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야, 이번 성탄절 찬양을 잘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당근이지."
"당근이라니?"
"당연하다는 말이예요."
위로가 한국에 두달간 있는 동안에 배운 속어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혼동하여 배워온 것이 아닌가 했어요. 사전을 찾아봅니다. 당근:'미나리과에 속.... .' 결국 홍당무를 당근이라 하는데, '마땅 當 그러할 然'을 쓰는 '當然'을 唐根이라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 말을 한국에서는 몇년 전부터 급속히 퍼져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습관적으로 다수가 확신 있게 쓰고 있으니, 당연은 점차 당근이란 말로 바꾸어질른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언어 습관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지만 그 잘못된 언어습관을 진실인 줄로 확신하고 위로는 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2000년 전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이런 잘못된 종교 습관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그 잘못된 신앙 습관을 가지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려고 최선을 다하십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삐뚤어진 습관을 교정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바른 신앙 중심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합니다.
한국이 법을 잘 만드는데 혼란은 좀처럼 가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법을 만들어도 국민들이 잘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는 농부가 주일에 일해주지 않는다고 웅덩이에 빠진 양 구해주는 비유로 공박을 받자 '저는 웅덩이에 빠진 양을 토요일에 구해줄 수 있으면, 주일까지 기다리지 않겠습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주일마다 웅덩이에 빠지는 양이 있다면, 팔아버리든지 잡아먹든지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에 노회체육대회 준비를 하지 말자는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는 주보 한 장이라도 가급적 평일에 복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에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집중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은 평일에 해두는 것이 좋아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제4 계명을 주신 까닭은 하나님 백성을 복주시기 위함입니다. 안식이 없는 백성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인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일에 매여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안식일의 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의 법을 통해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갖고 살기 원하십니다. 안식일의 법을 바로 정립함으로써 우리는 부나 권력이나 명예나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참 자유인으로 살기 원합니다.
1) 창조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福주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2) 출애굽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구원의 은총을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신 5:1215).
3) 포로시대 이후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불신앙을 청산하고 이방인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의미로 안식일을 '거룩한 성별의 날'로 지키게 하셨습니다(느
13:15).
4)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오면 안식일은 '축복의 날'로서의 안식일, 그리고 '구원을 기념하는 날'로서의 안식일, 그리고 '거룩한 성별의 날'로서의 안식일 의미가 희미해져갔습니다.
하나의 외적인 형식과 의식만 강하게 남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처럼 지켜졌습니다(사 58:13).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안식일의 참 의미를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신앙의 바른 의미를 우리들에게 심어
주시기 원하십니다.
주일을 주신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합니다.
하지만
2.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켜야 합니다.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 이야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여행 중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복음을 전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배까지 부른 건 아닙니다. 그런데 벌판을 바라보니 밀이 무르익어 있습니다. 밀 이삭에 손이 저절로 갔습니다.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는 (신명기 23:25)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모습을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앞 장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비뚫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갔을 때, 그들은 유쾌했어야 했습니다.
레위가 예수님께 나아와 그 모든 죄를 털어 버리고 잔치를 베풀며 천국 대사가 되었을 때, 마음이 즐거웠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마음만 혼란스러웠습니다. 굉장한 일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데, 그 일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배워온 체험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그들의 의식으로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이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나눈 대로, 바리새인들의 용량으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도무지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담아주시기 원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은 보이지 않고, 상이한 외모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하는 인간적인 실수만 크게 보입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어깁니다. 그래서 즉각 예수님께 와서 이 일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합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2 절).
물론 성경에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될 일에 관해 몇 가지 원칙이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종들이나 가축에게도 일을 시키지 말 것(참조, 출 20:10,11 ; 23:12), 짐을 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말 것(참조, 렘 17:21), 오락을 금할 것(사 58:13) 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아가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들을 적용할 수 있도록 조상들의 성경 주석을 엮어 만든 유전집 '미쉬나'(Mishnah)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안식일의 규례를 39개 조항으로 나누어 적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것을 금하는 조항도 들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보면 제자들의 행위는 탓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과 연결시키고 그들의 전통 성경 해석적 입장에서 보자면 빌미를 잡힐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악의가 없는 사람들에게 트집을 잡으려는 것도 죄인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2절). 자기 가족이 배가 고파서 밀밭을 지나다가 그런 일을 보면 눈에서 불이 날 겁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그게 믿는 자에게 있어야 할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그 시대에 살면서 그 모습을 보셨더라면, 아마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과 그 일행을 초대하셨을 것입니다.
며칠 전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와서 밤이 늦도록 자기목회자가 불의하다고 고소합니다.
목사님께서 선교지에 다녀오셨는데, 그들이 전해주십사 맡긴 북한 탈북자들을 위한 헌금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목사님께서 그 헌금을 유용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탈북자들을 위한 헌금 전달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분배하여 전달하는 과정에 영수증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분이 납득하기에 미진한 부분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목사님이 물러나야 할만한 불의를 행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하나님의 헌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자꾸만 하기 때문에 그 목사는 죄를 회개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말도 안되는 걸로 일을 만들어 너무 교회를 시끄럽게 한다고 생각하여서 그분을 출교시켜버렸습니다. 서로간에 앙금이 극단적인 독풀로 돋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법, 저법을 가지고 말을 하는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마음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주장을 밤늦도록 들으면서, 일리는 있고 이해가 가지만 우리 기독교인이 해야할 일은 아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그분의
말을 그대로 믿고 생각할 때, 출교까지 당했으니 기가 막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예수님을 닮았다는 생각보다는 자꾸만 바리새인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켜야 합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선례(삼상 21:16)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법과 그 백성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는 그 백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놉 땅으로 도피했습니다. 그 지역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도망간 다윗 일행은 먹을 것이 없
었습니다. 제사장은 그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떡상 위에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6개씩 2줄로 놓여 있는 진설병은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대치되었는데, 그것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이었습니다. 제사장만이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참조, 레 24:8).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으로 승화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에게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안식일에 밀을 부벼 먹었던 제자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오 그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어선 대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사고대로 한다면, 안식일에 제사장만 먹으라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은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통해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5절)이심을 깨우쳐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법을 잘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나라의 법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충돌한다면 하나님나라의 법은 그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법으로 그 백성을 생명을 옭아매야 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살리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경찰이 60Km로 가야 할 지점에서 100Km로 갈 때가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법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법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밭의 이삭일지라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은 인간의 '생존'이 중요함을 강조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안식일의 법을 적용하여서 불법자로 몰아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직된 사고입니다.
주님께 있어서의 안식일
1) 병자들이 고침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병고침을 통하여 창조주시요, 구원주이요, 죄를 깨끗케 하시는 주님이심을 증명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요 만유의 주인이심을 증명하십니다. 병자에 대해 긍휼히 여기심을 통하여, 예수님은 유전과 의무에 우선하여 율법의 정한 바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사랑의 주체이심을 실천하십니다(막 3:4 ; 눅 13:15, 16).
2) 진리로 깨우침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성전과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담대히 증거하셨습니다(참조, 막 1:21 ; 눅 4:31). 6일 동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전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한 날, 곧 안식일을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데 바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시간을 투자합니다. 이웃을 위해 힘을 쏟습니다. 주님의 안식일은 무위도식하는 날이 아닙니다. 진리를 듣고 진리를 실천함으로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이런 개념은 오늘날까지 조금도 바뀌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과 함께 명칭만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두 번 째 이야기]
얼마 후, 새로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 회중 가운데는 손 마른 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서기관,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 법에 저촉되는 행위가 나타나면, 그것을 증거로 잡아 주님을 고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주님은 병자를 한가운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 약한 병자를 한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끝내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실 것인가! 안식일 날 병 고치는 문제를 불법으로 보는 바리새인들의 심중에 불꽃이 튀고 있었습니다. 회당 안에 팽팽한 긴장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회당 한 가운데 섰습니다.
탈무드의 해설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에는 비록 안식일이지만 생명이 위독하면 병을 고칠 수 있고 또 출산이나 할례도 허용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Marshall).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자를 무리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시고는 주위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것과 멸하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9 적)고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좋다는 원칙을 다시한번 밝혀 주셨습니다.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송사할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일 수 있는 증거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은 어쩌면 그의 존재조차 기억될 수 없는 무명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선을 행하지 않고 침묵하는 일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행위'는 상대방의 목숨을 죽이는 '악한 행동'과 같았습니다.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그 양을 살리기 위해 온갖 정력을 다 쏟으면서도(참조, 마 12:11) 천하보다 더 귀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소홀하는 그 자체는 예수님 보시기에 악이었습니다.
마무리 하는 말
'네 손을 내밀라'. 이것은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마른손처럼 주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손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네 손을 내밀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치유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난관을 물리치시고 치료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병든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예화] 두 무덤 이야기
저는 소아시아 지역을 방문했을 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두 개의 성과 두 개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는 히에라폴리스 성과 그 성밖에 있었던 성 빌립의 무덤이었고, 또 하나는 에베소와 그 성밖에 있는 누가의 무덤이었습니다.
그 성들은 모두 무너져 있었습니다. 저는 성 안을 거닐었는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각양 좋은 집들과 문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음란한 우상의 신전들과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들이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위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도서관, 공중 목욕탕, 사창가, 정치인들이 그곳에서 토론을 하곤 했다는 아크로 폴리스와 공중변소, 고급 주택가 등이 가도 가도 끝없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 두 무덤들은 모두 성밖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빌립이나 누가는 그들을 향해 이 성이 멸망할 도성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의 도성을 알했을 것이니 성에서 내침을 받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성 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원형경기장에서 재판하여 성밖에 내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두 무덤들은 모두 성밖에 있었습니다.
그 성안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토록 견고히 쌓고 살았던 성이 바로 자기들의 무덤이 될 것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확신 있게 성밖에 매어친 그분들의 무덤이 영원한 진리의 표로 남을 것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안식일에 대한 완고한 사고로 예수님을 성밖에 매쳐버린 종교지도자들을 생각하면서 철저히 무너져버린 에베소나 히에라폴리스 백성들의 좌절과 아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자기의 완고한 사고의 틀에 진리를 판단하고 진리를 집밖에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철저히 무너져버릴 또다른 에베소나 히에라폴리스 백성들의 좌절과 아픔을 느낍니다.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외치시는 계18장 천사의 바벨론을 향한 비장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이런 절철을 밟지 않도록 하시려고 오늘 말씀을 주신 줄 압니다. 우리가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당근'은 무너져야 할 성입니다. 세상적인 사고, 생활 습관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악'입니다.
당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당연'을 옳은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당연을 '당근'으로 확신하고 나아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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