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1 March 2015

마5:21-26 형제와 화목하라

들어가는 말

형제는 성경에 약 1천 번(976) 나옵니다. 육친의 형제, 동족 동포, 친한 동무, 그리스도인 상호간입니다.
토론토가 '만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필라델피아는 '형제 사랑(Brotherly love)'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서로] 사랑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요일 3:23),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요일 4:12). 이 지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는 것은 주안에서 신자 서로가 화목하는 일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형제 화목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1. 우리 인간은 누구나 욕먹을 약점이 있습니다.

형제가 욕먹는 경우는 두 경우입니다.
1] 하나는 정말 욕먹을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욕먹을 짓을 하니까 욕을 한다. 참 간단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기서 끝입니다.

2] 또다른 경우는 욕하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각차에서 오는 오해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결과는 세가지로 나타납니다.
1] 노합니다.
2] 욕을 합니다.
3] 미련한 놈이라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화내고 '라가' 혹은 '미련한 놈'이라고 형제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은 혀로써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라가'는 보통 경멸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 뜻은 '이 멍청한 녀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에 대하여 멍청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멍청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아무리 이러한 죄들을 가볍게 여길지라도 그 죄들은 반드시 헤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가 있는 비난과 비방은 은밀하게 그리고 서서히 죽이는 '혀 아래 감추인 독'입니다.

형제에 대한 이런 행위의 위험에 대하여 지난주간에 만난 황 목사님과의 좋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

만남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T기도원에 갔다가 황 디모데 목사님을 만났다. 그분은 10여년이나 다른 시간대와 다른 장소에서 살아오셨다. 그렇지만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우리는 한 때, '성서 한국 세계 선교'를 모토로 외치는 학생 선교단체에 몸담았다. 그 단체에서 나온 지금은 목회를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하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특기할 점은 목회 스타일이다. 처음 목회지인데 그라고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러나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우려를 잠재우고 보름이 아닌 수년 동안을 단 한번도 낯붉히지 않고 행복한 목회를 하고 계신다. 그 비밀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쓴다. 낯붉히지 않고 목회를 감당할 수 있는 해법이 있는가?
'저는 상대가 감당할만한 사람이라면 그 잘못된 관점과 지식을 시정해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그 사람의 자존심이 걸린, 그리고 그 사람을 지탱해주는 나와 다른 그 지식을 그냥 살려두기로 했습니다.'(황 디모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선 학창 시절 교육 심리학 S교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림이 생각했다. 이 그림은 무엇입니까 하여 가만히 들여다보니 할머니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다른 학생이 이 그림은 할머니의 그림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이라고 했다. 그렇게 보니 정말 그랬다. 참 흥미 있는 그림이었다. 같은 그림인데 할머니로 본 사람이 있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본 사람이 있다니. 할머니로 본 내 눈에도 아름다운 여인으로도 보인다니 참 유쾌한 일이었다.
이어서 교수님께선 다른 그림 하나를 보여 주셨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어떤 학생이 고대 신전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학생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는 얼굴이라고 했다. 똑 같은 그림이 신전 대리석 기둥으로 보이기도 하고, 두 사람의 마주보는 얼굴로 보일 수도 있다니........   .
다음은 황목사님의 체험담이다. 교수님께서 글자판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글짜판을 바라보던 어떤 학생이 'reality!'라고 읽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편에 있던 학생이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그는 'fantasy!'라 읽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읽은 내용이 사실이라고 강변한다. 팽팽한 자기 주장들이 무성할 때, 교수님은 상대편에게 각도를 바꾸어 글자를 보여 준다. 놀랍게도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다. 각도를 바꾸어 보니까 상대편이 말한 그 글자로 보였던 것이다. 'reality'로 읽었던 학생의 눈에 'fantasy'로 보였던 것이다. 'fantasy'로 읽었던 학생의 눈에 'reality'란 단어가 선명히 비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내가 느꼈던 감정은 절대적일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에 그렇게 옳게 확신이 되는 그 관점은 정말 옳은가?
상대편이 본 관점은 당신에게 무가치한 것인가?
그 사람 눈 높이에서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평가하는가?
어떤 사람이 틀린 지식을 가지고 강하게 주장할 때, 그 주장이 틀렸다고 매정하게 그를 무시해버릴 만큼 당신의 관점은 완벽한가?

빌2장을 읽어가노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비우셨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understanding 하셨을까? 그분이 understanding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누구나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마리아 여인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도.  그분 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의 삶에 예수님과의 공감대(empathy)가 이내 형성되고 그 다음에는 그분이 어떤 말을 해도 듣게 되지 않았을까?  당사자의 아픔이 예수님의 눈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한컴사전에서 '듣다'란 단어를 찾아 본다. 'To hear; to listen'만 적혀 있는 게 아니다. 'to obey; to understand'로도 적혀 있다.

나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힘들어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해법을 생각해 본다.


어떤 경우에도 노하고 욕하고 미련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면 안됩니다.

(마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화를 낸다는 건 내가 심판 주가 되는 것이요.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나는 형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높은 위치에 서서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1l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2] 공회에 잡힌다고 말씀하십니다.
3]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2. 주님께서는 화내고, 욕하고 돌로 치는 대신 그 형제의 약점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는 천국백성인 우리는 형제의 약점을 인하여 화내고, 욕하고, 무시하면 안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때는
우리가 경건치 못한 자였을 때입니다.
여기 100여년 전 우리를 찾아와 생애를 바쳤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 한편을 소개합니다.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오 주여, 지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로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도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된 북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너무나 큰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소망 없는 땅 선교지를 도와야 하는가 하는 고민하는 분이 많습니다. 지난주간에 김성일 선교사로부터 온 편지를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읽으셨습니까? 고민스럽습니다. 저 역시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많은 갈등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북한이 도움받을 만한 일을 해야 돕겠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도우실 때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일을 했기에 찾아와서 십자가의 사랑을 주신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욕먹을 짓을 하는 대상들을 보면, 정말 도와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돕고 이해하는 대신 유황불을 내려서 심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황불을 내리는 대신 외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는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물론 돕는 방법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 옥수수로 후원한다는 방법 같은 것은 좋은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3. 성도의 우선 순위는 화목입니다.

(마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25)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서머나 형제 자매 여러분, 먼저 화목합시다.
어떻게 화목할 수 있습니까?
1] 소금을 두고 화목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4장 50절에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소금의 본질은 잃지 않으나소금은 녹아 없어집니다. , 소금은 간 곳이 없습니다. 그리할 때에 화목이 옵니다. 여러분, 화목하려면 많은 손해옵니다. 나란 존재가 없어져야 합니다. 내 명예고 뭐고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2]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됨이 없습니다(곽선희목사)
3] 그 형제의 약점은 보지 말고 아름다운 점만 보면 가능합니다.
이런 주제를 위해 제가 틈틈이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님의 옆얼굴'(살맛나는 인생)이란 예화지요. 지혜로운 화가는 자기도 살고 임금도 살립니다. 상한 눈을 자꾸 그리지 마세요. 형제에게 잔인한 행위입니다. 온전한 부분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눈을 그려 주십시오.
너죽고 나죽자는 사고는 막가는 세상의 사고입니다. 듣자니까 지난 주간에 대구 참사는 이런 사고의 극이 아닙니까? 기름을 부은 사람의 눈에 내 조국의 부조리가 얼마나 그를 절망으로 몰아 넣었으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일은 그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화목하는 길이 서로 사는 길입니다. 형제의 외눈을 파헤치지 맙시다. 온전한 얼굴을 그리세요. 하나님께서 이 지체를 축복하십니다.

이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우리를 돕기 위해서 찾아온 선교사님들에게 어떻게 하였습니까? 무서운 무시와 욕을 하였습니다.
형제간 화해가 깨질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23,24절).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엄숙하게 나아오기 전에 먼저 가서 그와 화목하라 하십니다.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은 곧 신앙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네 형제와 화목하라는 말씀은 그와 친해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들의 원수이십니다. 살인의 동기가 가인의 경우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 화목은 초대성도들의 특징이었습니다(살전 4:9). 성령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사람들은 형제사랑을 실행하였습니다(살전 4:9).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입고 그분의 사랑에 형제 화목으로 보답했습니다. 그래서 성도 사이에서는 서로, 형제 자매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 및 친구였던 소스데네, 디모데, 디도, 에바브로디도, 두기고, 오네시모 등을 모두 [형제]라 부르고,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를 [자매]라 불렀습니다.  성도상호간에 형제라는 유대감이 점점 강화되어 가면서 신자는, 모두 서로 형제 상호애를 표현하였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하셨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 13:8-10) 하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일입니다. 연합할 수 없는 세상에서 연합하여 동거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133:1-3).

형제들아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1,2)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내가 빛가운데 있는지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지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무엇입니까. 형제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미워하느냐 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2:9-11)


마무리하는 말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먹을 형제가 있거든 이해(understanding)하시기 바랍니다. 공감대(empathy)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을 듣는 동안은 내 마음에 아무 주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기도응답도 없습니다.

화내고, 욕하고, 무시하는 대신 그를 위해 기도하시고, 나아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당신의 말씀은
밝고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정원과도 같습니다.

찾는 모든 사람이 뽑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당신의 말씀은 깊고 깊은 광산입니다.
진기한 보석들이
그것을 찾는 모든 이들을 위해
그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반짝이는 별과 같습니다.
일천 줄기의 빛으로 나그네들을 인도하고
그들의 길을 밝히 비춰줍니다.
당신의 말씀은 병기 창고와 같습니다.
군인들이 무기를 고치는 곳
일생동안의 긴 전쟁을 위해
필요한 모든 무기가 있는 곳

아, 당신의 귀중한 말씀을 사랑하게 하소서
광산을 탐사하게 하소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꽃들을 주어 모으게 하소서
제게 빛을 비취소서
아 그곳에서 나의 갑옷을 찾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은 믿음직한 검
모든 적과 싸울 수 있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주님의 전쟁에서
              에드윈 호더(Sourcebook of Po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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