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인생에도 사시사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노라면, 언제나 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열매가 익어 가는 여름도 있고, 낙엽이 떨어져 가는 가을도 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 추위를 맞아야 하는 겨울도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유독 겨울이 긴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저 고난이 좀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간절한데, 또 다시 고난이 옵니다. 어제도 겨울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겨울입니다. 그리고 보면. 어떤 나라는 겨울
이 길고 어떤 나라는 여름만 있는 나라도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무엇이 좋다고 결론짓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름이 긴 나라가 겨울이 긴 나라보다 복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천만입니다. 여름이 겨울보다 좋은 계절이라고 얼른 말하는 것은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어떤 사람은 겨울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가을만 되어도 벌써 바짝 긴장을 합니다. 추위를 잘 견디는 사람도 환경이 바뀌면 그 겨울을 조심해야 합니다.
겨울에 자신이 있다는 사람도 어떤 겨울은 힘들 수 있습니다. 지난 번 노회 선교대회 때, 김바울 선교사님은 자신이 겨울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는데 내몽고에 들어가 보니, 그 지역에서 자기는 매우 추위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이더라고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욥이란 사람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온 겨울은 길고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여 몰사를 했습니다.
나쁜 사람들을 만나 사업이 완전히 거덜났습니다.
몸은 중병에 걸렸습니다.
아내마저 그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친구들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점은 겨울을 살아도 따뜻한 햇볕을 필요할 때,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캐나다가 겨울이 길고 춥지만 살만한 까닭은 따뜻한 햇빛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겨울의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시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나인성 과부에게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죽음(死亡,[히]maweth; [그](thanatos); [영]Death)은 생(生)의 상대어입니다. 죽음은 인간 모두에게 닥쳐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편의 죽음에 이은 외아들의 죽음은 너무 잔인한 겨울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힌두교 축제를 위해 인도 북부에 모였던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지진으로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뿐이겠습니까? 지금도 계속해서 죽어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번 죽는 일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습니다
(히 9:27).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5:12).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가 되었습니다.
이 죽음의 세력이 나인 성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세력에 매인 행렬을 이루며, 성문 밖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겨울을 맞은 나인 성 과부를 성경에서 만납니다. 그녀는 미쳐 생각지 못한 때에 가을 서리를 맞아 소중한 과일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 마을 한 과부의 집을 덮쳤던 것입니다. 그곳 과부
의 집에 혹독한 겨울이 닥쳐왔습니다. 한 죽음이 그 고을을 유독 큰 슬픔 속에 잠기게 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 젊은 청년이 죽음의 권세에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수를 다하시고 곱게 가시는 죽음은 복되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대부분이 그렇게 복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아프리카 남아공의 나선교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많은 아이들이 어린 나이로 에이즈 병으로 죽어간다고 합니다.
저는 젊은 사람이 부모님과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먼저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청년이 덜컥 쓰러졌기 때문에 그 고을 사람들은 슬펐습니다.
2] 과부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한 사람의 구성원이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의지할 남편도 없는 가정에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는 그 가정에 죽음의 권세가 그 아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어머니의 아들 잃은 비통함이 어느 가정이나 같겠지만, 특히 이 가정의 절망과 좌절은 심했을 것입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는 그들의 기둥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녀는 노년의 지팡이로서 아들을 의지하였으나 그는 꺾인 갈대가 되었습니다.(매튜 헨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녀는 견디기 힘든 슬픔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울면서 홀로 상여를 따라가는 겨울은 어느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살을 에이는 추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많을 사람들이 이 여인의 혹독한 겨울을 생각하면서 함께 눈시울을 적셨을 것입니다. 남편 없고, 아들마저 없는 그 나이든 여인의 남은 생애란 그 당시에 살아있으나 죽은 자보다 더 비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인생의 겨울에 찾아오신 예수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 하시매
여기 참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며,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는 메시야로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백부장네 종을 고치신 후,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6㎞ 떨어진 나인이
라는 성을 향해 가시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헤르몬'(Hermon) 산비탈을 배경으로 고지에 위치해 있으며, 오늘날에도 '네인'(Nein)이라 불리우는 작은 빈민층이 현존해 있답니다. 이 마을 서쪽 문 앞에는 바위 무덤들이 있었
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은 성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밖을 향해 나오는 행렬과는 판이하였습니다.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신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기쁨이, 메시야를 향한 소망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따르는 무리와 함께 나인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슬픈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일생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바로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일입니다.
1] 당시 나인 성 과부는 단 한마디의 간청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갑자기 몰아닥친 겨울은 너무 잔인해 보였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그녀의 모든 것을 무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녀는
앞이 깜깜해 있었습니다.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2]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보고 계셨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의 빛이 그녀를 비추고 계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녀의 깊은 슬픔을 아시고 깊이 감찰하셨습니다.
[적용]
주님은 우리의 겨울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을 때, 늘 찾아오시는 참 빛이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
다고 생각할 그때에도 주님은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자비하신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장례 행렬을 따라 묘지로 가는 가련한 과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아들 때문에 울지 말라 하십니다. 그는 곧 산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살전 4:13). 주님은 나인성 과부를 향한 충분한 위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만의 위로가 아니라 그녀의 혹독한 추위를 단번에 녹여버릴 수 있는 참빛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답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화]
지난 밤, 차문이 얼어붙었습니다. 아무리 깊은 겨울 밤이라 할지라도 돕는 친구, 추위를 피할 공간이 있다
는 건 복입니다. 혹독한 추위를 녹일 수 있는 참빛이신 주님께서 곁에 계신다는 건 복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청년아 일어나라는 말씀의 빛입니다.
3. 청년아 일어나라
청년은 이 가정의 중추적 인물입니다. 아버지조차 없는 이 가정에서 이 청년의 죽음은 온 가정, 온 마을을 꽁꽁 얼어붙게 하였습니다. 청년은 그 장본인입니다. 이 청년은 사망권세에 압사 당한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도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사람들에게 짐만 되는 시체입니다. 시체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잠들어 있지 않아야지요.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가는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사명의 길이 있습니다. 무력하게 울고만 있을 일이 아닙니다.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신 후, 예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권능의 주님답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능력이 함께 하여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
습니다. 그리스도는 청년을 살리시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권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는 열매가 있는 긍휼이요, 자비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만 여인을 위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청년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기적을 행하시고 슬픔의 근원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그의 말씀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나타냄으로써 입증되었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고(1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심으로 그 청년은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입이 열렸습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영화롭고 찬란해
이 세상의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488장)
내 영혼에 봄날 되어서 주 함께 하실 때
그 평화 내게 깃들고 주 은혜 꽃피네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3절)
그리고 그 어머니를 섬기는 충실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만으로 죽은 청년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를 살리신 경우는 이 외에 두 번 더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
셨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날에 모든 이들은 이 청년처럼 그분의 명령 한 마디에 살아날 것입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살아날 것입니다.
이 가정은 믿음이 없는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이와 같이 죽음의 권세 앞에서 절망하고 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믿음 없는 가정의 절망도 보시고 찾아가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만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위해서도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성경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믿음 있는 가정도 죽음의 권세 앞에서 절망하고 울고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신 가정이 바로 나사로에 가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그 가정을 들러 복음을 전하신 곳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도 그 가정에 죽음의 권세가 몰아닥치니까 절망과 눈물에 휩싸이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정에 부활 신앙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생명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 지난 후에, 그래서 나사로가 완전히 무덤에 묻친 후에야 나사로의 집을 향해 가셨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날씨가 더워서 죽은 다음날 바로장사해야 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집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면,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한 여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살아나리라.'
그런데도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
합니다. 예수님이 그녀 앞에 찾아 오셨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 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말하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합니다. 이만한 신앙고백도 좋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믿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누가 그렇지 않다는가? 답답합니다. 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사망권세를 이기실 수 있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마리아 또한 너무도 믿음이 좋은 자매입니다. 열심히 성경공부를 한 자매입니다. 성경공부만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실 것을 알고 옥합을 깨드려 주님의 장사를 준비한 탁월한 믿음을 소유한 자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의 행한 일도 함께 전파될만한 복된 자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빠가 죽었을 때, 부활신앙이 매우 약합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언니 마르다와 같은 답답한 얘기(21절)만 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누가 창조하셨습니까? 누가 나사로의 생명을 창조하셨습니까? 그 창조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앞에 서 있는데 그 앞에서 간구할 생각은 하지않고 울고 서 있습니다.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잘 믿는다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안타까우셔서 우십니다. 비통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우리가 죽음의 세력 앞에서 왜 절망합니까? 부활신앙이 없을 때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범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 짓밟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아론에게 들린 지팡이를 아십니까? 가지에서 잘려 사람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 반질반질하도록 딛고 다니다 부러지고 닳아지면 버리는 지팡이 말입니다. 반역한 고라가 멸망을 당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원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민17:5)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이것이 하룻밤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죽은 가지가 살아 열매를 맺는 역사는 바로 부활신앙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부활의 주님이셨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는 이미 끝이 난 것입니다. 썩어서 흙이 될 날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가 그 안에 들어갈 때, 그 뼈들은 일어나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부활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삶의 어떤 부분이 마른 뼈와 같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어요.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왕권을 발휘하실 때, 우리의 그 갇혀있고 썩어가는 부분은 하나님의 군대로 쓰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맺 음 말
'청년아 일어나라!'신 예수님의 말씀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을 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하셨을 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달리다쿰!' 외치실 때, 야이로의 딸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이세상의 어떤 사망의 권세도 이기실 수 있는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청년을 다시 어머니인 나인성 과부에게 돌려주심으로써 그녀에게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은 기적을 베푸시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긍휼로써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합당한 위로와 더불어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능력의 주님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장례행진은 생명 주심을 감사하는 잔치 행진으로 바뀌었습니다. 상여는 비었습니다. 사망의 그늘에서 혹독한 겨울을 맞아 슬픔과 절망으로 통곡하며 몸부림치던 여인은 생명의 빛을 감격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모든 겨울 추위를 주님께 고하고, 사망을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마음 속에 근심있는 사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슬픈 마음 있을 때에라도 주 예수께아뢰라(484장 1절)
죽음 앞에 겁을 내는 자여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하늘나라 바라보는 자여 주 예수께 아뢰라(4절)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무엇이나 근심하지 말고 주 예수께 아뢰라
사람들은 이 찬양이 없을 때 이런 찬양 가사로 노래했습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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