에 보내졌을 때 비엔나에 살던 26세의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다. 그는 매달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와 아내가 산채로 화장 당한 소각로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 아래서 일해야만 했다.
마침내 그가 취조를 받으러 끌려갔을 때 그는 강한 백열등 아래 벌겨 벗겨진 채로 서 있었다.
여러 시간 동안 그들은 그를 좌절시킬 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갖가지 거짓말을 동원해 질문과 비난으로 그를 괴롭혔다. 이미 그들은 그의 아내와 가족, 저작물, 옷가지, 결혼반지 외에도 가치 있어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갔다. 그 빗발치는 질문 속에서도 한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나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
Victor Frankl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자신의 태도선택'의 원리는 모든 어려운 상황에 똑 같이 적용된다.
그는 깨진 유리로 면도를 하면서 그 죽을 것만큼이나 피곤한 중에서도 남보다 한 시간 빨리 일어나 몸과 마음 관리를 잘 함으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음껏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십시다.
우리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https://www.blogger.com/blogger.g?blogID=8763127301799092150#editor/target=post;postID=5185460216882333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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