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6 February 2015

눅8:22-25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 예수님께는 가야할 목적지가 있으셨습니다. 그곳은 호수 저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야할 목적지,  '호수 저편'을 향해 가시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예수님께는 나아가실 목적지가 있으셨습니다. 아직 어두움에 잠겨 있는, 저 어두움의 땅을 향해 몸이 피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기 때문(눅4:42)에 주님은 그곳을 향해 나아가기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분주히 움직입니다. 저는 때로 HWY401을 달리면서 엄청나게 많은 차량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 중 몇 %의 차량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달리는 걸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 달려가는 민족입니다. 저는 언젠가 독일에서 길을 닦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4Km 정도의 자동차 도로를 개수하는데 반년 가까이 걸립니다. 10M가량을 파고 바위를 넣고, 그
도로를 닦는데 엄청난 재료와 엄청난 시간을 쏟아붇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건설 공사가 이를 수주하였다면 모르긴 해도 그 시간의 10%도 안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빨리 달려가는 우리 민족 안에도 반성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목적지가 분명한 것일까요? 우리 한국 민족이 가지고 있는 교육 열의는 세계적입니다. 세계인들이 추종할 수 없는 교육비를 쏟아 붇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의 방향이 바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육목적에는 '홍익인간'이란 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뜻대로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뜻인데 정말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나만 이롭다 하면 수단과 방법을 쉽게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까?
목적이 바로 서 있지 않을 때는 빨리 가는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위험합니다. 저 가파른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호수 저편'을 목적지로 확보하시고 배를 타시는 주님으로부터 참 삶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영화를 보면서 제가 느낀 또 하나의 감동은 귀도란 주인공의 목적의식입니다. 그는 수용소에 갇힌 가족을 살려내기 위해서 '탱크'를 갖기 원하는 아들 죠수아에게 철저히 목적 지향적인 훈련을 시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울지 않을 때, 20점을 줍니다. 쵸코렛 같은 간식이 먹고 싶더라도 참을 때, 30 점을 줍니다. 들키지 않고 잘 숨을 때, 40점을 줍니다. 이렇게 해서 먼저 1,000점을 받으면 탱크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수용소 생활은 1,000점을 따기 위한 게임장으로 변합니다. 모든 아이들이 비누가 되어 나가고 절망하며 죽어가지만 그들의 인생은 점수가 쌓여갑니다. 마지막은 아내를 살리려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끝내는 발각되어 죽음으로 끌려가면서까지 숨어 그를 보고 있는 아들 앞에서 당당한 왕자의 품위를 잃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기를 살리기 위해 힘쓰다 죽어간 아버지의 최후도 모른 채, 종전되어 나타난 연합군의 탱크 앞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생각하고 감격하는 아들 죠수아의 만세는 목적을 가진 인생의 아름다움을 깊이 각인시켜 줍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이 시대에 주님께서 타고 계신 배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리키시는 호수 저편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곳을 향해 배를 저어가야 합니다. 저는 때로 우리가 배를 저어가는 '호수 저편'이  어디 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가 열심히 예배하는 목적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는 목적입니다. 각 다락방이 모이는 목적입니다. 유초등부에서 장년부까지 교육하는 목적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위로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아빠가 되길 원하느냐?"

나는 위로에게 예수님이 생각나는 아들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생각나는 교회입니다. 선교하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진리를 순종하려 애쓰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
회입니다. 성도간에 사랑하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을 뵐 때, 감동이 됩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던 주님을 따르는 분들을 뵐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시고 피곤하실 텐데 수요예배와 성경공부 등에 열심을 기울이는 교우들을 뵐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한 주간 동안 힘써 일하고 쉬셔야 할텐데 주일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하고 아름답게 헌
신하는 분들을 볼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장애인 사역지나 양로원을 다니면서 헌신하는 여선교회원들을 볼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한 평생을 뭐하고 지냈는가 우시는 분을 볼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
다.
이 모든 일 중에 서머나 교회란 방주를 타고 저어가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목적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노
를 저어가는 마음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생각나는 목적지로 달려가고 있는가 점검해 보아
야 합니다.
룻은 돌아가라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1:16-17)

우리는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룻의 중심이 우리 안에서 불붙기를 바랍니다. 내 자아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 주님께서 함께 승선해 계시는 교회 중심으로 바꿔지기를 바랍니다.


2. 이 복된 배에도 풍랑은 다가왔습니다.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이 배가 어떤 배입니까?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입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
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한 곳으로 가는 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잠시 잠이 드신 틈을 타서 광풍이
내리칩니다.
광풍은 갈릴리 호수에서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 호수는 지중해 해면 보다 200m나 낮아 선으로 둘
러싸여 있었습니다. 고지의 더운 공기가 저녁에 차가워질 때에, 그 찬바람이 산의 협곡을 통해 호수 표면으로
급격히 불어내리면 그것이 파도를 일게 하였습니다.
그 높은 파도가 지붕 없는 배로 밀려들어 거의 가라앉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배는 물이 가득하고 위태하여졌습
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타신 배에도 광풍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지만 시험을 당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주신 아름다운 꿈을 가진 자이지만 다른 어떤 형제보다 의롭지만 기가 막힌 고난을 당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당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누구보다 빛내려는 믿음을 가졌지만 광풍을 만납니다.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대선지자가 광풍을 만나 큰 고통을 당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용장이 당하는 광풍의 위험은 너무 혹독하다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타고 계신 배에 광풍이 몰아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타고 계시는 배에 다가온 시험이 무엇입니까? 이런 광풍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장로님께서는 흩어져서 시험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저주받았구나!' 이렇게 절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약1장 12절 말씀대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생명
의 면류관'을 생각하고 시험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2년 전에 선희 자매님이 효자상을 받았는데 참으로 기쁘더라구요. 우리는 천국에 가서 정근수 장
로님과 정양임 권사님, 그리고 선희 자매님이 받을 생명의 면류관에 대하여 설레임이 있습니다.


3. 성도에게는 기도란 비밀병기가 있습니다.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제자들 가운데는 배를 다루는 일에 전문가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눅 5:1-11),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
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대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최선의 노
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마침내는 죽음의 위협
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찌할 길이 없었을 때, 제자들은 예수를 깨워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라는 반복된 외침은 그들이 처한 다급한 상황을 능히 짐작하게 합니다. 제자들의 급박한
보고가 초를 다투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깨어나기만 하면 제자들을 구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반영한 것입니
다.
두려움을 잠잠케 하는 길은 그 두려움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충심으로 그리스도를 "주"
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사실 아름다운 것입니다. 제자들이 만일 자기 힘만 의지했다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
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파도를 만난 사람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주님을 찾는 건 아닙니다. 자
기 의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주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 엄청난 광풍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
을 믿지 않았다면 주님을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4. 주님은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마치 바람과 물결에 인격이 있는 것처럼 꾸짖었습니다. 바람과 물결 배후에 있는 악령(惡靈) 또는 악마
적인 세력을 꾸짖은 것처럼 꾸짖었습니다(Tyndale).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꾸짖었던 것처럼(눅
4:39), 본문에서도 바람과 물결 그 자체를 꾸짖었습니다(Hendriksen). 자연계를 한마디 말씀으로써 제어하시는
예수의 신적 권능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광풍은 잔잔하여졌습니다. 마태(마 8:26)와 마가(막 4:39)는 '아주' 잔잔
하여지더라고 하였습니다. 잔잔해진 상태가 예수님의 크신 권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외우던 유치환 선생님의 시를 기억합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처럼 까닥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뭐 이런 시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무신론자인 시인이 쓴 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기도
를 들으실 때, 절대로 가만 계시지 않습니다. 응답하십니다. 일어나서 광풍을 잔잔케 하십니다.
Calvin Johnson이란 사람의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그는 1983년 죠지아주 클레이
턴 카운티 법정에서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네 사람이 그의 무죄를 입증하
는 알리바이를 제시했지만 법정은 그에게 무거운 형량을 선고했던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큰 풍랑을 만났습니
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나는 잘못 기소되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억울함을 벗겨 주시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났습니다. 1999년 6월 DNA 검사결과 그는 진범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하나님은 풍랑 앞에서 기도하는 성도를 그냥 버러두지 않으십니다.
[기도에 관한 성구]

마무리 하는 말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 하는고' 하더라

주님은 광풍을 잔잔케 하신 후, 물으셨습니다. 다소 위급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함께 있는 한
그 배는 안전하리라는 사실을 믿었어야 했지요. 그렇지 못한 제자들을 질책하신 말씀입니다(막 4:40). 두려움에
떤 제자들의 불신앙은 예수의 평안한 모습과 대조되며, 시험의 때에(13절) 마땅히 취해야 할 인내의 태도를 망
각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바다로 나가자고 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22절). 주님은 제자들을 깊이 신뢰하셨습니다. 잠이 깊이 드신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
들을 보내실 때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동행하는 자들은 어디든지 안전하고 담대하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
어 위태한지라 불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다로 나갔을 때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23절) 순식간에 배가 요동하여 물이 배에 가득찼고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불신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당장 그들을 구해 주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5절).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 중에서도 그들이 정작 그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가 오면 다시금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경우
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하찮은 것으로 낙심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그의 권능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기이히 여겼습니다. 풍랑을 무
서워했던 자들은 이제 풍랑을 잠잠케 한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저가 누구인가'하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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