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6 February 2015

눅8:16-21 빛의 자녀로 드러나라

세계적인 대문호인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삶은 1841년을 기점으로 BC와 AD로 나뉜다. 원래 그는 주색에 빠져있던 방탕한 사람이었다. 딸 레오폴디느는 아버지의 타락한 삶을 보다 못해 유서 한장을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빅토르 위고는 딸의 주검과 유서 앞에서 울부짖었다. "나의 타락한 삶이 딸을 죽였다. 이제 하나님의 품에 거하리라" 그후 그는 후생국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말년에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20년 후에는 명작 `무정'을 집필했다. `방탕한 사람'에서 `존경받는 사람'으로 변한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하나님을 만난 순간부터 인생관이 달라졌다. 이 진리는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주고 산 것이다" 현대인들은 신앙의 소중함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

빅토르 위고의  변화시킨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1. 하나님께서는 등불을 등경 위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
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의중을 헤아릴 길이 없어 당황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차별하여 들려주시는 분이신가? 이렇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신 바로 직후,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바른 의중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천국 빛(복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들어가는 자들'에게 그 '빛을 보게' 하십니다.
똑같은 말씀의 씨이지만, 아무 곳에서나 100배의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길가에 떨어지고, 바위에 떨어지고, 가시떨기에 떨어지면 결코 그곳에서 100배의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땅이 중요한 것입니다.
'좋은 땅!'에서 '100배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귀한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언제까지나 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로 머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까지 비유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주변에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먼저, 바리새인처럼 매우 교만하고 강한 마음으로 주님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예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빛이신 예수님을
등경 위에 두셨을지라도 그들은 그 빛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가 그들의 심령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저가 누구관대 죄를 사한다는 말인가!' 합니다.
주님을 향해 '참람하도다' 합니다.

이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 참빛이신 주님을 만나 죄를 고백하고 그 빛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들에게는 참빛이신 주님의 복음이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결론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참빛이신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은 자신들의 완악함 때문이요, 교만한 죄 때문이지 하나님이 차별하시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등불을 등경
위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등경 속에 감추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마음을 점검해 보시는 시간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가 나의 심령을 덮고 있지 않습니까?
교만한 나의 마음이 주님까지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빛을 비추어 주어도 내 영혼에 햇빛은 들지 않습니다. 그 빛이 심령
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비가 내릴 때, 그릇을 열어 받는 자에게 빗물이 고이는 것처럼, 참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는 자에게 참빛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오시면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등불로 드러나라 하십니다.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 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얼마전 175명을 태운 비행기 한 대가 공중에서 납치되어 바다에 추락하였습니다. 그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승무원 한 사람이 추락할 때의 20분간을 생생하게 증언하였습니다. 납치된 비행기가 더 이상 날 연료가 떨어졌을 때, 기장은 승객들에게 바다에 비상착룩을 할 수밖에 없음을 방송으로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 안에 타고 있던 앤드류 미킨이란 사람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는 추락하기 직전 비행기에서 몇분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승객들의 응답을 촉구했습니다. 그 때 20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의 수도 아디스바바 교회에 있는 한 성도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짧막한 예수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도 상식만 있으면,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16)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사용하여, 참빛을 받은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추는 빛임(16)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등불은, 점토로 만든 접시에 감람유를 넣고 심지를 박은 등잔입니다. 그것은 매우 희미한 빛을 내었습니다. 빛이 사방으로 비취도록 등경 위에 두었습니다.
[1] 주인에게 있어서 이 등불은 매우 소중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이런 등불 아래서 생활했습니다. 아무 때나 이런 불을 켜지 않습니다. 책을 볼 때나 식사를 할 때, 이런 등불을 켰습니다. 귀한 손님이 올 때도 이 등불을 켰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둘러 앉아 책을 볼
때면 부모님이 이 등불의 심지를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등불을 아끼면서 책을 읽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 방울의 기름을 소비하지 않으려고 등불 둘레에 빙 둘러앉아 한 순간이라도 등불을 아끼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등불의 기름이 잦아들어 들어가는 것을 안쓰러워 하면서 책을 읽던 시절이 새롭습니다. 주인은 이 등불을
매우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깨우쳐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참빛을 영접하고 빛의 자녀된 여러분을 천하보다 더 소중히 여기신다는 점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왜 빛이 하나님께 그렇게 소중하십니까?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빛이 되라 말씀하시기 전에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빛이라는 말씀은 분명 빛이 되라는 말씀보다 근본적이고 심각한 말씀입니다.
빛은 생물이 살아나가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인입니다. 빛으로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하게 되며, 동물은 빛으로 인해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빛은 에너지의 근원으로서 모든 삼라 만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참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성도는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빛을 비추기 전에 먼저 빛의 갑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참 빛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깊은 말씀을 얻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세상의 빛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빛은 참빛이신 예수님의 빛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태양계에는 9개의 혹성이 있으나 그 어느 혹성도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태양계의 유일한 발광체는 태양뿐이며, 다른 모든 혹성들은 반사체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의의 태양이시오, 참 빛이십니다. 성도는 이 예수님의 빛을 공급받아서 세상을 향해 빛을 반사합니다. 우리가 진정 세상을 향해서 빛을 반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 빛을 심
령에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3] 빛은 자신이 드러나는 대신 상대방을 드러냅니다. 성도들의 존재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있습니다. 세상을 밝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초든지 등불이든지 빛을 내기 위해 자신은 소모되어갑니다. 자신을 태움으로 빛
을 냅니다.
상대를 태우는 것은 불이지 빛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불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를 태우실 때, 우리 성도들은 찬란한 빛을 냅니다. 그리고 그 빛의 혜택을 세상 사람들은 입고 삽니다. 주님
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한 세상의 빛이라 하실 때,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소비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의 빛을 가리지 말고 비추라 하십니다.

다음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기쁨으로 빛나는 표정을 지니게 된 어떤 여공에 대하여 캄벨 몰간이 들려준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플랫포옴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 곁에앉아 있던 매우 교양있는 한 숙녀가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깊은 인상을 받고서 그녀에게 "저 실례지만, 아가씨는 무엇 때문에 그처럼 행복한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제가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고 있었어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제가 그 이유를 말하게 된 것이 기쁘군요." 그리고서 그녀는 구원의 경이와 그것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기쁨에 대하여 그 여자에게 증거하였다. 그녀의 풍부한 간증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그녀의 구세주로 영접하도록 만들었다.
신자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할때 그들의 얼굴은 자연히 그들의 영혼 속에 있는 기뿜을 반영해 준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왔을때 자기의 얼굴 꺼풀이 거룩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얼굴이 빛났다. 스데반이 초대교회 역사에서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빛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나의 어두웠던 그 삶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빛된 삶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빛은 드러납니다.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진리는 빛과 같습니다. 그것은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그 빛이 비춰져야 하므로 제자들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한편 '바클레이'(Barclay)는 이 말이 제자들의 위치
가 아무리 비천하다고 해도 자신이 그의 제자임을 천명하고 복음 전파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됨을 말씀해 줍니다.

저는 어떤 의료선교사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선교사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사역하는 분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몹시도 공부에 지쳐서 피로한 몸을 이끌고 학교 식당에 들어간 어느 날. 그 식당의 한 구석에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 한 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식사를 하기 전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평안해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가지고 있는 그 안식이 그렇게 부러워보일 수 없었습니다. 또 그 분이 가진 청결한 삶의 모습이 제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문득 저도 그 교수님처럼 예수님을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에게 다가가서 신앙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교수님을 통해서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교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의 빛을 갚기 위해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교수님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삶을 간증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두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억지 쇼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내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배어 있어서 참으로 드러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님은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예배를 미사일 발사라고 표현합니다. 미사일이 세상에 나가 터져야지 교회에서 터지면 자폭입니다.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실패하고 신학교로
숨어드는 비겁한 젊은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진짜 믿음 있는 젊은이는 삶의 현장인 직장에서 인정받고 직장을 개혁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복음의 최전선에 서 있는 믿음의 용장들이죠.”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숨기지 말고 전하라는 뜻입니다. '렌스키'(Lenski)는 부차적으로 복음의 빛은 이 세상의 숨겨진 모든 불의를 드러내고 그 실제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과 같아서 감출 수가 없습니다.(16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며 그 등불은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지금 은밀하게 행한 일이 머지않아 '알려지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17절). 우리 자신은 밝히 드러내야 한
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재능을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지속되든지 떠
나든지 한다. 즉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게 되는 것이다(18절). 은사를 받아 그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 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는 '
그 가진 것'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마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즉, '가진 줄로 알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버려지는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일 뿐 참된 은총은 아
니다. 사람들은 단지 소용없는 것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밤이 없다면
만약에 이 세상에 밤이 없다면
사람들은  별들을 볼 수 없을 거야.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별들은
캄캄한 하늘에만 보이는 거니까.

만약에 이 세상에 밤이 없다면
사람들은 등불도 켜지 않을 거야.
어둠을 밝혀주는 작은 등불은
캄캄한 속에서만 빛이 나니까.

만약에 이 세상에 밤이 없다면
사람들은 서로 빛이 될 수 없을거야.

(서정술)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18)

이와 더불어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받게 될 결과(18)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자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겸손하며 진실되게 말씀을 새겨 듣는 사람은 있는 것 위에 더욱 풍성한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
앗기게 됩니다. 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와는 전혀 무관(無關)한 것이며 영적 생명의 법칙에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 풍성한 생명의 결실을 거두기를 원하십
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장시켜 버리는 자는(마 25:24-30)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빼앗기고 맙니다.

3. 좋은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 친족입니다.

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하지 못하니 20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를 말합니다(막 6:3).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그에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가까운 친지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다지 애쓰지 않았다. 그
들은 그의 말을 듣고자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를 보려고 밖에 서 있었다. 왜입니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아무도 당시 바리새인들의 억측, 즉 예수님의 귀신들렸다는 소문 때문에 매우 큰 고통을 당했음에 틀림없
습니다. 그리하여 그 악한 소문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집으로 불러들이려는 발걸음을 재촉케 했고 결국 예수님을 찾아나서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닥친 심적 고통과 아들이 미쳤다
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생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은 인정하려 들지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세상에 나도는 소문 중에서 그 소문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따르는 자들을 예수님은 한 가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이요 동생이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참조,
요 1:12)을 의미하며 마음 가운데 아들의 영을 받은 것(참조 갈 4:5, 6)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빛이 그 속에 거합니다. 혈연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이 아닙니다.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가 의견을 존중해 주지 않는 가정이란 진정한 가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부끼리 부모와 자녀가 자녀와 자녀들이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데서부터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있는 것입
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보다 그의 제자들을 더 가까이 하며, 그들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19-21절).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말씀을 충실하게 듣는 자를 예수님은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자기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척들이라고 기꺼이 인정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영적 혈육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육적 가족들을 무시하는 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멸되는 육체보다 영적 가치가 더 숭고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가 예수님의 가르침(4-18절)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중요합니다.

어느 분이 내게 질문을 했습니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멉니까.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며 또 우리에게서 떠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그 질문을 받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깜깜한 방에서 불을 켜보십시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 집니다. 그렇다고 어둠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다시 불을 끄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빛과 어둠 간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나타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오는 시간은 순식간입니다. 마귀는 결코 구만리장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이 있으면 마귀는 그 즉시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하나님의 가족에서 순간적으로 멀어졌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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