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유대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끓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인데 분노와 살의가 번득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이유를 알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위험한 생각을 지적해 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빠질 수 있는 신앙에서의 위험 요소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은 긍휼이 담긴 마음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긍휼이 있는 안식일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신앙인 사이의 갈등을 만납니다.
우리는 우선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만납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 제자들의 다른 신앙을 만납니다. 저들은 유전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양, 시장하자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습니다. 저들은 외형상으로 볼 때, 유대인이었으면서도 그 조상들의 유전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처럼 이삭을 따서 비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알았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실수를 했다고 꾸중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안식일관에 대하여 잘못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때마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1)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14)
살의가 번득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넘치는 이 분노와 살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앙인의 마음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분노란 독을 바리새인들에게서 만납니다.
바리새인들의 내적 분노는 자기 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을 긍정적으로 볼 때, 참 귀한 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한 가지라도 더 잘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좀더 잘 지키기 위한 유대인의 유전(미쉬나)으로 안식일에 대한 규정만 39종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 죄요,
이삭을 손에 비비는 것은 타작 죄요,
이삭을 먹는 것은 노동 죄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넘어 자기 義가 되고 있고, 그것이 남을 정죄하는 분노로 폭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식일 속에는 창조를 완성하고 복되게 하고 안식하신 날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은 참 안식일, 곧 하나님의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 즉 구원의 완성으로서의 의미, 즉 재창조하신 날의 그림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그들 중에 오셔서 완성하시길 원하신 안식일은 구원을 완성하신 그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기뻐해야 할 잔치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안식일 성수에 대해 알려주시기 원하셨던 마음을 위클리프 주석에서는 이런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1] 마 12:3,4
(3)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다윗과 진설병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삼상 21:1- 6). 하나님의 율법이 진설병을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제한했지만(레 24:9), 인간이 극도로 굶주렸을 경우에는 이 규정을 파기하였으며, 랍비들도 이것을 예외로 이해하였습니다. 가장 엄격해 보이는 이 제사법 속에도 안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긍휼이 넘치고 있습니다.
2] 마 12:5,6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두 번 째, 제사장들은 직무상 성전 안에서 일을 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민 28:9, 10). 제사장들은 성전 예배를 집행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일을 하여도 정죄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가리키는 본체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은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안식일을 활용한 사건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3] 마 12:7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세 번 째 논점은, 호세아 6:6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십니다(마 9:13).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의 사랑과 자비를 찾으십니다. 만일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었다면, 제자들을 비판하기 보다 그들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법을 지키기 위해 법이 존재하는 목적인 인간을 희생하여서는 안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법을 지켜나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노는 Life Quality time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Anger가 우리 자아를 Control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분노 연구가들이 말합니다.
자기가 최고란 생각을 끊어버리라고
이런 사람 안에 내적 분노가 불씨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다가 기회 있으면 이 불씨가 폭발하는 때가 옵니다.
화가 나면 혈압이 오르고 정신적인 상처를 입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 쉬고 화날 때 떠오르는 말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큰 일을 생각하십시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긍휼이란 큰 주제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 안에 조그만 자기 의가 하나님의 크신 긍휼보다 커 보일 때,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분노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에 가득하여 형제에게 돌을 던지는 안식일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안식일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2. 선악간 시비도 긍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9)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선이 악보다 우월합니다. 옳은 것이 그른 것보다 우월한 도덕 개념인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을 앞에 두고 선악의 시비를 한다면, 잔인한 일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보고 안식일이니까 구해 내야 하는가 그냥 죽도록 내 버려 두어야 하는가 하는 시비는 무용한 짓입니다. 누구나 양을 살려놓고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 날에 합당하고 행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잔인한 덫의 제물이 되어 예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보고서 그리스도께 제시한 악의가 담긴 질문을 보십시오.
(10)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우리는 본문에서 이 불쌍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병 고침을 위한 어떤 청원을 했다는 기록을 읽지 못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를 송사하기 위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선악을 나누는 것이 이렇게도 소중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시비를 가리려드는 저들 앞에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십니다.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에 사람들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 짐승의 생명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옳다"
바리새인들이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보고 화를 낼 것을 미리 아시고서도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13절) : 공격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긍휼이란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선을 행할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내밀라.
그는 그렇게 하였고 손이 회복되어 성해졌습니다.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도로 하나님께 손을 내밀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손을 내밀도록 명령하십니다. 사실 이 사람은 그의 마른손을 자기 스스로 내밀 수 없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기도할 수 없을 지라도, 믿을 수 없을지라도 나의 마른손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내미는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 안에서 아멘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에는 그 말씀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박사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45분 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을 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쳐"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우리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다.
첫째,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사셨다. 장기려 박사는 1947년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하고 시작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였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다. 자신이 칭송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다.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했다. 학교와 연예계와 복권계에서는 물론 목사님 세계에서도 ‘성적 순’으로 자리 매김하는 오늘의 세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겸손한 분이었다.
둘째,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사셨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의 삶의 목적은 나눔과 베풂이었다. 그는 자기를 주인이나 소유주로 간주하지 않았고 종이나 청지기로 간주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수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그는 스스로 가난해 지므로 사람들의 삶을 부요케 만들어 주었다. 그는 자본주의적 물질만능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사례와 대우를 더 많이 받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오늘의 세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난한 분이었다.
셋째, 사람들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셨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는 명절 때 거지에게 10만원 짜리 수표를 주기도 했는데, 10만원 짜리 수표를 소지한 어떤 거지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그의 사랑 실천의 삶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이상규교수는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고 표현했다. 사모님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 그는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씨와 5자녀를 북한에 두고 월남한 후 45년 동안 아내를 그리며 홀로 살았다. 재혼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다. 사랑이 점점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되어가는 오늘의 세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실천한 분이었다. 그는 춘원이 지적한대로 ‘성인이 아니면 바보’였다. 썰렁하고 차가운 바람만 부는 이 겨울에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그분을 그리워한다.(글: 김명혁 목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으로 마음이 산란한 분은 없으십니까? 무엇이 옳다는 자신의 주관 때문에 남을 정죄하고 스스로 시험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바라보시고 판단하는 마음을 접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신 나의 마른손을 주님을 향해 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내 마음을 주님을 향해 여실 수 있기 바랍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 메마른 심령을 펴주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14-21)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마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8)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22)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그들은 격분하여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아주 무력한 사람들이 보통 사용하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는 자신의 규칙에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상한 갈대라도 꺾어지거나 밟히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아 백향목이나 번성하는 종려나무처럼 강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 불 붙여진 심지가 연기만 낼 뿐 타지 않을지라도 꺼뜨려지지 않고 오히려 돋구어질 것입니다.
저는 이번 한주간 고국을 다녀오면서 우리민족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0여년 전의 우리 민족이 얼마나 곤고한 처지에 있었습니까?
국모인 민비가 그 궁궐에서 살해를 당하고, 온 백성들이 기아선상에서 굶주리던 시절이 얼마전까지의 일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쌍한 백성을 하나님,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고국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축복을 받은 국민들이 얼마나 친절한지 모릅니다. 서울이 너무나 변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버스비가 얼마인지, 전화를 얼마를 주고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바쁜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그러나 어느 한 사람 불친절한 사람이 없습니다. 비행기 승무원들도 그렇게 여유가 있고 친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신 가장 큰 축복은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고국에 가면 양화진에 가 보리라 벼르던 차에 저는 이번 여행에서 양화진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내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이 잠들어 있는 그 동산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좋은 도서를 두 차례에 걸쳐서 기증하신 바 있는 임번삼 박사님께서 저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셀러 제임스 홀 선교사님 등의 묘비를 지나면서 감회가 컸습니다.
이분들은 당시 미국 대통령을 해도 잘 해낼 수 있었던 빼어난 인격과 신앙을 갖추신 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귀한 분들을 우리나라에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컸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신 예입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우리 말로 번역된 나라는 우리 민족이 유일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목베어 죽임을 당할 때, 그가 던져준 성경이 벌써 우리말로 번역된 조선어 성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우리 대한민국이 제3세계를 긍휼히 여기는 선교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세계선교 2강이란 명예에 부끄럽지 않게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500만 디아스포라 된 Korean 들 중에 세워진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교지의 선봉에 세워주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 가서 언어 훈련을 받기 위해 몇 년 씩을 소비하는데 우리는 삶의 현장이 바로 선교 훈련장입니다.
최영철 목사님이 베트남에 다녀 오셔서 이인호 선교사님께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미국에서 20년간 세탁업에 종사하신 분이십니다. 57세에 은퇴하셔서 65세가 되도록 베트남을 누비면서 선교에 열중하고 계십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잡혀갈 때마다 그는 월남이 좋아서 와서 사는데 왜 이리 귀찮게 하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선교한다고 해요. 나이든 사람을 예우하는 그곳 정서와 합하여 지금도 선교에 전심을 기울이는 그분은 베트남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있는 줄 압니다.
마무리하는 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진행하십시오.
선악간 시비를 잘 가려 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진행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이시라도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십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법에 맞지 않을 지라도, 선악간에 옳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것이 상한 갈대이기 때문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이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 심장에 늘 간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대 앞에서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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