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지난주일 우리는 수양관에서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왜 그토록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이며 그곳에 갔습니까?
아름답게 피어있는 들꽃들을 보기 위해서 가셨습니까?
자연 속에서 예배하는 즐거움이 있지만, 그것이 여름 수련회를 그곳에서 가진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이 수양관에 가셨습니까?
세상의 지체 있는 사람을 만나자고 가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이 수양관에 가셨습니까?
하나님과 친하고, 성도간 친하고 싶어서입니다.
참된 믿음의 공동체를 체험하고 싶어서 갔습니다.
교회의 지체인 성도간의 더 나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서머나 교회 목표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선교의 공동체를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진리의 공동체를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 며칠간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조금 불편했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얼마간의 목마름을 해갈시킬 수 있었습니다.
1. 인간은 누구에게나 목마름이 있습니다.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은 성령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예수님 위에 내리시는 것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 1:29-34). 그러나 그는 오늘 목마름을 가지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묻고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의 갈증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 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는 "다른 이"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왕의 오심을 알렸고, 심판의 날이 온다고 확신했었습니다(마 3:7-12).
그는 당시 얼마든지 높은 지위와 명예와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신분과 명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판 주로 오실 메시아께서 지나가셔야 할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오실 메시아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불의한 헤롯을 목숨을 걸고 꾸짖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은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심판보다 사랑의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요한의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줄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악한 세력을 징계하고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는군요. 우리는 그런 일을 하실 또 다른 종류의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위어스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믿음이 목마름을 해갈시켜 줍니다.
확신이 흔들리던 그날 세례 요한에게는 구원을 향한 목마름이 찾아왔습니다.
그날을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구원자를 향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만 지나갈 뿐 상황은 여전했습니다.
자신이 마련한 길로 나팔소리 울리면서 오셔야 할 메시야라고 확신했던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오시는 화려한 모습이 없습니다.
왕으로 오시는 소리도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 할 수 있는 세례 요한에게도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처한 상황이 열악한 감옥이란 극한적인 곤고함을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말입니다.
하물며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완악한 세상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늘날도 선교지에 있는 많은 선교사님들은 그들의 선교지에서 이런 인간들의 목마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원주민 마을을 돌면서 저들의 갈증과 필요를 생각했습니다.
원주민 마을을 따라 1,280Km! 3,200리 길을 다녀왔습니다.
5일간, 다섯 마을을 돌며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자
자연과 친근히 하자
원주민과 친근히 하자
서로 친근히 하자
이런 목표를 세우고 한 주간을 지냈습니다.
주변 자연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 보호구역에 사는 사람들도 비교적 착합니다.
사는 형편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황폐함 속에서 나날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나 남미,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눈부신 선교의 열매를 보고하는 선교사님들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김성일 선교사님과 같이 8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창고에 변변한 열매 한 광주리 들여보내지 못한 선교사님들에게도 박수와 헌금을 보냈습니다.
원주민 선교는 여러 면에서 이슬람권 선교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는 부유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절대적 존재를 시인합니다.
백인에 대한 적대감이 무성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한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기독교를 백인의 종교로 동일시하는 의식이 그들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한 선교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영적인 갈증이 있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멩이를 곳곳에 쌓기도 합니다.
기이한 짐승을 나무에 새겨 숭배하기도 합니다.
마약과 담배에 몰두해 봅니다.
성적인 탐닉과 빙고게임에 매달립니다.
그들의 내면에서 울리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우리에겐 이런 목마름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갈증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계십니까?
2. 사람은 근본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나갔습니다.
왜입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아닙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입니까?
그들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만나러 광야에 나갔습니까?
갈증을 해갈시켜 줄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참 선지자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러한 저들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가장 적합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 죄악된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 외쳤습니다.
통치자 헤롯왕의 죄악을 담대히 꾸짖을 수 있었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다 외쳤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선지자 중에 가장 큰 분입니다.
그리스도 앞에 오리라 약속하신 엘리야 같은 분입니다.
그리스도이신 그에게 사람들을 인도한 선지자입니다.
어떤 선지자보다 예수님을 가까운 곳에서 본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이런 선지자가 어디 있었다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0]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굉장한 칭찬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잘하였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사역으로 말라기 3장 1절이 성취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말 예언자였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이룬 일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가 고백한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세례 요한이 체포되지만 사람들은 방관합니다.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합니다.
결국 요한은 마침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이내 목이 잘려 죽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까?
이것이 전부입니다.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는 세례 요한도 사람의 힘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갈증을 전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세례 요한, 그는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번 가을 학기부터 우리 영어권 2세를 지도할 새로운 전도사님이 오십니다. Grace 황 전도사님 부부가 오셔서 우리 2세들을 지도해주실 것입니다. 정선희 전도사님께서 결혼하시게 되므로 유초등부 전도사님도 적임자를 찾는 중에 있습니다.
그동안 어린 영혼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수고하신 분들게 감사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수고하실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역자도 인간의 근본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 아들 위로는 아빠가 목사이지만 영적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인간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줄 수 있습니까?
3. 오직 예수님만 인간의 갈증을 해결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인류 가운데 온전히 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자, 가난한 자는 갈급한 심령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드럽게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며 요한의 믿음을 격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요한에게 다시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11:4).
이적을 제시하심으로 진실을 증거 하십니다.
선지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기적으로 하나님의 메시아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시면, 이적으로 병을 고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35:5-6)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
예수님께서는 구약이 이루리라고 약속하신 그 기적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리심으로써, 자신이 그 왕이라고 요한에게 확신을 주고 계십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예수님만 인류의 근본적인 목마름을 해갈시키실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메시야가 오셨다는 표시입니다. 이 표시를 불의한 세상을 뒤엎고 그들 중에 다윗의 왕국과 같은 힘 있는 나라를 건설하는 메시아로 생각하는 것은 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6]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따라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따라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구유에 오신 왕,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왕,
갈릴리의 비천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왕을 거부했어요.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런 비천한 예수님은 저들의 갈증을 해갈시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들어 실족하였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뿐인 삶을 인하여 실족하였습니다.
불명예스런 죽으심이 죄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하나님의 나라 왕의 사역이심을 이해하지 못했고 실족하였습니다.
저들의 생각 속에는 사악으로 가득한 로마제국을 심판하고, 헤롯을 넘어뜨리고 더 나은 다윗 왕국을 건설하는 메시아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메시아 왕국에 대해서 그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의 너무나 곤고한 삶의 현실이 그런 복음적인 말씀을 얼른 받아들일 수 없게 하였을는지 모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을 격려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지만, 우리가 의심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좋은 교훈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갈증을 일시에 해소시키시는 해답입니다.
우리는 세차게 흔들리는 나뭇잎을 봅니다. 곧 떨어질 것만 같은 나뭇잎을 보면서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그리고 때로 현실의 거친 세파에 흔들리고 시험을 당하는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사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나뭇잎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요, 그 바람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현실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우리는 때로 우리는 버거운 현실 속에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보이지 않은 바람과 그 바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이러한 영적 갈증을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아이십니다. 주님의 가르치심과 주님의 존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흔들리는 여러분 인생의 영적 갈증이 해결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것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입니다.
신앙으로 경주할 수 있는 출전권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확보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십시오.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성도가 믿음으로 경주를 하는 일에 있어서 난관이 있습니다. 열정을 방해하는 많은 적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땅에 매인 악한 자아(본성)가 있습니다.
몸의 악 제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이 경주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천국에는 싸움을 겪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소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천로 역정의 순례자는 많은 고생 끝에 드디어 왕궁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이상한 광경을 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왕궁에 들어가려고 몰려 왔지만 감히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 문에는 많은 군인이 갑옷을 입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담대히 문 앞에 나와서 자기 이름을 적게 한 후, 무장한 채 군인들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심하게 싸웁니다. 그러자 군인들을 물리친 후, 그 왕궁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듣습니다.
"들어오시오. 들어오시오.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그분의 공로를 덧입기 원하는 그 백성들 안에 인간의 영적 갈증을 충분히 없애 줍니다.
마무리하는 말
1898년 5월 1일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사역하다 쓰러진 평양에, 그 부인인 닥터 로제타 홀 선교사는 그가 남겨놓은 두 자녀와 함께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이질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모두 이질에 걸렸지만 이제 갓 세 살이 되어 가는 어린 딸 에디스에게 그 고통은 더욱 심했습니다. 여기 그의 마지막 순간을 적은 어머니의 일기를 소개합니다.
5월 23일 새벽 3시 30분에 다시 고통스러워 했다. 병이 난 후 처음으로 에디스는 안아달라고 했다.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이 작은 얼굴..... .
아침 10시 경, 나는 흰 민들레를 에디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오후 3시 아이의 손과 발이 차다. 얼굴과 몸은 뜨거워 섭씨 39.5도
오후 6시 45분 아이는 쉬지 않고 숨을 물아 쉬고 메스꺼워 했다.
7시 15분 열은 40.5도
8시 25분 열은 섭씨 41도. 숨이 가쁘다. 나는 에디스를 팔에 안고 전에 낮잠 재울 때 하던 것처럼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훨씬 조용히 숨을 쉰다. 만족한 것 같아 보인다. 아이의 얼굴은 평화스러워졌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크게 뜬눈으로 엄마를 보면서 이 작은 영혼은 이렇게 떠나갔다.
오후 8시 40뷴. 에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닥터 홀이 우리 곁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신 보석 같이 귀한 에디스가 평양의 새 집에 정착하기도 전에 우리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디스를 데려갔다고 하자 그의 오빠 네 살배기 셔우드는 첫 마디에 말했다.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장미꽃들을 관 위에 얹고 아펜셀러 목사님은 성경을 읽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리고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 에디스는 지금 아빠 품에 안겨 잠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가족의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타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곳이 아직 천국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그 갈증을 해갈할 영생수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목마름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적극적으로 이 땅에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사역 속에 영적 해갈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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