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중풍병은 뇌일혈로 인하여 반신 또는 팔다리 등 몸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증세를 말합니다. 의학이 많이 발달되었다는 오늘날도 치료가 힘든 난치병에 해당하는 병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는 이 중풍병으로 고통 당하는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좋은 이웃과 친지들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 고침 받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하여 우리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죄를 용서히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 안에도 중풍병처럼 죄로 마비된 여러 부분을 가지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나의 개인 안에는 물론, 내 가정과 공동체 안에 마비된 부분을 인정하게 됩니다. 교회의 각 기관 안에도 마비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그 부분을 찾고 치료를 받기 원합니다. 온전한 기능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1.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그날도 주님께서는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많이 몰려왔습니다. 몸둘 장소가 없을 만큼 사람들은 온 집안에 빼꼭 들어찼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천국복음을 사모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수을 시험하는 투기심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열망으로, 병을 고치기 원하는 열망으로 온 집안은 후꾼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매고 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 중풍병자가 낫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선한 소원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난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계신 집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차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깥쪽에 있는 사람의 허리를 쿡 찌르고 길을 조금만 비켜달라고 사정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기들도 치료받고 싶고, 자기들도 듣고 싶었기 때문에 양보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들것에 들려온 그들을 위해 모든 순서를 중단하고 그 사람만을 위해 모두가 양보할 이유를 사람들은 찾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순서가 끝나기를 기다리라
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들어가려고 여러모로 시도하였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다양한 시도입니다.
2] 상당히 먼길을 오직 이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자고 온 이 사람들은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집회에서 주님께서는 무엇인가 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난관 앞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난관을 만날 때,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가는 일은 분명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로 길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인데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난관으로 인해 우리 속에 생겨나는 낙심입니다. 사탄은 우리 앞에 난관을 가져다 놓고 낙심하는 마음을 불어넣습니다(참조, 민 32:9 ; 신 1:28). 그리하여 일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난을 만나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누군가 지붕을 통하는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중대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것은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 앞에 환자를 데려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 기가 막힌 생각에 마음을 합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난관 앞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난관을 앞에 두고 합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럿이었기 때문에 의견도 가지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의견이 채택되었을 때 일사 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난관을 극복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난관을 극복하기를 원하면 합심해야 합니다. 합심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될 뿐 아니라 적을 두렵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장 확실하게 청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믿음의 세계란 결코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서는 것입니다. 이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합심한 것은 먼저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도 컸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병자를 사랑해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즉각 행동에 옮겼습니다. 갑자기 지붕이 들썩거리더니 먼지가 쏟아져 내리고, 누군가 지붕을 부셔내는 것이었습니다. 지붕에 큰 구멍이 났습니다.
누구네 집인지는 모르지만 집주인은 질겁하여 항의했을 것입니다.
"당신들 무엇을 하는 거요."
"고쳐주면 될 것 아닙니까? 사람이 중요하지 집이 더 중요합니까?"
믿음이란 사람의 생명을 세상 무엇보다 무겁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마리 돼지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천하보다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제자들도 가르치심을 방해하는 무법자들을 향해 한마디 항의했을 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난관을 무시한 채, 자기들이 매고 온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를 매고 온 친구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중풍병으로 고통 당하던 본인이나 그를 돌보던 가족들은 그 동안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귀히 보십니다. 믿음이란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형제와 이웃을 살리는 일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흘린 땀과 눈물을 갖지 못할 때, 그 구원이란 부끄러운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도 결코 이들의 거룩한 소원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방 안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끝까지 예수님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믿음은
예수님 앞에 도달하기까지 중풍병자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무례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온통 흩으러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나무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확신있고 열심있는 믿음을 주님께서는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반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법도없어 보이는 어지러운 행위 보다도 믿음을 보셨습니다.
'저희의 믿음'이라고 했을 때 '저희'는 그 가운데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긴박한 필요성에서 절실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그 명령대로 즉각 행한 것을 보면 그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중풍병자라기 보다는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지목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는 다른 사람들들의 믿음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남의 신앙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을 가진 친구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르호보암은 어리고 나쁜 친구의 말을 따르다가 낭패합니다. 그의 곁에도 그로 하여금 섬기는 왕이 될 것을 권하는 믿음 있는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떠난 친구들의 말을 따르다가 나라를 망칩니다.
그러나 롯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때문에 소돔의 멸망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 요나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친구의 연결된 믿음이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치료함을 받은 것은 계집종의 믿음에 큰 도움을 받
았습니다.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고쳐주지 않는다고 노발대발할 때도 종들의 도움 때문에 요단강에 나아가 고침을 받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대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 예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주님께서는 환자의 병을 고치기에 앞서 죄사함을 먼저 선언하십니다(20절).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병고치러 온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① 죄 문제 해결이 주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육체를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죄란 영혼의 질병은 영혼을 상하게 합니다. 육체의 질병은 죄악의 경우 육체의 죽음만을 몰고 옵니다 그러나 영혼의 질병은 영원한 사망을 가져옵니다.
② 주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집이 미어지도록 주님께 나아옵니다. 용신할 수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나아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자고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말씀대로 병을 고치는데 있어서도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에 있어서도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죄 용서함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 받을 목적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시험하러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배우러 찾아왔습니다.
많은 병자들은 병을 고치러 찾아왔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의 귀한 말씀과 많은 능력을 행사하는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선물인 죄사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본 사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24)
사명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셨지요. 예수님은 중풍이란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자에게 보다 근원적인 인생의 답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죄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죄문제가 중풍이란 병보다도 더 시급하고 근본적임을 알려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의 치료만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까지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선 언젠가 다시 썩어져갈 육신보다 전체적이고 완전한 치유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은 천국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대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 복된 말씀을 들었을 때, 왜 '참람하다!'고 분노를 터뜨립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을 때, 그들은 바로 생각나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은 자가 아니라 능력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계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1)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라 하심을 깨닫습니다.
창조주만이 인간의 모든 죄를 사유하실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2) 구속주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죄용서는 구속주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구속주이심을 선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선입견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깨끗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창조주이시기도 하지만 구속주이시므로 당연히 죄를 사할 권세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병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sins are forgiven)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죄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먼저 씻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하는 죄용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의 마음을 알아 죄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서머나 교회 복사기가 새로워진 날입니다.
이 복사기는 몇 개월 전에 강문규 회계사 사무실에서 기증한 것입니다.
값진 복사기인데 흠이라면 약간 까맣게 나오는 것입니다.
복사하는 경비가 들어가지 않으니 참 고맙습니다.
그러나 교회 명예가 달린 주보를 복사할 수 없습니다.
까만 줄이 비오듯이 복사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 몇 차례 청소를 하다보니 어느 정도 깨끗하여졌지만,
아직도 좍좍 그어져 나오는 줄들이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내가 아무리 힘을 써도 비오듯이 그어져 나오는 이 까만 줄들!
나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나의 힘으로도 안되고, 내 능으로도 안됩니다.
복사기 전문가와 만난 자리에서 문제점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더니
'위 열 주는 둥글대'가 상했군요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바꾸어야지요!
먼 곳까지 가서 부속을 사온 후, 갈아 끼웠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냐고요?
오늘 여러분이 받은 주보를 보세요.
새로 고친 복사기로 인쇄한 것입니다.
깨끗하기가 원본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복사의 본을 결정하는 부속 자체가 상해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본을 따라 복사되는 인쇄물들은 한결같이 그 본을 따릅니다.
그 부속을 새롭게 바꾸니까 깨끗하게 나옵니다.
흠이 되는 줄이 없어졌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죄란 인간의 본질 자체를 파괴하는 복사기 둥글대 줄과 같습니다.
죄가 인간을 그어버리면 그 인간에게서 나오는 어떤 행위도 까맣게 나오는 유인물처럼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서 중풍병을 고치시기 전에 죄부터 깨끗케 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3. 주님은 그의 병도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주님은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죄문제를 해결해주신 예수님께서 그의 영혼을 치유하여 그들에게 영적 건강을 회복시키시더니, 말씀으로 신체적 건강도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중풍병을 고쳐주신 것은 이미 상해버린 부분을 회복하신 창조주의 권능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는 즉시 나았습니다. 만성적인 병이 곧 나았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의 병을 고치심으로 예수님은 죄 사하는 권세가 있으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왕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22절). 죄용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21절). 종교지도자들이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하고 그들이 물은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중풍병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이신 증거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워(뭉개고) 있는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독일어를 쓰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80%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합니다.
영적 중풍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효과적으로 손발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중풍병은 하나님나라의 손해요, 자신의 비극입니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사역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란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주제를 찾고,
그 주제를 찾아 설교를 만들고
또 전하는 일이 저에게는 즐겁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찾아 그 진리를 글로 쓰는 일이
저에겐 참 즐거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성껏 작성된 주일설교와 수요일 설교가 실려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최대한 바른 형식과 내용을 갖추어 작성합니다.
이것이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전,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로 하나님의 지체로서의 기능을 힘차게 발휘하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님,
주저앉지 않게 하소서.
진리를 여러분과 나눌 때, 주께서 제게 주신 은사가 귀히 쓰임받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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