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세계무역센타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 시의 펜타곤 테러 사건으로 인하여 수 천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테러 당한 세계무역센타는 미국 경제의 세계적 위상을 상징하는 건물이었습니다. 110층 짜리 쌍둥이 빌딩인 이 건물의 높이는 415m, 한 건물의 면적은 12만 3천 평, 한 건물 당 상주하는 사람은 2만 명이며 하루에 출입하는 인원은 15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건물이었습니다.
지난 해 가을, 저는 뉴욕을 방문하여 당시 무너져 내린 건물들의 흔적이 남은 공사 현장을 보면서 미국인들의 그 넓고 깊은 절망감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따지자면 저마다 할 말이 많겠지만, 대부분 공감하는 사실은 당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한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준비한 사람은 더욱 없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그보다 훨씬 비극적인 무너짐이 인류 마지막 겨울에 일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뼉?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한두 곳 무너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무너짐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까닭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깨어 그날을 준비하시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깨어있는 신앙은 하나님께 열려있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야곱은 벧엘에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닫혀 있던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 접목되어 있음을 깨닫고 놀라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 열린 인생을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사닥다리가 자신의 인생에 걸쳐 있음을 보았습니다.
재림에 대하여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 주제로 쓰여진 책도 많이 있습니다.
「인류종말을 대비하라」,
「다가올 종말」,
「예수님은 휴거 받을 자를 뽑으신다」,
「예수의 신부들이여 준비하라」,
「휴거의 나팔소리」,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하늘 문이 열린다」,
「경고의 나팔소리」
「내가 본 천국」
재림 신앙이란 하나님께 열린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있어 이 세상은 하나님과 단절된 세계가 아닙니다.
그분이 친히 만드신 세상입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죄문제를 해결하신 일이 2천년 전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있으셨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부활 하나님의 나라에 가시면서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본 이대로 다시 오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것이 재림신앙입니다.
나를 위해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재림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헤아리다가 약 1,500번이나 찾았다고 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재림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약 39권 중에서 17권이 예언서입니다. 이 예언서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서 말고도 모세 5경이나 시편 속을 보아도 거기에 상당부분이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오늘 예배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 고백한 사도신경도 예수님의 재림을 신앙으로 고백의 한 것입니다.
이런 재림 신앙을 믿는 자들은 한 가지 중요한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 열리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내가 할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알게 되니 나도 할 일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노아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리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듣게 되고 그 계획을 따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닫혀 있었으므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산 것입니다. 120년의 준비기간을 하나님께서 주셨을지라도 전혀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러나 하나님께 열린 노아의 가정은 달랐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듦으로 "홍수심판"에 대처했습니다.
120년 동안이나 순종함으로 준비했습니다(벧전3:20).
노아 시대 홍수의 피해는 사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큰 홍수의 파괴력은 사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없습니다. 쏟아지는 비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자원이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담기면 재앙이 됩니다.
사람들이 홍수를 예방할 준비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합니다. 산에 나무를 심어 삼림(森林)이 우거지게 하여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홍수가 나지 않도록 합니다.
댐(Dam)을 건설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열려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주를 예비하는 것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어 있는데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깨어 있어 예비하고 있어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인데,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다 쓸어버리실 날이 가까운데 준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와 같이 믿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재림 주가 오셔서 심판하실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노아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홍수에 엄몰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후무후한 홍수조차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비한 노아를 엄몰하여 삼킬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엄청난 홍수의 힘이었지만, 노아를 해칠 수 없었습니다. 노아는 오히려 방주를 타고 홍수 위에 있었습니다. 홍수 위에서 떠다녔습니다. 할렐루야! 심판에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신랑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등불 들고 주 맞을 준비 됐느냐!
「도적같이 오리라」(벧후3:10;계16:15)하셔도 좋습니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오신다고 하셔도 좋습니다(50).
주님 오시는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살후1:7).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자꾸 주님께서 오실 때에 관심을 쏟습니다. 그러나 언제 오시는가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하루를 깨어 있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열린 인생을 살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림의 주님께서 오시는「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는 말씀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본문36절).
이는 성도를 골탕먹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날을 정확히 알려주시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멋대로 살 것입니다.
늘 깨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늘 깨어 있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께 열려 있고 깨어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911사건은 깨어 있었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재앙이었습니다. 도적이 올 줄을 알았다면 얼마든지 간단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깨어있는 것이 복입니다.
한때 한국에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었습니다. 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장림씨는 그런 이야기를 체계화해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1987년 2월 27일날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직접 와서 안수해 주시고 계시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줄여서 “다미 선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수하에 천여명의 추종자들이 있었고 전국에는 70여개의 단체와 약 20,000여명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그 20,000여명의 신자들 중 5,000여명은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돌아다니면서 거리에서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로 드러났고 그는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50-51) 「후세에 경건치 않게 살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고전10:11).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깨어 있어 예비하지 못한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란 존재는 그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10:4) 위에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 집이 불타지 않도록 금이나 은 같은 믿음으로 견고하게 지어야 합니다(고전3:12).
세상 끝날이 가까울수록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눅21:36).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열린 성도입니까?
준비하고 사는 성도입니까?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려 있습니까?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도 순종하고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깨어있는 신앙인은 시대를 분별할 줄 압니다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주신 말씀의 요지는 시대를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통하여 여름이 오는 것을 알려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때를 여러 모양으로 알려주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있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곳곳에서 들립니다.
-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 민족과의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요즈음에는 서양문화와 이슬람문화와의 충돌이 범상치 않습니다.
-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납니다.
- 성도들이 핍박을 받습니다.
- 불법이 성행합니다.
-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랑이 식어갑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상원의원이요 대재벌로서 인품이 훌륭해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분이 있었는데, 너무나 사랑하는 외동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사랑하던 아들을 잃고 나니 살아갈 의욕마저 다 잃고 자신도 죽고만 싶은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아들이 나타나서, "아빠, 왜 낙심하세요? 미국에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있습니까? 나 대신 미국의 많은 젊은이를 사랑하세요. 그들을 위해 일하세요. 그들이 아빠의 아들이 될 거예요" 꿈에서 깬 상원의원이 결단하고 많은 재산을 털어 자기 이름을 딴 대학을 세웠는데, 이 대학이 미국 최고 대학 중의 하나인 스텐포드 대학입니다. 대학을 세울 뿐 아니라 많은 장학금을 주니까 좋은 인재들이 모이게 되고, 그 인재들을 잘 길러서 세계 명문 대학을 만든 거예요. 스텐포드 씨는 세상을 떠날 때도 "내 모든 재산을 장학금으로 쓰라"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지마는 꿈에서 만난 아들의 애타는 소원대로 값진 인생, 남기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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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 왕이여 (수요설교)
들어가는 말
인간을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로 기억이 됩니다.
인간역사는 누군가 머리가 되어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지도력을 갖는 것이 좋은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두가 리더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분명한 사실은 잘못된 리더는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탈무드에는 뱀의 꼬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꼬리가 머리 되려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적용되고 있는 분야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리더십을 주는 것이 좋은가?
아내가 갖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능력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은가?
성경에서는 남편에게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누구에게 리더십을 맡기는 것이 좋은가?
이에 따라 교회가 여러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교황정치가 있습니다.
감독정치가 있습니다.
회중정치가 있습니다.
장로정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로교에 몸을 담고 있는 까닭은 장로정치를 옳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아래 사는 모든 제도가 완전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믿음 있는 장로들이 하나님께 더 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리더십을 장로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믿음있는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 순종할 때, 장로정치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정치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주정치를 희망했습니다.
1] 사무엘의 노쇠와 아들들의 부족 때문입니다.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당신은 늙고" 사무엘은 나이 많아 더 이상 사사로서의 수임을 완수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의 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받으며 그릇 된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신실한 믿음을 본받지 않았습니다.
2] 주변국 군주정치의 매력 때문입니다.
5b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방에 유행하던 왕정 제도를 요구하였습니다. 아마 눈에 보이는 왕이 권위와 위엄을 가지고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면 왕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고, 그래서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열방의 제도가 몹시도 좋아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이방 풍습이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이렇게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풍습을 몹시도 좋아하며, 이런 풍습을 흉내내려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3] 전쟁의 위험에서 도움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2. 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1]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6:33)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2] 보이지 않는 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3. 하나님께서는 군주정치의 맹점이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11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 13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14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왕정 제도가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불이익을 가져다 주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왕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권과 재산이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중한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지 못하고 일의 노예로 전락함을 염려하셨습니다.
1) 강제 징집
즉 왕이 필요에 따라 남자들을 군사로 소집하고 또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려는 자는 결국은 또 다른 세상 지배자들의 속박 아래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배와 다스림 아래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 과중한 조세
조세 제도로 인해 자신들의 재물을 빼앗겨 손실을 얻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왕이나 통치자들은 우리 인생들에게 겉으로 는 유익을 주는 듯하지만, 큰 손실과 불이익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고 충성해야 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화]
사사기 8장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디안에게서 그들을 구원한 기드온에게 왕권을 줍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우리를 다스리소서 부탁하는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노라
거절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대답합니다.
대신 엉뚱하게 기드온 세겜에 있는 첩의소생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 70인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그때, 기드온의 막내 요담이 살아 남았다가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한 비유를 들어 외칩니다.
감람나무(기름), 포도나무(새 술), 무화과나무(단 열매)는 모두 왕이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왕이 되겠노라고 흔쾌히 나섭니다,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자를 것이니라."
마무리하는 말
이상에서 보듯이 끝까지 인간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은 마침내 소원대로 왕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인간의 지배를 받기 원했던 이스라엘은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실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인 왕(그리스도)으로 오셨습니다(마 1:1-16).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주소서
주님만 의지 하오니 주님만 의지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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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신실하게 충성하며 살아오신 성도 한 분이 기도제목을 목회자에게 전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물질을 상당히 많이 맡기셨는데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함께 기도를 나누고 싶어서다 .
북한 동족을 위해 병원을 세우는 일에 헌납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고
서머나 교회를 세우는데 봉헌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고
선교관을 세우는 일에 바쳐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기도 하여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싶으신 것이다.
이런 기도제목을 듣는 나의 마음엔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선교사님들이 오실 때마다 계실 곳이 없어 교우 주소록을 펴들고 계실 만한 가정을 찾아 이곳저곳 전화 다이얼을 돌려야만 했던 고뇌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가!
빌려 쓰는 교회로부터 날라오던 경고장을 수없이 받으며 나가라고 하면 어떻하나 덜컹거리던 심장이 멎을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인가!
교육 공간이 부족하여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는 사역자들의 방황이 그칠 날이 오는가!
마음껏 기도할 공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어느 권사님의 소원은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부요하신 분이신데, 우리 가운데 얼마든지 크고 비밀한 일을 이루시길 원하시는 분이신데,
그것도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시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우리 현실의 곤고한 것만을 생각하고 기도에 태만한 것은 아닌가?
아예 꿈조차 꾸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긴급한 소원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사는 것이 더욱 신앙적인 자세가 아닌가!
여러 가지 마음이 기도 속에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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