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가5:1-20 광인이여, 회복되어라!

들어가는 말

지구가 사막화되고 있다 합니다.
사하라 사막의 급속한 남진이나, 극성스런 중국의 황사현상도 지구의 사막화에 일부라는 보도를 만납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인간성의 사막화 또한 심각해 보입니다. 6.25란 무서운 전쟁을 겪으면서도 피난민들을 따스하게 맞으며 극복하였던 인정어린 우리 한민족이었건만 요즈음 신문들을 보면, 얼마나 무섭게 사막화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2천년전 벌써 이런 영적 사막화로 인하여 고통받은 광인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1. 광인은 비인간적 삶을 살았습니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광인은 귀신들린 자입니다.
그는 귀신에게 인생을 점령당한 자입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버려진 자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팽겨진 자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죽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는 작은 자입니다.
그는 소외된 인생입니다.

그를 그토록 광인되게 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마귀입니다.

성경에서 30번이나 나오는 마귀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이상하고 비밀스럽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루시퍼는 그 대장입니다.
악한 영 혹은 더러운 영이라고 하는 귀신은 그 졸개입니다.
이런 영들은 언제나 물질적으로 거할 처소를 찾고 있습니다. 그 속에 살면서 그것을 통하여 움직일 수 있는 도구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접근합니다. 그러한 영들이 인간에게 접근하면 인간의 생활은 언제나 해를 입게 됩니다.
그들에게 점령당하면 귀신들린 사람이 됩니다.
악한 영의 영향력 속에 놓입니다.

우리는 이런 불쌍한 귀신의 영향권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본문에서 만납니다.
그는 무시무시한 외딴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바위에 천연적 또는 인공적으로 깎여진 굴로서, 그 덮개가 없는 채 존재하여 들짐승이나 야인(野人)들의 휴식처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E.Gould).

그는 귀신에게 붙잡힌 후, 그 세력 안에서 자아를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W.Hendriksen). 무법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망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3).
그는 아주 난폭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포악하게 변하며 자기를 파괴합니다(5절).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소리지르고
자신을 상하게 하는 일 뿐이었습니다(W.Hendriksen).

광인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명을 상실하고 짐승처럼 사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인간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린채 무덤 사이에서 헤매는 이 광인 속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만납니다.

얼마 전 고국의 보건 복지부가 6,100명 18세 이상을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한국 국민 중 정신질환을 겪었거나 현재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31.4%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모두가 정도 차이지 사명을 잃어버린 채  광인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외로웠습니다]

저는 광인입니다.
저는 귀신들린 자입니다.
저는 귀신에게 인생을 점령당한 자입니다.
저는 무덤 사이에 버려진 자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팽겨진 자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죽어 가는 존재입니다.
저는 작은 자입니다.
저는 소외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귀신들린 자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제 생각엔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데
사람들은 저를 너무도 잘 아는 듯 말했습니다.
제 생각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듯한데
사람들은 저를 너무도 잘 이해하는 듯 공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외로웠습니다.


저도 누구에겐가 듣고 싶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저도 누구에겐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그 마음을.
그러나
아무도 저에게 다가와 사랑한다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확인해주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사랑을 갈망하는지 알까요?
내가 사랑이 필요한 존재인 줄 알까요?
그래서
저는 참 외로웠습니다.

저도 모든 사람들처럼 손과 발이 자유롭고 싶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저의 손과 발에 쇠사슬이 묶여 있어야 안심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제 손과 발에 쇠사슬 묶여 있음을 확인하려 할 뿐,
제 가슴에 채워져야 할 자유엔 무관심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자유가 필요한 자인데
사람들은 절대 저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 했어요.
저도 사실은 자유롭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저의 자유를 부자유스러워 했습니다.
저의 자유함이 남을 부자유하게 하는 존재
그래서
저는 참 외로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정말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인으로 생각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사랑이 필요한 것을
그에게 자유가 필요한 것을
그에게 이해가 필요한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고
우리에게 자유가 필요하고
우리에게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광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그 광인을 찾아가셨습니다.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거친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한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무덤 사이에 광폭한 짐승처럼 살아가는 광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가신 목적은 광인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귀신에게 인생을 점령당한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무덤 사이에 버려진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팽겨진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죽어 가는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그 작은 자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그 소외된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관심한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무시무시한 외딴 무덤에서 살고 있는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귀신 세력 안에서 자아를 상실한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무법자로 살아가고 있는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사망과 밀접한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아주 난폭한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위협이 되는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포악하게 변하며 자기를 파괴하는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소리지르고
자신을 상하게 하는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사명을 잃고 짐승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광인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광인을 회복시켜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광인을 회복시켜주시길 원하셔서 그를 찾아가신 예수님! 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머물러 있더라도 찾아오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짧은 마가복음의 분량에서 이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광인에 관한 기사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는 중요한 사건이지요.
광인을 찾아 광풍을 뚫고 바다를 건너오시는 주님은 오늘날도 광인되어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잃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광인을 고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중심은 본 마가복음에서만 보아도 거듭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막1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런 귀신들린 자를 첫 안식일 회당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날 저녁에도 막1:34에 보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3:11-12에서도 귀신들을 제어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를 세우신 목적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려 하심이러라”(막3:15)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도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서도 일곱 귀신을 쫓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상명령에도 귀신을 쫓아내라 명하셨습니다.(막16:17)

주님께서는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광인을 찾아오실 뿐만 아니라 광인을 점령하고 그를 다스리는 귀신을 내어쫓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사명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귀신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6,7절).
멀리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신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7절)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귀신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그러나 귀신은 말합니다.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알고 있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소중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라고 고백하는구나!
귀신도 어떤 면은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구나!.
귀신도 그리스도께 경배하는구나!
귀신도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구나!
그러나 문제는 그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찾아오시고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길 원하십니까? 우리를 찾아오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시길 원하시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온전히 맺고 있으면, 우리가 어떤 위험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고쳐 가십니다.



3. 주님께서는 광인의 존재를 회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물으십니다.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왜 예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까요?

1]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 현 상태의 심각성을 알려 주고 자아의식을 강화시키시려 그렇게 물으셨을까요?(W.Hendriksen)
2] 이름을 물음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한때는 모든 사람과 자연스런 교제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려 했을까요?(E.H.Plumptre),
3] 부드럽고 친근하게 이름을 물어 보심으로써 상대방의 동요를 진정시키려 했을까요?(Farrah)
4] 귀신들린 사람이 자신의 몸에 들어온 악령과 별개의 인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물으셨을까요?(Geldenhuys)

이름은 존재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그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빛을 낮](창 1:3-5),
[어두움을 밤](창 1:5),
[궁창을 하늘](창 1:8),
[뭍을 땅](창 1:9),
[모인 물을 바다](창 1:10)라 각각 이름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이름 짓는 일은 아담에게 맡겨졌습니다(창2:19-20). 그리하여 각 생물 기타의 이름이 속속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존재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행동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쫓아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그런데 광인은 그의 이름을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군대는 상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입니다.  오늘 이 사람은 한없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 시달려 온 사람입니다. 어두움의 권세가 명령하는 대로 무덤 사이에서 사망의 쓴맛을 보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며칠 전 고국 신문을 보니까, 군대에서 화장실에 변기를 깨끗이 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부대원에게 인분을 먹게 한 상관이 있었다 합니다. 어떻게 이런 비인격적이고 몰상식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분노가 봇물터지듯 합니다. 그러나 군대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군대는 상관의 명령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상관을 만나면 인생이 괴로운 곳이 군대입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군대는 또한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나이만 비슷할 뿐 자라온 환경, 학력, 가정배경, 개성, 인격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군대의 목적을 살리기 위해서 개성, 인격 등을 철저히 말살합니다.
그는 자신의 개성과 인격을 철저히 말살 당한 채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존재의미가 변합니다.

존귀한 자였던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나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공주'란 존재의미를 가졌던 사래가 하나님을 만나 '열국의 어머니'란 사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기꾼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얼굴'(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인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를 뜻하는 로루하마(호 1:6)를 [긍휼히 여김을받는 자]의 [루하마](호 2:1)로 바꿔주십니다.
[내백성이 아니라]는 뜻의 로암이(호 1:9), [내 백성이라]는 뜻의 암미(전 2:1)로 바꿔주십니다.
야곱이 그 막내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내슬픔의아들)에서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으로 바꾼 것은 흉조(凶兆)에서 길조의 이름으로 바꾸는데 있었습니다.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귀신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돼지 안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거부하지만 사람이 아니라면 돼지 안에 거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13 허락하신대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귀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귀신이 가야할 곳에 가게 하신 것입니다.
돼지와 함께 멸망의 길에 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왜 돼지 떼를 죽게 하셨을까요?

돼지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돼지 떼를 소유한 사람은 거라사 지방의 이방인 이었거나(F.E.Zeuner) 아니면 로마인에게 장사할 목적으로 돼지를 사육하던 유대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M.Henry).
예수께서 돼지 떼를 몰살시킨 이유가 귀신들린 한 생명이 2천 마리의 돼지 떼보다 귀중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W.Barclay, W.Hendriksen)
이는 동시에 종말의 심판을 위한 상징하는 일입니다(J.A.Bengel). 이를 통해 모든 인생과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2000마리 돼지 떼가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그 광인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 형편이었구나!
이것이 내 결국이었구나!
내 안에 좌정하여 주인노릇을 한 귀신이 바로 이런 멸망의 존재였구나 깨달았을 것입니다.

귀신이 떠나간 결과 그 광인은 온전하여졌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자연의 세계에 예수님께서는 능력 있는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에 대해 나타내셨습니다. 격하고 난폭한 광인을 잔잔하고 평온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이 미치는 범위와 결과를 본문은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R.A.Guelich).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나가시도록 구하였을까요?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신의 손'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까요?
2000마리의 돼지떼가 몰살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렸다가 치료받고 온전하여진 사람을 보기보다는 물질적 손해를 보았습나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산업에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떠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물질지상주의자들이요, 극단의 이기주의적인 생각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들의 요구 앞에 씁쓸한 자문을 해봅니다.

한 생명이 귀신의 권세에서 구원받는 것이 중요할까?
2천마리의 돼지가 소중할까?

생명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텐데 거라사 사람들은 돼지 2000마리나 손해를 보았다는 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이 분명한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귀신에게서 해방된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돌려보냈을까요?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회복된 광인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구하였습니다(parekavleiv i{na met j aujtou' h\/;파레칼레이 히나 메타 아우투 에). 이때 사용된 동사인 파레칼레이(parekavlei;간구하였으나)는 미완료과거로서 반복적으로 여러 번 간구하였음을 나타냅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단순한 인사치레로서 같이 있겠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함께 있기를 거절하고 돌려 보내셨을까요?

메타우투(metajutou;함께 있기)를 원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선 휘파게(}Upage;돌아가)와 앞앙게일론(ajpavggeilon;전하라) 명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한다는 것, '같이 있다'(meta;메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삶의 현장에 돌아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족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부모
그 형제
그 자녀
그 동안 그의 광인된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이제 그의 온전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를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하심으로 사명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전도자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나는 길잃은 나그네였네
죄중에 방황하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치유가 되었습니까?
은혜를 받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이제 참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사명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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