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께 풍성한 은혜를 다 받은 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왕 중 왕으로 우리 땅에 오셨을지라도 세상은 그분을 왕으로 맞아 그 통치 아래서 은혜를 누리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왕답게 다스리셨습니다. 왕권에 대한 어떤 도전도 잘 다스리셨습니다.
위어스비는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선지자에 대한 반역, 권능에 대한 반역, 신분에 대한 반역이란 흥미 있는 제목을 설정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을 보면서 참 귀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받은 지혜를 조금 활용하여 '반역을 다스리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란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바리새인 안에서처럼 끊임없이 일어나는 반역을 접고 주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능력에 대한 반역을 다스리셨습니다.
[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왕 중 왕으로 우리 땅에 오셨을 때, 귀신이 들려 벙어리 되고 소경 된 장애인이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놀랍게도 이 모든 장애 문제가 한 순간 해결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엔 즉시 한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이분은 메시아다!'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이 복이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우리를 찾아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장애를 넉넉히 온전케 하실 능력이 있으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자기가 강하고 뭔가 내게 있다고 생각한 사람일수록 그런 복을 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장애인의 고통을 극복하신 것을 듣는 순간 저들의 마음속엔 다른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바알세불'이란 '귀신들의 왕'를 뜻합니다. 정말 못말리는 사람들입니다. 많고 많은 생각 가운데 어떻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구나'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 악담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무서운 마음이 우리 안에 없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거예요.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엉뚱한 반역이 있음을 아시고 그 반역을 치료해주시기 시작하십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1] 스스로 분쟁하겠느냐 물으십니다. 귀신이 그렇게 멍청한 줄 아느냐는 말씀이지요. 사탄이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온전하였던 아담과 이브까지 그들의 전략대로 타락하게 한 영적 전쟁에 천재 아닙니까? 그들이 어떻게 적인지 동지인 줄도 모르고 서로 싸우다 자멸하겠습니까? 귀신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지요.
2] '너희 아들들'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리새인들의 제자들도 이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막9:38;19:13). 그들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힘으로 쫓아내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말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임을 분명히 하시고(28절), 그렇다면 이미 귀신의 나라를 제어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므로 귀신의 세력은 더 이상 예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적대감을 품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적대감은 바른 판단을 마비시킵니다. 메시야적 권능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라고 모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적대감입니다. 누구에겐가 우리가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모독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입술의 죄가 아니라 마음의 죄입니다(34-35절).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았는데도 주님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적인 죄였고, 지속적인 불신앙이며, 결정적인 거부였습니다. (위어스비) 간음이나 살인은 무서운 죄이지만 회개할 때,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악의적으로 거절하면 때는 늦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말을 전해들으시고 '이 말은 사단이 스스로 싸우고 있다는 의미'라고 저들의 생각을 반론하신 다음 '귀신들의 지도자 사단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귀신들을 내쫓을 수 없다'고 깨우쳐주셨습니다.
그 불쌍한 장애인을 치료하시는 때, 주님께서는 사단을 정복하고 이루신 일입니다.
이적은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어 눈멀고 귀머거리 된 환자를 온전케 하신 이적은 평범한 사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반역하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반역이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유주의자들이 이적에 대하여 반역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의 반역을 치료하기 원하십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우리 믿는 자들에게 이런 분쟁과 황폐가 사라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선지직분에 대한 반역을 다스리셨습니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입니다(출 4:16, 7: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이르신다)](사1:24, 렘1:15, 암 1:3 기타)고 백성에게 신의(神意)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지 직분을 이 땅에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면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묻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해인 중 몇 사람은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합니다. 참 선지자에 대한 반역을 종교지도자들의 말속에서 다시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조금 전에 벙어리 되고 소경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끝이 없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확실히 증거하는 초자연적인 표적을 행하기를 바랐습니다. 지금까지 본 표적들이 참 표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모든 놀라운 이적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행했다 생각하고 또 다른 메시아의 표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증하고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께 심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F. F. Bruce).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모든 기적이 있었습니다.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가능했습니다. 이 사실을 신뢰하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단호한 말씀으로 선지자에 대한 반역을 나무라십니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악하고 음란한 세대'란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우상 숭배를 통해 영적으로 간음했던 태도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메시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음란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혼인 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A. Plummer).
신부된 교회는 순결함을 가지고 신랑을 맞아야 합니다(고후11:2;계21:2,9). 우리 성도들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신부의 자세로 정결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신 반역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의 표적을 약속하십니다. 곧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가 경험했던 물고기 뱃속의 3일간과 예수가 십자가 죽음 이후에 겪으실 무덤 속 사흘 간을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을 십자가 죽으심의 모형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요나는 삼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다가 살림을 받은 그 사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능력 있는 선지자입니다. 이방인을 위해 쓰임을 받은 특별한 사자였습니다. 다만 그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방국가는 꿈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앗수르였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누고 싶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준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백성들을 구원하는데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요나보다 위대하십니다.
신분이 위대하십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순종이 위대하셨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입니다.
헌신인 위대하십니다. 억지로가 아닌 즐겨 몸을 주셨습니다
사랑에서 위대하십니다. 온 인류와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에서 위대하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메시지에 있어서 더 위대하십니다. 주님은 심판이 임할 것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원을 길을 전하셨고 그런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에 대한 반역의 부당함을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시대의 시바여왕과 비교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솔로몬왕 시대에 먼 남방에서 지혜의 말씀을 들으러 온 이방인 스바 여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능가하시는 분이십니다(11:27-30;고전1:2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솔로몬과는 비교를 할 수없으신 메시아께서 그들을 찾아와 전하는 지혜와 복음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심판 때에 시바 여왕은 이 사악하며 지혜를 찾지 않는 자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3. 성전회복을 원하셨습니다.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종교지도자들의 완악함 속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대한 반역을 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님께서는 성전회복을 원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주거(거처)]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지상적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멀리 세계의 각지에 이산(離散)되는 운명에 처하면서도, 계속 그 심령은 강하게 성전에 연결되어져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성전은 [여호와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겔 48:35)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이 구현되는 장소이고, 하늘과 땅이 접하는 곳, 즉 야곱이 말하는 [하늘의 문]이었습니다(창 28:17).
예수님께서는 성전회복을 위해 왕권을 사용하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 복을 받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장사하는 자들의 소굴로 된 것에 분노하셔서 채찍을 드신 적이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우상 숭배를 조장하던 귀신이 쫓겨 나고 성전은 회복되었으나 그 이후에 이스라엘이 바리새인의 형식주의가 주도하는 시대에 접어들므로 더욱 좋지 않은 상황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H. Alford).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케코스메메논(kekosmhmevnon)이란 '질서 있고 조화롭게 장식되었다'는 뜻으로서 인간의 마음을 집으로 비유하여 실내장식을 마친 상태를 뜻합니다. 그 "집"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비어 있었습니다. 완료분사형인 것은 정리와 장식이 이미 마쳐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패한 귀신이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 성전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었습니다(A. Clarke). 율법의 본뜻을 잊어버리고 외적 형식주의에 치중한 바리새파가 포로 귀환 후에 발홍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적인 형식주의로 장식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F. F. Bruce). 500년이 지난 오늘 복음서에서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 민족은 주님의 메시지와 주님의 사역을 반역하고 있습니다. 참 성전이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역하려 하고 있습니다.
소제되고 수리된 성전에 더 악한 귀신을 데려온 셈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각 개인에게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바리새적인 형식주의는 오늘날도 우리의 교회와 우리들 자시 가운데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통이 오랜 교회나 오래 전에 믿게 된 개인들은 타성에 젖은 신앙 생활로 인해 형식적인 면만을 강조하게 되어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돌아온 악한 귀신은 이전보다 훨씬 거하기 좋아진 상태를 보고 더욱 가공할 만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11장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모두"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12:46-50) "누구든지"라는 단어를 유념하십시오.
누구든지 이 초청에 응하시면,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한나가 성전에서 기도함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된 장애인이 복을 받았습니다.
성전이어야 할 바리새인들의 마음 가운데 더러운 시기 질투가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하셨을 때,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복을 받는 역사가 계속되길 원하십니다.
마무리하는 말
이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족이 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하니 [48]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입니다. '누이들'(호이 아델포이,13:36)도 둘 이상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5남 2녀 이상의 자녀들로 구성된 대가족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 요셉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요셉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설에도 요셉은 예수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어서 장남이었던 예수가 목수의 가업을 일찌감치 물려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가정의 장남으로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한 가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찾아온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 중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5)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막3:21,31)을 따르면 가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여기며 붙들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한편 가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그릇된 판단에 합세함으로써 당시 예수님의 입장이 매우 심각한 것이었음을 볼 수도 있습니다.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가 가정과 인간적인 생활에 대해 초연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질문은 진리를 고조하기 위한 도입 말씀입니다.(F. F. Bruce)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예수의 가족이라는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아우토스'는 '오로지 그만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R. Lenski). 예수님의 원 의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족이 됨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는 놀라운 이적이 있으십니다. 능력이 있으세요. 우리가 이에 대하여 반역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놀라운 이적이 우리의 삶에 나타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는 요나도 솔로몬도 넘보지 못할 참 선지직분이 있으십니다. 요나만 만나도 니느웨 백성은 구원을 얻었고 솔로몬만 만나도 시바여왕은 지혜를 얻었습니다.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보세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보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전회복은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얻을 수 없는 성전회복이 있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에 온전히 속하셔서 그분의 왕권을 온전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가족만이 누릴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참고 예화]
찬송가 432장을 지은 마틴 부부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부인은 중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남편은 간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설교부탁을 받았습니다. 마틴은 거절하려 합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가 설교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빠가 안계시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엄마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엄마는 그 말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즉시 작곡을 하였습니다.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난 어디서나 주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J.C. Penny가 간호사들이 불러 준 이 노래를 듣고 중병에서 일어나 백화점의 거성이 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강철왕 카네기가 어머니의 기도에 힘을 얻어 일어선 이야기들은 언제 들어도 힘이 됩니다.
"Dale, God take care of you"
위 예화는 조봉희 목사님의 설교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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