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철인 3종경기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1978년 하와이 주둔 미국 해군 J.콜린스 중령이 당시 하와이에서 성행하던 와이키키 바다수영(3.9km), 하와이 도로사이클(180.2km), 호놀룰루 국제마라톤(42.195km)의 3개 대회를 한 사람이 쉬지 않고 경기하도록 구성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해 2월 세계철인 3종 경기 연맹(WTC)이 결성되면서 하와이에서 첫 국제대회를 치렀습니다. 대회 제한시간인 17시간 이내에 완주하면 철인(iron man)의 칭호를 받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극한 어려움에 맞닥뜨리시고 그것을 극복하시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1. 배반의 강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1] 입맞춤으로 배반하는 가룟 유다를 만납니다.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부를 맡길 만큼 신임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이 배반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이 배반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아픔입니다. 이보다 슬프고 이보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철인 3종경기 중, 수영 3.9Km를 빠른 속도로 간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일 수 있듯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반을 받아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의 아픔은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입맞춤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좋은 인사입니다. 그러나 오늘 가룟 유다의 입맞춤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마음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입을 맞추고 있는데 뒤에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정 반대입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하리라고 정면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배반하고 부인하고 모함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저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입맞춤으로 배반하고 뒤에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장애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극복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우리가 비록 삶이 힘이 들고, 현실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앞에서 입을 맞추고 뒤에서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배반을 하지 맙시다. 주님 앞에서 그럴 것이고, 사람 앞에서도 그런 상처를 주지 않도록 서로 노력합시다.
대신, 사랑하는 사람이 배신을 하더라도 기도함으로 저들의 용서를 비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그런 배신의 바다를 건너가시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배신한 제자 유다를 친구라 맞이하셨습니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입맞추며 배신한 유다의 마음을 예수님은 일찌기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입맞춤과 그이면에 감추인 계략을 예수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중적인 유다의 죄된 모습을 알면서도 왜 예수님께서는 그를 친구라 영접하십니까?
[1]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쓴 잔을 마시는 일은 무죄하신 예수님만이 감당하셔야 하는 십자가였습니다.
[2] 유다는 그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서 역설적이게 동역을 하는 친구입니다.
3.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2. 음모의 늪에 함몰 당하지 않았습니다.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철인 3종경기의 두 번째 단계는 도로사이클(180.2km)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신자 가룟 유다를 극복하고 만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 사람들입니까?
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갖은 음모를 꾸밉니다.
거짓 증인을 세웁니다.
부당한 심문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체포되어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잡혀가셔서 불법적인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이라면 밤에 도둑처럼 재판해서는 안됩니다.
사형 선고를 어떻게 하루 밤도 생각해보는 일없이 내릴 수 있겠습니까?
배심원들도 모일 수 없는 유월절 전날에 사형 죄라 재판합니까?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면 2명 이상의 확실한 증인이 있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지도자들이 거짓 증인 세워도 됩니까?
그러나 저들은 이런 부당한 음모를 한 순간도 쉬임없이 진행시켰습니다.
재판 과정을 읽어가면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 확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고되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무기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셨으나 가만히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간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심을 믿기에 맡기셨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벌이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무기력해서가 아닙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살려주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대제사장이나 공회원들이 예수님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무고하신 예수님을 모함하고,
거짓 증인을 세우고,
죄 없으신 분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 영이 아닌 살려주는 영을 받으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내가 살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고 죽이려 드는 죄를 범하지 않기 바랍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묵묵히 침묵하면서 십자가로 가시는 살리시는 영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랑하던 제자로부터 부인 당하는 절벽을 극복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란 늪을 지나, 3종경기로 말할 것 같으면, 마지막 코스인 '마라톤'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의 부인에 이르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예수님이 물었을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공언했습니다.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위기에 처했다고 느껴졌을 때, 그냥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과감히 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무엇인가 해야한다고 자기 손에 든 검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에게 예수님께서 부인을 당하였다구요?
사랑하는 베드로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누구도 아닌 수제자 베드로의 부인은 지칠대로 지친신 예수님께 결정타가 되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철인 3종경기의 마지막 마라톤과 같은 어려운 코스였습니다.
가까운 분의 부인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나를 부인하는 체험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목회 중 제가 아끼던 사람이 나를 등지고 떠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가 저에겐 가장 쓰라린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런 사건을 나에게 말할 때, 큰 아픔이 됩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좋은 성도는 교회가 어려울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형제는 형제가 고난을 당할 때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분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까운 사람을 보호합시다.
가까운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수록 더욱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인을 당하여 절망이 다가올 때 여러분은 부인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결코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께 결정적인 고통을 되었습니까?
베드로의 어떤 점이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님께 큰 고통 가운데 빠뜨리게 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을 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해버린 버릴 수 있었습니까?
1] 베드로가 자기에 대하여 과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녁 만찬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했습니까?
겸손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농담하시는 분이 아니시거든요.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만만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다 떠날지라도 저는 아닙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를 들으신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도 자신 만만한 자만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섰다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정도면 됐다’생각할 그때 마귀는 '넌, 내 밥'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섰다'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마귀는 뒷다리를 겁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은 마귀의 표적임을 아셔야 합니다.
2]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주님께서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을 때, 베드로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 기도하라 하셨으나 잠들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기도로 조율이 되어있지 못하니 영력이 없고, 그래서 적이 다가왔을 때, 검을 의지합니다. 결국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3] 멀찍이 따라갈 때입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58절)
베드로가 안전거리를 두고 멀찍이에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탄과 안전 거리를 주어야지요.
앞 차와의 안전거리를 갖듯이 어두움의 권세와 안전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피해(손해)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주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시고, 교회 가까이 해야 합니다.
친구도 어려운 때에 있을 수록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교우간에도 어려운 때에 있을 수록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어려운 때 가까이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난로는 가까이 있으면 따뜻합니다.
이지선이라는 학생은 4학년 때에 술 취한 사람이 운전한 차에 받혀서 차에 불이 나는 바람에 온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곁에는 부모님이 그녀 곁에 있습니다.
오빠가 그녀 곁에 있습니다.
교우들이 그녀 곁에 있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때보다 그녀와 가까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녀 곁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그러다보니 지선 양은 그 무서운 수술을 수없이 되풀이 하면서도 하나님께 사고가 난 것을 감사하면 삽니다.
그녀의 인생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지선이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과 가까이 있으면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어려운 때일수록 가까이 하십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응답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한 자가 복이라 말씀하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쓰러지고 싶을 때 다가와 손 내미시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따라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도 그 사람과 함께 있었도다”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아니라 이 사람도 같은 당이라, 갈릴리 사람이라”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 사람도 그 당이라”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시간은 무려 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의도적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얼마나 기가막힙니까?
하물며 주님이시겠습니까?
74절과 75절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했습니다.
묵묵히 그 베드로의 모습을 지켜보셔야 하였던 주님의아픔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이미 경고해 주었지만 딱 무시하더니 끝내 세번이나 부인하고 있던 베드로를 보고 계셔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철인 3종경기의 마지막 코스 마라톤 하는 선수와 어찌 그 고통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철저히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 사랑을 확인하고 회복함으로 그 쓰린 경주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사단을 패배시키시고 죄에서 인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인생은 어떻게 보면, 철인 3종 경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계적인 수영 코스를 지나고 나면, 끝없이 펼쳐지는 싸이클 코스가 나타납니다. 그 난코스가 지났는가 싶은데 절벽같은 마라톤 코스가 펼쳐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절망합니다. 포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로 인한 배신의 강물이 너무 강하게 밀려왔지만,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꾸민 음모의 늪이 너무 간교했지만 함몰 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부인당한 현실이 절벽처럼 막아섰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신 이 일로 인하여 우리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도도히 흘러가는 배신의 강이 있습니까?
끝없이 펼쳐진 음모의 늪이 있습니까?
절벽같이 우리를 막는 절벽이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본문(마26:47-75)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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