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1 March 2015

눅13:31,32 작은 것 속에 보배가 있었네

우리는 큰 것을 얻어내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똑같은 그 사람인데,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대접이 달라집니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보다 신령한 교회처럼 생각되는 세상입니다. 
똑같은 그 사람인데, 작은 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이 임지를 조금 큰 교회의 담임하게 되면 낫게 봅니다.
작은 것은 무시되고 큰 것은 대우를 받는 참 재미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라 할 수 있는 겨자씨를 알려주시고 천국의 원리가 이 가장 작은 씨앗 속에 담겨 있음을 교훈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 이 작은 겨자씨의 성장과정 속에 담겨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작은 것 속에 보화가 있었네'란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 비유에 관한 말씀을 듣는 일을 통해서 작은 겨자씨에 담긴 천국비밀을 깨달으실 수 있기 원합니다.


 1. 작은 것에 소중한 것을 담아두셨습니다.

본문에서 겨자씨로 불리우는 씨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씨는 맵고 향기로워 약재나 양념으로 쓰입니다.  그 특징은 매우 작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습니다. 이것은 여러 식물의 씨앗 중 유난히 작은 씨앗이기 때문에 '겨자씨같이 작은'이라는 유대인의 경구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Alfred Flummer).
  겨자씨가 분명 작은 씨인 것은 사실입니다. 태생이 작거든요. 그러나 작다고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작지만, 실패한 씨 같지만, 그 씨는 주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데 이용될 만큼 비밀을 그 내면에 지니고 있습니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소중히 보고 계십니다. 
토인비란 역사학자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중추세력은 창조적 소수"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조봉희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부동산 크기에 달려 있지 않고 소수가 품고 있는 거시적 비젼에 위력이 달려 있다'
작은 것 속에 창조적인 무엇!이 담겨 있을 때, 그 소수만이 품을 수 있는 작은 것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크기만으로 작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작게 보인다고 창조적인 가능성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마엘의 낭패는 아기 이삭을 작게 본 것입니다. 그의 잘못된 판단이 자신과 그 모친 하갈의 삶을 곤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까지 큰 고통 가운데 빠뜨렸습니다. 이삭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인 가능성,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크게 실수한 것이 어린 요셉을 작게 본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작은 자였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윗의 형들도 다윗을 작게 보았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작게 보았다가 사망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사실은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어린 다윗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작게 보았습니다. 그 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작게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 큰 낭패를 맛본 것입니다.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큰 것이 축복이란 사고(思考)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작은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세속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작은 것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소홀히 합니다. 
대신 큰 것에 대하여 지나친 동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자가 붙으면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 처럼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길도 대로(大路)란 말쓰기를 좋아합니다. 올림픽대로 합니다.
다리도 대교(大橋)란 말을 쓰기 좋아합니다. 한강대교, 영동대교 이렇습니다. 그러나 무너지니 그 부끄러움이 말로할 수 없습니다.
성공을 해도 대성(大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작은 성공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는데 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장로교, 감리고, 순복음 교회 할 것 없이 다 한국에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만 있었을 때도 한국 교회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큰 교회가 많은 요즈음 기독교는 오히려 도전을 거세게 받고 있습니다.

가난한 청년이 열심히 돈을 모아 7순이 된 어머님을 모시고 제주도 관광을 나섰습니다. 특급호텔에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호텔에서 쫓겨났답니다. 그 어머니나 그 청년의 외모가 너무 남루하여 호텔에 어울리지 않으니 나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제주도에서 특별한 호텔이라 하더라도 사람보다 귀할 수 있습니까?

이곳 캐나다 시골에서 우리가 만나는 교회 모습은 상당히 흥미가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Niagara on the Lake이란 마을로 가는 길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라 불리우는 교회가 있습니다. 네 사람 정도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는 강대상이 갖추어진 교회입니다. 이렇게 까지 작지는 않지만 캐나다 시골을 가면서 조그만 교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전자와 사고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최고라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자라난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를 자랑하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한국 방문 때의 얘기입니다. 강남 생명의 말씀사에서 책을 몇 권 구입하고, 시장하여 그 앞 지하도에서 간단한 점심을 마쳤습니다. 얼마의 잔돈을 돌려줍니다. 그걸 팁이라 생각하고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은 음식점 주인이 '이게 뭐예요?' 합니다. 적다는 것 때문에 그분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돈의 액수보다 주는 사람의 마음을 소중히 했더라면 싶은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적은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 속에도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새벽예배에는 적은 무리가 모입니다.
교사들을 위한 1부 예배에도 적은 수의 성도가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수요 예배에도 주일 예배보다 많지 않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원하느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어느 예배나 있습니다. 새벽 예배는 새벽예배대로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은혜가 있습니다. 수요 예배는 수요예배대로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은혜가 있습니다. 찬양대도 없고, 사람도 많이 않지만 예배 중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쪽 캐나다 사람들은 몇 Cent를 매우 소중하게 사용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Gas를 넣으러 가면 Gas Station에서도 몇 센트 전쟁을 합니다. 소비자도 몇 센트 더 싼 곳, 더 싼 시기를 염두에 두고 개스를 넣습니다. 작은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 한민족은 작은 것을 잘 만드는 은사를 가졌습니다. 
요즈음 반도체나 핸드폰 등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작은 것 속에 답이 있습니다. 미래 기술은 작은 것에 달려 있습니다. 작은 것을 얼마나 작게 잘 만드느냐에 승부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를 소중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은 참 작은 자입니다. 그 300명의 용사는 참 작아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소중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작은 것 속에 담아두셨습니다.

가장 크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기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들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작은 자들인 갈릴리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소외당한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 소외당한 수가성 여인을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기 손에 들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라 명하셨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것으로 맡기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과부의 두렙돈은 작은 돈이지만 칭찬하셨습니다. 그 작은 것을 주님은 귀히 보시는 것입니다. 너무 작아서 사람의 눈에도 잘 띄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바로 그곳에 담겨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작은 믿음을 주님은 소중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세상이 보기에는 바로 작은 겨자씨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자였을 때,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받침대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큰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 위에 서 있는 우리를 크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주변의 작은 존재를 크게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 작은 자 안에 담아두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국이 데인족(바이킹과 같은)에게 처참한 침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엔 알프레드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백방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지만 오히려 해적들에게 패하여 백성들 틈에서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양치기 아저씨는 그분을 존경했습니다. 그를 숨겨주게 되면 자기에게 위태한 것을 알면서도 왕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깍듯이 섬겼습니다. 다만 입이 좀 헤푼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 양치기 아내가 어느 날 과자를 굽도록 명령을 하고 집을 나갔다가 왔더니 딴 생각에 골몰한 왕이 새까맣게 태워 놓았습니다. 화가 난 그녀는 부지깽이로 그 왕을 후려쳤습니다.
그녀에게 알프레드 왕은 과자 몇 개를 굽지 못하는 "늙어빠진 게으름뱅이!"였을 뿐입니다.
그날 무지한 자기 아내로 인하여 얼굴이 파랗게 질린 양치기 아저씨는 훗날 뜻을 이룬 왕의 부름을 받아 영국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양치기하는 사람이었지만 작게 된 알프레드를 크게 생각하고 섬겼을 때, 그는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겨자씨와 같은 작은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겨자씨와 같이 작은 자 속에 천국의 비밀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겨자씨 같이 작아 보이는 그 대상 속에 천국이 어떻게 왕성하게 이루어져 가게 되는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2.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됩니다(32a절)

겨자씨가 소중한 까닭은 작은 그대로 있지 않고, 그 작은 데서 움이 돋고, 싹이 나기 때문입니다.
저 작은 씨에서 나물만큼이나 자라랴 싶은데 쑥쑥 자라더니 나물보다 더 큽니다. 
그리고 이내 3-4m의 큰 나무로 자랍니다. 
겨자씨 안에 하나님이 두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겨자씨 안에 두신 생명의 비밀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황금이 값이 나가도 자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겨자씨는 자랍니다.

오늘 전도서 9장 4절을 보니,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 속에도 소중한 것을 담아 두셨습니다. 복숭아씨는 참 큽니다. 겨자씨는 작습니다. 그러나 큰 씨나 작은 씨나 거기서 자라난 나무는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류 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져 갈 것인가를 알려 주십니다.
그 원리는 자라간다는 법칙입니다. 천국 복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라온 역사를 살피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유대의 아주 작은 마을, 겨자씨와 같이 극히 적은 무리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는 자라서 온 세계를 품게까지 되었습니다.
우리 고국을 봅시다. 언더우드 목사님과 아펜셀러 목사님이 조선 땅을 밟았을 때, 기독교 교세란 거의 존재가 없었습니다. 겨자씨만하다고 하는 것이 좋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작은 씨들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움이 돋게 하셨고 싹이 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크게 교세를 키우셨습니다. 우리 한국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왔을 때, 사소한 사람들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정말 큰 거목으로 자라났습니다.

크리스쳔 월드란 신문사에서 감사절에 올릴 글 한편을 써달라는 부탁이 왔습니다.
그 동안 정리한 홀 선교사 가문의 이야기 '조선회상'을 간단히 요약 정리하였습니다.
그 아들 셔우드 홀 선교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들 닥터 셔우드 홀과 그 부인 닥터 메리안 홀 선교사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도 젊은 나이에 천국 가고
그 어린 동생 에디스까지 애처롭게 죽어간 조선 땅인데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 생으로 신고되었다.

그가 조선 땅에서 자란 후
미국과 캐나다의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의사 수업을 마치고
부인 의료 선교사 메리안 홀까지 데리고 다시 조선에 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무슨 권한으로 아내를 이런 벽지로 끌고 와 '고통'을 받게 하는가!

그러나 그는 황해도 해주 땅까지 왔고
1933년,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조선의 폐결핵과 싸울 구세 요양원을 처음 세운다.

믿음의 사람들 바다 건너서 헌금을 보내오고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 될성싶지 않던 '크리스마스 실'을 이끌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실' 운동, 성공시켰으니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복음의 텃밭 되었으랴!

불쌍한 민족 사랑한 것도 죄라고
강점한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2대에 걸쳐 희생으로 믿음을 표현한 홀 선교사 가문
박해 속에서도 의롭게 썩은 기독교의 밀알이었기에
비웃어도 30배로
시달려도 60배로
죽여도 100배로 결실을 얻어
선교 대상국이었던 이 나라가
오늘날 그 조선은 선교 강국이 되었으니

하늘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땅에서 당신 가문에 감사를 올립니다.

세계가 작게 본 조선을 그들은 크게 보았을 뿐만 아니라 위해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 기독교는 자랐습니다. 선교 대국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 자라는 방법은 점진적이어서 그렇지 하나님 나라는 자랍니다.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가 무르익습니다."(막4:27-28)

위로가 자라는 것을 보니 신기합니다. 11월 생이다 보니 늘 그 반에서 작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키가 자라는 것을 보니 자고 나면 자랍니다. 엄마 키를 넘어섰습니다. 이대로 자라면 내년이면 나를 추월할 것 같은 기세입니다. 
그러나 점진적입니다. 삼손도 약한 어린이였습니다. 자랐을 뿐입니다. 거목도 움이 돋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단번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다가옵니다. 얼른 자라지 않을지라도 초조하지 말고 물을 주고 가꾸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심은 자가 있고, 물을 준 자가 다를지라도 자라게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서서히 자랄지라도 자라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좋은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자라게 하십니다.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 공중의 새가 깃들게 됩니다.  (32절)

겨자씨는 제대로 자라게 되면 3-4m까지도 자랍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보금자리를 틀거나 쉬어갈 수 있는 나무가 되지요. 이 겨자나무에는 검은 방울새와 홍방울 새가 떼를 지어 깃드는 것이 일반이라고 합니다(pulpit). '깃들다'(카타스케눈)라는 말은 거처를 정한다는 말이요 그곳에서 둥지를 틀고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믿고 자라서 새들이 깃들 수 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힘들고 가난한 자들이 깃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서 길 잃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기까지 자란다는 의미입니다. 지치고 가난한 자들이 우리 신앙인들 곁에서 힘을 얻을 수 있기까지 자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강도와 같은 죄인들이 그분 안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니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는 일은 바른 도리입니다.
요셉이 겨자씨와 같이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하셔서 잎을 무성하게 하시니 온 애굽 사람들과 주변의 나라 백성들이 그의 가지에 깃들어 쉼을 얻고 굶주림을 해결하였습니다. 그를 무시했던 형님들이 그를 찾아와서 복을 맏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쉬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고 평화를 누리고 영생의 복을 누리는 지 모릅니다.
갈릴리 마을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역사를 두고 계속 많이 자라났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의 안식처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쉬임을 얻고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승동교회 박 상훈 목사님이 들려준 예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어떤 마을에 할아버지 한 분이 놀이터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아이들이 놀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청년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아가씨, 어떻게 하면 아가씨와 결혼할 수 있나요?"
그 아가씨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말 두 마리와 소 다섯 마리를 가져오시면 됩니다."
청년은 너무 기뻤습니다. 가능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 같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열심히 일했으나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를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늙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원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 그것 답이 간단합니다. '두 말 말고 오소'란 의미예요?
이를 들은 할아버지는 땅을 쳤답니다

자신이 너무 작다고 자학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소 다섯 마리와 말 두 마리를 더 갖추기 위해 한 평생을 다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수고하나
주님께서는 두말 말고 오라 하십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작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은 귀히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한 것처럼 작은 이웃도 하나님께서는 귀히 보십니다.
하나님께는 작은 우리를 겨자나무와 같이 기르시고 공중의 나는 새와 같이 이 세상에서 피곤하고 주린 새들과 같은 이웃의 심령을 해갈시키시고 그 굶주림을 채우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쁨으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겨자씨처럼 작을지라도 하나님께 심겨져서 하나님의 시(詩가)되고 멜로디가 되고 하나님의 그림이 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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