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때로 탄식하며 쏟아놓는 말이 있습니다.
'말세야, 말세!'
여러분은 언제 그런 말세를 느끼십니까?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매우 아름다움을 보며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의 내면이 썩은 것을 보시고 성전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실 때,
이 성전을 헐라 명하셨습니다.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성전이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을 보시며 친히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 바울 사도를 통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이셨습니다. 보기만 하여도 신성해 보이던 그 견고한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당대 세계적인 건축물이던 성전이 무너지다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빼어난 건축미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 내면이 썩어 있어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주님의 생각이셨습니다. 이는 말세의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입증되었습니다. 로마 장군 티투스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성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합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처럼 외면만 아름다운데 그냥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 예언은 동시에 장차 오실 심판의 날에 일어날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심판 주로 오실 그날의 많은 징조들의 상징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말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하시는 성전기능을 회복하는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1. 말세에는 성전을 흔드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위어스비는 그의 주석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31절에 묘사된 사건은 교회가 휴거된 후 7년간의 환란기간 동안에 발생할 것임을 명심하자. 이것은 다니엘 9장 20-27절에 묘사되어 있는 70주간이다. 이와 똑같은 시대가 요한계시록 6-19장에 묘사되어 있다. 이는 이스라엘이 다시 무대로 돌아오며, 하나님께서 거역하는 세상에 저주를 쏟아 부으시는 때이다."
말세에 어려운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1]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미혹”이란 말은 “비슷한 것으로 유혹”하여 타락케 하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시작하여 비성경적으로 끌고 가 결국 끝은 잘못되는 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처음은 똑같이 보이다가 나중에 갈라지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한 뱀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하게 말하여 첫사람 하와를 미혹하였습니다.
어떻게 사탄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최대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것을 사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거짓된 미혹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어떤 통계자료는 최근 5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은 1,100명이상이 된다고 보고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해방이후에 이러한 부류의 거짓 그리스도가 박태선, 문선명, 노광곤, 얼마전 형무소생활을 하다 죽은 조희성 등 3, 40여명이나 나타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난리 소문이 흉흉합니다.
[3] 서로 대적하는 일이 흔합니다.
[4] 처처에 기근의 소식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동족인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와 인도, 방글라데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현실입니다. 세계 인구 60억중에 66%가 공복감 속에서 잠자리 들고 있고, 여섯살 미만의 어린이들 중에서 70%가 영양실조와 연관된 병으로 죽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5] 지진이 일어납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 19C에 9번 정도로 알려진 지진은 20C에 들어 40여 번 일어난 것으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76년 중국 탕산 대지진에 24만명 사망했습니다.
1990년 이란 북서부 길란주에서 4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인도, 터키 등에서 발발한 지진의 파괴력은 우리가 신문지상의 보도를 통해서도 만난 바 있습니다.
21C에 들어와서도 계속 대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3년 12월 27일 이란 남동부 밤시 대지진에 인구 8만 도시에서 5만명이 죽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지진을 당해본 사람들은 그 파괴력에 놀랍니다. 좋은 집 나쁜 집, 부자 가난한 자 가릴 것 없이 무너집니다. 인간의 대책이란 지진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한번 땅이 흔들리면 다들 그냥 와르르 무너집니다. 인간이 천재지변 앞에서 얼마나 초라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것은 지진 앞에서 아이들 장난감 같습니다.
[6]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환난에 넘겨줍니다.
신자들은 미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7] 교인 가운데 배도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요즈음 신문을 들쳐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살하는 사람들
갈수록 잔인해지는 강도들의 횡포,
곳곳에 만연한 미혹사건,
행복을 가져오고 있지 못한 이라크 전쟁,
곳곳에 지진이나 이상기후로 인한 천재지변,
민심은 흉흉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미혹 당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2. 사랑이 식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어두움의 권세가 다스리는 세상은 차갑습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세상은 사랑이 식어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가슴도 차가워집니다.
우리는 가인의 사랑이 식어진 현장을 만납니다.
야곱과 에서는 형제지만 사랑이 식어진 것을 만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사랑이 식어진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성전인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슴이 식어지면 안됩니다.
요셉은 무심한 형제들의 오해 속에서 얼마든지 가슴이 식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리면서도,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오해를 받아 감옥에 들어감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을 당하면 당연히 사랑이 식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도 요셉은 사랑이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그 아버지 사울의 싸늘한 시선 앞에서도 다윗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을 향해 끝까지 사랑을 지킵니다.
호세아는 고멜의 싸늘한 배반 앞에서도 그 사랑이 식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반 속에서도 그 백성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지 않습니다.
중국 송 태종이 얼굴을 벌에 쏘인 적이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아부파들이 야단이 났습니다. 이는 대역에 버금가는 죄라 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벌은 기어코 잡아내어 사형에 처하고 당시 임금님의 뒤에서 부채질을 하던 시녀에게는 벌을 쫓지 못한 죄로 출궁형을 내리기를 태종에게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태종은 겸손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쪽을 모두 용서하여라. 지각없는 벌에게 형벌을 내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또 용안에 벌이 앉았다고 어떻게 시녀가 임금의 얼굴을 때려 벌을 쫓을 수 있겠느냐?
세상 임금도 이렇게 사랑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슴이 싸늘한 사람이 지성적인 것으로 대우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간의 사랑을 서로 나눔으로 가슴을 따뜻이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골고다로 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시는 독생자의 고통 속에서 식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을 만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13:4-7에서 나오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이 충만한 것 이상입니다.
4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런 사랑으로 충만한 성전이 복이 있습니다.
3. 구원을 얻기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인내가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내로 자주 표현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라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열매 맺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인내 가운데 열매맺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므로 25년을 기다림으로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야곱은 리브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7년을 하루같이 인내하였습니다.
북한의 실상에 접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신자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듣게 됩니다. 북한뿐 아닙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일본 천황의 군국주의, 이슬람, 중국에서도 기독교인들의 박해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지금도 순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난 중에도 신앙의 절개를 끝까지 지키고 배신하지 않은 인내를 이룬 순교자들의 신앙을 만나게 됩니다.
“벌이 꽃에서 꿀을 강탈하지만 그 결과로 꽃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사람을 강탈하고, 인권을 강탈하고, 갖은 죄악을 다 저지르고 있는 것 같으나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역사는 (굴절되지 않습니다.) 아름답게 열매맺어가고 있다”(챨스 베어드)
4. 복음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강도의 소굴을 성전 되게 하라!
성전을 천국복음으로 채우라!
이것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999년도에 어떤 선교사님께서 힘주어 외치시던 보고 내용이 생각납니다.
요즈음 주님께서 오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건 틀렸습니다. 주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는데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말씀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한국이 상당히 복음이 전해진 것처럼 떵떵거리지만, 요즈음 신문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5월 30일 서울에서는 '서울의 부흥을 꿈꾸는 청년연합'이 교파를 초월, 서울 지역의 주요 교회와 선교단체에 소속된 기독청년 1만여 명이 참여한 이번 행사의 주제는 'Again 1907 in Seoul-서울에서 예루살렘까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 올해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제2의 기도운동을 벌여 2007년 전국 단위로 확산시키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기도회였습니다.
특히 '서울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기치로 내건 이번 행사에서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봉헌식이 치러졌고, 그 봉헌사를 이명박 서울시장이 낭독하였습니다.
저는 이명박 시장을 그렇게 흠모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가 자신에게 일터로 맡긴 서울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서 온 서울 시민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도시가 되기를 원하는 그의 기도 정도려니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이런 비슷한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 서머나 교회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하지만 서울을 올려드린다는 말은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봉헌하는 제물은 흠없고 점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올림을 받았을 때, 이는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서울이 하나님께 올려드릴 만한 깨끗한 제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
우리 서머나 교우들이, 토론토가, 우리 고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은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이에 대한 반응을 알아보고 싶어서 저는 몇 곳 신문 덧글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이 놀랐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보는 신문일수록 엄청난 비난의 글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적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저들 내부에서 잉태되고 있는 유일신 사상과 기독교 패권주의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적은 덧 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시장을 고소하겠다고 연대가 출범할 기세입니다.
아, 우리가 세계 선교의 2대 강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고국의 영적 현주소가 이런 면도 있구나 많이 생각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내 고국에도 많이 있습니다.
1750년 영국 런던에 아주 큰 지진이 한번 일어났었습니다. 그때, 지진으로 부상을 입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브라운 헨리라는 의사가 그 삶을 붙들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니요, 죽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은데 죽은 다음에 있을 일이 무섭습니다.”
지금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약 없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 일을 위해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마무리하는 말
내 인생은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에 들어가기 위한 하프타임에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 인생은 마라톤의 반환 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성경은 우리가 역사의 마지막 지점을 달리고 있는 주자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징조들이 헉헉거리며 달리고 있는 우리의 경주가 마지막 골인지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마지막 지점을 경주해야 하겠습니까?
독일 뤼벡교회의 아주 낡은 벽에 있는 돌판에는 작자미상의 시(詩) 한 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목:‘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슬기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부르면서 내게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어질다 부르면서 오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부르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부르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왕이었을지라도 일천번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겸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영광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내 심령을 주님의 사랑으로 훈훈하게 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삶이 버겁더라도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면류관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이 서 계십니다.
그 동안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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