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가8:11-21 하나님께 감사 , 이웃은 격려

들어가는 말

4월 8일 한국 교계 지도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강원용, 김창인, 조용기 목사님이 15분씩 '제가 잘못했습니다'란 제목으로 세상에 메시지를 선포하고 온 교계가 회개기도를 드렸습니다. 강변교회에서 있었던 회개한다는 성명을 발표였습니다. 수십 년간 전력질주하여 세계 제일의 대형교회들을 이룬 목사님들이 무엇을 회개한다는 말일까요? 이렇게 보면, 신앙이란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년 전 토론토에도 부흥집회 차 오신 적이 있는 윤 모 목사님께서 기도하다가 도끼로 공격을 당해 크게 부상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예 밤을 새워 철야 기도를 하는 분으로 수천 명의 교우들이 그의 신앙에 동조해서 어떤 교우의 가정에 문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곳의 많은 교회들은 너무 조용합니다. 이 교회만 해도 주일 오전 예배 한번 딱 드리고 그만이예요. 누가 와서 기도한번을 한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저 사무원과 청소하는 사람만 열심입니다.
무엇이 신앙에 있어서 본질인가?
이것을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좋은 말씀입니다.


1. 표적보다 감사를 !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오늘 우리는 참 특이한 본문 말씀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읽어가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힐난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매우 특이합니다.
이들의 말과 행위에 가타부타 일언반구도 없이 저희를 떠나 타고 오신 배에 다시 올라 호수 반대편으로 가버리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밥맛 없는 사람을 만나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으시니 그냥 등돌려 떠나버리신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어떤 신앙 모습이 예수님을 그토록 실망시켰을까요?
그런 역겨운 신앙스타일이 혹시 내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앞의 본문 말씀을 보면, 인생들의 굶주림과 기갈의 고통을 해결해 가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만납니다.
약속된 메시아가 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분을 만나다니 정말 놀랍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감격 중의 감격이지요.
저는 우리 서머나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때로 좋은 만남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는 지 모릅니다. 제가 연약한 목회자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은데요. 정말 좋은 분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사랑에 갈급할 때, 사랑이 풍성한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조직력이 필요할 때, 논리 정연한 분을 동역자로 보내주세요.
성전과 선교관이 필요할 때 성전과 선교관을 주십니다.
성전을 보수하는 과정을 보아도 적재적소에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충성을 합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 앞에 정말 감격할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힐난하며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힐난과 시험은 명목상으로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을 강권하며 예수님을 힐난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돌을 변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등의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못말리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주신 놀라운 이적에 감사가 없습니다. 대신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정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 안에 주신 크고 비밀하신 분과 그 하신 일들을 체험하면서도 감격과 감사대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신앙!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은 교회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11절)을 원합니다. 즉 믿음의 표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처럼 시험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초자연적인 쇼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돌을 변하게 하여 떡을 만드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표적을 원합니다. 그와 같은 그들의 요구에 주님은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12절)고 단언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도움되고 유익이 되는 건전한 진리의 표적만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19세기 최정상에 선 천재 바이얼리니스트로 파가니니를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날 그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줄이 하나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어 두번 째, 세번 째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당혹스럽기 한 없는 형편에서 남은 한 줄로 끝까지 연주를 해내었습니다. 박수가 우뢰같이 쏟아지고, 앙콜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남은 한 줄로 끝까지 감당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끝까지 남은 한 줄은 우리 신앙인에게는 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끝까지 남은 한 줄은 우리 신앙인에게는 건강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끝까지 남은 한 줄은 우리 신앙인에게는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만 계시면 하나님을 붙들고 끝까지 연주를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들을 생각하면 더 바랄 표적이 무엇입니까?
또다른 표적이 꼭 있어야 합니까?

꼭 무엇을 꿈에 보아야만 합니까?
꼭 이상한 은사를 받아야만 합니까?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

여기서 사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한분이 계시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신앙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보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12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랐습니다(Sweet).
마음 속에 스며든 비애로 인해 신음하셨습니다(Wycliffe.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주님은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생각을 세밀하게 살펴 아시므로 진실해야 합니다(시139:1-3).

성도들은 표적주의 신앙 등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저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신 주님께서는 마음 속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향하여 주님이 보여 주신 표적은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예수님 한분과 그분을 통해 주시는 표적들로 인하여 감사하십니까. 감격하십니까?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이렇게 찬양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실 줄 압니다. 주님 밥맛 떨어지는 표적이 내 안에 일어나기를 바라지 마시고 예수님 만으로 감사하며 감격하며 순례의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힐난보다 격려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표적 요구를 거부하신 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교훈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형식주의와 거기서 발생하는 독선과 위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었다는데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선악과를 세리와 창기들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자신들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도 잘하고 안식일도 잘 지키고 일주일에 두번 씩 금식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위한 의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의라면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맹물이세요?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구원을 위한 의는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는 것이거든요.
십일조 금식 주일 성수 다 좋지만, 그것을 지켰으니까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는 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이런 교만한 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등돌리게 하고 정떨어지게 하는 모습이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인간인데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느냐는 거예요?
옷을 잘 입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다르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음식을 좀 고상하게 먹으면 달라집니까?
교육을 좀 많이 받으면 달라집니까?

저는 호수에 나가 오리를 보노라면 조그만 차이들은 있어도 오리는 오리입니다.
먹이를 찾아 물속에 자맥질하는 모습을 보면 똑같구요.
암수가  짝을 지어 사랑하는 모습을 보아도 그게 그거구요.
공짜 좋아해서 먹이를 주면 몰려오는 것 똑같구요.
사는 모습이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하나님 같은 오리 없습니다.
그런 오리 찾으려면 부질없는 짓이예요.

그렇습니다. 돼지는 그냥 돼지입니다.
소는 그냥 소일뿐이에요.
하나님같은 돼지나 소도 없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같은 사람은 없어요.
바리새인들이 착각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들은 다르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 이렇게 착각한 것이지요.
이런 인간을 보실 때 예수님께서는 역겨우신 것입니다.
물론 거룩하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몇가지 계명을 지킨 것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것처럼 거룩한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잣대를 가진 저들에게는 주님으로 인한 형제들을 격려하지 않습니다. 대신 힐난하지요.
많은 깨달음이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나는 격려자입니까. 힐난하는 자입니까?

2차대전 직후, 유럽엔 전쟁고아들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아침, 한 미군병사가 짚차를 타고 런던의 군 기지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골목을 돌아나오다가 그는 빵가게 앞에서 코를 문에 대고 있는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 가게 안에서는 요리사가 빵을 굽고 있었습니다.
병사는 차를 세우고 조용히 소년에게 다가갔습니다. 소년은 요리사가 빵을 구워 진열장에 놓는 모습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습니다.
병사는 그 소년에게 저 빵이 먹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너무 놀란 소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소년을 데리고 빵집으로 들어가 빵을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 데 소년이 병사의 옷을 잡아 당겼습니다. 돌아보는 병사에게 소년은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하나님이시지요?”

나폴레옹은 의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요인을 발견했다. 승자는 일반적으로 성공한 자를 칭찬하고 패자는 승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성공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오히려 힐난하는 것이 저들이 가진 서글픈 약점이었습니다.

성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힐난하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헤롯 당의 누룩은 권세와 부귀를 추구하는 세속주의였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적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삶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 읽은 스위스의 전설적인 영웅 윌리엄 텔을 기억하시지요?
오스트리아가 스위스를 지배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총독 게슬러가 스위스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게슬러는 자신이 스위스를 지배하게 되자 시내 한 가운데에 긴 장대를 세우고 거기에 자신의 모자를 걸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절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느날 스위스의 그 유명한 윌리엄 텔이 그 아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윌리엄이 어떻게 하는가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윌리엄은 그 모자에 절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지나쳐 갔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그를 즉각 체포하였습니다.
게슬러는 윌리엄에의 아들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화살로 그 사과를 쏘게 합니다.
화살통에서 두 개의 화살을 뽑아든 윌리엄은 한 개의 화살은 품에 넣고 남은 한 개로 정확하게 사과를 쏘아 떨어뜨렸습니다.
게슬러는 윌리엄에게 묻습니다.

“왜 그대는 두 개의 화살을 뽑았는가?”

“내가 만약 실수로 사과를 맞추지 못하여 아들이 다치게 되면 나머지 화살로 당신을 죽이려고 했소.”

“당신은 내가 두렵지 않은가?”

“나는 이땅에 태어나 지금까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두려워 해본 적이 없소.”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신앙으로 세상을 이긴 다니엘과 세친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헤롯의 누룩에 물들지 않은 그런 순결한 신앙이 세상을 이깁니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의 이 누룩들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순수한 신앙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헤롯과 같은 것들을 버리고 순수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보다 더 확실한 표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메시야적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요즈음도 이런 표적을 구하는 일로 인하여 여전히 교회는 어려움 가운데 빠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지 않은 일들에 신앙의 절대가치를(?) 둡니다
어떤 교파는 예수님께서도 하시지 않은 방언을 강조합니다. 꿈, 예언, 안찰, 환상, 등을 마치 신앙의 깊은 수준처럼 말하고 구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때로 신앙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마무리하는 말


우리 가운데 오셔서 놀라운 하나님의 표적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를 하나님 왕국에 초대하는 메시아의 사역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메시아를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육간의 건강을 찾았습니다.
생명의 길을 찾았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그분이 행하신 표적에 감격 감사하지 않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힐난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현재에 함께 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 감격하십니까? 점을 치는 아니면 또다른 표적을 오매불망 고대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주님을 힐난하며 살고 계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늪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신앙을 세우기 위한 복된 열쇠를 찾을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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