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사람마다 비판하는 일은 좋아하지만 비판을 받는 일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까지 비판하기를 즐겼지만, 정작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다고 비판하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가두고 그것도 부족하여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헤롯은 비판이 싫어 전후무후한 대 선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하여 누구보다 비판적 입장에 섰고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자기를 비판하는 소리는 아들의 말일지라도 듣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을 사랑하고, 친구 다윗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 사울 왕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에 섰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32)요나단이 그 부친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3)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삼상20:31-3)
비판은 아들이 그 아버지를 사랑하여 하는 것일지라도 창을 던질 만큼 싫은 것입니다.
인류 최고의 의인 세례 요한 요나단까지도 비판을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1. 비판 기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비판이란 기능 자체가 죄냐 묻는다면 아닙니다. 들보든 티든 눈에 들어있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판의 기능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기능을 허락하셨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잘못된 죄악들에 대하여 비판적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준다면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주간에 눈 때문에 고통을 당하시는 어떤 분과 함께 잠깐 안과 병원에 들렸습니다. 정말 친절하게 눈을 보아주는 행동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치료를 받은 그분이 의사 선생님께 떡을 사다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비판을 통해서 건강을 찾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다윗 생애에 일생일대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무서운 죄가 그를 사로잡고 천길 만길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때, 나단 선지자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들보가 그 눈에 들었다'는 나단의 비판은 다윗을 살리는데 매우 귀중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비판을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노라."
다윗은 그 쓰라린 비판을 받아들이고 회개함으로, 무서운 죄악의 늪에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충신의 아내를 취한 다윗은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보다 훨씬 악한 죄인이었으나 비판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 고백하였습니다. 비판을 잘 받아 회개함으로 자기도 살고 나단도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죄가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에 침투할 때에 이 비판적 기능을 통해 사탄의 침투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귀한 비판 기능을 경고하고 있습니까?
2. 그러나 비판 기능은 죄로 오염 됐습니다.
인간의 비판 기능은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스캔들
창조적 권고, 간섭
침묵하면 권고, 생각이 없는 것
늦으면 사정이 있어, -핑게
내가 화내면 소신 뚜렷, 남이 화내면 그릇이 작은 것
내가 약속을 어기면 그럴 수 있고, - 그럴 수는 없고
돈을 쓰면 관용, 낭비
내가 옷 사입으면 멋, 남이 옷 사입으면 사치
엔른 포스터의 글에서 따온 글입니다.
사위 칭찬
"늦게까지 잠 자도록 배려하고
날마다 미장원 가도록 허락
저녁마다 외식한대요."
며느리 비난
"아침이면 늦게 일어나
날마다 미장원 출입
저녁마다 외식
천국에는 비판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천국 백성이 하나님을 비판하겠습니까? 형제를 비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비판이 없습니다.
지옥에도 비판이 없을까요?
지옥에는 비판하는 소리로 왁자지껄할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하며, 부부였던 사람끼리 비판할 것입니다.
'너는 왜 그 때' 하며 가족끼리 서로 비판할 것입니다.
형제끼리 비판할 것입니다.
비판은 어디서 왔을까요?
사람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위로부터 온 선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비판이 맨 처음 나타난 곳은 창3:1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탄(뱀)이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하여 왜곡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후, 비판적 발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은 물론, 그분이 선물로 주신 아내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비판 기능을 계략 속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의 언어 속에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이로 볼 때, 모든 비판을 사탄적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지만 사탄과 죄의 권세가 인간의 비판 기능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감동이나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비판하려 하면 낭패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모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던 고라와 그 주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땅을 열어 묻어 버리셨습니다.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과 형 아론은 모세를 비판했다가 문둥이가 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고난을 당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는 다윗에게 가해진 시므이의 비판은 저주를 불러왔습니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의 책망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었습니다.
시므이 같은 악인의 저주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지 않은가 새겨들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 일로 인하여 영원히 기업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어찌하여 형제를 !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14:10-11)
'사막의 교부들'에 보면, - 수도사의 첫 번째 규칙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입니다.
비난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3. 비판하려면 초점을 자신에 맞추십시오.
저는 김동호 목사님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시는 것을 두 번에 걸쳐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매우 동감이 되는 부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비판하는 자가 갖출 자격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은 비판하는 사람을 수술하는 의사에 비유했습니다.
1] 환자를 살려야 하겠다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비판을 매우 지혜롭게 하여 덕을 세운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알았지만 예수님의 세례를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세례를 알지 못하다니 얼마나 큰 비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설교를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어떻게 하였는지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수군거리지 않았습니다.
공식석상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아볼로를 면박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용히 아볼로를 찾아갔습니다.
비난하지 않고 말을 잘했습니다.
아볼로의 인격을 존중했습니다.
아볼로는 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4-5).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비판을 하여야만 할 경우라면
예의를 갖춘 비판을
사랑이 담긴 비판을
겸손한 마음으로 비판을
상대방을 배려하는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리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해도 의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환자를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습니다.
특히 암 치료 환자는 엄청난 고통을 받습니다.
약이 암세포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죽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대상과 내용을 정확히 알고 수술해야 합니다.
위험한 비판은 무엇입니까?
정확하지 못한 엉뚱한 비판입니다.
비판의 위험성을 알아야 합니다.
수술로 인하여 사는 사람이 많습니까?
교회는 비판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자신이 살펴보십시오.
2] 그러나 내가 환자를 살릴 기술이 없다면 비판의 칼을 들지 마십시오. 준비되어 있지 않는 의사는 집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비판은 위험한 것이니 조심하라 하는 것입니다.
바른 비판을 할 수 있으려면 훈련과 기도와 실력이 필요합니다.
비판할 때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판받는 사람의 인격이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3] 하나님께서 치료할 분이신 것과 나는 하나님께 탕감 받은 죄인이었음을 명심하고 임해야 합니다.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판은 위험합니다.
(마18:24)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32)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비판받을 점이 많은 사람이요, 그러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인 것을 알 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이 공부를 합니다.
몇 십년 전만해도 맹장 수술이 위험하였습니다.
15Cm를 가르고도 사는 확률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심장 신장 간 이식을 훌륭히 해 냈다는 거죠.
무조건 매쓰를 들고 달려들지 않는가?
수술용 매쓰와 같은 비판의 말을 생각해 보았는가?
자기들이 쓰는 말과 용어로 비판적인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은 의사는 자기가 수술을 잘못해서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겠지요.
대신 환자가 잘못되어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좋은 의사였다면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남에게 있는 죄악은 작은 것까지 보고 헤아리면서도 자기에게 있는 죄악은 커다란 것까지 잘 보지도 못하고 보려고도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람을 사랑한다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소극적으로는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비판은 자기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않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본다.
-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진 사람이다.
-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받는 사람보다 천배 만배 나쁘다.
-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눈에 있는 들보조차 보지 못하는 맹인이다.
책망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을 용납하지 못하고 말로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형제의 공동체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남고 어떤 사람의 귀에 남는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들이 어디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이해인)
비판받지 않고 살 만한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서로 쳐다보면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믿는 형제는 긍휼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바로 비판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칼에 죽는 사람보다 말에 죽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통치하는 곳이기에 비판하는 사람은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나 비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오거든
사람을 살리는 비판을 하십시오.
프로클레이테스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로클레이테스라고 하는 강도가 철침대를 놓고 자기보다 큰 사람은 죽이고 작아도 죽이고 합니다. 이런 몹쓸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잣대로 사람을 임의로 죽이다니요.
자기의 자로 남을 길다 짧다 말하는 것이 비판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에는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서울 어느 교회 목사님이 큰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를 다녀도 시험이 되지 않아요?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옵니까?
그 성도가 대답하더랍니다.
나는 우리 목사님은 그럴만한 분이 아니라고 확신해요.
그러나
설혹 목사님이 한두 가지 잘못이 있다고 해요.
이 세상에 실수 없는 목사가 어디 있어요?
목사님은 잘못한 일이 한번도 없어요? 없어요?
얼마 전에는 그 교회에서 세례를 천명이나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 교회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믿을 수 있습니다.
서로 꿈을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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