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8 February 2015

마가9:15-29 산 아래서 우리는 할 일이 있다

들어가는 말

   "나는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

   파스칼의 말입니다.

산 아래는 죄인이 사는 곳입니다.
산 아래는 연약한 자가 사는 곳입니다.
산 아래는 경건치 못한 자가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를 믿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그 산 아래로 세 제자와 함께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에게 하실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약한 자들에게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하실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1.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산아래서 그들이 경건치 않고 연약한 죄인들이 살 수 있는 일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황홀한 신앙체험을 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변화산의 영광된 주님, 그 곁에서 수종들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
너무나 영화로우신 주님의 모습을 체험하였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이 황홀한 모습을 대하고 외쳤습니다.

주님 이곳에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그러나 그들이 들은 목소리는 '그렇게 하여라'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초막 셋을 짓는 대신 산 아래로 내려와 산아래 연약한 자들 가운데 고통 당하는 자의 아픈 현실을 대면하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산아래서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모습을 본 사람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아래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받은 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이방인을 섬기기 위해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안디옥 교회 안에서 머물러 있지 않았어요.
나가서 선교하고 세상 사람들을 섬기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은혜를 주셨음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 모이기를 폐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일들은 정말 귀한 일이요 본질적인 일입니다.  이 일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토록 귀한 성전을 주셨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일을 감당하도록 하시려고 성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 성전을  잘 단장하고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교관까지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우리 선교회의 사역이 선교하는 일에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내일은 소풍을 떠납니다.
이 교회 공사를 맡아서 고생한 성 사장님이 통돼지 한 마리를 바베큐할 수 있도록 내놓았습니다.
많이들 오셔서 서로 교제하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일에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먹고 교제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여기서 형성된 아름다운 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선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선교회란 이름답게 선교에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세계 선교사님들을 어떤 형태로든 섬겨야 합니다.
지역 양로원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돕는 사역을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대학부가 열심히 수련회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은혜를 받고 원주민 마을에 가서  원주민들을 섬기려는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원주민들은 이 시대에 산아래서 고통을 당하는 어린 소년과 같습니다. 그들의 역사와 현실 속에 있는 소외감과 아픔을 싸안고 기도하며 곁에서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어두움의 권세 아래서 고통 당하고 있는  산아래 소년과 그 아버지의 눈물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만 초막을 짓고 사는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정말 역겨워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화롭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까닭은 말씀에 순종하여 산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힘내어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불 속에 들어가고 귀신의 세력에 고통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말씀을 산아래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서머나교우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 고통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좀더 나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가지 말을 합니다.

모사가 많으면 경영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성전 사역을 진행하면서 우리 성건위 위원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많은 시간을 좀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 모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이 경계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모사 만능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위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 어린 영혼은 이곳 저곳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종교지도자들은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당하는 사람이 보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고통 당하는 어린아이가 변론의 대상이 아니라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로 생각되어야 합니다.
고통 당하는 어린아이가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로 생각될 때, 변론이 나오겠습니까?
그들에게 변론은 사치가 됩니다.
내 아들이 그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변론하겠습니까?
만사를 젖혀놓고 살릴 길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이런 어두움의 권세 아래 고통 당하는 연약한 자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취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들을 싸안고 눈물과 기도로 금식으로 내 아들을 살리는 심정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고통 당하는 자를 아들과 같은 심정으로 그 아픔을 갖지 않은 채 하는 어떤 변론도 싫어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변론하느냐?

그 따위 변론을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변론하는 세대를 믿음 없는 세대라 꾸중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께서는 변론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론하는 세대를 참을 수 없어 하십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귀신의 손에 들려서 고통 당하는 한 어린 영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나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참된 치료는 하나님의 개입에서 시작됩니다.

변론하지 말고 고통 당하는 자를 자신의 혈육처럼 맞아들이고 그의 치료를 위해 전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핸드폰 하면 노키아를 많이 생각합니다. 사실 노키아는 1990년도만 해도 별다른 존재조차 없었습니다.
   사장은 소형 컴퓨터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적자로 인하여 회사는 존폐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1992년 노키아는 요르마 올릴라라는 인물을 사장으로 영입하였습니다.
   그는 아무 기술도 없었지만 설계부터 판매까지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다른 회사에 외주를 주는 새로운 시도(아웃 소싱)을 하면서 그들은 전 사원이 청소년 캠프장이나 캘리포니아 해변으로 고객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검정색 핸드폰이 아닌 색상의 핸드폰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핸드폰 패션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산아래서 우리는 정말 우리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만나고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까?

그랙로리는 사도행전을 연구하다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들은 회의보다도 기도를 더 많이 했다"

산 아래는 연약한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산 아래는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산 아래는 어두움의 권세 아래서 고통 당하는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위의 영화를 두시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저들의 연약함과 죄와 경건치 않음을 감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마10장에 보면, 능력을 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기슭에 남아 있던 아홉 제자들은 실패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귀신을 극복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그 능력은 더 이상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지 않았습니다(10:8). 왜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었을까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 난감한 상황을 오히려 비웃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런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음 없는 제자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제자들이나 그들과 변론하려 드는 자들에게나 믿음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변론입니다.

[마17: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히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으로 살 때, 우리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은 믿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열매를 가져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란 하나님 밖의 세대란 의미입니다. 사탄이 다스리시는 세대입니다.

그런 곳에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교직에 있다가 미국에 이민하여 세탁소를 운영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탁소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고 그만 둘까를 생각하였습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힘도 들고 여러모로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탁물 속에서 $2,700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는 일도 힘들고 자존심도 상하는데 누가 돈으로 나를 시험까지 하나!

그 돈을 서랍에 넣어두었습니다.
그 주인이 세탁물을 찾으러 오는 날, 그는 옷 주인에게 퉁명스럽게 옷과 돈을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왜 이런 일로 나를 시험하는 거요?"

그 세탁물의 주인은 사진을 찍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진이 뉴욕 타임스에 정직한 한국인이란 제하에 실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세탁소를 찾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종업원은 2명에서 2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그 세탁물 주인이 어느 날 찾아와서 세탁공장 운영을 부탁했는데 알고 보니 공단 운영이었습니다. 그 세탁물의 주인은 알고 보니 항공사의 부사장이었습니다.

그 세탁소 주인은 700명의 직원을 고용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는 그 일을 맡은 지 8개월만에 백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세대에는 부요함이 있습니다.
사람도 믿는 세계에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열매가 얼마나 풍성하겠어요?
내 인생은 지금 어느 곳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까?

인간 관계에서 믿음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형제를 믿을 수 있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부부간에 서로간에 믿음이 있는 부부는 행복합니다.
교우간에도 믿음을 가지고 지낼 수 있는 교회는 행복한 교회입니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가져오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갑니다. 기독교적 믿음이 사람을 윤택하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루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

태산같은 사탄의 권세가 당신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 고통 당하는 어린이를 데려온 아버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에게 고통 당하는 아이를 데려 오라 명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그리고 치료해 주십니다.


마무리하는 말

어떤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올 때마다

얘들아 하나님의 집에 가자

하면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아이들에게 하나님 집에 가자 하니까 아이가 'No!'라고 대답을 하더래요.

왜 그러니?

"하나님의 집에 가보아도 하나님은 안계시던데요."

산아래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산아래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우리 안에서 하나님 만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할 일이 있습니다.


산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가 됩시다.
산아래서 연약하여 고통 당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교회가 됩시다.
산아래서 믿음으로 사는 교회가 됩시다. 누가 오더라도 나는 서머나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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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존중하는 삶(엡6:1-9)




하나님 질서를 존중하는 자는 받을 복이 있다


엡6:1-9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들어가는 말

5월은 가정과 공경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달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자는 어린이 날이 오월에 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하자는 어머니 날이 오월에 있습니다.
스승을 공경하자는 스승의 날은 지난 주일이었습니다.
이런 날들을 보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의례적인 행사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공경이란 신앙적인 의미를 우리는 묵상하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주의 운행을 보면서 사람들은 놀랍니다.
너무나 정확한 질서를 따라 운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따라 움직입니다.  봄 다음에는 여름이 옵니다. 여름 다음에는 가을이 오지 봄이 오지 않습니다. 가을 다음에 갑자기 봄이 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은 질서를 따라 움직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처럼, 달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중에도 질서를 주셨습니다.
부모님이 있고 그 부모님을 따라 자녀가 있습니다.
그 자녀를 따라 그 자녀들이 옵니다.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을 따라 종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요즈음은 고용주가 있고 고용인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성도님과 같이 어른들이 계시고 그 질서를 따라 교회가 세워져 갑니다. 요즈음 은혜를 강조한다고 해서 무슨 장로가 필요하냐 이런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고입니다. 가정에 무슨 부모가 필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철없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에 좋은 부모님이 필수적인 것처럼 교회엔 좋은 장로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따라 가정이 운영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따라 교회가 운영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따라 국가와 회사와 공동체가 운영되기를 원하십니다.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은 창조 전의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기 전의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질서를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질서의 사람인가?
하나님은 법없는 사람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존중하는 자녀를 책임지십니다.

사울과 다윗은 어떤 점에서 다른 줄 아시지요?
사울이 다윗보다 여러모로 빼어난 사람이었지만, 그가 하나님 눈 밖에 난 이유는 사울은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사무엘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드려야 할 제사를 자기가 임의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는 자를 사용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무시하는 자를 버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이란 법없는 자를 왕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질서를 존중하였습니다.
다윗은 어떤 곤경 속에서도 사울 아래 있는 자신의 질서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된 이런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영원한 보좌를 맡기셨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는 법대로 할 때 면류관을 얻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 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

    경기하는 자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꼭 첨가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로 가는 지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를 알았으면 경주자의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 참 좋습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질서를 따라, 법을 따라 기도하는 것은 열매가 있습니다.

    과식하면서 위를 보호해 달라는 기도
    과로하면서 건강하게 해 달라는 기도
    과속하면서 안전하게 해 달라는 기도

참으로 위험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타나는 교회, 예수님이 생각나는 교회, 예수님을 닮은 교회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진리에 순종함으로, 구제하고 선교함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향해 우리는 질서를 지키며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방방 뛴다고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구호보다는 오히려 헌신이 필요합니다.
늘 말보다는 오히려 희생이 필요해요.

    우리 서머나 교회 안에서 질서를 따라 열매가 있는 신앙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단 마음으로 순종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입니다.


    공경과 순종과 사랑은 하나님께서 질서를 존중하는 가정에 두신 가장 값진 신앙유산입니다.

    자녀들이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일이 왜 옳습니까?

공경과 순종은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보다 연세가 많으니까 더 값진 존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자녀가 있을 수 없으니까 부모님이 자녀보다 귀하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부모님이나 자녀들이나 동일하게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다만 가정에 질서를 주셨습니다.
부모는 부모의 자리에,
자녀는 자녀의 자리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하셨고 이것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종들이 왜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여야 합니까?

    당시에는 상전과 노예가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사회는 노예가 있어서 유지될 만큼 종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전도 인간인데 종은 왜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까?
노예제도는 없어져야 마땅한 악한 제도이기 때문에 거부해야 하고 그 폐지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여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사랑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눈 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6)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7)

     부모님께 순종하거나 주인에게 순종하는 일은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특히 단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하듯 섬기라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상전으로서 영성이 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단 마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으나, 엘리 제사장이 돌아가 자라면 돌아가 잡니다.
분명히 사무엘아 부르는 음성을 들었는데 듣지 못한 자처럼 가서 잠자리에 듭니다.
영성이 흐려 있는 엘리 제사장에게 철저히 순종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변했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의 계획은 일점 일획도 변개됨이 없이 실행되었습니다.


   


3. 질서를 지키는 자에게 주께서 복을 주십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3)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8)

    세상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두 가지가 있다고 폴 트루니에는 말했습니다.
하나는 결혼이요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입니다.
질서에 순종하는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힘든 일입니다.

인간을 알면 알수록 개가 사랑스러워진다고 프레드릭 대제는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개만큼의 순종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한국에서 교직에 있다가 미국에 이민하여 세탁소를 운영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탁소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고 그만 둘까를 생각하였습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힘도 들고 여러모로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세탁물 속에서 $2,700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는 일도 힘들고 자존심도 상하는데 누가 돈으로 나를 시험까지 하나!

그 돈을 서랍에 넣어두었습니다.
그 주인이 세탁물을 찾으러 오는 날, 그는 옷 주인에게 퉁명스럽게 옷과 돈을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왜 이런 일로 나를 시험하는 거요?"

그 세탁물의 주인은 사진을 찍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진이 뉴욕 타임즈에 정직한 한국인이란 제하에 실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세탁소를 찾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종업원은 2명에서 2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그 세탁물 주인이 어느날 찾아와서 세탁공장 운영을 부탁했는데 알고보니 공단 운영이었습니다. 그 세탁물의 주인은 알고보니 항공사의 부사장이었습니다.

그 세탁소 주인은 700명의 직원을 고용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는 그 일을 맡은 지 8개월만에 백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마무리 하는 말

본문 말씀은 우리 가정 우리 개인마다 필요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서머나 교회에 가장 필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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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결삼하7: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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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우리는 오늘 본문, 삼 하 7장을 많이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 수요일에 이 말씀을 상고하였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너무 아쉬어서 오늘 좀더 나누고 싶었습니다.
특히 7장 뒷부분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다윗은 신앙의 비밀을 더 풍성히 나눌 수 있기 원합니다.
그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밀을 본문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이는 다윗으로 하여금 영성의 대가라는 칭송을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 하나님 성전의 소중한 점을 알고 사랑했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2b)

너무 평범하게 느껴지는 이 말씀 가운데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원하고 있는가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26:8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다윗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바라보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시27:4과 6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면서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4)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6)

이런 다윗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가는 삼하7:8-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이런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겠지요?

저는 2년 전에 보스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보았지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대학교회 예배당이 열려 있었던 것과 그곳에서 기도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땅이 믿는 사람들로 인하여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믿음을 지키려고 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 아시지요?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는데 67일이 걸렸습니다. 긴 항해 후에 보스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10번의 주일을 배 안에서 지켰습니다.
어떻게 지켰는지 아세요?
주일이면 항해를 일체 멈추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하시나보다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보스톤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에 그 지역이 복을 받았습니다.
불과 백 년이 되지 않아서 세계적인 국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수천 년 동안에도 누릴 수 없었던 복을 그들은 이 몇 백년 동안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한국의 복받은 사실이 이 백성 중 하나님의 교회가 흥왕하였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시84편을 펴시고 1-7절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만든 다음 복음 송으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시겠습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아름다운지요
내 영이 사모합니다.
내 맘 다하여 주님께 기도합니다.
나의 왕 나의 주께

주의 궁전이 어찌 아름다운지요
내 영이 사모합니다.
내 맘 다하여 주님께 찬송합니다.
나의 왕 나의 주께

주의 성전이 어찌 아름다운지요
내 영이 사모합니다.
내 맘 다하여 주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왕 나의 주께


우리의 남은 일생 동안 성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특별히 성전 사랑하는 자를 위해 주시는 축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했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
는 말씀을 들었을 때,

다윗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님께 고합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자신이 근본 미천한 자리에서 존귀한 왕직에까지 부름을 받았다는 감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였던 다음 고백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된 것을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진 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밀입니다.

어버이께 늘 칭얼거리며 불평하는 자녀보다 작은 일에 늘 은혜를 감사하며 어버이가 최고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자녀를 축복해주고 싶은 것은 부모된 자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길에서 차가 섰습니다.
토잉한 후에 정비소에서 결론을 알아본 즉, 기름이 떨어져서 차가 섰다는 것입니다. 그 차가 고장난 곳은 기름의 상태를 알려주는 주유등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때로 고장나는 곳이 바로 나의 영적 주유등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가를 알 수가 없어서 감사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찬양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주유등이 꺼진 인생과 같습니다.
언제 차가 설지 모르는 불상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영적 주유등은 잘 작동되고 있습니까?

다윗의 귀한 점은 그 영적 주유등이 잘 손질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가 다윗의 작품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116:12-14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22-23에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나이다.(22)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23)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24)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늘 감사하고 감동이 되는 일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영원히 주님의 앞에 살기 원했습니다.(29)

이제 청컨데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까?


영국의 시인 윌리엄 E. 헨리란 시인은 그의 작품 인빅투스(Invictus)란 작품에 이런 오만한 시를 적고 있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I am the master of my fate)
나는 내 영혼의 선장(I am the captain of my soul)

뉴 에이지 무브먼트의 구호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단적 사고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문을 인도해서 가실 선장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포프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면 치료는 절반이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자신이 병든 사실을 모르는 무식에다 고집까지 센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성장도 성숙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인들을 이렇게 구분해 놓았습니다.


달구지 같이 밀어야만 가는 교인
연같이 끈을 붙들고 있지않으면 날아가 버리는 교인
고양이 같이 토닥거려야만 만족하는 교인
축구공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교인
풍선같이 잔뜩 부풀여 있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교인
크리스마스 장식 같이 쉴 새없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교인

나의 집이 주 앞에 치료를 받아야 할, 복을 받아야 할 가정임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 의식이 필요합니다.

헨리 워드 비쳐(17세기 성직자)는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하려는 강한 의지에서 나오고
고집은 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에서 나온다."

조깅이라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대중화 시킨 짐 픽스(Jim Fix)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하루 하루 평균 16Km를 조깅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갑자기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인을 묻는 기자에게 간단히 말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받는 일을 하지 않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조깅도 좋지만, 자신의 건강 상태를 진단한 후 적당한 조깅을 했더라면 그는 그토록 쉽게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정말 우리 신앙이 하나님 앞에 있는가 근본부터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아공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계시는 엔드류 머래이란 분은 이런 글을 적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오랜지 나무를 해치는 질병 가운데 뿌리병(Root Disease)이 있다 이병은 뿌리를 마르게 해서 결국 나무가 죽게 한다"
너무 간단한 말입니다. 예수님께 접붙여지지 않은 뿌리는 나무 전체를 죽게 합니다.

점검해 볼 일입니다. 이런 나무의 최 우선 과제는 옛뿌리를 잘라내고 새 뿌리를 접목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여질 때, 살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 가운데 한 가지는 춥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니까 정말 추운 남극에는 감기가 없다고 합니다.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감기는 자신의 몸에 감기 바이러스에 싸워 이길 면역 기능이 저하될 때 걸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그분 앞에 온전히 서 있을 때 결코 영적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소금 인형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싶었습니다.
꽃, 벌, 바람, 산, 강에게 물었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바다에게 가서 물었을 때 바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가까이 와봐!'

바닷물이 무릅까지 허리까지 가슴까지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녹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잠기는 인생이 영원히 복을 받습니다.

다윗의 복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께 온전히 잠기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축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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