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좋은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리더십에 대한 논란이 많은 까닭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이길 리더십이 요청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리더십을 깨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1. 리더십은 자리가 아니라 행함에 달려 있습니다.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며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오해는 '리더십' 하면 '자리!'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장 권위가 있는 자리를 찾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앉을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하다가 모세가 앉았던 자리에 올라가서 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때, 모세에게 입법에서 행정, 사법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후계자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앉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백성들이 행할 법을 세웠습니다.(입법)
그 백성들의 삶을 감독했습니다.(행정)
그 백성들의 죄를 판단했습니다.(사법)
문제는 그들이 앉은자리는 모세가 앉은 바로 그곳인데, 모세와 같이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 백성을 광야, 40년간 인도할 때,
하나님께 계명을 받아 그 백성 가운데 법을 세웠습니다.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재판을 총괄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충성하였습니다.
1] 모세는 충성함으로 행하였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을 때,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정면으로 비방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의 형님이요 누님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인데 그들 가운데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큰 위기였습니다.
큰 리더십이 요청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방하는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내리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주옵소서"(민12: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종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민12:7)
우리는 모세에게서 자리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무소불위의 권위를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환으로서의 충성만 보입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일꾼의 삶에서 자리나 권위보다 종으로서의 충성이 보이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2] 모세는 온유함으로 행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열두 명의 정탐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다녀와서 10/12이 가나안에 대하여 악평을 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면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민14:5)
은혜를 저버리고 악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쓸어버리고 싶으셨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1-12)
그러나 모세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민14:19)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을 축복하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우리는 이 절박한 순간에도 모세의 자리와 권위가 그 백성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온유함이 자리를 덮어버려서 자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3] 모세는 겸손함으로 행하였습니다.
민수기 16장에는 고라 무리가 250명의 족장을 선동하여 모세를 거스려 반역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자기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리더십을 주셨는데 모세가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인다"며 제사장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듣고 엎드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민16:9-10)
모세는 그가 가진 겸손으로 고라 무리의 교만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도 겸손으로 행했습니다.
모세! 하면 그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충성과 온유와 겸손이 생각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충성하는 행함이 자리보다 우선 순위에 있는 그런 리더십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모세가 충성과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높여 주셨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 출애굽과 요단강 앞까지 인도했습니다.
오기(吳起) 장군 이야기
연저지인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종기의 고름을 빨아주어 깊은 감동을 준다는 뜻으로, 중국의 고서인 <사기>에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위(魏)나라 문후(文侯) 시대에 유명했던 오기(吳起) 장군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사령관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의복이나 식사도 일반 사병과 똑같았으며, 군을 지휘할 때도 말을 타고 다니지 않은 장군으로 유명했습니다. 심지어 사명들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보면, 그는 언제나 달려가서 그 짐을 함께 지고 가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사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랫사람을 극진히 사랑해야 그들의 충성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오기가 군을 시찰하던 중, 종기로 고생하는 한 병사를 만났습니다. 오기는 그 병사와 종기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급기야 그를 치료하기 위해 그 종기를 입으로 빨아주었습니다.
이 소식이 그 병사의 어미에게까지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그 어미가 보여준 반응은 사뭇 이상했습니다. 아들을 치료해 준 오기에 대해 감사하거나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변 사람들은 '지체 높은 장군이 종기를 빨아 치료해줬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야 할 터인데 왠 통곡인가?'라며 의아해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의 어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난번에도 오 장군이 내 남편의 종기를 빨아주더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소. 그런데 이번에는 내 아들을 종기를 빨아주었다고 하오. 지 아비도 목숨을 걸고 오 장군을 위해 싸웠는데, 아물며 아들놈이야 오죽하겠소."
결국 오기가 위나라 최고의 장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싸워주는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결코 자리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리더십이 빛을 발할 수 있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자리만 탐하고 바로 이런 충성과 온유과 겸손, 헌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좋은 리더십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쁜 리더십의 사례입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리더는 본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을지라도 좋은 리더십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좋은 리더십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본이 되는 맨토를 만나는 것은 복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본이 되시는 국어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장로님이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분은 언행이 참 조용하시고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저는 국어 공부를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시절을 국어선생님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강 신항 교수님은 성실과 제자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신 맨토입니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성실은 저만 누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를 담담한 필치로 적어 책으로 출판하시곤 하셨습니다. 제가 세 번 째 책을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분의 영향이 컸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목회의 길을 가면서도 본이 되는 몇 분의 목회자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새벽기도회를 존중하는 마음은 김 명혁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분은 참 바쁜 분이셨는데도 꼭 새벽에 나와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곤 하셨습니다. 그분은 새벽기도의 본이 되신 분이십니다. 또한 김 목사님은 매월 첫 날 새벽을 하나님께 바치곤 했습니다. 월삭기도회가 우리 서머나 교회에 있는데, 성경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분의 영향도 있습니다.
캐나다에 처음 도착하여 사역한 교회가 중앙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시던 김은대 목사님은 헌신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사역하던 어느 날. 우연히 저는 그분이 낸 선교헌금 봉투를 보았습니다. 상당히 넉넉하게 선교헌금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 놀랐습니다. 그후로 저는 헌금 생활을 좀 넉넉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헌신 생활에 있어서 김 목사님은 저의 맨토입니다. 본이 되신 분이지요.
계화삼 목사님을 만나고 그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받은 본은 청빈하면서도 헌신적으로 목회하시는 일입니다. 계목사님은 새벽 기도를 가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그 보상금을 교육관 건축헌금으로 내놓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국을 함께 방문하면서도 참 청빈하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수준에 훨씬 못미치지만 그쪽을 바라보고 목회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교사가 되신 분도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굉장히 박식하셔서 어떤 모임 자리에만 가면 대화를 독차지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분을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말재주도 없지만, 사석에서는 가급적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저의 반면 교사가 되신 셈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정치를 너무 잘 아시는 분이 몇 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난 그런 분들은 놀라웁게도 교회 사역에 매우 약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교회 정치에서 조금 거리를 두게하는 까닭입니다. 물론 교회 정치를 잘하고도 교회 사역에 귀히 쓰임받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아무튼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들은 양무리의 본이 되는 일이 참으로 귀합니다.
3. 참 리더십은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참된 리더십은 '랍비'라 칭함을 받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버지, 아버지'라 부른다고 리더십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리더십은 사람의 말이나 눈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는가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1840년 리빙스턴이라는 이는 제1회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영국 국민들의 찬사와 환영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에서 서로 다투어서 박사학위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은 무엇이라 하였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프리카 선교의 사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측량할 수 없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해야 할 사명을 받았기에 그 은총의 만 분지 1 이라도 갚으려는 생각에서 그리고 주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 것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랍비, 아버지, 지도자 모두 좋은 말입니다.
박사학위도 좋은 권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리더십은 이런 지위나 학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버리고 말구유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앞둔 그 중요한 자리에 제자들은 아무도 형제의 발을 씻겨 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손님만 와도 발을 씻겨주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인데 왜 제자들은 서로의 발을 씻겨주기는커녕 예수님의 발조차 씻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만큼 피곤했기 때문일까요? 혹시 조금 전 서로 누가 크냐는 자리다툼으로 마음들이 굳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 답답한 순간에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묶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예수님에 있어서 섬기심은 리더십의 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 된 우리 또한 섬기는 자가 되기를 명하십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죄인을 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분명 푯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발을 씻기심으로 제자들을 섬기시던 유대인의 왕!
십자가 지심으로 죄인들을 섬기시는 유대인의 왕!
그 십자가에 달리신 왕의 리더십을 인정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리더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리더십은 십자가를 지신 유대인의 왕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종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10년간 선교사로 했던 로엘 케네디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원주민 두 명과 함께 어떤 마을로 전도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돌무더기가 보이자 그들은 각각 무거운 돌을 한 개씩 들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에게도 무거운 돌을 하나 들라고 하였습니다. "왜 돌을 들어야 하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에 그냥 나갔습니다. 곧 강에 도착하였습니다. 물이 불어 넘치고 있었습니다. 동행하던 두 친구는 무거운 돌을 메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돌의 무게 때문에 떠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건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건넌 후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교사님! 그냥은 건널 수 없습니다. 무거운 돌을 메고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때서야 선교사는 무거운 돌을 메고 온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자기가 이길 수 있는 큰돌을 메고 와서 건넜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물로 들어오니 물 때문에 돌이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 돌 때문에 자기가 떠내려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세파에 떠내려가지 않고 천국까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 짐이 무거워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무거운 짐 때문에 고난의 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때로 우리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란 십자가 덕분에 오늘까지 우리가 어려운 시험 강을 건널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험한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무서운 시험의 강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중심을 잡아 주는 구체적 준비 행위가 필요합니다.
본이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께서는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들을 섬기시는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처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30)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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