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에겐 가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고 싶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이 묻기조차 두려운 그 길로 가십니다. 길이 많은데, 왜 하필 그길로 가십니까? 주님!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외치고 싶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고 계시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외치고 싶은 말씀입니다. 출세의 길, 박수 받을 길이 얼마든지 주님 앞에 있는데, 왜 하필이면 형벌의 길, 고난의 길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굿굿이 걸어 가십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만 크다는 교만으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기심이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자기들만 택함을 받았다는 선민 사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교만과 독선과 그릇된 선민 사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승천할 시간이 이제 만기되었습니다.(모펫) '아날렙시스!' 엘리야가 승천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왜 하필 예루살렘입니까?
1. 가장 작은 자 안에서 큰자를 보시기 때문입니다.(46-48)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세상은 내가 크다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누가 크냐는 변론이 왜 생깁니까? 누가 크냐고 왜 묻습니까? 내가 크다는 세상 사람들의 교만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크다는 이런 교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크다는 교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라 하십니다.
이는 역설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누군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해본 사람이 있다면, 이 말씀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일감 투성이입니다. 허물이 많고 약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을 때 큰 자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 이는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한 이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로 쓰임 받은 스토리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작다는 그 사실이 우리 인간이 보는 것처럼 작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작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욱 돌봐 주시는 은혜가 있음
을 느낍니다.
아벨은 분명 가인보다 작은 자였습니다. 가인은 아벨이 작게 보였기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께 더 나은 제사를 드린 큰 자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보다 작은 자였습니다. 이스마엘이 희롱할 만큼 작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복을 주십니다. 이삭을 희롱하는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 하십니다.
요셉은 그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형들은 그를 은 20개에 팔아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형제들이 그에게 절하는 큰 자가 됩니다.
야곱은 에서보다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형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작은 자였으니 큰 자입니다.
다윗은 그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눈에도 왕감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자였습니다. 형들이 전쟁터에 얼신거리지 말고 돌아가라 할만큼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 가운데 존귀한 자로 택함을 받습니다. 그는 기름을 부음 받기 전에 작은 자로 골리앗 앞에 서 본 경험이 있습니다. 크다는 어른들이 모두 벌벌 떨고 있는 그 때, 가장 작은 어린 다윗이 전세를 바꾸어 버립니다.
솔로몬은 암논과 압살롬, 아도니야보다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큰 자로 그 시대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나아만 장군 집의 계집종은 누구보다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조언을 따라 문둥병자인 나아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 작은 종이 없는 나아만 집안은 문둥병자의 초상집 이상이 아닙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커 보입니다.
5000명 가운데 어린아이는 수를 헤아리는 수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가 가지고 온 5명2어를 가지고 축사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 중에 큰 자가 누구입니까? 그 어린아이가 누
구보다 커 보이지 않습니까?
예화]
스코틀랜드 어느 시골에서 물에 빠진 어린이를 한 농부의 아들이 살려주었습니다. 그것이 고마워서 소원을 따라 공부를 키켜주었는데 그가 유명한 Alexander Fleming(1881-1955)입니다.
구원을 받은 소년도 장성하여 훌륭한 정치인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처칠입니다. 처칠은 루스벨트 스탈린과 함께 회의 중 폐렴으로 눕게 되었는데 그가 플레밍박사가 발견한 페니실린으로 살아난 사건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가장 작은 자를 큰 자로 볼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작은 자로 일생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시대 사람들이 볼 때는 작은 자로 보였습니다. 모양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0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0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왜 하필 예루살렘입니까?
2. 이기적인 죄인까지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49-50)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는군요. 그럼 우리 서로 함께 예수님을 따르십시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그는 예수님 따라가기는 싫다고 한마디로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처럼 살고 싶지 않소."
예수님을 위해서는 수고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 삶은 내 삶인 것이지요. 봉사도 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편리한 일입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에게 따졌어요.
"그러는 게 경우가 아니지요."
당신은 요즈음 말로 하면, 예수님의 특허권을 도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치유권을 쓸 때가 있지만, 주님 영광이 드러나야 할 특별한 경우에만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도 수긍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전후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했다고 칭찬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을 하셨습니다. 그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관용을 가르치신 것이지요.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제자들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몇 사람의 제자만 위해 가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신 없이 자기 실속만 차리고 사는
사람까지도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독선을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서 옹졸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관용할 필요를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 사람을 이해하고 관용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제자된 사람들의 넓은 마음을 요구하시는 권면인 것입니다.
[적용]
어떤 사람은 우리와 신앙 기질이 다릅니다. 신앙 생활 습관이 다릅니다. 너무 이기적입니다. 나 만큼 헌신도 없습니다. 저건 아닌데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용납해
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2) 그 사람도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어떤 사람'은 누구 못지 않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온전히 의지하였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
다. 그렇다면, 그는 주님 믿고 그 힘을 얻어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 통치 아래 들어와 있습니다. 나라가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나같은 사람만의 독점물로 여기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구주로 믿고 그를 영접한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중에서도 그분을 구주로 시인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나 같은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위험한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유대인들의 독선이 무서운데 특히 바리새인들의 독선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바리새인(Pharisees) 원어의 뜻은 [분리된 자들]이란 말입니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 특히 모세 5경에 기록되어 있는 레위적 정결을 엄수하였습니다. 처음 그들은 그리스화(-化)의 흐름에 반항하여, 율법의 엄격한 실천에 열중했던 [형제들]입니다. 로마시대에 6천명 이상의 단원을 가지고, 회당조직을 통하여 전 유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마 23:2-7). 부활의 신앙이 있었습니다.(행 23:8), 그리스문화의 침투에 대해서도 사두개인과 달리 세차기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국민생활의 중심에 두기를 노력하여,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얻었습니다. 바울도(행 26:5), 그 스승 가말리엘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행 5:34-40, 22:3). 다만, 그들은 경건의 능력이 뒷받침하지 못하였으므로 형식적 순결과 위선에 빠졌습니다.
바리새인은 안식일에 침대(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요 5:10) 환자가 생겨도 고칠 수 없습니다.(막 3:2, 눅 13:14). 배가 고파도 밀 이삭이라도 따먹으면 안됩니다.(마 12:1-2)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도 정해두었습니다.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의 규정을 말하는데(행 1:12), 유다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6스타디아(=1,000m), 수 3:4에 기초하여 2,000규빗으로 하면, 900m로 된다. 대략 1km 전후라는 것으로서, 이 거리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까지가 됩니다.
이것은 세례요한과 같은 선지자나 예수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마 3:7, 23장등).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막 3:6, 15:1),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박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행 9:1).
3. 거부하는 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품으십시오.(51-56)
사마리아 사람들도 구원에 동참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으므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심하시고 사마리아에 사자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습니다. 찾아온 축복을 걷어차 버린 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복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이심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에게서도 문제를 만납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무례함에 분노하여 흥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사마리아인들을 저주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놓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사마리아인들이 그들을 찾아오신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지요. 그들을 분노함으로 저주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55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편협한 신앙과 그릇된 열정을 꾸짖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도 자신을 희생하여 죄인들을 살리려 함이지 멸하려 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사마리아인까지 미치기 원하십니다.
[적용]
나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은 누구입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라도 태워버리고 싶은 그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람도 구원을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작은 자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크게 보이십니까?
나와 생각이 다른 자를 나를 위하는 'against me' 가 아닌' for me'로 볼 수 있습니까?
나를 거부하는 그 형제를 위해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노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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