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가8:27-38 좋은 성전으로 영원히 남는 길

들어가는 말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지난 주일이 어린이 주일이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어버이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어버이가 없으면 아이는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생명은 어버이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님께 자녀들의 생명과 인생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아는 자녀들은 부모님을 공경합니다.


이 중요한 원리는 우리 신앙에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의 부모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좋은 성전으로 남게 된 베드로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우리 위해 행하셨는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님께 효도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나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어느 날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요?"

"나는 당신을 호수만큼 사랑합니다."

아마 이런 답을 아내에게 들었다면 그 남편은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존재신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여러가지로 생각하여 왔습니다.

좋은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인 중의 한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 대한 평가는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았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매우 영감어린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공식적으로 고백한 첫 제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칭찬하신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니라."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의 마음에 흡족하였습니다,
그 고백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가 담겨 있었습니다.
천국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 열쇠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주님의 능력을 충분히 체험한 베드로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간단했지만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전부라는 답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바로 다스려주시는 왕이셨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시는 선지자셨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제사장이셨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실까?
저는 화사하게 핀 아름다운 목련꽃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목 같은 저에게 목련꽃과 같은 분이세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쇠하여 가는 저의 인생에 꽃이요 열매이십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저는 꽃 없는 고목과 같습니다.
바람 속에서 제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도 저에게는 제 인생의 꽃이신 예수님의 명예가 떨어질까 걱정이 될만큼 예수님은 저에게 소중한 분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네요.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주님,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바다만큼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봄이 가기 전에
아니 오늘 주일, 하나님의 전을 나서기 전에
주님께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우리 젊은 학생 가운데 박민욱이란 학생이 주님을 참 사랑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계절'이란 찬양을 준비했는데 함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게 하옵소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와 가정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소서.
주의 청년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 구원의 환상을 보게 하소서.
한 손엔 복음 들고 한 손엔 사랑을 들고, 온 땅 구석구석 누비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 구석구석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소서.
하늘의 뜻, 이 땅에 이뤄주소서.
주의 나라 되게 하소서. 주의 청년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 구원의 환상을 보게 하소서.
한 손엔 복음 들고 한 손엔 사랑을 들고 온 땅 구석구석 누비는 나라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였지만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는 뼈아픈 질책을 당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마땅히 있어야만 한, 그분이 지셔야만 하시는 십자가를 제외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상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습니다.(31)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청을 합니다.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리스도 고난의 정점이지만 또한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버린 바 되어야 했습니다.
정밀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우리의 아픔을 대신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정밀 검사에서 낙방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고통을 대신 당해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상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33)

그런데 이 귀한 하나님의 일을 베드로가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많이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나라!"

강퍅한 바리새인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혹독한 말씀이셨습니다.
'사탄아!'는 독사의 새끼들이란 말보다 더 혹독한 말씀이거든요.

베드로가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게 될 구원사역입니다.
그 구원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사탄이 해야할 말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베드로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지 말라는 말은 자신의 삶에 천국에 갈 의가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내 힘과 의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정밀검사에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은혜를 덧입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직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천국까지 달려가시는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의를 덧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할 일은 부단한 충성입니다.

효성스런 자녀의 기본 조건은 충성스런 하나님 자녀의 조건과 궤도를 같이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믿는 다면 다음 순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자기의 의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녀는 효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똑똑한 자녀라고 효도하는 것 아닙니다.
많이 배운 자녀라고 효도하는 것 아닙니다.
부유한 자녀라고 효도하는 것 아닙니다.
건강한 자녀라고 효도하는 것 아닙니다.

어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자식이 밉다고!
자기를 나타내는 자녀가 효도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 말씀이면 무조건 예 하는 자녀가 효도합니다.
부모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녀가 효도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충성도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효도란 자녀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모를 좇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오르바와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고 떠납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시어머니를 좇아갑니다. 그 결과 룻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여인 룻을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당당한 이름을 올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힘들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버거운 일이지만
자기를 부인하는 그곳에 바로 놀라운 영광이 있습니다.
삶의 길이 있습니다.


신앙도 다름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신앙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부인하고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갔을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정말 놀라운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아브라함의 자기 부인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지고 났을 때, 에서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았습니다. 이는 야곱의 자기부인의 결과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부인하고, 부모님 말씀에 예 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형들에게 음식을 가지고 갔다가 고난도 당했지만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자신이 살아 왕께 고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였던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비참한 자결로 인생을 마감하였던 것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자기를 부인한 점입니다.


다음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주님의 제자된 자들이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의 공로 아래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34)


자기란 모래와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말입니다.
그것을 움켜쥐려고 애쓸수록 더 빨리 흘러 나갑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잡으려고 애쓸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도들은 모래알 같은 자아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겠다고 몸부림칠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자기를 주님의 그릇에 부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죽는 것이요, 그것은 버리는 것이요, 그것은 죽음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질 때 그 자아는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일이 필요합니다.
깨끗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만든 바이얼린을 깨어버렸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그와 거의 동시대 인물 가운데 안드레아 과르네리(1626-1698)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자 과르네리 델 제수라는 사람은 할아버지의 빼어난 바이얼린 제조기술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항상 최상급의 나무만을 선택하여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귀한 점은 그가 만든 악기마다
"예수는 세상의 구원자"라는 고백을 써넣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만든 악기 가운데 싸구려 나무로 만든 악기는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좋은 고백을 가지고도 술을 즐기는 방탕벽으로 인하여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1698-1744)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94세까지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나는 바이얼린을 만든 것과 대조적입니다.

좋은 고백을 가진 것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고백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백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좋은 고백이요 귀한 고백이지만 신앙의 완성점은 아닙니다.
바른 신앙 고백은 바른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마라토너가 좋은 마라톤 대회를 선택하여 출발선상에 서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금메달을 향해서 그 때부터 달려가야 합니다.

저는 보스턴에 가서 보스턴 장로교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보스턴 마라톤의 출발점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곳에서 선수들이 몸을 준비하는 장소입니다.
출발선이 그 교회 앞거리에 뚜렷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출발선상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영광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괜찮은 사람들이지만 우리 중 아무도 그곳에 설 자격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이봉주 선수는 그곳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좋은 출발 선상에 섰을 뿐만 아니라 경주를 끝까지 잘했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출발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신앙 경주가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너무 좋은 출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정에 있어 비틀거리는 모습을 만납니다.

마무리하는 말


저는 이번 성전 보수공사를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성전은 끊임없이 보수되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만큼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옛 자아는 끊임없이 부인되어야 합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개혁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건축자의 의도대로 끊임없이 빚어져 가야 합니다.
옛 자아가 부인되는 것과 건축자의 뜻대로 늘 새롭게 빚어져 가는 일이 계속 될 때, 우리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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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월삭 기도회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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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 백성이 좋은 집에 살기 원하십니다.
판벽한 집에 살기 원하시지 결코 거지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신앙이 좋은 집안은 비교적 잘살게 하십니다.
전통적으로 신앙이 좋은 나라는 잘살게 해주십니다.
뿌리는 자에게 좋은 열매를 주십니다.
수입이 많게 도우십니다.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마실 때 흡족함을 주십니다.
입을 때 따뜻함을 주십니다.
일하고 삯을 받을 때, 전대에 돈을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매우 반대적이 입장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 백성이 그 반대적인 곤고함 가운데 처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을 읽어봅시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가 잘 되는 것 잘 사는 것 다 좋아하시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황무하였는데도 무관심하고 자신들만 판벽한 집에 잘 살려고 하는 그런 심보를 축복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다.

영국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어섰을 때
해지는 곳이 없다는 말을 들을 만큼 흥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국 교회가 황무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영국은 회복이 어려울 만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많은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공산 정권은 모든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교회 말살 정책을 썼습니다.
교회는 황무하였습니다.
지금 북한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을 만큼 큰 재난 가운데 처해있습니다.

성전을 황무하게 하면 그 백성들에게 곤고함이 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서머나 교회에 큰 축복과 기회가 왔습니다.
황무한 성전을 구입하여 아름답게 단장하여 하나님께 봉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 교회가 얼마나 황무하여졌는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곰팡이가 슨 벽들
버려지고 썩어가는 음식과 부엌기기들
어제 외벽공사를 하는데 물이 빠져나가야 할 하수구에 나무뿌리가 박혀서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이런데도 우리만 판벽한 집에, 아름다운 집에 두 다리 편안히 지낸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실 수 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제 우리 서머나 교회를 통해 성전이 단장되고 하나님의 찬양이 울려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대로 기도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복을 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다만 우리들이 좀더 열심을 내어 우라 교회가 성전 기능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주시고 협력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찬양을 힘있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봉사를 아름답게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좀더 선교와 구제에 힘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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