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면, 빛나는 햇빛이 폭포의 물보라에 반사되어 이루어진 무지개가 장관을 이룹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해도 빛나고 물보라도 휘날리는데 무지개를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위치 선정이 잘못된 탓이지요.
오늘 우리는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사람들 가운데 위치 선정이 잘못된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길은 정해지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 온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이 정해져야만 합니다. 결단할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향해 가든지, 아니면 세상으로 돌아가든지 해야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구원의 일을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 중이십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이 어떤 존재인가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출애굽기 29장에는 제사장의 위임식이 나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과 같습니다.
1] 한 제사장을 세우시려고 수소가 대신 죽습니다. 그 제사장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장의 죄를 안수 받고 죽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군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
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2] 또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군사될 제사장을 세우기 위하여 수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단 위에 불태우십니다. 수양은 제사장의 죄 때문에 제단에서 한 줌의 까만 재가 되기까지 불태워집니다. 결국 수양 한마
리가 '향기로운 냄새'로 변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나라의 제자를 세우시려고 대신 제물이 되실 것을, 향기로운 냄새로 바쳐지기까지 희생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 또 한 마리 수양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군사될 제사장을 세우기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도어 피를 대신 흘립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화목제물이 된 것이지요.
제사장의 귀를 거룩하게 하려고 피를 대신 흘립니다.
제사장의 손을 거룩하게 하려고 피를 대신 흘립니다.
제사장의 발을 거룩하게 하려고 피를 대신 흘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하나님의 군사의 귀, 손. 발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4]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군사될 제사장을 세우기 위하여 화제가 될 무교병이 불에 태워졌습니다.
밀을 완전히 갈아 고운 가루로 드려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진 무교병은 옛 밀의 흔적조차 사라지고, 고은 가루로 만들어진 무교병으로 바쳐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운 가루가 되기고 무교병으로 빚어지시고, 불태워 지심으로 우리로 왕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옛 사람이 흔적 없이 부인될 소망이 있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화답하는 자신의 부인과 헌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지원병이 마침 나타났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1] 이 사람은 주께 매료되었던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는데.......... .
2] 대단한 헌신 자입니다.
3] 세상 실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마 8:19).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22절 주석 참조)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예는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셨을까요?
제자가 되려고 지원한 정확한 동기에 대해서는 이것이다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본문(마 8:16) 앞을 보면, 예수님께서 크고 놀라운 권능을 행하시는 것으로 보아 주님을 찾는 지원자가 예수의 권능에 매력을 느꼈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따르는 제자
들이 부러웠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지요.
무엇보다 예수님의 답변을 보건데,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선뜻 받아들이시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중심에 꼭 맞는 동기가 아니었던 것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진군하는 줄을 모르고 지원한 것입니다. 이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생소한 것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답하신 말씀을 통해 볼 때, 자신이 바라고 있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기대가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지도자를 따르는 자들이 누리는 어떤 영광된 무엇을 기대했다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그는 그가 바라는 영광이 십자가와 연관된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自己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진솔하게 답을 해 주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께서는 지원자의 세상적인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계십니다. 그런 불순한 동기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뜻으로 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우에게 굴을 주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에게는 집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특별한 사명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 식. 주 문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세상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머리 둘 곳이 없는 분이십니다.
지원자의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지원 동기가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시려는 예수님과 상충되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누가 크냐면서 다투었던 세상 나라의 가치기준을 넘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의 바른 동기는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한 서기관이 주님 앞에 나타나서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 말하지만 그 동기 속에는 이런 깊은 희생과 아픔이란 십자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동기 대신에 세상의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친절한 답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우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세상적 야심과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여우에 있어서 소중한 굴을 찾아서, 공중에 나는 새와 같이 여기저기 새집을 찾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이 세대가 여우처럼, 새처럼 교회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돌아보지 않으시고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놀라우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에 값하는 제자가 되기 원합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 받은 자의 존귀함을 지키기 원합니다.
3. 우선 순위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출정할 군사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를 부르시고, 마태를 부르신 것처럼 부르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를 그물을 버려 두고, 세리 마태도 기쁨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여, 나로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먼저 이해하는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
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습니다(레 21:1-3).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 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주여, 나로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긴급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떠나가는 것이 힘이 든 사람
-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가정과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부친 장례와 하나님의 나라 전파는 피상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모두 중요한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이 겹칠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먼저 택해야 한다면, 우선 순위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 전파는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묻게 되는 것은 부친 장례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말인가?
효도하지 말라는 말인가?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라- 세상에 맡기라.
장례문제는 장례회사에 맡기라.
제자가 다 하려 하지 말라.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 전파에 우선 순위를 두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누가 나의 어머니요 형제냐? "
하십니다.
- 아버지의 뜻(하나님의 나라 전파)대로 행하는 자라야! 형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30세까지 효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
께는 우선 순위가 명확하십니다.
이러하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쓸만한 한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말씀은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려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의 의미는 세상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도들은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하나님의 일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얽매임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예수 제자의 길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습니다.
4. 그 나라의 군사는 한 곳만 바라봅니다.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그는 주께 봉사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봉사를 미루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우선 이 말은 명분이 좋습니다.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왕상 19:20). 당시 엘리야는 물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구태어 가정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들추어보니,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가정에 발목이 묶여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 책임, 즉 가족 작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구태어 가정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였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더 무겁게 생각할 것인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쟁기를 잡은 자는 똑바로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입니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야 합니다.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0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로 나서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제자라면 예수님의 군사인데, 그 엄숙한 예루살렘 길,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목에서 가족 인사이야기가 더 무겁게 느껴진대서야 될 법한 일입니까?
- 경주자는 목적 의식이 뚜렷해야 합니다
- 주님께 부름 받은 군사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예화] 기드온의 300명 용사
- 300명의 기도온 용사가 왜 기드온 용사입니까?
32,000 중 22,000이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 300명만 남게 됩니다.
마무리 하는 말
동기가 올바른 제자
우선 순위가 바로된 제자
그 나라와 의가 세상 무엇보다 무겁게 생각되는 제자를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노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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