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와 '아니오'
마5:33-39
(마5: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5:35)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5:36)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5: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백성에겐 소중한 하늘이 있습니다.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보좌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대사는 그분의 보좌 앞에서 꼭 해야할 일이 있고, 또 해서는 안될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겐 소중한 땅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 땅온 살아 계신 하나님의 발등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앞에서 꼭 해야할 일이 있고, 또 해서는 안될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이는 큰 임금, 하나님의 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서 꼭 해야할 일이 있고, 또 해서는 안될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겐 머리가 있습니다. 나는 그 머리를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머리로 꼭 해야할 일이 있고, 또 해서는 안될 말도 있습니다.
나 중심적인 삶에 익숙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합니다. 그분 이름으로 맹세하는 위험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정립할 수 있기 바랍니다.
1. 맹세는 원래 하나님께 속한 성경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언약을 맺으시며 맹세하셨습니다(창 24:7, 신 29:12).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맹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없으므로(히6:13)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히6:13).
자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십니다(시89:13).
자신의 위대한 이름으로 맹세하십니다(렘44:26).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겔33:11).
그리고 그 맹세를 변역(變易)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하여 맹세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들도 하나님의 맹세에 첨여 했습니다.(신6:10-13, 사 48:1, 렘 12: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며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013)
하나님의 맹세를 받은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중대사에 합당한 맹세를 하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며느리를 구해 오도록 종을 하란 땅으로 보내면서 맹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당시 종이 주인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간절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혼은 여호와에 대한 참된 충성의 표요, 주인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였습니다. 종은 하나님과 주인께 충성하는 맹세로 환도뼈 밑에 손을 넣었습니다(창 24:2,47:29).
연약한 자의 구원을 위해 맹세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간음의 혐의로 몰리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불명예를 안고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경우를 당해야 합니다.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자기 몸의 결백을 증명할 때, 여호와 앞에서 맹세할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출 22:11). 피해 당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2. 그러나 죄인들이 맹세를 오용했습니다.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5:35)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5:36)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믿음의 사람들 간에도 이 맹세를 신앙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영토록 계시느니라](삼상20:23, 고후1:23, 빌 1:8, 갈 1:20)
인간들은 자기들보다 더 뛰어난 존재를 가리켜 맹세함으로써 자기들의 말을 확정하였습니다.(히6; 16)
그러나 세상은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은 맹세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진실이 없는 사람일수록 헛된 맹세를 자주 그리고 과장되게 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죄가 되는 맹세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사울 왕은 성급하게 맹세함으로 말미암아 요나단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 잘못을 저질렀다. (삼상 14:24-45)
입다의 과도한 맹세는 딸을 죽였습니다.
이런 맹세를 주님은 금하신 것입니다.
분봉왕 헤롯은 경솔하게 맹세하였다가 세례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마 14:3-12).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할 때, 맹세를 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한 번 부인한 것도 부족하여(마 26:70),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72),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함으로 부인했습니다(74).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말자고 동맹하면서 악한 맹세를 했는데, 이것은 미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행23:12-15).
예수님 때에는 많이 일상화된 나머지 하늘, 예루살렘성(聖城), 태양, 대지, 성전, 제단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습니다. 맹세가 남용되고 있었습니다.
'알렌'(Allen)은 맹세의 행위는 진실을 감추려는 악한 생활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으며, '부루스'(Bruce)는 자신의 불성실을 은폐하는 악심이라 했습니다.
맹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지름길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당시의 죄악된 맹세를 비판하셨습니다.
(마5: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우리 성도가 '도무지 맹세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영광스런 임금의 인을 신하가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경죄입니다. 더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어인을 사용했다면 그는 죽을 큰 죄인입니다.
본문은 이와 같이 맹세를 헛되이 남용하고 있는 것을 금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맹세가 원래 가지고 있는 신성과 위엄을 부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맹세는 하나님의 의와 통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있는 하나님의 어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중심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한 방편으로 악용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을 금하셨습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이 같은 잘못된 맹세는 우리가 입으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경외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3.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아갑시다.
(5: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 성도들 또한 죄악된 세상에 살다 보면, 참 기가 막힌 경우를 만납니다. 사람마다 때로는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맹세자에겐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이해해 줄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나 살기도 바쁜데 누구를 이해한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냥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쓱 보고 이해가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일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야속합니다. 세속 말로 '미치고 환장'하는 거예요. 당신만은 나를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가 호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곳 이국 땅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2세들과의 갈등이 큽니다. 1세 입장에서 보면, 2세들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2세들은 한국인의 사고와 문화에 무관심합니다.
공부는 곧잘 하나, 참여(involve)를 못합니다.
교수를 많이 찾아 갈수록 성공적인데 교수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좋지 못한 술 문화는 한국에서 잘 받아들여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21살 생일에, 4/5명 친구들이 21잔의 폭주를 마시게 하고 집에 갔는데 그 학생이 죽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우리 2세들에게 우울증이 높습니다. 미시간 대학에서 정신병에 관한 교수를 맡고 있는 박동희 교수에 의하면 한국 학생의 절반은 우울증에 걸린 듯하다 합니다.
인내가 부족합니다. 쉽게 생명을 끊고, 못 참고 이혼해 버립니다. 49-60%의 젊은이들이 이혼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한국인의 자살율이 미국인보다 100%가 높습니다. 미시간 대학에서도 매년 한 명 정도의 한국 학생이 죽는답니다. 코넬대의 자살자가 절반이 한국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등록은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많답니다. 부모들이 당한 어려움을 내가 책임지려는 자세가 없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우리 1세들은 2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1세 입장에서 보면, 2세들이 하는 일은 영 성에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세 입장에서 보면, 1세가 2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며칠 전, 머리를 자르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위로가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내 말을 듣지 않아! '
'아니 내가 네 말을 듣지 않는다니?'
컴퓨터에 조금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 해법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두들겨 가는 모습이 시간만 가지 영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얘, 그만하고 저리 비켜 봐라."
제가 나서서 몇 가지를 시도해보았습니다. 저 역시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윤희균 집사님께 전화를 해서 지금 해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위로가 섭섭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자기가 두들겨 가며 해답을 찾고 있는데 중지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몇 가지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제가 중지를 시켜서 못해봤다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좀 황당했습니다. 해봐야 뻔히 안 되는 게 눈에 보여서 중지시켰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위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섭섭했습니다. 나는 고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럼, 오늘 저녁에 가서 해 봐라.'
그리고 가게에 가서 위로가 마시고 싶어하는 음료수를 사주면서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위로에게 그날 밤 위로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방법대로 컴퓨터를 고쳐보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물론 위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아빠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는 상처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고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뒤로하고 말입니다.
한컴사전에서 '듣다'란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To hear; to listen'만 적혀 있는 게 아니다. 'to obey; to understand'로도 적혀 있습니다. 아, '2세들이 우리 1세에게 듣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생각했습니다.
1세는 2세로 인하여, 가슴을 칩니다. 2세는 막힌 1세로 인하여 가슴을 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맹세(盟誓)란 극단적인 방법에 호소하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내 형편과 마음을 상대편에게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맹세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왕으로 다스리시고 나는 그 왕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 대사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 땅은 그분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감을 내 의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종인 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오직 예이거나 아니오일 뿐입니다. 왕의 뜻에 맞는 일이라면 무조건 예 해야 합니다. 왕의 뜻에 어긋나면 지체없이 아니오 해야 합니다.
섣불리 맹세하려 들지 말고 듣고 이해하려 자세가 중요합니다.
2세들에게는 우리가 갖지 못한 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 위로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위로 엄마가 도시락를 챙겨 저에게 줍니다. 말없이 받아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위로가 저를 따라와서 말합니다.
"아빠, 왜 Thank You를 하지 않아요?"
엄마가 도시락을 챙겨주는 데 왜 감사를 표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와서라도 Thank You 하세요."
위로가 저에게 지적해준 말은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세들은 확실히 우리 1세보다 Thank You란 말을 잘합니다.
1세들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저는 상대가 감당할만한 사람이라면 그 잘못된 관점과 지식을 시정해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그 사람의 자존심이 걸린, 그리고 그 사람을 지탱해주는 나와 다른 그 지식을 그냥 살려두기로 했습니다.'(황 디모데)
우리는 현실 속에서 너무 크고 작은 답답한 일을 만납니다. 그때, 우리는 먼저 듣고 이해를 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고국에는 남북간의 갈들과 동서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남북이 열리고 동서가 열려야 한다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는 방법에 대한 견해는 첨예하게 갈려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마음이 열려야 남북이 열리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열 수 있느냐가 고민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5억불인가 10억불의 돈을 주었답니다. 그 결과로 이산 가족 상봉이 수 차례 이루어졌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 개성으로 가는 길이 50년만에 열렸다고 자랑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비판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돈이 핵무기 만드는 데 쓰여지고 결국은 그 핵무기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머리 위로 날아올 것이 아니냐는 반론입니다. 6.25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 나이든 어른들의 마음속에는 북한은 이해하기 힘든 집단입니다.
그러나 어떡하면 좋지요? 김정일의 마음을 여는 길은 옥수수 가루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거든요.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어야 마음이 열리는데 그걸 주고 마음을 열자니 위험하고 그래서 우리 고국엔 힘든 나날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가 상대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남북의 휴전선은 열리지 않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맹세는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에 대하여 예라고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아니요 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이가 맹세하는 관계라면 건강한 관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맹세하지 않더라도 그렇구나 서로 믿어줄 수 있는 관계가 바람직하고 건강합니다. 서로 믿고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맹세를 위한 담보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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